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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애거사 범장 지음(休崖居士 范樟 撰) -
북부여기 상(北夫餘紀 上)1)
시조 단군 해모수2) 재위 45년(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壬戌 : B.C. 238) 4월 8일이라.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蘭邊)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오룡(五龍)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
계해 2년(B.C.238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敎人必自胎訓始
기사 8년(B.C.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이른바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公養胎母之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胎敎)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壬申十一年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
임신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경진 19년(B.C.221),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辛巳二十年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
신사 20년(B.C.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癸未二十二年滄海3)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擧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계미 22년(B.C.218),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왕정(秦王定 :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4)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副車)5)를 박살냈다.(설명)6)
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임진 31년(B.C.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燕)나라․제(齊)나라․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盧綰)(B.C.247)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다.
丙午四十五年燕盧綰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 모수리(慕潄離)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
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정미 원년(B.C.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月支)7)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설명)8) 이에 이르러 변(弁)․진한(辰韓)의 두 한(韓)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 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戲觀戰龍圖知變也
기유 3년(B.C.192),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9)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中夫餘)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龍圖)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신미 25년(B.C.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
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임신 원년(B.C.169), 정월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195)년의 겨울이었다.
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경신 49년(B.C.121),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四世檀君 高于婁(一云解于婁) 在位三十四年)
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았다.
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계해 3년(B.C.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甲子四年帝遣將攻海城三月而不克
갑자 4년(B.C.117)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병인 6년(B.C.115)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 모두가 항복해 왔다.
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
정묘 7년(B.C.114), 목책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계유 13년(B.C.108), 한(漢)의 유철(劉澈)10)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䝱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穀可都遂勸王移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갑오 34년(B.C.87)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海夫婁)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國相)인 아란불(阿蘭弗)이,「통하(通河)의 물가 가섭(迦葉)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며 또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北夫餘紀 下)11)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12)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13)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乙亥三年帝自將傳橔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
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槀離國之地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14)
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
갑오 22년(B.C.87), 단군 고우루(高于婁)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裴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岔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秋八月與漢寇屢戰于西鴨綠可之上大捷
을미 23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海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岔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西鴨綠河)의 상류에서 한구(漢寇)15)
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誕降于岔陵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능(岔陵)에서 태어났다.
辛酉四十九年帝崩以遺命葬于卒本川太子高無胥立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등극하였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六世檀君 高無胥 在位二年)
壬戌元年帝卽位于卒本川與父老會于白岳山立約祭天頒行事例內外大悅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史例)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帝生而有神德能以呪術呼風喚雨善賑大得民心有小解慕漱之稱時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이 때에 한(漢)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癸亥二年帝巡到寧古塔得白獐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先是帝無子見高朱蒙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時下夫餘人將欲殺之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行至岔陵水欲渡無梁恐爲追兵所迫告水曰我是天帝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者垂及奈何於是魚鼈浮出成橋始得渡魚鼈乃解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16)에 하부여인17)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岔陵水)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1) 해모수(解慕漱)계 고구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2) 해모수(解慕漱) :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3) <단군세기>에는 창해(蒼海)로 기록되어 있다.
4) 박랑사(博浪沙) : 하남성 박랑현의 동쪽에 있다.
