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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三國 時代
사직 고속버스터미널에는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행락객들이 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행락객들이 갖추고 있는 장비들은 가히 위압적이었다. 그들은 격전을 치러낸 용사들이 달았음직한 훈장 비슷한 각양각색의 금속배지를 등산모에다 즐비하게 꽂고 있었는데 집채만한 두툼한 등산화를 신은 그들의 목적지는 그 고도를 아무리 낮게 잡아도 해발 삼천은 넘을 듯하였다. 특히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울긋불긋한 행락객들의 파카는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 만년설을 헤치며 강행군할 때라야 어울릴 성싶은 훌륭한 보온 장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나처럼 같은 광주행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약간의 혼선이 생긴다. 광주근처에 만년설로 뒤덮힐 만한 산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내 자신이 전라도는 초행이었다. 만약의 경우 내장산쯤은 오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싶어 중학교 일 학년짜리 아들놈의 운동화를 껴 신은 나의 행색은 오히려 행락객들에게 혼선을 일으켜주기에 알맞았다.
가벼운 방한복에 운동화까지는 괜찮았겠으나 인조가죽의 서류가방을 든 사십대. 산행도 답사도 아닌 차림에다 그렇다고 나그네 행색은 더더구나 아닌 중년의 남자.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인상착의를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신사복 바짓가랑이에 밤이슬을 묻힌 채 새벽에 하산하는 낯선 사내를 만나기만 하면 그것은 일생을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횡재를 하는 거였다. 비록 이슬에 젖은 채 하산까지 하는 사내는 아니더라도 뻔히 아는 담뱃값을 물어 본다든가 지금의 내 행색처럼 약간의 남루에다 유행에 뒤떨어진 차림만 보여도 지체 없이 신고할 정신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나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는 않았다. 수상함이 곧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지던 반공교육은 쇠퇴하고 말았다. 대합실의 젊은 행락객들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 주변을 살피기보다는 자신들의 즐거운 일정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들은 대합실의 그 어떤 누구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소동에 가까운 장난짓거리를 벌이다가 광주행 버스가 들어오자 우르르 몰려나갔다.
나도 그들과 같은 버스를 타고 전라도로 향했다.
태어난 이래로 전라도는 처음이었다. 이 땅에서 사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도 특정한 도계(道界)를 넘어보지 못했다는 자각에 이르자 문득 준환의 말이 떠올랐다.
「말씨가 다르다는 것은 서로 왕래가 적었다는 증거이다. 영호남같이 인접한 지역에서 우스운 일 아냐?」
아닌게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우스운 꼴의 주역인 셈이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사람들이야 소백산맥이나 섬진강을 영호남간의 왕래를 가로막는 천연적 장애물로 치부할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광주와 부산 간이 서울과 같아진 요즈음 내가 서울을 오르내린 횟수와 비교해 볼 때 사십이 넘은 나이로 전라도 땅을 처음 밟는 사실은 정말로 우스운 일이었다. 때문에 준환이 살고 있는 정주는 광주를 거쳐서 가야할지 전주를 먼저 거쳐야 할지를 몰라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반도 지도를 펼쳐보는 부산을 떨어야 했고 그나마도 내가 지도를 보고 판단한, 전주를 경유해서 간다는 결정도 방금 출발하기 위해 승차장에 들어서고 있는 광주행 버스를 보자 순식간에 번복이 되고 말았다. 전주행 버스는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기 때문이었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영남의 산천이나 호남의 산하가 한결같이 정월의 찬바람에 생기를 잃은, 딱히 구별 지을 길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황량함을 펼쳐 보였지만 준환을 다시금 생각해보기 위한 전라도행인 만큼 전라도의 자그마한 언덕배기와 개울에 걸쳐진 다리 난간 하나에도 그것이 지니고 있을 내력을 보듬기 위해 차창 밖의 산하를 주시하는 나의 머리는 여느 여행길처럼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낯선 지방의 바위와 마른 풀숲이 그곳에 붙박이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를 짐작해보는 일은 막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결국에는 전라도의 산천은 그것과 유사한 내 고향의 산천이 지니고 있는 내력으로 환치되는, 엉뚱한 되풀이만 계속될 뿐이었다.
사람들도 그랬다. 광주에서 갈아 탄 버스에는 고향의 장터에서 늘상 부닥치는 그런 낯익은 얼굴들로 꽉 차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투박한 농사꾼들의 모양과 행동거지로부터 내가 그 어떤 이질감을 기대하였더란 말인가. 오히려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이란 전제가 애초에 설정되지 말았어야 할 오류였다.
역시 준환의 말은 옳았다. 왕래가 없으면 동질성도 이질성으로 취급되고 만다는 사실은 도계(道界)를 넘는 잠깐의 외출로 확인이 되었다.
대학 4년 동안 준환은 이 땅이 안고 있는 앙금 같은 갈등 구조에 유달리 민감하였다.
기숙생들이 가와가쯔 하루오를 세워놓고 장난질을 치고 있을 때에도 준환은 나를 손짓하여 기숙생들로부터 분리시켰다.
