|
제 4장 종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벌내쟁투로 인해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던 대야벌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생사림의 멸문에 영향을 받기엔 대야벌은 너무나도 거대한 단체였다.
하지만 겉모습이 안정돼 간다고 하여 내부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전서구가 매일 대야벌 하늘을 수놓았고, 일부 단체에서는 무인들을 출병시키곤 했다. 천마삼경으로 인해 벌어졌던 벌내쟁투는 그 무대가 밖으로 옮겨졌을 뿐 여전히 진쟁 중이었다.
무인들의 출병이 잦아지면 야장도 활기가 넘친다.
무복을 짓고, 병기를 벼리는 주문이 꾸준히 들어오고, 주루를 찾는 무인들의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일감이 많아 바쁜 다른 전과는 달리 안정전은 각 전에서 올라온 정보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사실 화장실을 푸는 안정전의 업무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업무에 불과하고, 주된 업무는 강호 무림과 대야벌의 동향 파악이었다.
야장의 장주인 무원이 안정전에서 생활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 점점 심각한 양성으로 치닫고 있네.”
첩지를 읽어내려 가던 무원은 창노를 보며 말했다.
생사림 무인들을 추격하는 것 외에는 아직 눈에 띨 만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각 세력 간의 사소한 충돌은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작은 충돌이 잦아지면 머잖아 큰 싸움으로 이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 이번엔 변화를 기대해도 좋겠군요.”
“ 그럴 것 같네.”
“ 바람이 불면 뭐하겠소. 올려야 할 돛이 없는데.”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연우강이 안으로 들어왔다. 창노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무슨 소리냐?”
“ 영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탁상공론의 전형이라는 거지 뭐겠소. 여기에 앉아서 대야벌이 어떻고, 강호가 어떻고, 황실이 어떻고 하면 세상이 달라진답디까. 쓸데없는 일에 심력 낭비 하지 말고 건강이나 챙기세요.”
연우강은 물건을 싼 듯한 보자기를 창노 앞으로 툭 던졌다.
“ 그렇다고 해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뭐냐?”
창노는 바닥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고 하였소. 영감. 어떤 일이 됐든 그 일을 할 때는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거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면서 시작만 하고 나머진 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만 못하오. 그거 보약이니까 아침마다 공복에 복용하시오.”
그랬다.
연우강이 창노 앞으로 던져 놓은 것은 생사림 지하에서 얻었던 불량의 여의선천신단이 들어가 있는 보약이었다.
“ 보약?”
창노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설마 녀석이 보약을 지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 원래 머리가 나빴던 거요.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굳은 거요?”
“ 너 이자식?”
창노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 좀 합리적으로 살란 말이오. 영감. 그렇게 마구 퍼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뒈져버리면 혼자 남겨진 애는 어떻게 하라는 거요?”
“ 그, 그러니까 운화를 위해서 이걸 지어왔다고?”
“ 그건 나도 모르겠고. 아무튼 영감 얼굴이 반쪽이 됐소. 그 약 처먹고.... 아니다, 영감에게 말해 봐야 소용없을 테니까, 어르신께서 챙겨줘야겠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흔들며 무원을 보았다.
“ 알았다. 녀석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먹이도록 하마.”
무원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창노에게 약을 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연우강이 알아서 지어온 것이었다.
대견한 녀석이라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그럼 보약은 됐고....”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창노를 빤히 쳐다보았다.
“ 또 뭐 인마?”
“ 나 우영이란 놈에게 죽을 뻔했소.”
“ 우영?”
“ 아시오?”
“ 사월림의 살수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놈이 널 공격했단 말이냐?”
창노는 깜짝 놀랐다.
“ 그렇소. 몽요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요.”
“ 그놈이 왜?”
“ 역시 머리가 나쁜 거 맞네. 그놈이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 파악이 안 되오?”
“ 운화 때문이란 말이냐?”
창노는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우영은 사월림 삼월오살칠영으로 불리는 살수 중 칠영의 막내다. 그런 그가 연우강의 목숨을 노렸다는 말은 암살대전이 시작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그 대상이 연우강이라니,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몽요는 내 행동이 오해할 만했다고 합디다.”