5) 부거(副車) : 본인이 타지 않고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명령한 까닭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8년 뒤인 B.C. 213년(진시황 34년)에 함양궁(咸陽宮)에서 연회를 개최했는데 복사(僕士)라는 관직에 있던 주청신(周靑臣)이 군현제도를 예찬했는데 반해 제(齊)나라 사람 순우월(淳于越)이 주(周)나라의 봉건제도를 찬양한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진(秦)나라는 진시황의 중앙집권제를 통하여 통치했던 최초의 나라였는데 제(齊)나라 사람 순우월이 비난한 것이다. 승상 이사(李斯)는 진시황에게 상주(上奏)하여 분서(焚書)를 단행하게 했다. 분서(焚書)란 동이족이며 단군겨레의 후손인 춘추전국 각 나라 역사서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 신선사상(神仙思想) 즉 동이족 계통의 문헌들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렇게 때문에 중국문헌에서 단군(檀君)과 한웅(桓雄)의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한국(桓國)의 문화는 유교문화로 둔갑하고 말았다. 갱유(坑儒) 또한 유교의 선비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신선사상의 방사(方士 = 道人) 및 그 문하생 460명을 매장한 것이다. 진시황은 신선설(神仙說)을 믿어 방사(方士)를 신임했는데 그 중의 후생․노갱 두 사람이 진시황을 비난하고 도망쳤는데 그 동료가 숨겨주었으므로 수도에 있는 방사(方士)들을 잡아다가 산채로 묻어 죽였다. 신선사상 즉 동이문화의 탄압은 한나라 때에도 계속되었으며 유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다. 유교는 왕 또는 천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중앙집권을 하는 통치자에게 유리했는데 그것은 중국 중화사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춘추제국은 역사와 족보를 잃어버리고 단군조선과의 유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진나라가 6국(춘추제국)을 통일하자 회사(지금의 황하와 장강일대)에 있던 오랑캐(동이족)들이 모두 나라와 조상을 잃어버리고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시황의 탄압에 대하여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과 한(韓)나라의 장량(張良)의 진시황 저격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북부여세가>에
“癸未二十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擊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계미 22년(B.C. 218년) 창해(滄海)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나라왕 정(政 : 진시황)을 박량사(博浪沙 : 하남성 박랑현의 동남에 위치)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副車)를 박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초한지(楚漢誌)>에서는 진시황에게 망국의 원한을 풀려던 장량(張良)이 하북성에서 창해(滄海)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여홍성이 장량에게
“저의 성(姓)은 여(黎)가 이오며 바닷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창해공(滄海公)이라 부릅니다. 저에게는 다른 제주는 없고 오직 백 근 정도의 철추(鐵鎚)만은 마음대로 휘두를 자신이 있지요. 그리고 남의 억울한 사정을 보면 참지 못하여 곧장 달려가 갚아주는 성격입니다. 오늘 우연히 귀하(장량)와 같은 분을 만났으니 무슨 임무나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장량(張良)은 한고조(漢高祖)의 공신(功臣)으로 자는 자방(子房), 한(韓)의 세족 출신인데 한(韓)이 진시황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갚는다고 자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力士)를 구하였다.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동유(東遊) 중인 진시황 정(政)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여기서의 자객이 바로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다.
장량(張良)은 그 뒤 여홍성(黎洪星)의 거사 미수로 수배되어 몸을 숨겨오다가 한(漢)나라 시조(始祖) 유방(劉邦)과 연결되어 진시황을 타도하고 한(漢)나라의 천하통일 사업에 큰공을 세워 한(漢)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진시황 저격사건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먼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하’에
“계해년(B.C. 238년) 단군 고열가(47대, B.C295~238)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왕정(秦王政 : 진시황)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쳐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리고 <해동역사>에는 “진(秦)나라 때부터 조선은 속국이 되고 신하노릇을 하더니 뒤에는 또 좁은 곳에 조용히 관망하였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長城)을 쌓게 하고 요동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하여 잠시 항복하여 진(秦)나라에 속국이 되었으나 즐겨 조회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회대(淮岱)의 춘추제국은 단군조선의 진한(辰韓 : 진조선) 땅이며, 춘추제국은 단군조선의 오가(五加)라 하였는데, 진시황은 B.C. 246년 13세로 즉위하여 B.C. 231년 한(韓)을 멸망시킨 것을 비롯해서 초(楚)․위(魏)․조(趙)․연(燕)을 멸망시키고, 마지막으로 산동반도에 있던 제(齊)를 멸망시킴으로써 6국을 통합하였다. 이 6국의 주체세력들은 모두 동이족으로 단군겨레의 후손이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자 회사(淮泗)에 있는 오랑캐들은 모두 흩어져 백성들의 집을 만들었다.”하였으니, 회수(淮水)가에 있던 회이(淮夷)의 후손인 초(楚)나라가 없어졌으며, 산동성에 있던 래이․서이가 이룩했던 제나라가 없어졌고, 양이 또는 우이였던 위(魏)․조(趙)․연(燕)의 나라들 모두 없어져 구이(九夷)의 겨레나라가 회대(淮岱 : 회수(淮水)와 대산(岱山) 사이라는 뜻, 중원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지대로서 일찍부터 한족(桓族)이 웅거하던 땅)에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진(秦)나라 2대 호해 때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기자조선에 망명했다 하지만 그들뿐 아니라 6국 모두 겨레나라였던 단군과 기자조선에 의탁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스런 마음에서였다.