「한국인 무리 속에 일본인이 하나뿐이라는 상황이 즐거운 거야.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 또 하나의 치욕을 연출하고 있는 꼴이다.」
준환의 지적만큼 냉철하지 못했던 나는 일제의 잔흔쯤으로 여겨지던 하루오를 한국 학생들이 전쟁 포로 삼아 심문하는 듯한 상황이 결코 싫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준환의 지적을 받고 보니 그도 그럴 성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의 대학 기숙사에 일본인이 향학 목적으로 버젓이 활개치도록 방관할 정도로 민족감정이 둔감해지지는 않았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있어서 하루오는 일본 놈이라는 인식을 지울 길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장난을 빙자하여 응어리진 민족감정을 다독거리는 형상의, 일종의 화풀이를 펼쳐 보이는 중이었다.
때마침 시내 개봉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 도라도라도라의 내용을 인용해가며 기숙생들은 일본인 유학생 하루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 위하여 온갖 야료를 다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질기만 한 하루오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 태평양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던 대본영 소속의 제로기의 꼬락서니가 어떻더냐는 물음에는 우리가 기대하였던 종류의 흥분은 하지 않았다.
「나 하루오는 한 개인의 자격으로 한국에 왔을뿌니무니다. 조상들이 한국에 어떤 짓을 하였든 그것은 하 하루와는 관계가 없으무니다.」
언젠가 하루오가 지극히 양순한 표정으로 사심 없이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토로하였을 때 밸이 뒤틀렸던 나는 하루오를 기숙사의 내 방에 12시까지 잡아두고 그를 몰아붙였다.
너를 낳아준 사람은 누구냐? 오늘의 하루오를 있게 한 사람은 누구였더냐? 너 자신이 일본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주하지 않는다면 너 스스로도 조상들의 행적과 무관함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 과거 한국에 저질렀던 조상들의 죄악상에 대해 굳이 외면 내지는 무관함을 거론하는 하루오 개인의 저의는 무엇인가? 이 땅은 아직도 36년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아니 그로 인한 후유증이 더욱 깊어만 가는 처지이다. 남북의 분단이 일본과 무관하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말아라. 조국의 불행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를 뻔히 알고 있는 인접국의 한 대학생의 울분을 하루오 개인의 생존기간과 행동영역의 한계성을 빙자하여 끝내 외면한다면 과연 그 됨됨이는 바람직한 것인가.
아직 한국어가 서투른 하루오에게 퍼부었던 나의 논지는 보통의 한국인이었더라도 알아듣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그마한 몸집의 일본인 유학생 가와가쯔 하루오는 조금도 지겨워하지 않고 경청해주었다. 그리고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예의 그 선량한 표정으로 자기는 하루오 개인의 자격으로 한국에 왔을 뿐임을 또 한 번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준환은 하루오가 돌아가고 난 뒤 나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져왔었다.
「내가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신라의 후손이라고 보아지는 너한테 옛 신라의 행적을 문제 삼는다면 어떡할 거냐? 비록 천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신라도 일본 못잖았을 텐데?」
너무나 뜻밖인 준환의 질문에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하이구, 이 친구야, 그래 니 말대로 신라가 백제를 우째했다 치자. 그기이 언제 적 일인데 지금 와서 문제는 무슨 문제가 된단 말고?」
「그렇지만 너도 하루오에게 문제를 삼지 않았니?」
나는 정색을 하고 준환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맘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를 모르겠다. 설마 일본을 두둔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천만에. 일제 삼십육 년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것처럼 백제의 상처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
「백제의 상처?」
「그래. 백제의 상처. 그런 것 생각해본 일 있니?」
당시 준환이 내놓은 백제의 상처라는 게 너무나 황당하게 여겨졌으므로 나는 능란한 준환의 궤변으로만 여겼다. 의자왕이 삼천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호사가 문제였지 백마강에 꽃잎처럼 떨어져 익사를 했건 절벽에 부딪혀 두개골 함몰로 죽었건 죽음 그 자체야 전쟁터에서 의당 생길 수 있는 다반사가 아니겠는가. 계백의 용맹은 나 역시 역사상 그 어떤 장수와도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단지 그의 소속이 기울어지는 왕국이었음이 한스러울 뿐이지 황산벌을 뒤흔든 5천 결사대의 위용은 전사에 다시금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준환은 삼천이나 되는 꽃다운 젊은 여자들이 집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 출진에 앞서 가족을 참수한 계백의 결단은 신라군의 잔인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아무리 왕조의 멸망이 목표인 전쟁이었을지라도 적대국 구성원의 절대다수의 생명을 표적으로 삼은 전쟁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같은 민족 간의 통일전쟁의 성격을 띤 경우에는 통치권의 획득이 목표이지 그 영토내의 주민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인의 목숨까지를 전쟁의 목적으로 삼았다. 삼천 궁녀의 집단투신이 바로 그 증거이며 계백 이하 백제의 장수들이 가족을 참수해가며 출진의 결의를 다진 것 또한 상대적으로 신라군의 잔인성을 대변한다는 논지였다.
