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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건
서평
도서 및 저자소개
데이비드 피터슨(David Peterson)은 런던에 있는 오크 힐 신학대학(Oak Hill Theological College)의 학장이다. 그는 『히브리서와 완성』(Hebrews and Perfe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과 성경신학 시리즈의 새로운 연구인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Possessed by God, Inter Varsity Press)의 저자다.
본서의 원저는 1992년에 인터 바시티 출판사(Inter-Varsity Press, Nottingham, United Kingdom)에서 출판된 데이비드 피터슨의 Engaging with God이라는 저서다. 이를 김석원이 번역하여 2011년 부흥과개혁사에서 『성경신학적 관심으로 본 예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원저 Peterson, David. Engaging with God. Nottingham: Inter-Varsity Press, 1992.
번역서 데이비드 피터슨.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본 예배신학』김석원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본서의 구성은 들어가는 글로 시작하여 1장 구약에 나오는 예배, 2장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숭배함, 3장 예수와 새 성전, 4장 예수와 새 언약, 5장 사도행전에서의 성전과 공동체, 6장 바울과 복음적 예배, 7장 하나님 백성의 모임 안에서의 예배, 8장 히브리서와 예수를 향한 예배, 9장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배, 10장 예배와 복음: 총정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가는 글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본 서평에서는 번역서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고 평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요약
들어가는 글
데이비드 피터슨은 니콜스(W. Nicholls)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예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며 양보할 수 없는 사역이다. 예배가 표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듯이, 교회의 모든 사역이 필요 없어져도 예배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사역보다도 더 철저하게 교회의 기초인 계시로 방향을 잡고 점검되어야 한다.”(W. Nicholls, Jacob’s Ladder: The Meaning of Worship, Ecumenical Studies in Worship No. 4 (London: Lutterworth, 1958), 9.)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배는 교회, 교단에서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실험적 예배'라는 것이 유행하지만, 교회를 찾는 이들의 불만을 계속되고 일반적으로 예배라 불리는 활동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어떤 이는 교회를 전전하며, 더 감동적인 사역을 하는 곳을 찾아다닌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예배'란 무엇이며, 또 신앙의 다른 쟁점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예배란 정말 무엇인가?
보통 말하는 기독교 예배는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종교 활동을 뜻한다. 현대인은 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예배를 통해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직접 느낄 수 있는 감동, 도전, 위로와 격려를 원한다. 그렇다면 예배는 근본적으로 감정이나 경험의 문제인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것과 종교적 황홀경 내지는 신 앞에서 느끼는 깊은 자괴감과 같은 것일까? 실제로 기독교 모임을 평가하는 데는 개인의 경험 중심의 접근 방법이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배와 상관이 없다. 예배는 어떤 식이든 우리의 반응을 포함하게 되지만, 내적인 자기감상을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다.
말 말 말
성경에는 예배의 주제와 신학을 이해하는 데 도우이 되는 다양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신구약 성경에서 예배를 표현하는 핵심 단어들이 성경 전체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을 보고 교훈을 찾는 것이 목적에 포함되어 있다.
삶의 방향으로서의 예배
예배는 성경신학의 주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창조, 죄, 언약, 구속, 하나님의 백성, 소망 같은 내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예배신학은 삶의 방향 혹은 참되고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가진 다양한 차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주로 주일 예배 같은 뻔하고 좁은 범위로만 보는 데서 못 벗어나고,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의 깊이와 범위를 놓친다.
제자들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 과거 예배 용어를 일부 사용하여 주님의 인격과 사역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주 안에서 새롭게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는 신자의 전인격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믿음의 반응은 언제 어디서든 예배와 함께한다. 따라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정해진 의식과 설교를 듣기 위해 교인들이 모인 제의적 자리만을 예배로 보는 전통적인 정의는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다. 이런 예배야말로 신약성경이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예배다.’
신과 인간의 행위
우리는 먼저 하나님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 그분을 기쁘게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을 우리가 보이기도 전부터, 그분과의 관계로 먼저 불러 주셨다고 가르친다. 신구약 언약 모두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구원과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응 문제이자, 그분이 요구하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능하게 하신 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맞물림
우리는 기독교적 예배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중요 질문의 담을 찾아, 이를 통해 보다 포괄적인 정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알아가고 다가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그분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예수의 오심이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시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교회에서의 모임과 일상 속의 예배라는 개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면서 동시에 다음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살아 계시고 참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제시하고,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말한다는 명제’다.
