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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일, 성령강림 후 제19주]
[*. 성경, 찬송가
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10월 3일, 성령강림 후 제19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성령강림 후 제19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31장(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은 시편 26:1~12절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 함께 기도합니다. [출처 미상]
(영상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둔감함을
주여, 용서하소서.
우리로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편견과 두려움을
주여, 용서하소서.
우리 비전의 편협함과 주님의 명령을 기피하는 것을
주여, 용서하소서.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분함을
주여, 용서하소서
주님의 일을 우리 뜻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주여, 용서하소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인내하지 못하는 것을
주여, 용서하소서.
다른 관점들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것을
주여, 용서하소서.
우리 자신의 영혼의 요새에서 나와 더 충만한 삶과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주여,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1, 2:1~10절입니다. (성경)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 특별 찬양: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 말씀 선포: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9주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욥기인데 욥기는 다른 책과 달리 한 번에 다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오늘은 욥기 전체가 본문입니다.) 특별한 주제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는 신학 용어로는 ‘신정론(神政論, theodicy)’이라고 합니다. ‘절대 사랑의 선하신 신께서 다스리는 곳에서 왜 의로운 인간이 고난을 받고, 때로 악인이 잘되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신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과 답변입니다 (‘theo’는 ‘신’이라는 뜻이고 ‘dike’는 ‘정의, 정당성’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여기서 쏟아져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악에 대한 문제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악을 창조 혹은 허락 하시는가? 선과 악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살인, 도둑질, 거짓말, 탐욕 등 사람 개개인이 갖는 도덕적인 악뿐 아니라, 태풍, 쓰나미, 지진, 기근 등 천재에 해당하는 자연적인 악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모든 악의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이 곧 신정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입니다.
2. 욥기
욥기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 욥이 (까닭없이?) 그의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잃어버리고 또한 혐오스러운 병(현대에 ‘루퍼스’라고 하는 ‘전신 홍반성 낭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답하며 정답을 보여주려는 책입니다.
욥에게 닥친 불행은 “사탄이 하나님을 충동한(1:9) 결과’라고 하는데, 사탄은 언제나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합니다. (아담과 하와, 혹은 예수를 유혹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사탄은 1장에서는 욥의 ‘소유물’을, 2장에서는 욥의 (생명을 제외한) ‘사람-됨’을 빼앗으면서 신을 저주하도록 꾑니다. 그리고 사탄이 등장하지 않지만 3-37장까지 욥의 친구들 그리고 젊은 엘리후의 주장(‘진리 논쟁’)을 전하며 ‘거짓 주장’으로 욥을 꾀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가 사탄을 대신하는 셈입니다.
[*. 사탄은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계 12:9). 사탄은 자신을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놓으며 천하를 가지려고(소유하려고), 곧 천하를 꾀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밀턴은 사탄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봅니다. 밀턴의 <실낙원>에 따르면 사탄은 본성이 악한 존재이고 인간은 본성은 착하나 유혹에 넘어가 악에 빠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탄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칼릴 지브란은 그의 책 <예언자>에서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본성이 악이므로 멸망해야 할 존재라고 여기는 밀턴과는 달리, 사탄은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 (악한) 인간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지브란은 사탄을 타락한 인간의 유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지브란의 의견에 더 많이 동의합니다. 천사와 사탄은 가장 착한 사람과 가장 악한 사람의 투영체입니다. 밀턴의 말대로 천사와 사탄이, 사람의 세계와 달리, 따로 존재한다면 멸망할(한) 사탄을 위한 구세주 천사가 또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천하를 꾀는 사탄은 사람을 꾀는 방법으로, 땅에 대한 유혹, 사람에 대한 유혹, 그리고 하늘에 대한 유혹을 합니다. [*.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땅에 대한 유혹과 사람에 대한 유혹은 눈에 보이는 까닭으로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행해집니다. 밝은 빛에 드러나면 그 악한 실상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뇌물, 권력 등과 관련된 부패가 어둠 속에서 행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유혹은 백주 대낮에 대놓고 유혹을 합니다. 잘 보이지 않기에 때로 사람은 그것이 유혹인지 조차 모른 채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 두번째 유혹은 정신만 바짝 차리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유혹은 ‘의식’의 문제로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욥의 경우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한 나무의 이름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적고 있습니다. 유혹의 특징이 ‘(선악을 알게 하는) 거짓 지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욥에게 행한 사탄의 첫번째 유혹은 땅(소유물)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 유혹은 ‘사람-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유혹은 하늘에 대한 것으로 욥기에서는 사탄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욥의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젊은 엘리후가 드러나지 않은 사탄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세번째 하늘의 유혹의 특성상 사탄은 자신을 그들 속에 숨기며 꾀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어쨌든 욥은 첫번째와 두번째 유혹은 이겨냅니다. 의인이라면 사실 첫번째와 두번째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세번째 유혹입니다. 어쨌든 앞의 두 유혹부터 살펴 봅니다.