“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 그 보약을 찾으러 갔을 때 약사 영감에게 종기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물어봤는데, 칼로 째고 고름을 짜내야만 낫는다고 합디다.”
“ 그, 그래서?”
연우강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녀석은 남궁세가에서 밀고 있는 남궁철상을 없애야만 이번 일이 풀릴 거라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 영감보고 하란 말은 아냐.”
“ 네가 직접 하겠단 말이냐?”
“ 영감도 그동안 날 겪어봐서 알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빚지고 못 참아.”
“ 남궁철상이 일 갑자 반이나 되는 공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던 사람은 너다. 연우강. 지금 네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 그래서 영감을 찾아온 거잖아.”
“ 그 때문에 날 찾아왔다고?”
“ 천뢰제왕신공의 구결이 필요해.”
“ 넌 천뢰제왕신공을 익힐 수가 없다.”
“ 내가 익히려는 게 아냐. 영감. 천뢰제왕신공을 익힐 놈은 바로 남궁철상이야.”
“ 그놈에게 천뢰제왕신공을 주겠다고?”
“ 그놈이 원하는 무공이 천뢰제왕신공이었어. 찾아내기만 하면 오십만 냥을 준다고 하더라고.”
“ 널 싫어한다면서 일을 시켰단 말이냐?”
“ 원래 비열한 놈들은 싫어하면서도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활짝 웃을 수 있는 족속을 말하는 거잖아. 그놈이 그런 놈이야.”
“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창노는 버럭 소리쳤다.
“ 쯧쯧! 이 꼴로 사는 이유가 있었네. 어르신은 뭘 믿고 안정전을 맡긴 겁니까?”
연우강은 무원을 보며 혀를 찼다.
“ 너 이자식, 오늘....”
급기야 창노는 견디다 못하고 연우강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 구결을 바꾸면 되잖아. 영감탱이야. 꼭 그런 것까지 가르쳐줘야 해?”
“ 구, 구결을 바꾸라고?”
창노는 잡았던 멱살을 슬며시 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아니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구결을 바꿔 상대를 없애는 비열한 짓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 그럼 그놈을 그대로 두려고 했던 거야?”
“ 그건 비열한 짓이다. 연우강.”
“ 아주 더럽고 비열할 짓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렁에 빠진 남궁세가를 옛날로 되돌릴 수 없어. 그리고 비열한 놈들과 싸울 때는 그보다 더 비열해야 해. 죽기 직전에 난 정의를 지켰노라고 유언을 남겨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놈들이 날 없애달라고 한 이유는.....”
“ 남궁세가는.....”
“ 내 말부터 들어. 영감탱이야. 남궁세가 늙은 놈들이 남궁운화가 아닌 날 제거해 달라고 청부를 했던 건 살아있는 남궁운화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야.”
“ 살아 있는 남궁운화로부터 가주 자리를 물려받겠다는 뜻이란 말이냐?”
“ 그래서 영감 머리가 나쁘다고 한 거야. 가솔들의 반대 없이 남궁철상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뭐겠어?” “ .......?”
창노는 멀뚱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남궁철상을 가주로 앉히고자 하는 일부 수뇌들의 결정을 남궁세가 가솔 전부가 찬성하는 것은 아닐 테다.
자신이 믿고 있는 자들 또한 그런 부류들이다. 남궁철상을 반대하는 가솔들이 있고 운화가 가주로서 자격을 갖춘다면 남궁세가는 정상을 되찾을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연우강은 남궁철상에게 가주 직위를 넘겨주더라도 반대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 남궁운화를 남궁철상에게 시집보내는 거야, 영감.”
“ ..... 죽일 놈들!”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창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남궁세가 수뇌들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살심이 솟아올랐다. 비로소 연우강을 제거해 달라고 청부한 이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 문제는, 놈을 죽인 걸로 남궁세가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야.”
