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탄 카드를 쓰면서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성탄이 되시기를" 기원하는 문구를 넣는 습관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성탄 맞음에서 성탄의 큰 의미가 퇴색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화점의 쇼윈도우와 진열대에 먼저 찾아오는 성탄은 과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교회들마다 행사로서 진행하는 성탄 축하 행사는 과 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구세군의 자선 냄비로부터 시작하여 일년에 한번씩 연 말연시에 즈음하여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는 일은 과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우 리는 이에 답하기 전에 과연 성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다.
성탄은 기본적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속 사역을 위해 당신님께서 영원부터 가지고 계신 신성 외에 또 인간성을 취하시어 신인의 독특한 존재로 이 세상에 성 육신하신 것을 기념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주 예수께서 정확히 언제 탄생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정확히 12월 25일에 탄생하셨기 때문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기도 했고 1월 6일에 기념하기도 했 다가 점차 서방 교회 안에서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12 월 25일은 정확히 그날 주께서 탄생하신 것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신약 시 대의 성도들과 함께 보편적으로 우리 주 예수의 나심과 성육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성탄의 의미의 핵심은 주 예수께서 왜 성육신 하셨느냐는 것에 모아진다.
그러나 그와 함께 먼저 강조해야 할 일은 성육신의 역사성(historicity)이다. 비록 12월 25일과 연관시켜서는 안되지만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일은 시간과 공간 가 운데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일을 그 모친 마리아가 기억하고 마음에 두고 있다가(눅 2:19 참조) 필요한 때에 그 경위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고 하나님께서는 마태와 누가로 하여금 그 전하여 들은 사실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이 이 성탄과 성육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천사들의 이른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눅 2:10) 자신들이 경험한대로 전하여준 목자들도 당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의 역사성을 전달하는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주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 어오셔서 일정한 기간 동안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신 일이 발생했다는 데 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항상 이 역사적 사건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이 역사성에 근거 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동정녀 탄생으로 이루어진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마태공동체와 누가공동체만이 받아들이던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온 세상 의 기독교가 이 동정녀 탄생으로 이루어진 성육신의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선언 해야만 할 것이다. 이 사실이 부인되면 사실 진정한 기독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동정녀 탄생에 의한 성육신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이들 이 많아 졌고 예수 자신은 그렇게 의식하고 언명하지 않았다가 후에 그가 성육신 하신 하 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이 생겨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보수적인 신학적 입 장인양 나타나기도 하는 이 상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시대야말로 동정녀 탄생에 의한 성육신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성육신이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 적 사건임을 이 번 성탄을 기회로 하여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우리가 경 배하고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서도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 오실 수 있는 그러나 시공간 안으로 들어오셔도 그 제한을 받지 않을 실 수 있는 분이심 (extra humanum extra Calvinisticum)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한다. 그는 시공간에 대 하여 내재와 초월을 동시에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역사적인 성육신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회 는 이 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즉 성육신은 구속 사건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죄가 없었어도 성육신이 일어났었겠는가에 대한 모든 사변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이런 사변을 하는 오시안더(Osiander)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은 칼빈의 『기독교 강 요』의 해당 부분을 보라. 우리 주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의 사변과는 달리 주님의 성육신에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역사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육신이라는 구속자의 오심이 있어야 한 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 가르치심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신약 교회에 성령을 부어 주시고 지금 도 이루어 가시는 구속 역사(historia salutis)의 한 시작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육신 하 신 일이 있어야 그가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셔서 온전한 의를 이루시고 우리 를 위해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아 주시어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부활한 몸으로 하늘에 오 르시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의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세워 구속 사역을 계속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 진행시켜 나가시 는 일의 기초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로 칩입 하여 올 수 없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성자가 계셔야 그가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의를 보여 주시고 그 의를 가르쳐 주시며 그 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우리로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이미 그 나라 백성으로서 살며 이 땅에서 진행하고 성 장하며 충만해 가는 그 나라의 극치를 대망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것이 기본적인 성탄의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에 그가 인간성을 취하셔서 신성과 인성을 동 시에 지닌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과 관련해서 우리 선배들의 생각을 참조하여 두 가지 생각을 덧붙여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렇게 그가 인간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 으므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라는 안셂적인 생각이다(Cur deus homo 참조). 이 안셂의 생각에서 중세적인 요소만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설명을 매우 중요한 생각으 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죄에 대한 형별을 받으셨 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인간성을 취하기 위해서 성육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인간성(몸과 영혼)이 형벌을 받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인간성(사람의 몸과 사람의 영 혼)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자신과 많은 사람을 위한 이 형벌을 받을 수 없으므로 무한한 가치를 지니신 성자께서 친히 인간성을 자신에게로 취 하셔서 신성과 인성을 지닌 신인(the God-man)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가 인간성을 취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네 인간들의 인간성을온전히 성화시키어 그 원상을 회복하게 하시므로 이제 그 안에서 구속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사는 우리들이 온전한 인간성 참된 인간성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형이상학적 기초와 도덕적 모 범을 보여 주기 위해 인간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염두에 두셨던 그 온전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취하심이 우리의 온전한 인간성 드러냄의 존재론적 기초이다(은혜).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신 온전한 인간성은 우리가 그 뒤 를 따라 가야 하고 본받아 가야 하는 윤리적 토대이다(책임).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고(은혜 Gabe) 그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내야할 책임을 지닌 것이다(과제 Aufgabe). 이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규정하는 특성이 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케 하신 참된 인간성 참된 하 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 온전한 인간성 참된 하나님 의 형상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성탄에 즈음해서만이 아 니라 날마다 매순간마다 십자가와 성탄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 십자가와 성탄을 이렇게 연 관되어 있는 것이다. 성탄에서 기념하는 성육신이 있어야 십자가의 구속이 있을 수 있는 것 이다. 믿음으로 십자가 구속에 참여해야 성탄에서 기념하는 인간성을 취하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부디 이번 성탄은 이런 성탄의 큰 의미로 충만한 성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탄에 대해 참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탄 때에 만이 아니고 날마다를 이런 의미에 충실해서 살아 갈 때 우리는 온전한 기독교의 증인으로 이 땅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