「하기 쉬운 말로 푸른 백마강에 삼천 궁녀들이 하늘하늘 꽃잎처럼 떨어지는 장면을 한 왕조에 대한 충절과 남성을 향한 정절의 결정체로 승화된, 극적인 대목으로 연결 지어 백제의 종말을 장엄하게 상상해대지만 최소한의 객관적 상황논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따위 상상이 얼마나 엄청난 진실을 가로막는 천박한 것인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삼천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이 한꺼번에 죽음을 선택하는 기적이 가능했겠느냐구. 이런 건 상식이 아니겠어? 」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설사 준환의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었다 치더라도 무엇이 경상도 땅에 공부하러 온 한 젊은이로 하여금 1,300년이나 지난 과거의 상처를 되씹도록 했을까.
「그래. 상세한 삼국의 통일과정은 잘 모르겠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너무나 까마득한 옛일이 아니냐? 그 상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니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의 반문에 준환은 시선을 어두운 기숙사의 창밖을 향한 채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 준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소외감이 깊어지다 보면 가마득한 시절의 상처까지도 돌이켜지는 법이지.」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학생회의 초청 형식으로 학교를 방문하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5월 축제준비로 들떠있던 자그마한 지방대학의 학생들은 경악하였다. 도대체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반정부 시위가 전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데도 유독 우리 대학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실이 많은 학생들에게는 치욕적인 사실로 여겨지고 있던 판국이었는데 반독재 투쟁에 나서지는 못할망정 독재자의 아내를 초청하다니.
이로써 우리 대학은 데모 한번 변변히 해보지도 못하는 겁쟁이에다 청와대의 안주인을 초청하는 희대의 아첨꾼으로 전락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학생들의 항의로 벌집이 되어있는 학생회 사무실로 뛰어갔을 때는 학생회장은 이미 준환에게 멱살이 잡혀 쩔쩔매는 중이었다.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준환은 이런 중대한 결정을 어떻게 학생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를 따지고 있었다. 학생회장은 사색이 된 채로 변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이, 의장, 의장. 이,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하자. 사실은 나도 환장하것다. 대통령 마누라는
우리 학생회서 불러서 오는 기이 아이고 영문과 김숙자가 지 혼자서 핸 짓이다. 정말이다. 」
「김숙자라면 여학생회 부회장 아냐?」
「와 아이라. 그렁께 우리 학생회가 누명을 뒤집어 썼뿐기지. 가스나 그기이 학생회 이름으로 청와대에다 편지질을 해 갖고 영부인님 우리 학교에 한번 다녀가 주이소 하고 사정을 했능갑더라. 그저께 갑작시리 청와대에서 우리 학교로 오겠다고 연락이 왔능갑데. 나는 그것빼끼 모른다.」
「이런 미친년, 숙자 그년은 어디로 도망갔어?」
「도망가다니? 지금 학장실에서 칙사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인데.........」
「학장이?」
「종합대학 인가를 따 낼라고 안 그래도 혈안이 되어 있던 판국인데 청와대하고 연줄이 닿게 생겼으니 학장이 지금 숙자를 끌어안고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더만. 나도 학장실에 함께 붙들려 있다가 더러워서 방금 왔다. 」
준환은 학생회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자 허탈한 듯 웃고 말았다. 그런데 육 여사의 학교 방문의 여파는 정작 내가 당하는 꼴이 되었다. 학보사 주간 교수는 막무가내로 개교기념 특집 1면 화보로 대통령 부인의 학교 방문에 때맞추어 영부인의 인물사진을 게재하라고 요구하였고 편집장인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버티었다.
이미 학교 전경을 담기 위해 항공촬영을 끝내고 사진을 제판중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였다. 점잖은 주간교수도 이번만큼은 자기 지시대로 해야 한다며 개교기념 특집호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나보고는 손을 떼라고 노골적인 엄포를 놓았다.
나는 즉시로 기자들 및 수습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만에 하나 주간교수의 지시에 따르는 일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학보가 아니라 학교의 기관지가 될 테니까 학생들로부터 매장 당할 자신이 있거들랑 주간교수와 손잡고 신문을 만들어 보라고 나대로 엄포를 놓았다.
학장실에 불려간 나는 학장으로부터 친히 뺨을 맞았다. 학장은 마치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고 안 되고는 내 손에 달린 것처럼 노발대발하였다.
「그래 신군. 자네도 한번 생각해보게. 모교를 살리기 위해 숙자와 같은 갸륵한 여학생도 있는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가? 우리 학교가 발전하는 게 그렇게도 싫은가? 」
학장은 종합대학의 인가를 받기 위한 짓이라면 청와대의 항문이라도 핥아댈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고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 학생들의 순진한 혈기 따위는 그의 신념에 아무런 흠집도 낼 수 없는, 부질없는 도덕적 객기로만 비쳐졌을 뿐이었다.