“ 종기는 카롤 째서 고름을 짜야 낫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창노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받았다.
“ 남궁철상이 종기라고 생각한 거야?”
“ 그럼?”
“ 남궁철상은 꼭두각시 가주가 될 뿐이야. 남궁세가의 전권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 미친 노인네들이야. 영감. 남궁세가의 종기는 바로 그것들이라고.”
“ 으음!”
창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우강의 말이 맞다. 남궁철상은 직계가 아니고 방계다. 그런 그가 가주에 올라봐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다. 결국 남궁세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남궁철상을 가주로 만들려는 자들을 제거해야만 할 터였다.
“ 천뢰제왕신공의 구결을 적으라는 이유가 그 때문이야. 영감. 일단 남궁철상을 폐인으로 만들어야 해.”
“ 녀석이 폐인이 되면?”
“ 남궁철상 그놈이 폐인이 된다고 해도 남궁세가의 그 노인네들은 가주 자리에 앉히려고 할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궁운화가 더욱 필요해져.”
“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느냐?”
“ 뭐가 어떻게 돼. 노망난 노인네들이 멀쩡한 처녀를 병신에게 시집보내는 걸 지켜보면 그것들은 사람도 아니잖아.”
“ 그것들은 누구...”
“ 영감이 믿고 있는 놈들. 즉 남궁철상이 가주에 오르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가솔들을 말하는 거야.”
“ 그러니까 네 말은 남궁세가 가솔들 스스로 운화를 보호하도록 하잔 말이냐?”
“ 그래야 결속력이 강해지잖아.”
“ 만일 그 지경이 됐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 꼭 듣고 싶어?”
연우강은 창노를 빤히 쳐다보았다.
“ 듣고 싶다.”
“ 영감이 여기를 나가는 거야. 그리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안휘성으로 달려가서 남궁세가 가솔이란 놈들을 전부 없애고 건물은 불태우는 거야. 그 다음에 그 불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면 돼.”
부르르!
창노는 몸을 떨었다. 결국 남궁세가를 없애고 자살을 하라는 말이었다.
“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대의를 위한답시고 팔황정벌인지 뭔가를 떠난 업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거야. 그리고 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영감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할 거니까.”
“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 영감도 내가 업둥이란 사실은 알지?”
“ 알고 있다.”
“ 하지만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금릉 연씨 상단을 내게 물려주려고 했다는 건 모를 거야.”
“ 정말이냐?”
“ 그래 영감. 어린 시절부터 그분들은 혈육인 우진이 그 녀석보다 날 더 챙겨주셨어. 서당르 때려치우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셨고, 동네 아이들을 두들겨 패고 오면 돈으로 해결해 주셨지.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야단을 치지 않았어.”
“ 부처님 같은 분들이었구나.”
“ 맞아! 그랬어. 그런데 웃긴 게, 잘못을 했을 때 야단치지 않는 그분들의 행태가 더 싫었어. 내 친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런다고 여긴 거야.”
“ 친부?”
창노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의 친부에 대한 말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원 또한 다르지 않았다. 연우강을 후계자로 선택하면서 몇 가지 조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친부모에 대한 사실은 없었다. 창노는 귀를 쫑긋했다.
“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영감.”
“ 그러니까 금릉 연씨 세가가 네 친부에게 빚을 졌단 말이냐?”
“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거기까지만 하자고, 아무튼 그분들의 마음을 곡해한 내게 집을 떠날 좋은 기회가 생겼어. 금릉연씨 세가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지. 유일한 대안은 군납이었는데, 군납 조건 중의 하나가 자식이 군에 있어야 한다는 거였지.”
“ 그래서 군으로 간 거였더냐?”
“ 내가 군에 간 건 그 때문이야. 입대 전에 아버지께 그런 말을 했어. 우진이 녀석에게 연 씨 상단을 물려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내가 아버지께 한 첫 부탁이었어.”
“ 그건 부탁이 아니라 가문을 살리기 위해 널 희생한 거다.”
“ 아무튼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부탁이 맞아. 이제 난 두 번째 부탁을 할지도 몰라, 영감.”
