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와 서정시
―권달웅의 『산도화꽃 그늘 아래』를 중심으로
이영숙(시인 · 문학평론가)
1.
모든 시는 어느 정도 메타적 성격을 지닌다. 한 편의 시에는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드러나며,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지론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poem)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으로 시(poetry)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간된 시집이 서너 권 이상 되었을 때 일정한 기준에 의해 선별된 시를 묶어 시선집을 내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는 시인의 시 정신 내지는 시적 정체성(poesy)을 일별하기에 매우 유용하다. 더욱이 『산도화꽃 그늘 아래』와 같이 서정시라는 공통된 시적 경향성을 가진 4인의 시인(권달웅, 나태주, 유재영, 이준관)이 시선집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내놓은 공저에서랴. 시를 ‘시 한다’는 측면에서 시의 메타적 성격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이 글은 시선집 전반이 아니라 그 중 권달웅 시인의 시만을 대상으로 논의의 범주를 좁혀보려고 한다. 서정시(poetry)에 대한 서정시(poem)를 통해 그는 서정시(poesy)를 어떻게 구현했는가.
물푸레나무 잎에
자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몸을 늘였다 오므렸다
오체투지한다
저 먼 곳을 자로 재어보듯
한 걸음 한 걸음씩
엎드려서 간다.
시인처럼 잠시 머리를 쳐들고
나뭇가지가 되었다가는
해진 무릎 재봉틀로 박음질하듯
도르르 입을 오물거린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벼랑에 이를 때까지
꼬불꼬불 능선을 넘어간다
―「자벌레 한 마리」 전문
“시인”이란 단어가 등장한 유일한 이 시에서 “자벌레”는 “시인”에 비유된다. 자벌레와 시인의 어떤 속성이 닮았기 때문일 것으로, 자벌레의 자리에 시인을, 시인의 자리에 자벌레를 대입함으로써 권달웅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의 의미를 무난히 독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자벌레처럼 잠시 머리를 쳐들고/ 나뭇가지가 되었다가는/ 해진 무릎 재봉틀로 박음질하듯” “오체투지”하는 “시인”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나뭇가지가 되어보는 자벌레’는 ‘나뭇가지가 되어보는 시인’에 다름 아니다. ‘자연 사물_되기’를 통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벼랑에 이를 때까지” 가고야 마는 “시인”을 그는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린다.
땀 흘리고 일하다가 잠깐 쉬는
산그늘에 내리는 뻐꾸기 울음 같은
이팝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김이 오르는 하얀 쌀밥 같이
한꺼번에 핀 이팝꽃은
흙냄새도 나고 땀냄새도 나고
누룽지냄새도 났다
내 생일날 아침
엄마가 일껏 지은 고봉의 하얀 쌀밥,
어서 먹어라. 어서,
나는 배부르다. 생각 없다.
―「이팝꽃 그늘」 부분
이 시 역시 「자벌레 한 마리」의 연장선에 있다. “무더기”로 핀 “이팝꽃”이 외형상 고봉으로 얹은 쌀밥 같다는 것은 예로부터의 비유다. “땀 흘리고 일하다가 잠깐 쉬는/ 산그늘”에서 허기진 “나”에게 “이팝꽃”은 “김이 오르는 하얀 쌀밥”으로 보였을 수 있지만, 여기에 “흙냄새”와 “땀냄새”라는 현장성과 “누룽지냄새”라는 후각적 상상력이 더해져 “이팝꽃”은 두 공간(밭, 집)을 하나로 묶으면서 “엄마”를 호출한다. “일껏 지은 고봉의 하얀 쌀밥”을 “엄마”가 “어서 먹어라. 어서”라고 권하는 “내 생일날 아침”. 가난한 밥상을 앞에 두고 모자가 마주 앉았을 것이다. 필자는 “나는 배부르다, 생각 없다.”라는 마지막 행을 두 가지로 읽고 싶은데, 발화자를 “엄마”로 보는 관점과 아들인 “나”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전자라면 생일날이나마 아들에게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먹이려는 모성의 자연스러운 발로가 될 것으로, 아마도 시인이 의도한 것도 이것이리라. 그러나 이를 (독자 입장에서) 후자로 읽었을 때는 시의 판도가 매우 달라진다. 그것은 하나의 치명적 도약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다. “엄마”가 “어서 먹어라, 어서”라고 권했을 때, “나는 배부르다. 생각 없다”라고 답함으로써 그 “하얀 쌀밥”을 “엄마”께로 돌리는 현실적인 배려 너머에 이미 “이팝꽃”으로 배를 불린 “나”가 있기 때문이다. “하얀 쌀밥”을 연상하는 것과 “이팝꽃”으로 포만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중의적으로 읽히는 장치가 시에서 활발하게 작동할 때 서정시의 현대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 것에도 홀리지 않고/ 오로지 한 올 새소리에만 홀”(「미혹」)려 온 시인이 “어둠 속에 고개 수그리고 있는 나무가/ 밤나무인지 감나무인지 자귀나무인지 오동나무인지/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만 듣고/ 그 나무 이름을 알아”(「공손한 귀」)내는 ‘귀’를 갖고 있음에랴.