이미 학장은 비서를 시켜 청와대에다 육 여사의 존영을 한 장 주시면 학교 신문의 전면에 모시겠다는, 생색용 전화질을 하도록 지시를 해놓았다. 힘들여 청와대와 통화를 마친 비서가 학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창 나를 훈계하고 있는 학장에게 무어라고 귓속말을 하자 갑자기 학장의 논지가 바뀌었다.
「좋다, 신군. 자네들 뜻대로 기교기념 특집호를 한번 만들어보게. 나도 꽉 맥힌 늙은이는 아니니까 비록 학교의 발전이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들 뜻을 따라보겠네. 」
능구렁이 같은 학장은 대학신문에 대통령 부인의 사진을 싣는 것은 오히려 모양이 안 좋겠다는 청와대의 견해를 비서를 통해 확인하자마자 그렇게 둘러댄 것이었다.
어쨌든 육 여사는 개교기념일에 맞추어 학교에 왔다. 영부인과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는 대강당에는 독재자에 대한 반감보다는 대통령부인이라는 명성에 더 이끌린 탓인지 전교생이 몰려드는 바람에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만원을 이루었다.
학생처에서 마련한 각본대로 꼭두각시들이 순서대로 일어나서 질문을 하였고 육 여사는 예의 능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변을 하였는데 질문의 내용은 주로 각하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냐, 남편으로서의 각하는 몇 점을 줄 수 있느냐,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느냐, 자녀들의 교육방침은 어떤 것이냐, 텔레비전 프로는 대개 어떤 것을 보느냐는 등의 유치한 내용들이었다.
그때 예정에도 없는 질문자가 강당 한가운데로 뛰어 나갔다. 준환이었다. 먼저 그는 육 여사의 답변이 끝날 때마다 까닭 없이 해해거리고 있는 학생들을 한번 힘주어 노려본 다음 연단의 육 여사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사학과 사학년 김준환입니다. 저는 오늘 영부인께 질문하도록 사전에 조작된 질문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좋겠습니까?」
순간 학생처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학생과장이 재빨리 준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준환은 육 여사가 앉아있는 연단 가까이로 잽싸게 걸어 나갔기 때문에 학생과장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실은 영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남편의 행정부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대는 대통령의 부인이다. 일개 학생의 신분으로 서슬이 시퍼런 독재자의 아내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였다. 따라서 대강당은 삽시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초긴장 상태의 정적이 숨소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육 여사는 준환의 질문에 반색을 하였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에요. 안 그래도 어째서 이런 질문이 안 나오나하고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사실은 여러분들과 이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기 위해 온 거예요. 지금까지의 질문들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니 정말 미안하군요, 나는 정말로 그런 줄 몰랐어요. 」
그 날 육 여사는 학생들이 데모에 가담하는 동기나 열정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또한 바로 옆에서 지켜 본 남편은 나랏일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고 있기 때문에 아내로서 안쓰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로 시작하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장시간에 걸쳐 언급을 하였다. 특히 자녀들과 다정하게 식사 한번 제대로 할 여유도 없는 국가 원수의 직책이란 얼마나 반 가족적인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앞날을 책임져야 할 지도자의 직분이란 그 고독함이 얼마나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지를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강당 안의 분위기는 서서히 독재자를 동정하는 쪽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애절한 심경으로 남편을 변호하는 육 여사의 표정에서 학생들은 항간에 떠돌던 각하와의 불화설을 일축하였다. 그러나 준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남편이 라이벌인 김대중씨를 납치하여 돌을 매달아 현해탄에 빠트려 죽이려고 한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준환의 폭탄 같은 질문에 육 여사보다 정작 학생들이 먼저 경악하였다. 학생처장이, 저놈 끌어내! 하고 강당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그러자 육 여사가 급히 만류하였다.
「안돼요, 그러면 안돼요. 교수님들이 그러실수록 더욱 더 학생들이 정부를 불신하게 돼요.」
덕분에 준환은 강당 한가운데에 계속 버티어 서 있을 수 있었다. 참으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강당의 분위기는 육 여사와 준환의 대결장으로 변하였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제가 대통령을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그 분과 평생을 함께 살고 있는 아내예요.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에요. 아마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남편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에요. 만약 대통령이 그런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면 애초에 저하고 부부의 연을 맺지도 않았을 거예요.」
육 여사는 자신의 인상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의 실추된 이미지를 자신과 연계를 지음으로써 격상시키고자 하였다. 답변의 논리적 맹점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는 육 여사의 표정에 학생들은 점점 매료되어갔고 따라서 독재자의 행적은 그 아내의 미소에 가려졌다. 그러나 준환은 독재자의 가면을 벗기는 질문을 늦추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은 내일쯤이면 이런 질문을 한 나는 당연히 정보부에 끌려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영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준환의 마지막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육 여사의 강렬한 반문성 답변이 강당을 울렸다.
