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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코너입니다 ‘달을 가리키다’
성현들은 달을 가리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손가락만 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시간인데요. 종교의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종교의 참된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원불교의 가장 큰 경절인 ‘대각개교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4월 28일인데요. 오늘은 대각개교절을 십여 일 앞두고 있는 만큼, 대종사님의 대각의 의미와 원불교 창립정신을 되새기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원광대 정역원에 계신 원익선 교무님을 전북 원음방송과 이원 연결로 만나보겠습니다. 교무님, 안녕하세요?
1. 반갑습니다. 이제 원불교 최대경축일인 대각개교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교무님은 어떤 마음으로 대각개교절을 맞이하고 계신가요?
종법사님의 작년 11월 취임법문인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라는 마음을 변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늘 새롭습니다. 어제의 나와 너, 오늘의 나와 너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이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것과 같습니다. 아침의 공기가 늘 새롭게 느껴지듯이 일상화된 우리 자신을 늘 새롭게 가꾸어가는 것이 불법의 생활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무지 속에서도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처럼 기쁨과 희망과 지혜를 우리 삶 속에서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교단의 시작을 불법연구회의 창립인 1924년으로 보지 않고, 대종사님의 깨달음으로 잡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이 ‘새롭게’라는 대종사님의 대각의 정신을 이 시대에 우리에게 바르게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교단과 이 사회와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대각개교절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 뜻을 더욱 깊이 새기는 대각개교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오늘은 교무님과 함께, 대각개교절의 의미와 원불교의 창립정신에 대해 말씀 나눠보려고 합니다. 어떤 종교든 가장 큰 경절에는 그 종교의 핵심 가치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원불교의 대각개교절은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도 무명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대종사님은 깨달음을 혼자 즐기시지 않고, 인류에게 그대로 내어놓고 사바세계를 진리세계와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시다가 열반하셨습니다. 사실 인류의 위대한 성현들 모두가 이러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을 필두로 공자나 맹자 등 많은 성현들이 걸으신 길을 함께 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류의 진보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분들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그래서 문명이 그나마 여기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핵심은 성불제중·제생의세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고 우리 이웃도 부처가 되어 성현들의 그 깨달음과 일치가 되고, 그 일치가 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지구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셨듯이 대종사님 결국 그 일을 위해 평생을 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살다 가신 것입니다.
3. 올해로 원불교가 세상에 나온 지 104년이 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이 어떤 뜻으로 원불교의 문을 열었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1916년 당시의 시국은 어땠을까요?
1916년만을 얘기하는 것도 뜻이 있습니다만, 대종사님이 사시다 간 삶의 전체와 관련 있는 시대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종사님이 나신 때는 동학운동의 여파가 깊어질 때였고, 세계가 혼돈으로 빠져들 무렵입니다. 한반도는 조선말의 학정으로 민중들이 도탄에 빠진 때였고, 세계도 양육강식의 식민지 시대가 판을 치던 때였습니다. 성현들이 진리의 명령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시대는 이러한 때를 말합니다. 특히 한국은 1916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던 때입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죠.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신 해에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羅喆) 선생님이 순교합니다. 그분의 정신은 만주의 무장투쟁을 비롯해 국내의 수많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김구 선생님을 비롯해 그 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운동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무여한의 법인성사가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힘이 모여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금년은 이 민족의 자주를 외친 삼일만세운동과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인 민주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무여한, 즉 죽지 않으면서 죽은 폭 잡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 나라의 역사와 우리 교단의 역사가 현재의 우리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부처님도 예수님도, 아마 당시의 상황에 맞는 개벽의 기치를 내걸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을 텐데요. 당시 우리의 상황에 맞는,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가장 시급하게 느낀 것은 무엇일까요?
대종사님이 태어나서 열반에 이르는 시기는 전쟁으로 인간에 대한 대량살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저 교과서에서만 피상적으로 느껴서 그 참상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문명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전쟁이나 정당한 전쟁은 없으며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수천 만 혹은 수억 명이 폭탄 몇 개로 죽을 수 있는 그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시대가 시작되었고, 실재 그런 일이 전개된 시기, 바로 그 때가 대종사님께서 살아계셨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자비 가득한 성자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지금 시급한 것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막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최근 몇 년 동안 한반도에서 우리가 경험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고통을 돌이켜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말하는 신성한 인권이나 노동, 자유로운 교육이나 여가, 삶의 평온과 행복은 물거품이 됩니다. 전쟁은 야만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전쟁 하나만이라도 없애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원불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들이 뭉쳐 군대를 줄이면서 핵무기로부터 총탄이 이르기까지 전쟁무기의 생산, 유통, 거래, 보유 등을 금지하는 세계적인 선언과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 사실 당시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대종사님이 새로운 종교의 문을 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웃종교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요?