2.
맨발로 산을 걸어 들어가면
반달이 약속 없이
먼저 마중 나와 있었다
―「분천」 부분
시인이 경유했을 삶의 시공간은 이랬을 것이다. “약속 없이/ 먼저 마중 나”오는 “반달”이 있는 신화적 세계, “맨발로” “걸어 들어”가야 할 신성한 “산”, 그리하여 도시적 환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고향으로서의 ‘분천’. 실제로 경북 봉화는 권달웅 시인의 고향이다. 그 절대적 시공간에 대한 회고와 동경의 영향 아래 권달웅 시인은 그것을 단순하고 명징하며 “소나기 그치고 햇볕 쨍쨍한” 그늘 하나 없는 풍경으로 그려낸다.
소나기 그치고 햇볕 쨍쨍한
학교운동장에서 만났다.
길을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어버린 땅강아지 한 마리,
딸각거리는 필통 속의 몽당연필처럼
침 묻혀 꼬불꼬불한 글씨를 쓰며
시오리 길을 가고 있다.
맨드라미 고개 수그리는 하오
구구단 외우지 못해
수업 끝나고 늦게까지 벌 청소하다가
혼자 듣고 돌아가는 풍금소리처럼,
―「하학」 전문
향토적 서정이 유년과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의 논리적 사유는 더욱 자주 무장 해제된다. “길을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어버린 땅강아지”나 “구구단 외우지 못해/ 수업 끝나고 늦게까지 벌 청소”한 소년이 동일시되는 가운데 “땅강아지”는 소년에게 발견되고, 소년은 시인으로 자라 미래의 독자인 우리를 시 속으로 끌어당긴다. “혼자 듣고 돌아가는 풍금소리”가 소년의 “시오리 길을” 내내 동행했을 것이고, 그 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걸으며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자신의 ‘반달’을 부지불식간에 만나는 행운을 더러 누리기도 하는 독자가 있다.
부석사 들어가는 길은 사과밭이다.
사과가 동자승 머리 같다.
단풍 쓴 산이 자꾸 뒤따라왔다.
겹겹의 비단능선에 둘러싸여
빛깔 좋은 사과가 우르르
순흥 죽계천 피끝 마을까지
굴러갈 듯하다
―「부석 사과」 부분
독자를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은 강인함보다 오히려 느슨한 여백이다. “부석사”의 소재지인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서 “죽계천 피끝 마을”로 불리기도 하는 경북 영주시 안정면까지 지도상의 거리를 먼저 따져봐야 이 시의 스케일을 알 수 있다. “겹겹의 비단능선에 둘러싸여” 무려 25.3Km를 “빛깔 좋은 사과가 우르르” “굴러”가는 장관을 상상해 보라. 권달웅표 서정시의 특이점은 시 속의 여백을 독자에게 개방하여 시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지점이다. “꽃상여 행렬이 지나가듯/ 온 세상이/ 개구리 떼울음소리에/ 떠내려간다.”(「장마」)라고 했을 때 우리는 “꽃상여 행렬”을 뒤따르는 죽은 자 일족의 곡소리와 “개구리 떼울음소리”와 “온 세상이” “떠내려”갈 듯 쏟아지는 장마 빗소리를 볼륨을 최대화한 스테레오로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복원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 여기 떠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나 여기 떠나 자라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나 여기 떠나 다시 살 곳으로 돌아간다면”(「은어」)이라고 다소 감상적으로 눈물 어린 시구를 읊었을 때, 그 시공간은 다시 도래하지 않을 먼 과거로서 잃어버린 신화의 세계임이 역설적으로 피력된다.
메밀묵이 먹고 싶다.
달빛 같은 메밀향이 그립다.
어수룩하고 구수한 맛,
메밀가루를 물대중하여
서서히 저어 굳힌
은근히 당기는 맛이 좋다.