「질문하신 학생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세요?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요? 안심하세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육 여사가 장담한대로 준환은 잡혀가지 않았다. 준환은 우리나라가 진실로 민주국가여서인지 육 여사의 장담 때문인지 그 원인이 분명치 않다며 웃었다.
육 여사가 학교를 방문한 기념으로 심은 나무의 이파리가 말라 갈 무렵 청와대에서 답례로 학생들을 초청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학교 당국은 경사가 났다며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고속버스를 전세 내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청와대 방문단에 편성된 학생회 간부들은 별도로 학생처장의 지시를 받았는데 청와대 접견실에서 지켜야 할 사항과 그 날의 시간별 일정에 대해서 장황하게 브리핑을 받았다.
준환은 그 날의 자리에 없었다. 대통령의 부인에게 불경한 질문을 던진 죄목으로 학교 당국은 방문단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출발하는 당일, 준환은 학생처장의 황급한 부름을 받고 방문단에 합류하였다. 육 여사는 준환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명단에서 준환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자 별도로 지시를 내렸다. 학교 당국의 옹졸한 처사를 육 여사는 오히려 걱정하였다. 청와대 접견실에서도 육 여사는 준환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우리 집에 오니까 어때요? 한결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전 국민을 다 초청하고 싶어요. 그러면 다 한 집안 식구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
준환이 무어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함께 간 학장의 부인이 얼른 맞받았다.
「아이고, 영부인님의 그 지극한 애국애족의 정성이 태양처럼 빛나십니다.」
하며 수다를 떨었고 학장은 육 여사의 말끝마다,
「너무나 영특하신 영부인님의 고귀한 애국충정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려대었다. 학장과 학장의 부인은 노인네 특유의 망령기까지 섞인 아첨을 아끼지 않았다. 육 여사의 말이 끝날 때마다 ‘애국애족하시고’를 후렴처럼 중얼거리며 맞장구를 쳐대니까 마침내는 육 여사 자신이 듣기가 거북한지라 약간의 짜증을 내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얼떨결에 독재자의 관저에 발을 들여놓게 된 셈이어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소위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뼈대 있는 청년 학도의 자세일까를 가늠해 볼 여유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이 평생에 한번 경험해보기에도 벅찰, 대통령의 부인과 대통령이 사용하는 식당에서 오찬을 나누게 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청와대 접견실의 품위 있는 붉은 카페트를 처음 밟았던 순간부터 일기 시작한 미묘한 심경의 변화가 급기야는 육 여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환각성 호감으로 전이되어 본의 아니게 변절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영문과의 김숙자는 이 황홀한 만남의 인연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임에 스스로도 감격을 주체를 못하겠는 듯 육 여사 옆에 달라붙어서 당당하게 애교를 떨었다.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났다. 비록 보리 혼식인 식단이었지만 반찬은 국가 원수의 관저답게 정갈하였고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이며 시중을 들던 검은 양복의 미남들이 후식으로 내 온 아이스크림을 핥을 때에는 평소에 품었던 독재자에 대한 쓰디쓴 인상이 달콤한 아이스크림 맛으로 뒤바뀌는 중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식당 벽에 걸린 대통령의 가족사진을 육 여사의 설명을 직접 들으며 구경할 때에는 그야말로 대통령과 한식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감히 청와대 한복판에서 큰소리로 웃어제끼는 배포도 갖게 되었다.
이때 준환이 일행들의 웃음소리를 일시에 멈추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육 여사도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생각할 여유를 가지려는 듯 육 여사는 준환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의 요지를 되물었다.
「미안해요. 우리 아이들 사진 때문에 웃다가 보니 학생의 질문을 잘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아폴로 십일호가 가져온 달 암석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나요?」
방문단 일행은 일제히 청와대 식당의 한쪽 켠에 있는 자그마한 유리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미합중국 정부가 인간의 달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우방국에 나누어준다는 글귀와 함께 굵은 모래알 크기의 달 암석이 투명한 재질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이렇게 귀중한 과학적 자료는 전 국민이 언제라도 관람할 수 있는 장소에 전시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학장이 당장 준환을 보고 호통을 쳤다.
「이보게 김군! 자넨 어째 그리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가? 주야로 국사를 맡고 계시는 대통령께서 조석으로 달 암석을 쳐다보시며 안목을 우주적으로 키우신 다음에 나라를 경영하신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일이겠나?」
연이어 어조를 바꾼 학장은 육 여사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하였다.
「영부인님. 철없는 어린 학생들의 소견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 늙은이의 부덕의 소치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육 여사는 굽실거리고 있는 학장보다는 준환을 쳐다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조금전과는 다른, 어딘가는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정말 그렇군요. 지금껏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말씀을 드려보겠어요.」
결국 그 날의 청와대 방문도 준환의 질문으로 어색한 마감을 하게 되었다.
