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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7일 아침에 보도된 뉴스 하나는 보고있는 동안에도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선된 미국의 대통령을 인준하기 위해 모인 상하원 합동회의장을 시위대가 장악해 의원들이 대피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실제 속사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치학자들은 선거 결과에 따른 정치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겠지만, 미디어 학자의 눈에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낸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공기처럼 형성된 환경에서, 그래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도 광범위해진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0년 전 예견한 문제가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원저의 제목은 《The Shallows: What the Internet Is Doing to Our Brains》이다. 더 할 수 없이 얄팍해진 우리 생각의 깊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목으로 삼은 것인데,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도대체 인터넷이 우리의 두뇌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유려한 칼럼과 에세이를 통해서 여러 번 수상한 경력이 있는, 글쓰기의 재주가 남다른 사람이다. 이 책은 출판된 지 올해로 10년을 넘기고 있는데, 그가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들의 우울한 결과들이 드러나는 중이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을 진실로 믿고 폭도와 다름없는 행동을 나라를 위한 일로 생각하고, 비판적인 지적에는 아예 귀를 막거나 거짓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의 얄팍함이 현실화하고 있다.
2010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미디어의 이해》를 번역하던 중, 그해 출간된 니콜라스 카의 책을 접하고 순식간에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책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걱정과 《미디어의 이해》를 통해 매클루언이 경고하고자 했던 내용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두 고전이 독자들에게 거리감과 이해의 어려움을 던져 주는 반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자의 수려한 글솜씨 덕에 너무도 잘 읽히는 책이다. 미디어 특히 인터넷이라는 미디어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실제 사례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내용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클루언이 제시했던 미디어에 대한 이해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매클루언의 주장에 바탕을 두면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적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주로 글쓰기, 책읽기와 관련된 관찰을 바탕으로 인터넷이 우리의 두뇌 구조를 바꾸고,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이는 글쓰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자와 인터넷이 우리에게 작동하는 방식을 고찰해 보면 인터넷이 우리에게 어떤 것인지 살펴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이 가져다준 사고의 얄팍함
인터넷이 처음 등장할 즈음 수많은 우려가 제기됐는데, 그중 가장 주된 내용은 사실 그리 낯선 내용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대한 비판은 고대 그리스에서 문자가 도입되던 시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문자에 보냈던 의심스러운 시선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문자의 도입은 사람들의 생각을 없애고 결국은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지혜와 얇디얇은 지식을 구분 못하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걱정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옳았다’고 니콜라스 카는 이 책의 9장 도입부에서 밝히고 있는데,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의 불편한 시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자를 인터넷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게 보일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글자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이 잘 드러난 플라톤의 책 《파이드로스》의 한 부분이다.
이집트의 왕 타무스는 발명의 신 테우트를 초청해 잔치를 베풀게 된다. 테우트는 최초로 수와 계산을 발견하고 기하학과 천문학을 창시했으며, 더 나아가 장기와 주사위 놀이, 더군다나 글자까지 발명했다. 테우트는 타무스 왕에게 가서 자신의 기술들을 보이고는, 다른 이집트 백성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타무스는 그 기술 하나하나가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 물었고, 테우트가 세세히 설명하는 사이에, 타무스는 각각의 기술에 대해서 좋은 측면과 그렇지 못한 측면에 대해서 평가했다.
글자의 경우에 이르러 테우트가 말하길, “왕이시여, 이 글자는 이집트 사람들을 더 지혜롭고 더 잘 기억하게 해 줄 것입니다. 기억의 약이자 지혜의 약을 발명했다는 말씀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그대는 글자의 아버지로서, 글자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글자가 발휘하는 능력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소.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것은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신뢰로 인해 외부로부터 남의 것인 표시에 의해 기억을 떠올리지, 내부로부터 자신들에 의해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 환기의 약을 그대가 발명한 것이오. 다른 한편 그대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지혜로워 보이는 의견을 제공하지만 참된 모습, 즉 진상(眞相) 그대로를 제공하지 않소. 왜냐하면 그대 덕에 많이 듣게 돼 그들은 가르침이 없어도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사실은 그들은 무지하며 함께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니, 지혜로워지는 대신 지혜로워 보이게 된 탓이오.”
구술 미디어에서 문자 미디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남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상황은 인터넷 미디어의 도입으로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이제는 읽어서 소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내적 성찰의 과정마저도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물며 어떤 것을 읽을지 검색하는 단계를 넘어, 어떤 것을 읽고 볼 것인지 알고리즘이 알려주는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면 우리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에 진입한 것이다.
매클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동안 미디어도 우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우리 두뇌의 가소성을 언급하면서, 우리 두뇌는 우리가 사용하는 미디어에 의해서 새롭게 조직화하는 특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흔히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하면 미디어를 통해 인간의 능력이 확장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심각한 오해다. 단순한 기능이나 성능의 확장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 신체의 확장과 쇠퇴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확장되는 것이 있는 한편 반드시 그것에 수반해 쇠퇴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뇌의 가소성은 미디어를 통한 재편을 통해 이전에 가능하고, 활용했던 기능의 쇠퇴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조직화를 이룬다는 이 책의 지적과 동일한 맥락에 있는 말이다.