없어도 있는 듯한
말랑하고 야들야들한 맛,
달밤 다듬이소리처럼
아련한 그리움이 스민 메밀묵,
눈 내리는 밤 온돌방에서
눈물 많은 친구를 만나 겸상해
메밀묵을 먹고 싶다
―「겸상」 전문
미각과 후각과 촉각과 정서를 “서서히 저어 굳힌” “메밀묵”이 여기 있다. 시에는 있고 현실에는 없는 이것은 우리가 상실한 세계의 표상이다. 달빛 같고, 어수룩하고 구수하며, 은근히 당기는 맛에 말랑하고 야들야들하며 달빛 내리는 밤의 다듬이소리까지 스며 있다. 어디에서 이런 “메밀묵”을 구하고, 새삼 “온돌방”을 어떻게 찾으며, 누구라서 “눈물 많은 친구”가 있을 것인가. 비대해지는 문명 세계에서 서정은 점차 이상향으로만 남아 관념 덩어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3.
시대적 부침에 따라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시적 대안으로 시의 장르가 추가되거나 소멸하는 와중에도, 당대적 가치나 권력 주체의 이동 등과 거리를 두면서 서정시가 그 위상을 줄곧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생명 존중이라는 시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간 서정시가 현실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초월적 틀에서 봉합하거나 아예 간과해버림으로써 여러 비판에 직면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문명이 곧 자연인 세대의 전면적 등장과 문화 권력의 전면적 장악으로 인해 자연에 잇댄 서정성은 점차 낯선 것이 되어가고, 낡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당대의 언어로 당대를 기록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서정시의 변화가 모색되어야 하는 시점이 된 것 같다. “중학교 입학 한 달 앞두고/ 산새처럼 떠나버린/ 열세 살 귀난이 누이,/ 어머니는 가슴에 묻었다. 벌써 오십 년이 흘러갔다./ 해마다 입학 철이 되면/ 목련꽃처럼 눈부신 여학생들이/ 웃으며 지나간다.”(「목련꽃 어디쯤에」)와 같은 가계사적 과거 소환이나, “권실아, 은수원을 떠나 서울 잠실벌에 별똥별 같이 떨어진 권실아,”(「권실이」)와 같은 소통 불능의 개인사적 애상에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다시, 권달웅의 시에서 현대 서정시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1964년 초겨울 역마다 서는 완행열차는 경상북도 봉화에서 청량리까지 아홉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가 고추장항아리 쌀 한말을 이고 내린 보퉁이에는 큰 장닭 한 마리가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이십 오원 하는 전차를 탔다. 사람들은 맨드라미처럼 새빨간 닭 볏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나는 닭대가리를 보퉁이 속으로 꾹꾹 눌러 넣었다. 아무리 꾹꾹 눌러 넣어도 힘 센 장닭은 계속 꾹꾹거리며 대가리를 내밀었다.
빨리 전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났다. 전차는 땡땡거리고 가도 가도 왕십리는 멀기만 했다.
―「먼 왕십리」 전문
아마도 시인의 대학 시절이 시적 배경인 듯하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청량리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온 “아홉 시간”보다 “청량리”에서 “왕십리”까지 가는 “전차”에서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심리적 갈등을 “장닭 한 마리”를 매개로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다니! “1964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내면의 세련된 형상화를 통해 시는 2022년인 현재의 우리에게 당대적인 울림을 준다.
엮어놓은 굴비두름처럼
사람들이 줄줄이 흔들린다
―「지하철에서 잠깐씩」 부분
이번에는 “전차”가 아니라 지하철이다. 지하철이라는 문명 사물과 “굴비두름”이라는 자연 사물을 등가로 놓는 것만으로 시는 지금―여기의 언어가 된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 나날이 목격하는 우리의 일상에 급격히 마음이 기우는 것은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겨울 남대문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소뼈를 고아 우려낸 국물을
밥에 부었다 따랐다 부었다 따랐다
토렴을 한다.
새벽 일찍부터 나와 일하다가
끼니를 거른 사람들이
언 손 불면서 깍두기 집어먹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들이마신다.
(중략)
하수구 얼어붙은 밥알을 쪼아 먹다가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들이
후루룩 소리를 낸다.
―「토렴하는 국밥」 부분
서정시야말로 찰나의 시학을 실천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토렴”하는 ”국밥집 아주머니”와, “끼니를 거른” 채 “새벽 일찍부터 나와 일하”던 “사람들”과, “하수구 얼어붙은 밥알을 쪼아 먹”는 “비둘기 떼”가 만든 공간에 후끈한 김이 서린다. 살풍경이 살풍경 아닌 것으로, 남루가 남루 아닌 것으로, 그렇다고 하여 과장이나 비하 없이, 묘사만으로, 이 시는 당대적 풍경을 완성한다.
4.
브레히트의 말처럼 여전히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서정시를 써야만 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시인의 숙명이다. 21세기라는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시의 전압을 올리는 권달웅 시인의 시를 더 자주 보고 싶다. 현대 서정시의 지경이 깊고 넓어질 것이다.
―《문학저널》, 2022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