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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님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자고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함께 나누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5장 1절을 메시지 성경이라든지 일부 영어 성경을 보면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지난주에 나누었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과 대조되는 모습을 암시해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생각해 보면 당시 초대교회는 은혜받은 성도들이여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두니 사도들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매우 질서 있게 구제 사역이 그 공동체 가운데 일어난 것이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있지 않았다. 그것이 특별한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또한 부흥의 은총이 그 공동체 가운데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4장 마지막 절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바나바라 하는 요셉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두니라라는 말로 마무리가 돼요. 마지막 절이 그렇게 끝나죠.
바나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삶으로 실천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같이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에 있어서 마음과 행동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한 부부를 소개해 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의 이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일입니다. 이들도 바나바처럼 땅을 팔아 헌금을 하고 싶어서 두 사람이 함께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소유를 팔아서 이 땅 판 값으로 현금을 하자. 그런데 실제 이 밭을 팔고 딱 손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까 이게 적지 않거든요. 마음에 갈등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을 다 드리면 좋겠는데 다 드리기에는 조금 아쉽고 아깝고 얼마를 좀 놔뒀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이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간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지금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는 바나바처럼 사도들과 다른 신자들에게 신실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내가 판 것으로 내가 이렇게 섬겼노라라는 그 마음과 함께 마음 한켠에는 야 이것을 다 드리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내적 갈등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여러분 내가 그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야 내가 하나님께 헌금하기 위해서 이렇게 계획을 했는데 딱 손에 들고 보니까 천만 원, 100만 원만 내가 썼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들 때 그런 마음이 안 들면 괜찮은데 그런 마음이 들 때 이 내적 갈등이 얼마나 심하게 내적 갈등 가운데 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결정을 합니다.
아무래도 전부 다 바치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일부만 드리도록 하자. 일부만 좀 숨기자 그렇게 결정을 하게 되죠. 그래서 아나니아가 땅 판 돈 일부를 떼어서 숨겨놓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 발 앞에 내어놓으며 말합니다.
사도님들 이것이 제 소유의 땅을 팔아 준비한 은혜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참 좋겠습니다.
사실 독자인 저와 여러분들은 성경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죠? 이게 전부가 아니구나. 근데 그 사실을 누구도 알고 있어요?
아나니아가 왔지만 함께했던 삽비라도 알고 있어요. 그러면 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르실까요? 하나님도 아시겠죠? 오늘 베드로의 반응을 통해서 하나님이 확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죠. 당신은 어찌하여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성령을 속여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땅값 일부를 따로 챙겨두었으면서 왜 전부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땅 팔기 전에 그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땅 팔고 난 후에도 그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사실 당신의 마음대로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거짓 행동을 하여서 그렇게 성령을 죽이는 것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나니아를 꾸짖었잖아요.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꾸짖자마자 그것을 하나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다 이렇게 하죠. 다시 말씀드리면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이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사도들 앞에서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사도들 발 앞에서 죽자 젊은이들이 들어와서 그 그들이 시체를 메고 나아가서 제사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약 한 3시간쯤이 지났습니다. 아내 삽비라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된 것이죠. 베드로가 그녀에게 묻습니다.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이 그게 전부입니까?
네 그게 전부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있게 바르는 줄도 모릅니다. 대답을 들은 베드로가 말하지 그대들이 어찌하여 서로 짜고 성령을 시험하려 합니까? 왜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합니까? 보시오. 당신 남편을 매장하고 돌아오는 젊은이들이 문앞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그대 또한 베드로 손에 실려 나갈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도 사도들 앞에 쓰러져 죽게 되었고 청년들이 들어와 여인이 내게 마다 남편 고 장사했더라.
그런데 오늘 마지막 부분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나미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큰 두려움을 깨었다. 오늘 사건은 실로 은혜 가운데 풍성했던 초대교회에 찬물을 끼얹을 듯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 몇 가지를 좀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주하고 다음 주하고 연결해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곳에 사단의 역사와 사단 충만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가 이렇게 안타까운 사건을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우리가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문제없는 교회가 존재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죠.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물론 죄인들이 모여 있지만 죄인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에도 사단의 역사와 사탄의 충만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땅값을 들고 먼저 찾아왔던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내가 성령을 속이고 땅까지 부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아나니아의 마음 가운데 무엇이 가득했다는 거예요? 사탄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가득하다는 이 단어를 보면 성령 충만의 충만이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충만함을 고발하고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부터 니가 지금 일탈했다는 것을 질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소그룹 공동체였던 그 제자 공동체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데 예수님이 부르시고 예수님께서 사명 주신 그들이 모인 제자 공동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죠. 12 제자 가운데 속해 있던 가롯유다를 향해서 가롯유다 속에 사단이 들어갔고, 사단이 가롯유다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어요.