광주에서 갈아 탄 버스가 정주에 닿자 나는 곧 함박웃음을 머금은 중년의 사내를 맞이하였다. 대학 졸업 후 흘러 가버린 16년의 세월이 준환의 듬직한 체구 위에 연륜이란 풍모로 바뀌어 얹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예지가 번득이던 그의 눈가에는 세월의 파도에 밀려 온 주름이 자리 잡았고 패기에 넘치던 몸짓 따라 물결치던 검은 장발은 어느 덧 희끗희끗한 서리가 앉아 있었다.
반백이 다 된 준환의 모습에서 문득 내 자신이 지난 세월동안 아무 생각 없이 건너 뛰어버린 시간의 공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 잠시 어리둥절할 판이었다. 나도 분명히 마흔을 넘긴 연륜이긴 하나 준환의 모습은 단순히 사십 년을 살아온 것만은 아닌, 또 다른 어떤 세월의 중복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모르는 세월을 그가 살아왔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니는 우째 늙지도 않노? 꼭 옛날 학보사 기자 시절 그대로 아이가?」
일부러 경상도 말투로 환대해주는 준환의 마음 씀씀이가 순간 뜨겁게 와 닿는다. 주차장에까지 승용차를 가지고 나온 준환은 나를 태우자마자 곧바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도로변의 이정표로 봐서 목적지는 국립공원 내장산이었다. 바로 옆 좌석에서 새삼 관찰해 본 준환의 얼굴은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경상도 땅에 공부하러 와서 친구하나 얻었다고 좋아했던 일 , 그간 후회도 많이 했을 텐데 ....... 어쨌든 답장도 변변히 못한 것 미안하네. 」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사실은 졸업 후까지 준환과의 관계가 계속될 것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70년대의 중소 도시에 소재한 지방 대학생들에게는 비록 같은 과가 아니더라도 좁은 교정에서 항상 마주치는 친근감으로 해서 쉽사리 친분관계로 맺게 되고 더구나 기숙사의 같은 방에 거주한 연분이라면 대학에서 만난 일생 동안의 친구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특히 준환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역이 필요 없는 유일한 경상도 친구’라며 나를 좋아하였다. 나도 그런 준환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하루오가 학업을 마치고 나면 제 나라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준환 역시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그와의 만남 자체를 당연히 한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때? 전라도 땅을 한번 밟는데 입국 절차가 까다롭지는 않든?」
준환은 악의 없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그동안 내가 근거도 없이 지니고 있었을 지역적 폐쇄성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말처럼 약간의 절차가 없지는 않았다. 행장을 꾸리는 나를 보고 아내는 ‘그 먼 데를.....’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행선지가 전라도보다 더 먼 곳인 설악산이나 제주도였을 때에는 ‘그 먼 곳’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냥 잘 다녀오라는 정도였거나 아니면 그런 인사말도 빼먹을 만큼 일상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졸업 후 입대와 제대, 그리고 취직하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겨우 겨우 사립학교의 교편 자리를 하나 얻어 2년쯤을 흘려보낸 80년 가을, 모처럼 들른 고향집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준환이 보낸 편지가 먼지를 쓰고 있었는데 처음에 얼른 한번 읽어서는 그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사건의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 먼 곳’의 상황이었던 탓이었을까.
‘.......나․당 연합군의 화력에 비해 월등한 계엄군의 화력은 정치적인 이유로 가까스로 절제당하고 있다가도 한 번씩 고삐가 풀리면 엄청난 희생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점에 있어서 계엄군은 나․당 연합군과 충분히 닮고 있었다. 오로지 희생의 증폭만을 노린 듯한 계엄군의 전투 행태는 그들이 비록 이민족을 상대로 그런 잔인성을 발휘했대도 불가사의한 경지였다. 한마디로 계엄군의 목표는 무슨 전략적인 거점 확보나 공공기관의 수비가 아니라 바로 시민들의 생명이었다......... ’
광주의 참상을 주로 풍문으로밖에 들을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관심의 초점은 희생자의 숫자였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사망자의 수치야말로 비극의 규모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환이 전하는 광주의 참상은 각도가 다른 것이었다.
‘ .......실수로 컵을 깨뜨렸을 때의 표정과 망치를 들고 일부러 컵을 잘게 부수고 있는 표정과는 저절로 구분이 되는 법이다. 그들은 우리를 집요하게 죽이려들었다........ ’
나는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준환이 발신지를 밝혀두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준환의 편지는 나로 하여금 가해자 진영에 편입되도록 하는 미묘한 여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장산의 내장이 무슨 뜻인지 자네 아나?」
「내장산? 속에다 간직한다는 內藏이 아니던가?」
「맞았네. 어떤 사람은 오장육부의 뜻으로 內臟으로도 해석하지. 유난스럽게도 꼬이고 접힌 산의 주름살이 마치 뱃속의 창자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內臟을 內藏하고 있는 산이지. 자네 오늘 전라도의 內臟에서 한잔 하더라고잉. 」
겨울의 내장산은 인적이 뜸했다. 저녁 으스름이라 그런지 내장산 호텔 앞의 넓은 주차장은 더욱 휑뎅그레하였다. 투숙할 객실을 확인한 뒤 준환은 곧 바로 호텔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
「전라도까지 와서 호텔 따위가 내주는 소속 불명의 술을 마실 수야 있나.」
우리는 토속주를 파는 호텔 주변의 주점에 자리 잡았다.