“ 어떤 부탁을 하겠단 말이냐?”
“ 어떤 개 후레자식이 내 머리에 청부를 했다고 말할 거야. 그럼 아버진 그 개 후레자식이 누구냐고 물을 거야. 아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흥분하실 거고 어머닌 통곡을 할 거야. 그럼 내가 그분들에게 뭐라고 할 것 같아?”
“ 남궁세가라고 말할 거라고?”
“ 그렇지. 망하기 직전에 있는 남궁세가 놈들이 날 죽여 달라고 청부를 했고, 벌써 공격을 받아서 죽을 뻔했다고 말할거야. 그럼 그분들이 어떻게 나올까?”
그 말에 창노는 할 말을 잃었다.
만일 녀석의 말처럼 그렇게 된다면 남궁세가는 멸문을 당할 수밖에 없다. 결코 금릉 연씨 세가가 무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가진 막강한 금력. 그 금력이면 사월림의 전 살수를 고용할 수도 있고, 사월림의 살수로 부족하다면 낭인림의 낭인들까지도 추가할 수 있다.
그것도 전혀 드러나지 않게.
“ 나는 하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해. 하지만 한 번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면 그 일에 목숨을 걸 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그래서 그놈들이 날 개 씨부랄 놈의 독종새끼라고 부른 거야.”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르신. 잠깐 저 좀 보세요.”
밖으로 나간 연우강은 무원을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원은 조금 전 연우강과 창노 사이에 오간 대화로 인해 멍한 상태였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밖으로 나갔다.
“ 왜 그러느냐?”
“ 어르신이 준비해 줄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 준비?”
“ 막장을 패천림에 도전시키기로 했습니다.”
“ 무슨 소리냐?”
무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다.
“ 말 그대로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장가도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똥지게를 지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해야지요.”
“ 그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게 패천림 림주냐?”
“ 여자 집안이 조금 빵빵하거든요. 하지만 막장 그놈은 불알 두 쪽 말고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더구나 나이도 많고, 패천림의 림주 정도는 돼야 그나마 균형이 맞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 패천림의 림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느냐?”
“ 패천십관을 통과해야 하고 림주에게 도전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 막장이 가능할 거라고 보느냐?”
“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어르신은 패천십관에 대해서만 세세하게 알아 오시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연우강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 뭐냐?”
“ 선물입니다.”
“ 선물..... 억!”
연우강이 건넨 것을 무심결에 받았던 무원은 질겁하여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사람의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 이 못된 녀석!”
무원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설마 녀석이 선물이라고 내민 것이 사람 손가락일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그건 유명계의 손가락입니다. 어르신.”
무원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유명계는 생사림의 림주 마수귀의의 이름이다. 더불어 그는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십오위에 올라 있는 초극 고수가 아닌가?
“ 정말이냐?”
무원은 확인하듯 물었다.
“ 나머지 아홉 개와 발가락 열 개는 술을 담가서 약사 영감님 발치에 묻어드렸습니다.”
“ 어떻게?”
무원은 넋을 잃은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 소위 의원이란 놈이 분관 안으로 숨어들어 간 모양입니다. 집하장에 분뇨를 붓는데 그 안에서 나오더군요. 그래서 아쉬운 대로 손가락하고 발가락만 잘라냈습니다.”
“ 목을 따는 게 더 쉬, 쉽지 않았느냐?”
“ 그놈이 살아서 대야벌을 나가야 몇 가지 의문점이 밝혀질 것 같아서 목을 따는 건 보류했습니다.”
“ 의문점?”
“ 대야벌 벌주가 벌내쟁투를 묵인한 이유라든가, 벌내쟁투에도 나서지 않고 생사림 무인들을 쫓지도 않는 자들은 도대체 유명계와 무슨 관계인지, 어르신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보는 거냐?”
무원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 벌내쟁투의 결과를 놓고 파악해야 할 것은 지금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외부로 나가 있느냐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방금 연우강이 말한 것들이었다.