첫번째 유혹(ref. 욥기 1:8~12)에서 그는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소유물이 다 없어졌습니다.
[*. 욥기 1:8~12 첫번째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이 자녀(당시에 자녀는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와 재산을 잃은 후 보인 모습입니다. 욥기 1:20~22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첫번째 소유물에 대한 시험을 욥은 이렇게 이겨냅니다.
두번째 유혹(ref. 욥기 2:3~6)에서 그는 생명을 제외한 ‘사람-됨’의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됨’이 질병으로 인해 무너지고 사랑했던 사람들, 심지어 아내에게서 조차 버림을 받습니다.
‘전신 홍반성 낭창’으로 인해 가려운 몸을 기와로 박박 긁을 때에 욥의 아내가 말합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자신의 부인에게서 조차 버림받은 후 욥이 말합니다. 욥기 2:10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두번째 ‘사람-됨’의 유혹에 대하여 욥은 이렇게 이겨냅니다.
그런데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어떤 다른 생각이 들어왔다는 (들어오고 있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미세하지만 여기서부터 ‘하늘 (지평)’의 세번째 유혹의 시작점이 됩니다. 세번째 유혹은 어렵습니다. 진리를 다루는 ‘의식’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31장까지 욥은 그의 세 친구와 세 번에 걸쳐 입씨름을 이어갑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대동소이합니다. 즉,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빨리 하나님을 찾아 회개하라는 내용입니다. 세 친구의 말을 들어봅니다.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기 4:7-8)”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빨리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5:8입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빌닷의 말입니다. 욥기 8:3절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그러니 하나님을 찾아 간구하라고 합니다. 5-7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소발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에 대하여 다 아시기 때문에(욥기 11:11) 죄악을 멀리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라는 것입니다. 욥기 11:13~15입니다.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고난을 당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다고 항변하는 반면에, 그의 친구들은 그가 틀림없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처럼 심한 고난을 받고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결백을 선언하고 공정한 처리를 탄원하고 나자(29~31장), 이번에는 젊은 엘리후가 새롭게 등장하여 말합니다(32-37장).
엘리후는 세 친구들의 주장들을 반복한 다음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서 욥을 질책합니다. 엘리후의 주장, 욥기 34:10~12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사실, 세 친구와 젊은 엘리후의 이야기 어느 곳에서도 그 말의 틀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 옳은 말입니다. (바람이 분다는 말과 깃발이 나부낀다는 말이 서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그러나 욥에게는 그저 재난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기 16:2)” 사실 욥의 대답은 이 한 마디에 다 들어 있습니다. 19:2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신정론(神政論)
신정론 논쟁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과 악의 존재가 어떻게 서로 공존하는가?” 라는 논리적 딜레마와 “전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악를 허용할 수 있는가?” 라는 윤리적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실, 신과 사람, 그리고 세계에 일어나는 광범위한 모순에 대한 해결은 간단치 않을뿐더러,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오만입니다. [*. 일반적인 이해는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율법(신명기 28장)과 지혜 문학(시편 37, 92편; 잠언 10:27~30) 그리고 구약 예언의 근본적인 요지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욥기 21:7~15입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이와 같은 탄식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접합니다. 욥뿐 아니라, 예언자 하박국(ref. 하박국 1:13)과 예레미야(ref. 예레미야 12:1)가 그랬고, 날 때부터 맹인을 만난 예수님의 제자들이(ref 요한복음 9:2.) 그랬습니다.