「진짜배기 전라도의 물로 만든 술을 들게. 이곳 井邑 땅은 이름그대로 샘물의 고장이네. 땅바닥을 조까 건드리기만 해도 풍성한 전라도의 인심처럼 지하수가 솟아 넘친다네.」
분위기는 아무래도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고백의 형태이든 사죄의 모양이든 간에 준환의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자꾸만 멀어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입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났을 때 자네는 계림대도독부 부산지점에 마침내 민족의 성화가 타올랐다고 했지만 나는 자네의 그런 편지를 받고도 학생들에게 정반대로 가르쳤다네. 」
「어떻게?」
「천인공노할 망나니들이 혈맹의 은혜도 모르고 불을 질렀다고........ 」
「하하하하하-」
「허허허허허-」
「그래,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나?」
「어찌할 것 같은가?」
「웅진도독부 광주지점은 망나니들의 성가신 불장난으로 한동안 폐쇄되기도 하였다.........?」
「맞았어! 그렇게 가르치면 되겠군. 하하하하하-」
「그럼, 그렇게 안 가르친단 말인가? 허허허허허-」
파안대소로 활짝 피어난 준환의 얼굴은 어느 새 홍조가 깃들어 반백의 머리가 더욱 대비가 되어 보였다.
끈질긴 신념이었다. 대학 때부터 줄곧 한반도를 어설픈 나․제 동맹의 효력이 살아있는 삼국의 정립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72년, 7․4 공동성명이 터져 나왔을 때에는 준환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하였었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되뇌어 보며 고구려와 신라가 천만 뜻밖에도 이렇게 멋진 짓을 할 줄도 안다며 흥분하였다. 역사에 없었던 돌연변이라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겨우 100일을 넘겼을까,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기어이 돐도 넘기기 전에 남북대화가 중단되자 준환은 기숙사의 방문을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 두고봐라, 역사에 기록될 거야!」
이후로 준환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을지도 몰랐다. 김대중의 납치는 나․제 동맹 체제를 뒤흔드는 사건이었고 광주시민항쟁은 나․제 동맹 체제를 깨뜨리려는 음모론자들의 입을 통해 여․제 동맹의 전조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어때? 생각나나? 청와대에서 영남 정권의 안주인을 면박 주었던.......」
「아, 육 여사!」
「그래. 꼭 두 달 뒤에 총 맞아 죽었지.」
「참 좋은 분이었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아내 형에 비추어 본다면 말이야. 형편없는 남편을 만나 끝내는 비명횡사를 당하고 말았어. 그 머저리 같은 경호실장이 육 여사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도 문세광의 총구는 육 여사 쪽을 향하지는 않았을 텐데.....」
준환의 육 여사에 대한 인상은 뜻밖이었다. 한복이 잘 어울리는, 한 마리 학과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청와대 현관에서 손을 흔들던 우아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햐, 이 친구 거 꼭 누구랑 닮았구만. 거 왜 영문과의 김숙자 기억 안 나? 육 여사가 죽자 국상이 났다며 상복을 입고 대성통곡을 했던..........」
「잘 알지.」
「그 후 학장이 주최한 무슨 파티 장에 미군 대령과 함께 나타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 소문엔 미군 장교들만 상대하는 고급 콜걸이 됐다더만.」
그럭저럭 술이 두 사람을 흥건히 적셔놓았다. 모처럼 마셔보는 막걸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갈증을 일깨워주었다. 유달리 붉어진 준환이 연거푸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넨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가? 물론 정숙하고 매력적인 양가의 규수를 맞이했겠지.」
결혼한 지 13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피차에 처음 확인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결혼할 당시는 매력적이기 보다도 정숙한 처녀였지. 지금은 정숙하기보다도 매력적인 감독관으로 돌변해버렸지만..... 」
「감독관이라구? 무엇 때문에 감시를 당하나?」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은가? 부부란 게 말로는 일심동체니 어떠니 하지만 분명한 두 몸이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겠어?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묶여서 감시하고 견제 당하는 꼴들이 우스워. 나도 역시지만............. 참! 내 정신 좀 봐. 도착하는 즉시 집으로 전화한다는 것이 이렇고 앉았네.」
준환이 취했는지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만 있다.
「그 선생님의 책에 자네 이야기가 적혀 있는걸 보고 처음에 무척 놀랬지. 나는 처음에 누군가 했더니 뜻밖에도 자네더만. 통일관을 심어주기 위해 그렇게 교육하고 있는 교사도 사실은 드물지. 그러나 뭐랄까, 너무 관념적이랄까 막연히 통일만 부르짖으면 통일을 위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착각들을 하는데 자네도 마찬가지야. 두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라는데 그에 앞서 현재 이 땅의 삶이 몇 동강난 상태인지를 먼저 파악했어야 한다구. 그저께 자네를 한번 보자고 편지를 한 것은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네. 」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교사가 펴 낸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라는 책 속에 부끄럽게도 나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 미술 수업시간에 시도한 ‘통일기원 행진도’를 비롯하여 ‘함께 살기’ 란 제목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는 집단 토우전 같은 것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본 준환이 편지를 보내왔었다.