“ 잠룡을 오백 명이나 뽑은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 그렇구나. 그런데.......”
무원은 연우강을 물끄러미 보았다.
“ 할 말 다했습니다. 어르신.”
“ 안 물어보느냐?”
“ 뭘 말입니까?”
“ 나와 창제가 왜 여기 있는지, 그 이유 말이다.”
“ 여기서 잔뼈가 굵은 분들일 테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굳이 궁금해할 이유가 없지요. 저 가겠습니다. 참......”
“ 말 하거라.”
“ 혹시라도 과거에 알았단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땐 무조건 모른 척 해야 하는거, 아시죠?”
“ 무슨 소리냐?”
“ 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아무튼 그 머리 나쁜 영감도 교육 잘 시키십시오. 운화 처자가 무공을 이해하는 속도가 좀 늦다고 여겼는데....”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안으로 시선을 주었다.
벌컥!
“ 안 먹어, 자식아!” 문이 벌컥 열리면서 뭔가가 휙 날아왔다. 그것은 연우강이 놓고 나온 보약이었다.
“ 쯧! 저러니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
약을 잡아챈 연우강은 무원에게 내밀며 빈정댔다.
“ 뭐라고!”
창노가 씩씩대며 뛰어나왔다.
“ 내가 이걸 영감에게 준 이유를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 머리가 나빠서 그런다, 자식아!”
“ 운화 처자가 불쌍해서 준 거야. 영감. 이걸 열심히 처먹고 오랫동안 운화 처자를 돌봐 달라는 거잖아. 제발 머리 좀 굴려. 늙어서 머리가 안 돌아가면 도박이라도 해서 기름칠 좀 하라고.”
연우강은 들고 있던 약을 창노를 향해 홱 던졌다.
“ 넌 자식아, 형님께는 꼬박꼬박 어르신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영감이야.”
“ 그럼 영감이 형님 하든지.”
연우강은 픽 웃으며 몸을 돌렸다.
“ 야! 자식아!”
“ 약이나 꼬박꼬박 챙겨 먹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죽음이 아냐, 영감.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이 세상에 혼자밖에 없다는 지독한 외로움이라고.”
다시 약을 던지려뎐 창노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는 멍한 눈으로 연우강의 등을 보았다. 문득 녀석의 어깨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 운화가 목욕하고 싶단다!”
창노는 연우강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오십 냥만 챙겨오면 누구에게나 욕조는 열려 있어.”
“ 공짜로 해줘!”
“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대신 매주 목욕을 하면 월에 속옷 한 장 정도는 공짜로 줄 수 있어. 물론 제일 싼 걸로.”
“ 에라! 도둑놈 새꺄!”
“ 쿡!”
무원은 생경한 눈으로 창노를 보았다.
원리 원칙을 따지고, 삶의 근간은 예의라고 주장하던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창노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 치사한 새끼,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위해 부탁을 했으면 그 정도는 들어줘도 되잖아. 지가 물을길어오는 것도 아니고 석탄을 캐는 것도 아니잖아.”
“ 외상장부에 기입하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무언은 여전히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운화한테 우강이 저 녀석이 내 앞에서는 설설 긴다고 큰소리를 쳐 놨단 말입니다.”
“ 우강이 그 녀석이 약을 지어주었다고 하면 운화 앞에서 체면이 살겠구먼. 뭘 고민하고 그러는가, 우강이 그 녀석 말처럼 자네 정말 머리가 나쁜 것 아닌가?”
“ 형님!”
“ 농담이네. 그보다 녀석 말대로 하기로 한 건가?”
창노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 그럼 어떡합니까. 만일 제 아들이 그 녀석처럼 가문을 위해 희생했다면 전 목을 달라고 해도 줄 겁니다. 그건 연금석 그 사람도 다르지 않겠지요.”
“ 자네가 결정을 내렸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내 생각도 우강이 녀석과 같네. 남궁세가 가솔들 전부가 남궁철상을 지지하는 건 아닐 테고, 그 지지하지 않는 자들이 운화 편이 돼 세가를 좀먹는 자들을 향해 검을 뽑았을 때 남궁세가는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거네.”