미디어가 사람의 뇌와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 이미 여러 번 확인한 사실이다. 시계가 만들어진 이후 우리에게 각인된 시간은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우리 신체에 각인된 천성이 됐다. 또한 지도가 만들어진 이후 우리가 지각하는 공간이 탄생했으며,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다. 스스로 말했듯이 니체는 눈이 나빠져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타자기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의 글에서 보이는 아포리즘적 글쓰기는 타자기와 무관하지 않다. 문체가 바뀐 것이다. 니콜라스 카가 주목하는 매클루언의 주장처럼, 우리의 도구는 그 도구가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을 증폭시키게 되면 그와 함께 다른 부분은 결국 마비시키게 된다. 인터넷의 도입과 함께 우리의 두뇌가 마비 혹은 쇠퇴해버린 그 기능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활자 미디어 시대 이후 우리가 고민하고 만들어왔던 많은 제도적 장치들은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찰과 숙고를 바탕으로 작동이 보장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우리의 신체와 미디어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학자인데, 니콜라스 카가 보여주는 주장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우리의 신체로 작동하게 되면서 우리의 몸이 얼마나 잘 적응하고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시각장애인들의 지팡이는 그들에게 손과 같으며, 목수가 망치를 집어들 때 그의 뇌에 있어서 망치는 손의 일부가 된다. 군인이 쌍안경을 볼 때 뇌는 쌍안경을 우리 신체의 일부로 판단한다. 어떤 도구든 그것이 신체의 일부로 체화되면 그것은 더 이상 신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이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된다. 인터넷망은 우리 두뇌의 확장이다. 계속 말하지만 우리의 두뇌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 두뇌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인터넷의 작동 구조와 방식이 우리의 두뇌를 그런 방식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말이다.
읽기와 쓰기가 정체성 형성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우리는 이 같은 기술을 타고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가 보는 것도 타고난 것이 아니며, 문화적인 기술들의 습득을 통해 그러한 방식으로 ‘보기’라는 기술을 체화하고 획득한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며, 의도적인 알파벳의 개발과 다른 많은 기술들로 인해 가능해졌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는 이 상징적인 문자를 이해 가능한 언어로 변환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읽기와 쓰기는 가르침과 연습, 계획적인 뇌의 성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카는 인터넷 시대에 이런 방식의 연습과 훈련의 부족이 만들어내는 뇌의 변화 그리고 그 결과로 빚어지는 사고의 얄팍함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미디어 근시’를 치료하려면
인터넷을 바탕으로 한 각종 SNS 미디어에 의해 확장된 우리의 신체, 특히 가소성이 좋은 우리의 두뇌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인쇄 미디어에 의해 읽고 쓰는 연습과 체화를 거치지 않은 세대에게는 이미 읽는 미디어를 통한 세상의 파악은 불가능한 정도이다. 니콜라스 카가 그의 책에서 하버드 대학생들의 글쓰기 실력에 대해 통탄하듯이, 우리나라의 각 대학에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글쓰기 교육은 그 성공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디지털 세대는 인터넷 방식을 바탕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바뀐 환경에 바뀐 미디어는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변화가 오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여기부터다. 그 바뀐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깃발 아래 몰려다닌다. 알고리즘을 통한 기사와 원하는 기사만 알아서 올려주는 유튜브는 우리의 두뇌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올려주는, 인터넷 세상의 공명실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는 일종의 환청이다.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매클루언은 미디어 낙관론자가 아니다. 니콜라스 카 역시 낙관론자로 볼 수 없다. 텔레비전이라는 영상 미디어가 사람들의 근시를 조장한다고 매클루언이 말했을 때, 그가 말하는 근시는 안과적 의미에서의 근시가 아니다. 멀리 내다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야가 좁아져서, 생각의 깊이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든 미디어는 그것만의 특성이 있어 미디어 간의 비율 조정이 필요하다. 어떤 미디어가 좋은 미디어냐고 묻는 것은 일종의 헛소리에 가깝다. 지금의 디지털 인터넷 미디어를 작파하고 인쇄 미디어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 미디어는 영상과 인터넷이 지배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일종의 치료제와 같다.
인터넷 미디어가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 치료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 좋은 처방전이다. 읽고 쓰는 것에 기반을 둔 미디어 역시, 변화를 위해 알고리즘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의 두뇌는 그런 시도에 반응할 준비가 늘 돼있다고 하니까.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 2월호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김상호 교수의 글 '인터넷이 만들어낸 우리 생각의 얄팍함-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해당 글이 링크주소가 연결이 안되네요. 아마 홈페이지에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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