예, 말씀하신 대로 분명한 것은 원불교는 99개의 종교에서 100개를 채우기 위해 나온 종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새로운 종교가 시대와 장소를 따라 나타나는 이유는 기존의 종교나 기존의 질서가 제 역할을 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대종사님이 <조선불교혁신론>을 통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게 이 땅에서 구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신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부처님 이전의 바라문적 질서, 예수님 이전의 유대적 질서에 대해 비판하신 것과 같습니다. 500년 전의 마르틴 루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비판의 정신이 모든 종교의 성자와 같습니다. 다르다면 이웃 성자들과 다른 시대에 사셨고, 이 시대가 격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척하자”라는 표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대야말로 바로 물질과 정신이 함께 바르게 공존해야 한다고 제시하신 것입니다. 고대나 중세 사회라면 이러한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죠.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백낙청 선생님은 최근 현대사회가 자본주의에 적응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이중과제론’을 제시하셨습니다. 원불교야말로 수행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보고 계십니다. 이 점에서 원불교는 현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온 혁신불교이자 혁신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그렇다면, 대종사님이 대각을 이루신 후 새 회상을 펴시는 과정도 참 궁금한데요. 대각을 이루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영육쌍전입니다. 육을 위해서는 방언역사를 하시고, 영을 위해서는 법인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단편적으로 나눌 수 없고, 각각의 영역에 다 영육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각 영과 육을 대표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역사는 민중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밥 한 공기 먹기조차 힘들던 때, 농토를 만들어 함께 귀한 쌀을 생산해서 밥을 먹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몸소 제자들과 실천하신 것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일입니다. 또한 혈인(血印)을 나툰 법인기도는 이 세계에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을 바르게 하기 위한 문명전환의 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처해 있는 과학, 국가, 자본주의의 독점의 폐해를 잘 알고, 이를 정신의 힘으로 극복해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전쟁이나 지구환경 문제는 과학, 국가, 자본주의 3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견고한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잘 길들이고 바른 길로 가도록 우리 자신의 수행과 신앙의 힘으로 해결해 가는 길이 바로 법인정신입니다.
7. 이러한 창립정신을 우리 원불교가 잘 새기고 있는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런 질문도 드려보고 싶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지금 우리 원불교의 모습을 보시면 칭찬을 좀 많이 해주실까요?
이만큼 온 것은 대종사님이나 선진님들께서 칭찬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이 모자란다고 나무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방언역사나 전재동포구호사업처럼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구제하고자 했던 일들이 다른 형태로 재현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사회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 이웃들의 고통과 절규와 함께 해야 됨에도 우리는 방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은 아무 어려움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수많은 청년들이 고정되고 안정된 직장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며, 이 순간에도 실의와 절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있으며, 열악한 산업시설로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멸시, 지구적으로는 전쟁이나 환경문제로 인류가 생존의 임계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원불교야말로 대종사님의 뜻을 다시 잘 살펴서 우리 자신이 소멸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촛불이 자신을 밝히고 사라지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종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웃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이웃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이타(利他)적인 세계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의 기쁨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종교인일 것입니다.
8. 매년 대각개교절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하겠죠. 대종사님의 대각의 본뜻을 잊지 않는 것일 텐데요. 원불교에서는 대각개교절 경축 기간으로 4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정하고 있는데, 교무님은 지금까지 의미가 있는 어떤 행사들이 기억에 남으시는지요?
익산에서 대각등(大覺燈) 행렬이었습니다. 학생 때 참여했는데 뭔가 이 세상에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빛을 밝혀주겠다,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정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원불교를 모르는 분들 또한 빛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간직한 깨달음의 씨앗을 돌이켜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불이 상징하는 것은 많습니다. 진리, 지혜, 정의, 평화, 희망 등. 물론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웃의 고통과 함께하는 원불교가 되는 실질적인 대각개교절이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삼동인터내셔널이나 원봉공회가 하고 있듯이 국내에서만 머물지 말고, 세계의 가장 고통 받는 지역에서 그곳의 아픔을 품안에 껴안음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 그것이 대각등의 바른 의미라고 봅니다. 그럴 때, 대각등 행렬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고 동참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9. 마지막으로, 우리 둥근 소리 둥근 이야기는 이웃종교와 함께 하는 시간인만큼, 이웃종교인분들께도 인사를 전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어떤 말씀 전해주고 싶으세요?
원불교를 비롯한 모든 이웃 종교는 같은 길을 다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는 이 땅과 이 세계의 평화와 행복입니다. 각자의 종조, 교조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 또한 원불교의 대각의 빛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 대각의 뜻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다른 길의 끝에서 함께 만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현들의 후손들인 우리들이 더욱 손을 잡고, 이 한반도와 세계의 모든 고통과 차별과 모순과 부조리를 일소하는, 인류의 희망으로 거듭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달을 가리키다>에서는 원광대 정역원에 계신 원익선 교무님과 함께 했습니다. 교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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