“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건......”
창노는 무원의 손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원은 조금 전 떨어트렸던 유명계의 손가락을 들고 있었다.
“ 거짓말로 할 게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게 있지 않는가. 이건 거짓말을 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아니네. 더구나 녀석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무원은 손가락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 그렇지요.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창노는 손가락을 멍하니 보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이미 무원 형님과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녀석은 대야벌 백인고수 서열 십오 위에 올라 있는 유명계의 손가락을 잘라와 놓고도, 과정은 생략하고 손가락을 자른 결과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네.”
“ 뭐가 분명하다는 말입니까?”
“ 녀석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거네.”
“ 정말 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녀석이 말한 세 가지를 기억하는가?”
“ 막장을 패천림의 림주로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만일 녀석의 말처럼 막장이 림주가 된다면 녀석은 막강한 우군을 대야벌 중심에 심게 되는 셈이네.”
“ 벌내쟁투를 묵인했다는 건 무슨 의미라고 보십니까?”
“ 그건 우리가 알아내야 할 사항이네.”
“ 그럼 천마삼경이라는 희대의 보물과 마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장보도를 본체만체하는 자들은......?”
“ 녀석은 그들을 생사림과 한패로 본 모양이네.”
“ 한패라고요?”
“ 대야벌 내의 파벌인지, 아니면 어떤 세력의 하수인인지 그걸 알아내서 이용하라는 거겠지.”
“ 그 녀석 똥지게 맞습니까?”
창노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우린 나무를 보았고, 녀석은 숲을 본 결과일 수도 있네.”
“ 우리가 너무 세세한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단 말입니까?”
“ 그렇지. 녀석은 지금껏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 대야벌을 관찰해 왔다고 할 수 있네. 우리보다 더 넓게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네.”
“ 그렇다고 해도 이건...”
“ 그것뿐만 아니네. 창제.”
“ 또 있단 말입니까?”
“ 이걸 보네.”
무원은 탁자 위 화병에 꽂아두었던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창노에게 내밀었다.
“ 뭡니까, 이건?”
“ 한 달 전에 가져온 거네.”
“ 하, 한달이라고요?”
“ 나뭇가지를 쳐다보던 창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선으로 비스듬히 잘려나간 비스듬히 잘려나간 나뭇가지의 단면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잘랐다는 나뭇가지 단면은 막 잘라낸 것처럼 생생했다.
“ 녀석의 거처에서 정원사를 하고 있는 욱일승이란 자가 자른 거네.”
“ 맙소사.”
창노는 신음을 내뱉었다.
극에 이른 활검이 아니고는 한 달 전에 자른 나뭇가지 단면이 여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 말은 곧 일욱승이란 자가 운화에게 내공을 전이해 주기 전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과 같다.
“ 그날 기억하는가?”
“ 언제 말입니까?”
“ 그 일욱승이란 자를 우강이 그 녀석에게 소개시켜 주던 그날 말이네.”
“ 가만,... 맞다. 그 녀석은 깜짝 놀랐었지요.”
“ 맞네. 얼버무리긴 했지만 그 녀석은 세 사람을 전부 아는 듯한 눈치였네. 그리고 조금 전에는 과거에 알았던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했네.”
“ 설마 지옥에 갇혀 있던 그들....”
“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네. 그들을 조사해 보면....”
“ 잠깐만요.”
창노는 무원의 말을 잘랐다.
“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 운화의 호위 중에 자신을 괴노라고 소개했던 자가 있습니다.”
“ 우리와 아주 절친했던 녀석 중에 신풍괴노가 있었네. 이름은 두작군이었고.”
“ 하지만 두작군이라면 제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형님. 얼굴이 다릅니다.”
“ 원래 얼굴이라면 과거의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네.”
“ 그들도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군요.”
“ 지옥의 죄수가 대야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그렇다면 지옥에서 녀석과 인연을 맺었다는 말이 되는 겁니까?”