우리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것뿐입니까?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다른 제자들 앞에 매우 당당하게 그리고 정말 멋있게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신앙의 고백을 하게 되죠. 그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도 바요나 시모나 내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면서 그를 칭찬해 주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내가 이제 잡히게 될 것이고 3일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며 이야기합니다.
주여 그림하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멱살은 잡지 않았지만 아마 몸을 잡고 막 흔들면서 예수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행변했다라고 행정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처럼 초대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사탄의 역사가 일어났고 사탄의 충만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지 않도록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에베소서 4장 27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면서 그 방법 두 가지를 소개해줘요.
첫 번째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해서 선한 일을 해라. 도둑질하다는 사람 그거 청산해라.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니가 돈을 벌어 그 손으로 수고한 것 가지고 선한 일, 즉 과거의 일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죠.
또 한 가지는 나쁜 말을 입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말해라. 그러니까 나쁜 말 그거 먼저 하지 말아요. 이거 청산하고 어떻게 하면 은혜되는 말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다가 그것도 아무 때나 하지 말고 은혜가 될 만한 적절한 시기를 보았다가 그때 한마디 툭 던져서 은혜가 풍성하게 해라.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죠. 우리 마음속에 사탄이 충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령을 거스르게 되고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단을 멀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가운데도 기록하고 있거든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시기 때문.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 즉 서로 대적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함께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충만함으로 성령을 거스르는 자가 아니라 성령 충만하여서 사단의 유혹까지도 뿌리칠 수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성령 충만이 아니라 사탄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라 기록하라.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굽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목이 곧았다는 건 뭐예요? 교만이죠 교만 그리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거 그런 사람이 성령을 거스른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그러니까 우리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 마음과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면 마귀에게 틀을 주기 시작하면서 마귀의 얘기를 듣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씨가 먹으면 너 정녕 죽을 거야.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는 사단의 유혹 속에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쥐어버린 그리고 순종하지 않게 된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는 그 말은 이들의 마음 가운데 무엇을 가져다준 거예요?
참석자 1 15:26
교만 모기 고동자로 만든 것이 그 교만함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등지고 사단의 이야기에 솔직해서 그 말에 귀기울여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불순종으로 나타난 죄인이 되었다라는 것이지, 이러한 교만이 결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성령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이 반대로 여러분 예수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하지 않습니까? 이 잔을 나에게서 좀 옮겨주십시오라는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어느 만큼 땀방울이 빗방울이 될 정도로 열심히 간절히 간곡히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 기도하던 중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결론으로 대답했다. 즉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노라고 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사단의 틈을 주지 않는 성령 충만한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 시민 공동체가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는 공동체,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분명한 것은요. 성령 충만할 때 사단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곳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거예요. 개인도 마찬가지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사단이요 더 접근하는 거 그래서 세상에 보다 이 성전 안에 사단이 더 많이 그래서 예배드리고 못 나갈 때 조심하라고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성질로 생각하고 그러면 조심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그래 내가 신앙 안에서 멋지게 살 수 있어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푹 넘어져 버린다면 문구 때문에 한 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된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 겸손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 듣는 귀가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또한 그리하여서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계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이야기를 왜 성경에 기록해 주셨을까? 두 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짓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는 거예요.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말하기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다 그렇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또한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깨어서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라고 지적해 주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베드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상에 대한 이야기죠. 지금 너희가 누구한테 하는 건지 아니라고 묻는 거 그 거짓말 하나님께 하는 거예요. 너희가 같이 함께 깨어서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대한 거짓이고 시험인가를 생각해 봐야겠죠. 여러분 지금 이들이 사도들 앞에 괴물을 갖다 딱 내려놓는 장면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이 모습을 떠올리시고 제가 두 가지 질문을 할 테니까 대답을 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니까 잘 생각하시고 대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이 예물을 딱 내려놓았을 때 사도에게 드린 겁니까? 하나님께 드린 겁니까? 되게 어렵죠. 문제 사도들이 있고 그 앞에 아나니아가 예물을 가지고 딱 내려놨어요. 사도에게 드린 겁니까? 하나님께 드린 겁니다. 이거 어려워요. 하나님께 드린 거죠.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린 거죠.
