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옥폭포와 연풍마애불 천안노인 겨울나들이[下]
실없는 노인들 : 聖地의 향청건너 연풍초등학교 100년 비석이 우뚝 서 있고 동헌이 말끔하게 단장되어있다. 그 동헌이 부러웠다. 우리동네 목천에도 100년 초등학교가 있는데 안정복이 근무했던 그 동헌은 헐리고 없다. 직산에는 衙門도 있고 동헌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다. 영주에는 향교에 학교를 잇대어 영주여고를 세웠고 여소생들은 매일 그 마루를 닦는다. 문화와 역사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교회나 성당도 그렇게 잇대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혹 계성여고가 그렇지 않나 싶은데...
우리는 무거운 마음을 털고 수옥폭포로 향한다. L은 여기저기 산 이야기를 주절댄다. 기억에 남는 건 보배산-조령산-군자산...나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여기가 벌써 조령이야?!’ ‘형님! 졸고 있었슈?!’ ‘아니! 그럼 경상도가 지척이네...수안보도...’ ‘그럼유!-나선 길에 삼강주막에 한번 가실래요...’ ‘에라 이놈아 그럴 바엔 영덕가서 대게를 먹고 오겠다...’ ‘그것도 좋지유! 우린 가끔 가유-형님이 안 가서 그렇지...’ ‘야 그나 저나 야! 나는 C선배의 자비와 네 보시로 사는데 너는 봉사만하고 내 나이 되면 어떡할거냐?’ ‘얘 있잖우?! 얘-’ ‘에라이! 이놈아!’ 그 둘은 갑장이다.
백두대간을 가른 갈비뼈의 하나로 소백산은 단양과 풍기, 계립령 지나 조령에서는 충주와 문경...낙동강과 한강을 가르기도 한다. 延豊에서 發源하는 물은 어디로 갈까? 문경 거쳐 낙동으로? 괴산 거쳐 미호천으로 그리고 세종시의 금강으로...물 따라 人心 따라 그 흐름이 궁금하다.
李白은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이런 시를 썼다. 여산의 향로봉은 솔방울을 닮았는지 향로봉에 해가 비치니 무지개가 돋아난다고 첫 구절을 시작한다. 紫煙-보랏빛 연기를 무지개로 해두자! 옆으로 보면 강이 걸린 것 같고...우러러 보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이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물은 절벽을 만나 흐르지 못하고 쏟아진다. 막걸리 한 주전자가 쏟아져 우리 內臟의 九折羊腸에서 五慾七情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여산이나 소백산맥이나 차령산맥이나 크고 작은 차이 뿐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무튼 이 詩의 묘미는 평지에 고이고 잔잔히 흐르는 물이 절벽을 만났을 때의 그 驚愕에 있다. 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또 金洙暎의 瀑布만큼 우리 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詩도 드물다. 나는 그냥 지난 몇 년 간 얼마나 무의미한 삶을 살았는지...이 폭포 앞에서 새삼 悟得했다. ‘성난 물소 놓아주기’가 관념적 위안을 주었다면 이 폭포는 내게 오관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기쁨과 생명력을 오감으로 체득하게 했다. 누군가 좀 더 자세히 말하라고 한다면 그냥 ‘너도 여기 와보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냥! 그러 했다!’는 뜻이다.
돌아오는 길에 마애불상을 만났다. ‘나란히 앉은’ 즉 唯我獨尊이 아닌 이 磨崖佛은 내게 묘한 인상을 주었다. 중국에 老子와 孔子, 神農氏와 創?가 對坐하는 민주적[?]인 畵像石은 흔하지만 이렇게 佛聖이 竝坐하는 경우는 드물다. 마애불이 계신 곳을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남한강변이나 포구나 산곡의 마애불들은 대개 商人들의 행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의 안전이 부처님의 관심사라고 나는 斟酌하곤 한다.
고개 넘으면 ‘水安保’인데 그곳 사람들은 ‘물安保’라고 부른다. 요즘 환경파괴의 시대에 ‘물의 안보’라는 말은 내게 절절이 다가온다. 도대체 人體의 얼마가 물로 이루어졌는가? ‘물이 없으면 피도 없다!’ 이런 말이 가능할까? 그 다음 다음이 재물인데 ‘褓負商 가는 길에 도둑도 간다!’ 또는 ‘褓負商 가는 길목 도둑이 지켜준다!’는 구호가 가능할까? 譏察이나 捕校가 겁이 나면 도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놈을 다스릴 분은 부처님 말고 누가 있겠는가? 임금도 꾸짖을 사람이 부처님 말고 또 있겠는가? 아무튼 어떤 의미로든 종교는 우리에게 또 다른 자리에서 ‘安保의 一翼’을 담당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직 군대만 양성한 나라가 그 군대로 망하는 역사를 보면 내말이 100% 틀렸다고는 못할 것이다.
쓰잘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고 다음에 문화재 전문가의 견해를 옮겨둔다. 아무튼 실없는 노인들은 황혼을 이마에 붙이고 안개가 걷힌 출발지로 돌아왔는데 아직 해어름이다. 우리동네 테딘워터파크에서 목욕이나 하자고 하자니 그도 싫고 술은 당연히 謝絶!! 제수씨들은 영감이 외출하면 제일 좋아한다는데...‘지금 어디냐’는 K정경부인의 전화는 ‘저녁을 어찌 하겠느냐’는 뜻으로 해석해야할까?
양반이 되었다가 천주교에 歸依하고 부처에 예불을 한 하루는 저물고 우리는 연춘리에서 순두부로 저녁을 하고 헤어졌다. ‘다음에 또 봐유!’ ‘그리여!!’<*>
제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쏟아지는데...그 바닥을 이루는 암반이 압도적이다.
폭포앞에서 K도 숙취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겨울절벽의 석양에 X레이 사진을 찍은 枯木
수옥정에서 바라본 폭포...그 물애 석회성분이 있는 것일까?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보물 97호
L이 일러준 산가운데 유일하게 머리에 남은 鳥嶺山...저 너머는 嶺南인데 조령의 남쪽이라는 뜻일까?
연풍이 경상도가 아니라 충북 괴산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수옥폭포는 조령 제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이루어진 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 수안보에서 연풍 방면으로 6km, 연풍에서 수안보 방면으로 5km 지점의 3번 국도에서는 400m의 거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여 초가를 지어 행궁을 삼고, 조그만 절을 지어 불자를 삼아 폭포 아래 작은 정자를 지어 비통함을 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폭포 아래 언덕진 곳에 정자가 있었는데 1711년(숙종37년)에 연풍현감으로 있던 조유수가 청렴했던 자기의 삼촌 동강 조상우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짓고 ?玉亭이라 이름지었다. 또한 상류의 2단에서 떨어지는 깊은 소는 조유수가 사람을 시켜 물을 모아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파놓은 것이라 한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정자는 낡아 없어졌으나 1960년에 괴산군의 지원을 받은 지역주민들이 팔각정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주소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2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충주에서 상주로 가는 국도변 산마루턱에 있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 두 부처를 나란히 새긴 이불병좌상(二佛幷坐像)이며,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이불병좌상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12m 높이의 암벽에 감실을 파고, 그 안에 3.1m 높이의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 설화를 불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소띈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이 있어 완강하면서도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는 이 작품 외에 죽령마애불, 대전사지출토 청동이불병좌상 등의 이불병좌상이 있으며, 통도사 영산전의 견보탑품변상도에도 이불병좌상이 그려져 있다.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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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막의 등불 원문보기 글쓴이: 양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