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스승을 찾아라. ♣
- 法門(법문). 田岡(전강) 禪師(선사). -
因星見悟(인성견오)라,
悟罷非星(오파비성)이로다.
不逐於物(불축어물)이요,
不是無情(불시무정)이니라.
『별(星)을 因(인)해서 깨달음을 얻음이라,
깨달아 마침에, 별(星)이 아니로다.
物件(물건)을 쫓지 아니함이요,
이 無情(무정)이 아니니라.』
지금 내가, 이렇게 拄杖子(주장자)를 들어 보였는데,
大衆(대중)은, 拄杖子(주장자)를 들기 以前(이전),
山僧(산승)의 마음을 取(취)하였다면,
道人(도인)일 것이요,
만약, 이 拄杖子(주장자)를 보고만 있었다면,
境界(경계)를 取(취)하는 凡夫(범부)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拄杖子(주장자) 든,
道理(도리)를 똑바로 보겠는가?
拄杖子(주장자)로, 法床(법상)을 한 번 치시다.
三年(삼년) 前(전),
내가, 梵魚寺(범어사)에 祖室(조실)로 있을 때였다.
그때,
日本(일본) 고베(神戶市 長田區 蓮官通六丁目三)에 있는,
平和寺(평화사) 住持(주지) 成智信(성지신) 스님으로부터,
上梁(상량) 記念(기념)으로,
梵魚寺(범어사)에 佛法大義(불법대의)를 물어왔다.
내가 答(답)하여 보냈는데,
이 法語(법어)가,
고베의 平和寺(평화사) 法堂(법당)에,
족자로 걸려 있다고 한다.
參禪(참선) 大衆(대중)들에게,
參考(참고)가 될까하여, 한번 紹介(소개)한다.
寄平和寺上樑法語(기평화사상량법어)
黃花翠竹宣明妙法(황화취죽선명묘법)하고,
風柯月渚顯露眞心(풍가월저현로진심)이로다.
鶯吟燕語常談實相(앵음연어상담실상)하고,
頭頭毘盧物物華藏(두두비로물물화장)이로다.
咄會麽(돌회마).
回首看山醉流霞(회수간산취류하)하고,
倚樹沈眠日已斜(의수침면일이사)로다.
『노랑꽃 푸른 大道(대도),
妙法(묘법)을 밝히고,
바람가지, 물, 달(月)도,
眞心(진심)을 나타냄이로다.
꾀꼬리와, 제비도,
恒常(항상) 實相(실상)을 말하고,
낱낱이 法身(법신)이요,
物物(물물)이 華藏世界(화장세계)로다.
애달프다. 알겠는가?
머리를 돌이켜, 山(산)을 바라보며,
흐르는 안개(霧)에 醉(취)하고,
나무를 依支(의지)하여 졸고 나니,
날은 이미 저물었도다.』
不立文字(불립문자) 敎外別傳(교외별전),
直指人心(직지인심) 見性成佛(견성성불)하는 法(법)인,
부처님의 正法眼藏(정법안장)을,
燈燈相續(등등상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만일 부처님의 正法(정법)을,
조금이라도 잘못 傳(전)한다면,
後世(후세)에 끼치는 허물이 많을 것이다.
깨닫지 못한 分上(분상)에는,
靈山會上(영산회상)의 拈花示衆(염화시중)과,
迦葉微笑(가섭미소)도, 다 妄說(망설)이다.
大衆(대중)들이여!
威音王佛(위음왕불) 以後(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친 者(자)는,
모두 天然外道(천연외도)라 했으니,
法(법)을 받은 明眼宗師(명안종사)에게,
認可(인가)도 받지 않고,
自己(자기)가 第一(제일)이라 하며,
妙(묘)한 言句文字禪(언구문자선)을,
活句(활구)라 하고, 學者(학자)들을 속이고 있다면,
이러한 外道(외도)들은,
부처님도 求(구)하지 못하리라.
今日(금일) 最上乘(최상승) 活句參禪法(활구참선법)을 닦는,
大衆(대중)들은 冥心(명심)할지어다.
그러면 어떤 것이 活句參禪法(활구참선법)인가?
모름지기 祖師關(조사관)을 뚫어야 하나니,
오직 話頭(화두)만 잡드리 하되,
理致(이치)길도 없고, 말길(言路)도 없고,
마음 길(心路)도 없나니,
이렇게 勇猛精進(용맹정진) 해나가다가,
直下(직하)에 大悟(대오)하는 것이다.
卽(즉), 한번 듣고, 言下(언하)에 문득 깨달아야,
곧, 너의 本性(본성)을 보느니라.
“일러라. 너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일러라.
왜 너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모르는가.
어서 일러라.”
이렇게 다그치고 입만 열면,
“어느 곳을 向(향)하여 입을 여는가?”
三十榜(삼십방)을 막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 拄杖子(주장자)를 척 빼앗아 들고,
“이 榜(방)을 한번 이르시오.”
“오냐, 그 榜(방)을 맞고 나갈 테니,
너도, 또 일러라.”
法(법)이란 이런 것이니,
여기서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卽(즉), 格外丈夫(격외장부)인데,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내가, 나를 깨닫는 漏盡通(누진통)은,
本覺(본각)을 昧(매)하는 法(법)이 없느니라.
오직 내가, 나를 自覺(자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正法(정법)인 것이다.
이렇게 大平等(대평등). 大圓融(대원융).
理事無碍(이사무애). 事事無碍(사사무애)의,
圓覺大智(원각대지)를 證得(증득)하고,
이 三界火宅(삼계화택)에서,
色相境界(색상경계)에 執着(집착)하는 衆生(중생)들을,
모두 濟度(제도)하여야 하느니라.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이요,
轉處實能幽(전처실능유)라.
隨流認得性(수류인득성)하면,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니라.
『마음은,
一萬(일만) 境界(경계)를 따라 구르고,
구르는 곳마다,
實(실)로 能(능)히 그윽하다.
흐름을 따라,
性品(성품)을 認得(인득)하면
기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느니라.』
이 偈頌(게송)은,
二十二祖(이십이조) 摩拏羅(마나라) 尊者(존자)가,
二十三祖(이십삼조) 鶴勒那(학륵나) 尊者(존자)에게 設(설)하여,
五百(오백) 마리의 鶴(학)을,
濟度(제도)케 하신 偈頌(게송)이다.
參羅萬像(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法身(법신)이요.
華藏刹海(화장찰해)다.
깨친 分上(분상)에는 무슨 걸림이 있으리오,
오직 因緣(인연) 있는 衆生(중생)을 爲(위)하여,
生死解脫(생사해탈)의 正法(정법)을 傳(전)할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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