여러분 예물 드릴 때 저한테 드리는 거 아니잖아요 그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예물을 준비해서 갖고 오는 거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 땅값에 팔고 전부라고 말하는 이 속이는 사도에 대한 것이니까 사연에 대한 것이 헷갈리십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드린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거짓말들은 사도에게 한다. 그게 말이 될까요? 여러분 드린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요. 거짓말도 하나님께 한 그렇죠 왜 대상이 하나님이니까 내가 예물을 드릴 때 사람에게 주지 않잖아요. 하나님께 드리잖아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것은 사람에게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솔직하지 못한 것이지 드린 것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거짓말도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도 참 좋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 성령의 통치가 아니라 사단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 하나님께도 거짓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볼까요? 여러분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사람 거짓말하기가 쉽습니까? 거짓말하기가 어렵습니까? 그렇죠 성령 통치를 받는데 거짓말하는 게 쉽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말이죠.
그러면 사탄의 통치를 받으면 거짓말하는 게 쉽습니까? 거짓말하는 게 어렵습니까? 그렇죠 이거는 또 쉽게 대답을 하죠. 맞아요.
죄인 된 인간이 거짓을 일삼는다는 것은 그것은 먼저는 내가 사단에게 쫓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지금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한번 현실적으로 그 부부를 한번 좀 들여다보실까요? 이 부부는 왜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여러분 인간의 눈으로 한번 그들을 바라봐 보십시오. 이들이 지금 한 것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감당하고 있던 구제 사역을 동참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동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이들이 땅을 팔고 값을 얼마를 감추었지만 실제로 헌금 생활을 정말 잘하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죠. 이들의 마음 가운데 분명 갈등은 있었지만 그래서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스스로 아마 의미부여했을 거예요.
야 그래 우리가 땅을 팔아서 1억이 되었는데 천만 원은 우리가 쓰는 9천만 원 드는 거 대단한 거 아니야 잘해 우리가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9천만 원이나 했는데 이 문제가 되겠어 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어쩌면 동참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요. 헌금에 동참했느냐 안 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땅값을 감추고 전부라고 말했던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이 마음 가운데 가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결국에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임 잘못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 헌금을 드리고 구제를 위해서 교회에 구제 헌금을 하는 것은 강제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굳이 땅을 팔지 않아도 그래서 그 값을 헌금하지 않아도 이들이 공동체 생활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렇게 했었던 것은 아마도 앞서 소개했던 바나바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거죠. 이들도 바나바처럼 헌금을 내어서라도 교인들에게 칭송받고 싶은 그러한 생각, 그것과 더불어 우리의 이름 좀 내고자 하는 자기 부모이 이러한 것들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의 공명심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까요? 아니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려고 나타난 현상일까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공명심이 나타나지 않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거 오늘날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직장에서 주일날 오라고 그래 그런데 저는 기독교입니다. 주일날 교회 갑니다. 자신 있게 말하고 직장에 가지 않고 놀러 간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세상 가운데 지분이 그러한 되는 거죠.
또 실제적으로 우리가 이런 걸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제 삶 가운데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거죠.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목회자들이나 아니면 중식자들, 리더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또 리더자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 동일한 것이죠.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말은 청산이 그처럼 하는데 한 번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엇을 위한 것이에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거짓된 삶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마태복음 6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러니까 구제는 은밀하게 해야 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내용의 일부입니다. 은밀하게 하는 것 그러한 자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겠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반면 외식하는 자 같은 삶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무엇을 할 때 하나님께 하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덫이 되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거짓 행할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외식된 삶, 공명심을 위해 하나님께 거짓 행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하나님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또한 거짓된 삶을 원하지 않는 그래서 오늘 성가대가 찬양했잖아요. 어떻게 이런 찬양을 불렀을까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찬양했습니까?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고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길 원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길 원합니다.
그런 고백 아니겠어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삶을 싫어한다. 자언 19장 5절은 말씀 아니라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잠언 19장 5절. 시작.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시편 101편 7절에도 말씀합니다. 이것도 큰 소리로 한번 같이 읽어봅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라.
마지막으로 잠언 12장 22절도 같이 읽습니다. 시작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요정을 걸어갈 때 사람 앞에 보여주기 위해서 살다가 죄악의 길에 서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는 두 가지 교훈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 충만한 곳에 사단이 역사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 가운데 사단이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축구하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 우리의 삶 가운데 거짓이 선포되어질 때 우리는 사단의 동의를 기 하나님 나의 입수를 통해서 진실을 말하게 해주십시오. 늘 진실한 삶, 진실한 말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대하듯이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