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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담연하여 쾌적하다’ 함을 풀이하리라. |
[문] 이는 어떤 즐거움인가? |
[답] 이 즐거움이 두 가지가 있으니, 내적인 즐거움[內樂]과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이다. 이 즐거움은 5진(塵)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건대 돌 틈에서 나는 샘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아서 균등한 마음씨를 행하고, 범행을 닦고, 10선업도를 얻고, 청정하여 티가 없게 되면 이를 내적인 즐거움이라 한다. |
[문] 이 즐거움은 어느 세계에서 걸리는가? 욕계에 걸리는가, 색계에 걸리는가, 무색계에 걸리는가? |
[답] 이 즐거움은 욕계에서는 걸리기도 하고 걸리지 않기도 하다.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걸리지 않는다.
지금 말하기를 “마치 비구가 제3선에 든 것 같다”고 했는데, 만일 색계에서 걸리는 것이라면 마치 비구가 제3선을 얻는 것 같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색계에서 걸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이 경지는 욕계의 마음에 희락을 내고 온몸에 가득 채우니, 마치 보드라운 풀[煖蘇]에다 몸을 담그면 몸이 유연해지며 화평하고 즐거운 것과 같다. |
걸리지 않는다고 함은,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관찰하면 모든 법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아 진실한 지혜를 얻고 마음에 집착이 없이 형상 없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것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반이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제3선천의 즐거움을 말하는가? |
[답] 두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느낌의 즐거움[受樂]과 느낌이 다한 즐거움[受盡樂]이다.
느낌이 다한 즐거움이란, 온갖 5음(陰)이 다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곧 무여열반의 즐거움이다.
능히 근심과 번뇌를 제하여 마음속이 환하니, 이를 즐거운 느낌[樂受]라고 한다.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제3선 가운데 가득히 들어차 있으니, 이런 까닭에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제3선천의 즐거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
[문] 초선과 2선에도 즐거운 느낌이 있거늘 어찌하여 제3선만 말하는가? |
[답] 즐거움에는 상․중․하가 있는데, 하는 초선이요, 중은 2선이요 상은 3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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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에 두 가지가 있으니, 낙근(樂根)과 희근(喜根)이다. 5식(識)30)과 상응하는 것이 낙근이고,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희근이다. |
2선에서의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희근이며, 제3선에서의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낙근이다. 일체의 4계 안에서 3선을 제하고는 달리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없다. |
이는 5식은 분별할 수도 없고 이름의 특징도 알 수 없어서 안식(眼識)이 생함은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이지만 의식은 이미 생겨나 있는 것이다. |
이런 까닭에 5식과 상응하는 낙근은 만족한 즐거움이 될 순 없으며,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만이 만족한 즐거움이 된다. |
이런 까닭에 3선 가운데에는 공덕이 적으며, 즐거움이 많은 까닭에 배사(背捨)ㆍ승처(勝處)ㆍ일체의 입(入)이 없다. |
이 3선을 지나서는 다시 즐거움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비구가 제3선천에 든 것과 같다”고 말한다. |
이제 ‘일체 중생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으며, 계행을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았다’ 함을 풀이하리라. |
[문] 무슨 까닭에 즐거움에 이어 “모두가 좋은 지혜를 얻었다”고 말하는가? |
[답] 사람이 즐거움을 얻기 전엔 능히 공덕을 지을 수 있지만 즐거움을 얻은 뒤엔 마음이 즐거움에 집착되므로 공덕을 짓지 않는 예가 많다.
그러므로 즐거움 뒤에 차례로 마음이 좋은 지혜를 얻었다 한다. 좋은 지혜란 계행을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
[문] ‘계행을 지님’을 일러 ‘스스로를 지킨다’고 하며 또한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다시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는가? |
[답] 몸과 입으로 짓는 선(善)은 ‘계행을 지닌다’고 하며, 마음을 거두어 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보호한다’고 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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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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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체의 공덕은 모두 계․정․혜에 포섭되는데,
‘계행을 잘 지닌다’ 함은 계에 포섭되고, ‘스스로를 보호한다’ 함은 정에 포섭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함과 선정에서의 자(慈) 등의 공덕은 혜에 포섭된다. |
[문] 누구도 ‘계행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계행을 잘 지닌다고 하는가? |
[답] 바라문같이 세간법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
“집을 버리고 계를 잘 지킨다면, 이는 종자를 끊는 사람이 된다.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재물을 얻어 널리 공덕을 짓는다면, 이러한 이에게는 복덕이 있다. 출가한 자는 걸식하여 자신도 꾸려 나가지 못하거늘 어떻게 공덕을 짓겠는가?” |
이러한 것을 일러 ‘계행을 잘 지니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
또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법으로 다스리는데 집착되어 스스로를 잘 보호하는 사람을 꾸짖어 이렇게 말한다. |
“사람은 법으로 다스려서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어야 한다. 법을 범해서는 안 되며, 존귀하고 친한 이를 버려서는 안 된다. 법을 세워 세상을 구제하면 그 이익 됨이 크거늘 무엇 때문에 자기 몸 하나만을 좋게 하려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무사(無事)에 빠져 세상이 어지러워도 바로 잡지 않고 사람이 급해도 구제하지 않는가?” |
이러한 것을 일러 ‘스스로를 보호하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
또한 어떤 사람은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꾸짖어 이렇게 말한다. |
“원수에 보복치 못하고, 도적을 묶지 못하고, 악인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가 있어도 엄단하지 못하고, 환란을 물리쳐 구하지 못한 채 잠자코 있어 이익이 없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가?” |
이러한 것을 일러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
이런 게송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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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용맹하지 못하면 |
세상에 살아서 무엇하리오. |
친한 이가 위태해도 구제 못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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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땅 위에 선 나무장승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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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갖가지 착하지 그릇된 말을 하는 것을 일러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이를 꾸짖는다’고 한다. |
그러나 이 천인(天人)들은 모두 좋은 지혜를 얻고, 계행을 잘 지니고 스스로를 보호하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러한 착한 법을 행하면 몸과 마음이 안온해져 두려움에 떨지 않으며, 번뇌[熱]도 없고 근심도 없이 좋고 착한 명예만이 있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경 받는다.
이것은 열반의 문으로 향하는 것이다. |
목숨이 마칠 때에 복덕스러운 모습을 보아 마음이 기쁘고 근심과 후회가 없다. 설사 열반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들의 세계나 혹은 천상에 태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