진(秦)이 회대(淮岱)의 모든 나라를 하나로 만들었던데 비하여 단군조선은 망하여 온 나라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이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곡(山谷)에 나뉘어 살았다.”하였다. 2천년을 이어온 단군조선의 진한세가가 22대 단군 때 무너졌고, 그 후 중토에 옮겨 살던 진한(眞韓)의 오가(五加) 춘추제국이 모두 흩어졌으며, 이때 단군세기를 지켜오던 마한(馬韓) 즉 동호(東胡)가 흉노의 모돈에게 패해 쇠약해진 때였다. 그때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실시했던 것이었다. <자료출처 : ‘한단고기’ 및 ‘환웅․단군 9000년 비사’>
진(眞)조선이 연조(燕朝)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 진(秦)이 강해져서 마침내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벌하니 한인(韓人) 장량(張良)이 여홍성을 소개하여 진시황의 순행(巡幸)을 기회하여 120근 철퇴로 저격하였으나 실패한다.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二世)가 즉위하매 이듬해 진승(陳勝), 항적(項籍), 유방(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거하여 진(秦)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두산(李斗山)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秦)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萬城 : 모든 사람)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天神)으로 우러러 보는데, 난데 없이 벽력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秦)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널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중에서>
7) 월지(月支) :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천왕(天王)인 진한(辰汗)을 보좌한 비왕(裨王)인 번한(番汗)과 마한(馬汗)은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지 못하고 달님의 아들이라 칭하였는데, 달님의 아들을 한자로 적으면서 달님은 달(達) 또는 월(月)로, 아들은 지(支, 氏)로 각 적었다. 그 때문에 달님의 아들을 월지(月支. 月氏) 또는 달지(達支. 達氏)라 불렀고,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월지국(月支國) 또는 달지국(達支國)이라 불렀다. 월지(月支)라는 말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에도 사용되었다.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 사용된 월지(月支)라는 말은 마한(馬韓)이라는 뜻이지 비왕(裨王)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기(史記)> 흉노전에 나오는 월지(月氏)는 해님의 아들을 칭하지 못한 무리들이다. 목지국(目支國)은 오기(誤記)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8) <후한서(後漢書)>에는 기자조선왕(箕子朝鮮王)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남은 무리 수천 인과 같이 바다 길로 한지(韓地)로 이동하여 마한(馬韓)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한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도망하여 (한지로 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후는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
<後漢書 韓傳>
9) 고진(高辰) : 고주몽의 증조부, 해모수의 둘째 아들.
10) 유철(劉澈) : 한(漢) 무제(武帝)
11) 동명(東明)계 고구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12) 졸본(卒本) : 졸본(卒本)은 본래 골본(忽本)이다.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이고, 골본(忽本)은 고구려 때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특정 지명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에는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구려 무리들에게 하도 당하여 고구려가 졸(卒)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곳을 원래 용어대로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에도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골본(또는 졸본) 중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수도로 사용한 골본(忽本)은 심양(沈陽)이고, 고주몽(高朱蒙)이 초기에 수도를 둔 졸본천(卒本川)은 혼하(渾河) 상류이며, 유리(琉璃)가 고주몽을 찾아온 졸본(卒本)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북옥저(北沃沮)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3) 동명(東明) : 고대의 구려 무리들은 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이라 믿었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올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 준다고 하여 해와 달을 동명(東明)이라 불렀다. 고대에 구려 무리의 우두머리들은 자신을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칭하였는데, 동명은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사용한 칭호(稱號)이다.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적혀 있는 동명(東明)의 본명은 고두막(高豆莫)이고,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적혀 있는 동명의 본명은 고주몽(高朱蒙)이다. 동명(東明)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사용한 칭호(稱號)이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분들은 <삼국사기>만 읽고 고구려(북부여)의 고두막(高豆莫) 단제(檀帝)와 (고주몽)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동일인물로 착각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4) 고리국(藁離國) : 고리국(藁離國)은 고리국(高離國)을 발음대로 다른 한자로 적은 것으로, 고리(古離 = 高黎)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이다. 즉 부여(夫餘)와 같은 뜻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5) 한구(漢寇) : 한나라 군사를 비하한 것.
16) 고무서의 둘째 딸 예씨(禮氏)부인
17) 하부여인 : 남쪽 심양 방면에 있던 부여인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