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사태의 장기화로 명승지를 찾아 댕긴 기억도 아득합니다. 꿈도 야무졌었지, 연초엔 일본 역사의 보고라는 간사이(關西) 지방 교토와 나라도 탐방키로 해 항공권과 숙소까지 얘약했었지요.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중 '나라, 교토' 편 그리고 관광가이드 책까지 정독하며 꿈에 부풀었는데..
이제 다 포기했지만 아쉬움에 문화유산답사기 중 근래에 나왔다는 山寺 편을 완독하고, 그동안 읽어보지 못한 '서울' 편을 들여다 보고있읍니다. 원래 아는게 저렴(?)도 하지만 60년 가까이 살아 온 서울에 대해 이리도 무식한지 놀랬읍니다. 고궁에 가면 수많은 건축물이 있는데, 그 이름을 어떤 기준으로 명명되었는지 기초지식 조차 없었기에 답답하였읍니다. 그래서 맘먹고 궁궐 건물의 이름 중 특히 마지막 자에 대해 파헤쳐(?) 보기로 했읍니다.
궁(宮), 전(殿), 각(閣), 루(樓)
궁(宮) : 대개 집합명사로 쓰입니다. 5대 궁궐이라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에는 각각 많은 전각(殿閣)과 부속 건물들을 품고 있는데 이를 통털어 00궁(宮)이라는 이름을 붙였읍니다.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東宮)조차 단일 건물인 경우는 드물고, 대비나 대왕대비가 거하는 곳이나 왕자를 생산한 후궁이 사는 데도 宮이란 명칭을 썼지만 역시 부속 건물이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전(殿) : 옥편에서 찾아보면 '대궐 殿'이라 나오는데, 궁궐 중 임금이 정사를 펼치고 왕비가 기거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건물을 지칭하지요. 창덕궁에는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인정전(仁政殿)과 큰 인물이 될 왕자를 만든다는 대조전(大造殿, 중전의 침전)이 있읍니다. 경복궁에는 부지런히 정사를 보시라는 근정전(勤政殿)과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화합한다는 교태전(交泰殿)이, 창경궁은 밝은 정사를 펼치라는 명정전(明政殿)과 통명전(通明殿)이 각각 이에 해당합니다. 중전이 기거하는 대조전, 교태전 그리고 통명전 등에는 龍마루가 없는데, 이는 임금이 龍이기에 굳이 용마루가 필요없다고.. 덕수궁에는 대한제국 무렵에 지은 석조전(石造殿)이 있지만 원래는 중화전(中和殿)이 메인 빌딩입니다. 경희궁에는 숭정전(崇政殿)이란 정궁있었는데, 일제가 허문 것을 근래 다시 복원하였읍니다. 5대 궁궐에는 그외에도 용도에 따라 많은 殿이 더 있는데 다 생략하고, 다만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바로 옆에 위치한 문정전(文政殿)만 집고 넘어가겠읍니다. 이 전각은 성종 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으로 불 탄 걸 재건했고, 일제가 다시 헐어버린 걸 1986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이곳은 영조가 아들인 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인 얼룩진 역사까지 품고 있지요.
별도로 논하겠지만 임금이 사시는 궁궐과 동격(?)이라는 불교 사찰의 경우, 부처님이 모셔진 큰 건물을 대웅전(大雄殿)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합니다. 그리고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부르는데, 이도 이즘에야 알았읍니다.
각(閣) : 옥편에 '누각 閣' 자로 나와 있어 짐작하듯이 2층이상의 큰 건물을 지칭하는데, 殿과는 달리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건물로 한단계 아래로 보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왕국이 아닌데도 내각(內閣)이란 말을 쓰는 것은 옛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 겠지요. 창덕궁 後苑(옛날 秘苑)에는 정조대왕 때 지은 규장각(奎章閣)이 있고, 경복궁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관문각(觀文閣)이, 덕수궁에는 보문각(普文閣)과 문화각(文華閣)이 눈에 띄네요.
궁궐 밖에도 閣자가 붙은 건축물이 많았는데, 특히 박통 시절 밤정치 3대요정이라는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이 있었습니다. 대원각은 여주인이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거듭난 후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구요.
루(樓) : 옥편에 '다락 樓'로 나와 있듯이 2층집을 의미하며 집무공간이기 보다는 주로 조망과 연회를 위한 장소이지요. 규모가 閣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慶會樓)는 그 크기나 규모로 볼 때 閣을 능가하여 殿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지요. 규장각의 경우 규모가 큰 누각 건물인데 2층만 별도로 주합루(宙合樓, 우주와 합일된 누각)라 부르는데, 통상 합하여 규장각주합루라 합니다. 樓의 경우 아래 층에는 기둥만 있는 게 보통인데 규장각은 아래층이 비어있지 않는 엄연한 집무 공간이었읍니다..
