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장진주사(將進酒辭) 1
박 현 기
옛 어른들이 보릿고개 넘어가는 4월을 死月이라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한 달 동안 일곱 군데에서 부고를 받았다. 풍요로운 세상이니 굶어 죽을 일은 없고, 그중 여섯 어른이 코로나로 인한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요즘 코로나와 연관되어 사망하면 애완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애완동물은 인생의 반려이니 곱게 염하고 입관한 후 애도 속에 장례를 치르지만, 코로나로 사망하면 비닐백에 담겨 냉동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작별 인사조차 나누는 둥 마는 둥 쓰레기처럼 화장되고 만다. 죽는 것도 시대와 사인(死因)을 잘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란 말이 우습지만, 변화하는 가족의 개념과 행태가 숙연해지는 思月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대면이 귀찮고 불편할 때는 코로나 핑계를 대면 만사형통이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란 말을 실감한다. 한때 부고나 청첩장에 은행 계좌가 들어가 있으면 예의 없다 욕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간편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 여겨진다. 때로는 실속도 있다. 일곱 군데 중에서 조의금만 보내도 될 곳에는 은행에서 해결하고 꼭 가야 할 곳만 조심스레 찾아갔다. 초등학교 은사님의 영전에는 아니 갈 수 없었다. 선친과 문학활동을 같이 하신 막역한 친구이자 초등학교 2년간 담임을 하며 내게 글을 가르쳐주신 어른이기에 마지막을 배웅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가끔 만나면 아버지처럼 느껴졌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가면서 선생님의 곱슬머리와 총상 입은 손가락이 눈에 선했다.
조문객 하나 없는 은사님의 빈소는 참 적막하고 썰렁했다. 도우미 아줌마 한 사람이 졸고 앉았다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많이 지겨웠던 모양이다. 저녁때라 문상객이 있을 법한 시간인데 이것도 코로나 탓일까. 한 사람의 조문객도 없다. 선생님은 마지막 선택을 엄청나게 잘하지 못하셨다. 한 세기를 품고 누운 어른의 빈소가 적막강산이란 사실이 가슴 아프다. 오십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 미혼인 네 자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그저 우두망찰 앉아있다. 선생님의 그 많은 문단 후배 제자들에게 연락도 하지를 않았단다. 아니, 연락처를 몰라 못했단다. 휴대전화 검색만 해도 금방 확인될 걸 참 답답한 사람들이다. 장차 무덤도 없이 몇 편의 시로만 남겨질 선생님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재배를 올리고 앉아 가만히 선생님의 사진을 본다. 구불구불한 곱슬머리가 휘날리는 중년의 모습이다. 형형한 깊은 눈빛이 어쩌면 야성적이기까지 하다. “네 재주가 아깝구나!” 오래전 선생님을 만났을 때, 글을 쓰지 않는다는 나를 질책하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이젠 젊은 네가 맡아라.” 술 한 잔 부어주며 주관하시는 문학단체를 내게 당부하던 순간도 떠오른다. 이제 내가 가 닿고 싶었던 피안의 세계는 모두 사라졌다. 가슴 한쪽을 찬바람이 휘돌아 간다. 내게는 오를 수 없는 먼 산이었고 이상향이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멀잖은 곳에 계신다는 자체가 위안이기도 했다. 향 연기가 하늘하늘 허공으로 흩어지는 걸 이번에는 내가 우두망찰 보고만 있다.
내게는 두 개의 큰 산이 있었다. 아버지와 선생님. 막역지우이며 시인인 두 산은 높고 깊어서 늘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피안의 세계였다. 나도 시인이 되리라. 자라면서 그 동경은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의 좌표가 되었던가 보다. 그 좌표는 삶의 고비에서 꿈과 현실이 부딪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심적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나는 현실을 택했고 꿈은 영원히 꿈으로 남았다. 두 어른의 기대를 저버린 나는 자신 있고 당당하게 그 산의 큰 그늘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내 아버지의 시가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이상향을 노래했다면 선생님은 순수한 서정과 반짝이는 언어로 감성을 자극했다. 가난한 시인들은 서로 지향하는 세계가 달랐지만, 무던히도 어울려 다니셨다. 흥이 돋으면 어린 자식들 잠든 단칸방 윗목에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리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때론 높게 때론 낮게, 무슨 대화였는지 어렸던 나는 전혀 모른다. 그저 희미한 기억뿐, 한 번도 내로라하는 자리에 가보지 못했지만, 학도병 참전 중에도 시집을 내고 병석에 눕기 전까지 시심을 잃지 않는 열정을 품고 사셨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25의 소용돌이를 겪고 근대화 과정까지 지지리도 가난하고 험난한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산 인생이다. 어쩌면 그 열정이 두 분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구십 넘은 연세에 코로나로 인한 사망이니 장례 절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화장장의 적체로 비닐백에 담긴 채 냉동실에서 5일을 기다려야 한단다. 내가 늘 바라보던 두 개의 봉우리는 평지가 되었다. 어쩌면 나는 좌표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지막 시집 내기를 은근히 말씀하실 때 내가 해드리리라 속으로 다짐했는데 실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버지는 산소라도 있지만, 선생님은 한 줌 재로 흩어지면 끝이다. 소속되었던 단체에 선생님의 거취를 알려 드리라 하고 나니, 제 몫 못하는 상주가 미운 건지 무조건 화장하는 시대가 미운 건지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두 분이 계신다면 술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친다. 산을 잃은 나를 위하여 평지가 된 내 별을 위하여.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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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한비문학》등단
한비문학 회원, 수필문예회 회장 역임. (현)수필미학 회장,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수필집 《민들레 피는 골목》
대구수필문예대학 10기 수료.
dst10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