“ 그 인연이라는 건 녀석이 금제된 내공을 풀어준 거겠지.”
“ 좋습니다. 형님. 하지만 문제는 본인도 무공이 없다고 했고, 우리도 분명히 확인했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어떻게 그들을 풀어주었느냐 하는 겁니다.”
“ 지금 빌어먹을 녀석이라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형님. 그 빌어먹을 녀석이 어떻게 우릴 속였냐 하는 겁니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승걸 형님께서 속이지 않았습니까?”
“ 우리들에게 들킨 정도였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들켰겠지.”
“ 나쁜 자식. 진작 말했더라면 승걸 형님을....”
비로소 녀석이 유명계의 손가락을 잘라온 이유를 알 듯 했다. 사정사정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 움직인 건 바로 승걸 형님의 죽음 때문이었다.
“ 그건 녀석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네. 우리가 결정했고.”
“ 물론 압니다. 하지만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 그 일은 잊게. 아니 승걸로 인해 그 녀석의 심경에 변화가 왔다면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네.”
“ 심경의 변화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형님.”
“ 무슨 말인가?”
“ 혹시 녀석이 처음 대야벌로 들어올 때를 기억하십니까?”
“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왔던 그 때 말인가?”
“ 그때 녀석은 흑랑기의 진군가를 부르며 들어왔습니다.”
“ 그게 어쨌단 말인가?”
“ 녀석을 조사하면서 흑랑기에 대해 알아봤다는 건 형님도 알지 않습니까?”
“ 그런데?”
“ 녀석이 흑랑기의 대장으로 있을 때 생긴 전통인데, 흑랑기는 적진으로 쳐들어가기에 앞서 진군가를 부르며 그 자리에 소변을 본다고 합니다.”
“ 전투 중에 소변이 마려우면 안 되니까 그건 당연히 해야 할 것 아닌가?”
“ 아닙니다. 형님.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그들이 소변을 보는 건 영역표시의 일종입니다.”
“ 영역 표시라고?”
“ 그렇습니다. 이리들이 영역을 표시할 때 소변이나 대변으로 하는 것처럼 흑랑기도 그렇게 한 겁니다.”
“ 그 영역표시와 녀석이 들어오면서 했던 행동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 녀석은 진군가를 부르며 대야벌 안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엔 구토를 했습니다. 그때 막장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는데, 녀석은 영역표시라고 대답했습니다.”
“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 그땐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듣고는 문득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떤 말 말인가?”
“ 조금 전에 녀석은 하지 않을 거면 시작 자체를 하지 않지만 하려고 마음을 굳히면 그 일에 목숨을 걸 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개독새란 별명이 생겼다고 했고요.”
“ 그럼?”
“ 녀석은 대야벌로 들어오는 첫날 진군가와 구토로 영역표시를 하면서 선전포고를 한 겁니다.”
“ 선전포고라......”
무원은 지금까지 연우강이 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분뇨를 푸는 일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일을 한 건 없다. 그러면서도 대야벌의 상황을 속속들이 꾀고 있다.
단순한 심심풀이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 그럴 수도 있겠군.”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렇다고 해도 우선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하세. 녀석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 그래야겠지요. 전 약이나 달이렵니다.”
창노는 약봉지를 들고 일어났다.
“ 조금 전에는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세상을 속일 정도로 머리 좋은 증손자를 안아볼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조금 전 연우강에게 당했던 일이 생각난 듯 창노는 씩씩대며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반 시진 후.
탕약을 마시던 창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 벽에 똥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 겁니다. 형님. 아니 염라대왕의 목을 쳐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거란 말입니다. 나쁜 자식!”
가부좌를 한 채 운기행공에 들어가는 그의 얼굴은 울음도 아닌 그렇다고 웃음도 아닌, 두 감정이 절반씩 섞인 기묘한 표정이 뒤엉켜 있었다.
“ 그래야지. 그 녀석이 그렇지 않았는가.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이 세상에 혼자밖에 없다는 지독한 외로움이라고 말이네. 운화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오래 오래 살게.”
무원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