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은 신진서로 시작해서 신진서로 끝났다. 신진서 9단은 2월에 LG배 우승을 개인 첫 메이저 타이틀로 장식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기전을 석권했다. 랭킹에 있어서도 1월부터 12월까지 1위를 휩쓸었고 연간상금에서도 나홀로 10억원을 넘겼다.
결산①/ 2020년 국내 프로바둑계
신진서, 전 부분에서 일인자 체제
바둑계의 2020년도 힘든 해를 보냈다. 전 세계를 예고 없이 강타한 코로나19는 기지개를 켜려는 바둑계의 봄을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예정되어 있던 대회들이 줄줄이 연기되고, 끝내 취소 사태를 맞기도 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몇몇 사건들은 양곤마가 쫓기듯이 어려운 형국에 찬물을 끼얹는 자충수처럼 전해졌다.
그래도 국내 대회들은 선방했다. 저력을 갖춘 전통의 기전들이 역경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나갔다. 또 이붕배가 새로 탄생하고, 명인전이 부활의 씨앗을 뿌리며 저 너머의 봄날을 손짓했다.
대부분의 지역 개최 대회들이 전면 중단되는 상황에서 '보물섬 남해'가 만든 슈퍼매치 7번기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빼앗아간 세상에 위로가 됐다. 2020년 국내 프로바둑계를 성적 중심으로 <표>와 함께 정리했다.
신진서, 4대 종합기전 독점
2020년의 반상 세계는 신진서로 시작해서 신진서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월의 LG배를 통해 메이저 대회 우승 신고식을 한 신진서 9단은 국내 무대에서는 종횡무진 활약했다.
한 해 동안 열린 종합기전은 4개. 이 모두가 신진서 9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6월의 GS칼텍스배 프로기전과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7월의 용성전, 11월의 KBS바둑왕전까지를 석권했다. 더욱이 번기승부의 결승에서 한 판도 내주지 않는 퍼펙트 질주를 이어갔다.
지난해 신진서 9단과 종합기전 두 개씩을 나눠 가졌던 박정환 9단에게는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한 한 해가 됐다. 박정환 9단이 정규기전의 우승 없이 보낸 해는 입단 초기인 2008년 이후 12년 만이다.
▲ 여자바둑계의 '최정 천하'는 2020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85개월 연속 여자랭킹 1위를 독주했으며, 국내 여자기전의 연속 우승 횟수를 늘렸다.
제한기전에서는 새 얼굴의 우승자들이 속속 탄생했다. 상금 규모와 상징성에 있어서 종합기전 이상인 맥심커피배는 이지현 9단에게 입대 선물을 안겼다.
이 밖에 송지훈 6단은 크라운해태배로, 문유빈 4단은 이붕배로, 김창훈 4단은 미래의별로, 현유빈 3단은 하찬석국수배로 개인 첫 우승을 이뤘다. 박하민 8단은 처음 열린 대통령배 프로부문의 초대 우승자로 이름을 올렸고, 조혜연 9단은 삼세번째 결승에서 대주배 첫 여자 챔프가 됐다.
여자대회에서는 최정 9단이 여자국수전을 4연패, 여자기성전을 3연패했다. 이 모두 대회 최초의 기록이다. 최정 9단은 현재 국내 여자개인전에서 7연속 우승 행진을 진행 중이다.
신진서ㆍ최정, 남녀 기록 3관왕
남녀 기록부문은 올해도 신진서 9단과 최정 9단이 휩쓸었다. 32년 동안 이창호 9단이 갖고 있던 연간 승률 최고 기록을 0.13%포인트 차로 넘어선 신진서 9단은 승률(88.37%) 외에도 다승(76승)과 연승(28연승)에서도 독보적 1위에 올랐다.
지난해보다 수치상으로는 떨어지긴 했지만 최정 9단도 여자기사의 다승(54승), 승률(67.5%), 연승(16연승) 1위를 차지했다. 신진서ㆍ최정의 기록부문 3관왕은 3년 연속이다.
1-2인자 간의 완벽한 세대교체
지난해 박정환과 신진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6차례씩 양분했던 톱랭커 자리는 해가 바뀌면서 신진서 9단이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신진서는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2위와의 점수차를 293점까지 벌렸다.
293점은 1-2위 간의 역대 최다 점수차. 지난해 12월랭킹은 박정환ㆍ신진서 순이었고, 그때의 점수차는 5점에 불과했었다. 박ㆍ신 2파전이 2020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당시의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진서 9단은 박정환 9단과의 맞대결에서 12연승을 올리며 점수차를 벌렸다. 2020년을 시작하기 전까지 신진서 기준으로 4승15패였던 상대전적은 2020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18승17패로 크게 바뀌었다.
▲ 7살 후배 신진서 9단에게 톱랭커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59개월 연속, 통산 74차례 1위를 차지했던 박정환 9단이다.
세 차례의 타이틀전에서도 신진서 9단은 박정환 9단에게 영봉패를 안겼다(LG배 2-0, 쏘팔코사놀 3-0, 용성전 2-0). 남해 7번기의 최종 스코어도 7-0이었다.
2020년은 완벽한 세대교체로 '신진서 시대'를 열어젖힌 원년으로 새겨졌다. 이처럼 1-2인자 교체의 시기가 명확했던 적은 적어도 2000년대 들어서는 없었다. 이세돌 9단이 이창호 9단을 상대로도, 박정환 9단이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하지 못했었다. 신진서 9단은 올해 상금에서도 나홀로 10억원(10억300여만원)을 넘겼다.
한편 상위권 기사들의 연간 랭킹 변동은 예년보다 훨씬 덜했다. 지난해 12월과 '톱10'을 비교해 보면 이영구 9단이 10위권에 진입했고 박영훈 9단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2019년을 17위로 마감했던 최정 9단은 1년새 28위로 11계단 떨어졌다.
전년도와의 비교
전년도와의 부문별 1위 기록을 비교해 보면 전체 경기수의 감소로 양적으로는 줄어들었지만 질적으로는 상향됐다. 30승 이상을 거둔 기사는 2016년 21명, 2017년 27명, 2018년 41명으로 오름세를 보이다가 2019년에는 27명으로 떨어졌고 올해는 50명을 훌쩍 넘겼다.
60% 이상의 승률은 2016년 23명, 2017년 31명, 2018년 35명, 2019년 30명에서 올해 34명으로 늘었다. 승률 10위까지가 70%를 넘긴 해도 2007년 이후 13년 만에 찾아왔다. 신설된 프로기사협회리그를 통해 승수와 승률을 올린 신예기사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올해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 올해 폭발적인 힘을 낸 신진서 9단은 "그동안 박정환 사범님을 상대하면서 항상 자신감이 없었고 두다 보면 페이스에 말리는 경기가 많았다"면서 "LG배 결승에서도 사실 1국에서 많이 좋았지만 역전을 당하면서 또 이렇게 지나 생각했는데 운 좋게 역전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