중국에는 도처에서 樓나 閣 자가 붙은 건물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특히 저자거리에는 음식점, 술집 심지어 홍등가에도 이런 명칭이 눈에 띕니다. 아마도 궁궐을 동경하고 흉내내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재(齋), 헌(軒), 정(亭), 당(堂)
재(齋)와 헌(軒) : 원래 민가에서 사대부들의 사랑채를 지칭하는 말로, 책이 많은 사랑방을 齋, 그리고 마루(軒)가 널찍한 사랑을 軒이라 불렀읍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임금들이 여염집의 분위기를 동경하여 이런 이름을 궁에도 붙이게 된듯 합니다. 창덕궁에는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귀국후 살다 가신 낙선재(樂善齋)가 있고, 경복궁에는 고종의 개인 서재였던 집옥재(集玉齋) 등이 있읍니다.
軒은 궁궐의 사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내전에서 많이 보입니다. 낙선재 권역에 있는 석복헌(錫福軒)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비(순종효황후)가 국권이 침탈된 후 옮겨와 살다 1966년 돌아가십니다. 좀 특이한 걸로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란 건물이 있는데, 1900년 전후하여 러시아 사람이 지은 서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고종이 여기서 외국 사신들과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에서 저평가된 임금 중 한분으로 23세에 요절한 24대 임금인 헌종을 꼽을 수 있지요. 그는 서예와 그림에 능했으며 특히 秋史 글씨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헌종은 여염집을 동경하여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많은 서책과 그림을 들여다 놓고 적잖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하지요. 헌종은 여기에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을 3번이나 불러 제주도에 귀양간 김정희의 안부를 묻고 글씨도 전해 받았다고 합니다. 심약한 헌종은 추사를 귀양에서 풀어주지 못하다가 죽기 한해 전에 겨우 해배시키지요. 지금도 낙선제에는 秋史體와 많이 닮은 헌종의 글씨를 볼 수 있답니다. 낙선재는 헌종 사후 방치되다시피 하다 조선이 그 운명을 다 한 왕실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거하다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장소이지요.)
정(亭) : 창덕궁 후원은 자연을 거의 그대로 다듬어 조성한 왕실 정원으로, 일본 교토의 아기자기한 정원이나 중국 황실에서 인공으로 조성한 이화원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요. 이 창덕궁 후원에는 17채나 되는 정자(亭)가 있고 아직 개방되지 않은 곳에 더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읍니다. 창덕궁 후원으로 진입하면 처음 만나는 곳이 부용지이고 물가에 세워진 정자가 부용정(芙蓉亭)입니다. 건너편 언덕에는 규장각이 보이지요. 좀 더 들어가면 꽤나 큰 연못이 나오는데 애련지라 부르며 그 물가에 애련정(愛蓮亭)이 있읍니다. 숙종이 조성했는데 연꽃을 사랑한다는 이름과는 달리 이곳에서 장희빈을 사랑한 건 아닌지.. 경복궁에도 후원이 있고 이곳에 향원지라는 연못을 조성하고 정자를 지었는데 향기가 멀리까지 이른다는 의미를 지닌 향원정(香遠亭)입니다. 고종이 실권을 잡으면서 처음 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몇년전 필자가 경회루를 탐방헸을 때 건너편 물가에 있는 작은 정자의 이름이 뭐냐고 해설자에게 물으니, 명칭은 없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망중한을 즐기기 위해 만든 정자라는 겁니다. 왕궁 내의 정자 중 가장 근래에 만든 게 아닐런지.. 창경궁에서 적잖은 정자가 있습니다. 좀 특이한 정자로는 맨땅(?)에 세운 함인정(涵仁亭)있는데, 물가가 아니라선지 젖을 涵자를 넣어 물기를 보탰네요. 이 정자엔 중국 東晉의 대시인 도연명의 유명한 '四時'라는 4구체 한시 현판이 걸려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들러 보시길..
당(堂) : 堂이란 평범한 여염집을 의미하는 말인데 궁궐 안에도 무수히 많은 堂이 있읍니다. 그런데 규모로 보아 도저히 堂이라 부를 수 없는 건물이 창덕궁 인정전 뒷편에 있는 희정당(熙政堂)입니다. 원래 서재 목적인 崇文堂이란 이름의 건물이었던 것이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으면서 규모가 켜졌다는 거지요. 처음에는 임금의 침실로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증설하여 정무를 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정사를 베푸는 곳이기에 殿에 버금가는 규모를 지니고 있읍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마지막 쯤에 가는 데가 연경당(演慶堂)입니다.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집이지요. 양반 사대부들의 호화저택을 모방하여 99칸으로 조성한 궁궐 내의 여염집으로, 현재 건물은 고종 때 새로 지은 거랍니다. 연경당 옆에는 아주 작지만 벼를 심는 논이 조성되어 있어 왕실에서도 농사일을 체험해 보라는 의미겠지요. 덕수궁에도 堂이 많아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등이 있는데, 석어당(昔御堂)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민간에서는 사대부나 안주인이 사는 집을 당호(堂號)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율곡 선생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여염집 여류시인 삼의당(三宜堂), 그리고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당호는 초당(草堂)입니다(초당은 강릉 소재로 두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읍니다만..).
** 보강과 첨삭으로 거의 일주일이 더 걸렸읍니다. 다음에는 寺刹의 건물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첫댓글 잘 몰랏던 것들을, 깊은 전문지식으로 파헤쳐,
우려한 글솜씨로 엮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크게 감명받으며 숙독햇슴다.
다음 원고를 또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