‘............신 선생. 통일이란 분리된 개체의 단순한 더하기도 아니고 두 잔을 부어 모아서 한 잔을 만드는 식의 질량의 증가도 아니라고 봅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윤곽을 강제로 뜯어 고쳐서 서로 끼워 맞추는 접합은 더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통일은 놓여져 존재하는 개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다만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호의적이면 그것이 곧 통일이고 적대적이면 분단인 것입니다.............. ’
그러나 내가 보기엔 준환의 그러한 관점이 오히려 이상주의자에 가까운 관념적인 통일관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 자네의 논지대로라면 북쪽엔 연개소문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의 정권이 버티고 있고 한편에는 현대판 당나라 군대를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는 정권이 영남을 근거지로 날뛰고 있으니 당연히 전라도엔 별도의 자치정부, 호남공화국쯤을 건국하여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자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억지로 하나 되게 하는 것보다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다? 분단의 고착화가 아니고?」
준환은 점점 더 호방하게 웃었다. 목 언저리에는 붉은 반점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존재를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호의적이면 분단이 고착될 까닭이 없지. 교류가 활발해져서 외형적인 분단이야 무의미하지 않겠어?」
「당나라 군대는 어쩌고?」
「상대를 아낀다면 당연히 외세 따위는 몰아내게 되어 있어! 실제로 힘을 합쳐 몰아낸 역사가 있지 않는가. 고구려나 백제가 적으로 여겨질 때에만 당의 군대가 필요한 법이거든.」
세 번째로 화장실을 다녀오는 준환은 어떤 여성의 부축을 받으며 주점에 들어서고 있었다. 관광지의 화장실이란 공용으로 지어져 주점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녀오는 걸음이 한참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에 여자 관광객과 눈이 맞았을 리는 만무하였다. 화려한 차림의 여성이 어딘가 눈에 익은 모습 같기도 하다 싶을 때 준환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소개를 하였다.
「서로가 잘 알지? 인사해. 내 마누라야.」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늘 오셨단 얘기를 듣고 호텔에 들렸더니 나가고 안 계시더군요. 옛날 그대로예요. 하나도 안 변했네요?」
「가만있자, 누구시더라......?」
「아, 숙자 몰라? 영문과의 콜걸, 숙자......」
그러고 보니 숙자였다. 미군장교들과 무수한 염문을 뿌려댄 숙자가 준환의 아내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겨줄 수야 있나. 지금도 웅진도독부 광주지점에 출퇴근하고 있긴 하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이 김준환이 품으로 돌아오는 여자가 되었지. 하하하-」
「미안하네. 난 정말 몰랐어. 늦었지만 축하하네.」
「의례적인 축하라면 거절하겠네. 적어도 자넨 이 사람의 과거와 무관한 채로 축하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성공한 부분이 있다면 이 사람 영육 전반에 걸쳐 침투해 있던 외세를 몰아낸 것이라네. 말도 말게. 광주 땅에 처음 나타났을 때 미국 때로 뒤덮힌 김숙자의 꼬락서니란 참 가관이었지. 」
좀 취하긴 했어도 준환은 당당하였다. 준환의 팔짱을 끼고 있는 숙자도 당당해 보였다. 문제는 내 자신이 당당할 건더기가 없어지는 느낌이 느는 것이었다.
「모처럼 만나셨는데 미안해요. 준환씨는 제가 모시고 가겠어요. 사실은 당뇨가 좀 있어서 술을 마시면 곤란한 사람이에요.」
저것이 바로 통일이던가. 한때 앙숙지간이었던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그래 오래 전에 서동도 선화공주와 통일을 이룬 적도 있었지.
숙자가 모는 승용차에 편안하게 기대어 누운 준환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스럽게 보였다. ▩
<92. 1. 전남일보 신춘문예 가작>
첫댓글 제가 읽은 선생님의 소설은 거의 자전적인 소설로 읽히는데요.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있는 듯,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를 맺어서 그러한가, 봅니다.
용기 있게 사이다 발언하는 준환 학생과
불경스런 질문을 부드럽게 받아치는 육영수 여사의 인품이 돋보입니다.
끝까지 독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단숨에 읽히는 소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소설속의 사건 중 30%~40%는 실제로 있었던 점에 있어서 자전적인 소설입니다. 청와대에서 달 암석에 관련된 질문은 내가 한 것이었고 육여사한테 김대중 납치사건을 따진 학생은 준환(허구인물)이 아니라 기억에 없는 다른 학생이고 따라서 숙자와 준환의 결혼은 당연히 소설인데 따지고 보면 허구가 조금 더 많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