[*.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예레미야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 요한복음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플라톤이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의인의 억울한 죽음을 혼의 세계를 이야기하며 그랬고, 도스토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코프가 고약한 사채업자 노파를 죽이며 그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며 그랬고, 홀로코스트(Holocaust) 시절, 교수형 대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를 바라보며 유대인 랍비가 그랬고, 태풍이나 쓰나미를 보며 그랬고, 지진과 기아를 만나며 그랬고, 갑작스레 다가온 시한부 선언이 그랬고, 오늘날 마주하는 코로나19 전염병을 바라보며 우리는 또 그렇게 신정론의 문제를 꺼내 듭니다.
“지극히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이 세상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면서!
4. 신정론(神政論)에서 대속론(代贖論)으로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인과응보로 해석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욥기 38~41장).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일’이며 동시에 “깨닫지도 못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42:3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마침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라며 엎드립니다. 마치 시인이 그저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편 46:10a)”라고 노래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됨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리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마음이, 사람을 대하시는 마음이 바뀌셨을까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을 때가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선에는 상을, 악에는 벌을 분명하게 내리시는 모습입니다. 상과 벌을 분명히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다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이가 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또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는 사실에 (아담의 타락과 같은) 심한 자괴감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곧 친척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친척에게서 며느리를 찾는 아브라함에게 말입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세기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이러한 까닭에)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에게 후사가 없었고, 이삭의 간구에 (그 모습조차 보시기 힘들었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뱃속에서부터 다투는 쌍둥이를 주시고는 사람을 대하는 섭리의 방식을 완전히 (그 지평에서) 바꾸십니다. “선(善)과 악(惡)에 대한 상벌(賞罰)이 아닌 ‘사랑의 섬김’으로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신정론의 모든 논의는 사실 예수님의 대속론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ref. 창세기 25:21~23,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때부터 선(善)에도 때로 고난과 같은 벌(罰)이 따르게 되었고, 악(惡)에도 때로 축복과 같은 상(賞)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대속(代贖), 하나님의 마음을 밝힌 예수님의 복음 선포, 그 핵심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파합니다. 로마서 8:1-2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은 선와 악을 가르고 상과 벌을 가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선악과 상벌의 가름없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깁니다. 용서받으며 용서합니다. 사랑의 섬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성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의 사람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이 있습니다. 성(性)이라고 합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노니는 것, 새가 노래하며 날아다니는 것, 연어가 돌아오는 것 등등이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성(性)에 기인합니다.
사람에게도 성(性)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성(性)은 어떤 것일까요?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습니다. 본래 사람의 성이 선하다고 보는 입장이 맹자라면 [*.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설명합니다.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면 사람은 누구나 그를 구원하려고 하죠. 이러한 선한 마음이 본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이 악하다고 보는 입장이 순자입니다. 맹자를 추종한다면 열심히 수양해서 본래의 선을 이루어야 할 테고, 순자를 추종한다면 열심히 수양해서 본래의 악을 극복해야 하겠지요. 뭐, 가만 생각하면 그게 그것입니다. 맹자는 타락 이전의 아담을 보았고, 순자는 타락 이후의 아담을 본 것뿐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선(善)했고, 타락 이후의 아담은 악(惡)에 빠졌으니 말입니다.
신앙인은 타락 이전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에 성선설을 많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본래의 성(性)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음’입니다.]
5. 나가는 말
욥기에서 제기하는 신정론(神政論)의 문제를 마주하면서, 1)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기 38장-41장을 묵상하며 읽어보십시오. 큰 것을 작은 것에 온전히 담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큰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아주 큰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장자에 나오는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 물고기 곤(鯤)이나 그 물고기가 변하여 구만 리를 올라 육 개월을 날고 한 번 숨을 쉰다는 큰 새 붕(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마주하는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도록 말입니다. 아기가 살아갈 삶을 생각한다면 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 옳고 그름과 그에 따른 상과 벌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방식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가져오신 대속(代贖)의 복음(福音)입니다. 선악을 구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토해내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양껏 드시기 바랍니다.
주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송가 139장 (오 영원한 내 주 예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하거나 혹은 교회계좌번호로 송금합니다. 교회계좌번호: )]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