여기서 사용하는 방법론
먼저 고대 사회가 신을 예배한 방식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구약 신앙과 몇 가지 의식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고, 이를 통해 신약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2장에서는 구약과 성경 밖의 자료에서 예배를 표현하는 주요 용어의 용례를 간단히 검토한다. 다음 장에서는 다양한 신약저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예배를 표현하는지 살펴보고, 배경을 자세히 검토하여 각자의 예배신학의 특징을 찾아볼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방법은 성경신학이다. 성경신학이란 하나님과 성경적 계시를 성경 각 권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 강조를 두어 연구하는 방법이다.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가 드러내는 정도보다 더 조직적으로 성경을 설명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때 사용한 벙법에 가능한’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신학은 성경 본문을 배경과 검토하면서도, 무엇보다 성경 안에 발견되는 하나님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계시의 성격을 밝힌다. 예배를 인도하고 참석하는 이들 속에서 예배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회복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전체 계획과 그 백성을 향한 목적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예배의 역동성과 진정한 의미도 회복된다.
1장 구약에 나오는 예배
세속화된 현대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필요와 관점에서 보면, 구약이 말하는 성전, 제사, 제사장 이야기는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신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다. 기독교 예배에 대한 연구 대부분이 신약의 모델과 교훈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예배를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려면, 계시, 속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는 소명 같은 핵심적인 성경의 주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주제와 예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나가서 신약 전체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때, 성경이 강조하는 예배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예배와 계시
고대 사회에서 성지의 의미
고대인들은 신을 찾을 수 있는 장소, 신에게 나아가기 위해 이름을 알아내는 것, 계속해서 신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언약을 세우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와는 달리, 구약은 하나님이 구체적인 역사와 장소에서 이스라엘 선조에게 자신을 드러낸 유일한 창조자이자 온 우주의 주인이라고 가르친다. 구약 신앙이 가지는 독특성은, 자연이나 초월적인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 외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는 점에서도 찾아진다.
예배와 구속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는 구속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라고 정의한다. 합당한 예배는 인간의 제도나 방법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시내산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하나로 묶는 신앙은 호렙 혹은 시내 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된다. 출애굽기는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이 책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그의 백성을 구속한 목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심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여 자신에게 이끌어 냈고, ‘언약의 피를 통해’ 관계를 인 치신 것이다.
예배와 종교
고대의 이웃들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사와 의식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주로 성소라는 장소와 제사장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성막의 중요성
이스라엘은 성소를 짓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제물을 자발적으로 준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성막이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항상 같이 움직이는 분임을 표현했다. 성막은 시내 산부터 약속의 땅까지의 여정에서,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었다.
제사장, 제사, 하나님의 영광
출애굽기는 제사 제도의 원리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제사장을 세우고, 매일 화제를 바치고, 그의 백성과 만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장막’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는 장면은 신학적으로 서로 연결된 중요한 사건들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임재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풍성하게 볼 수 있도록 요청하는 데, 이것은 그의 동행하심을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이 요청 역시 하나님의 현현을 한 번 더 약속함으로써 응답되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고, 모세 앞에서 자신의 선함을 선포하고 은혜를 드러냈다.
예배와 희생 제물
종교의 목적은 정해진 제의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의 호의를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개인, 가정, 도시, 지역 사회의 이익 혹은 재해 방지를 위해 이런 과정이 꼭 필요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도 다른 고대 종교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을 공유할 때도 있었지만, 이들 의식에 부여한 의미는 매우 달랐다.
종교 축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이스라엘 예배의 특성을 지키기 위해 계속 사투를 벌여야 했다.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제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는 솔깃한 유혹 때문에, 바알 종교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스라엘 예배의 특징은 이방 종교의 요소를 거부하는 내용 뿐 아니라,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받아들이는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로 만들어진 안식일은 매주 벌어지는 제의였다. 매 칠 년마다는 땅의 쉼을 위한 안식년을 치렀다. 일련의 종교 축제로 채워진 한 해 일정은 축제, 찬양, 감사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의 본질임을 보여줬다.
이스라엘의 제사 형태
이스라엘에 대한 규정은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려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도우미였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제의에 대한 자료 일부에 불과하지만, 주로 성막과 성전을 통해 제도화된 희생 제사에 관심을 둔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생제사는 화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순으로 등장한다.
정결제와 성화
레위기의 율법은 '거룩한 것과 평범한 것 그리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쓴다. 정결이란 정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거룩과 부정은 정결이란 기준으로 정해진다.’ 정결한 것은 성화를 통해 거룩하게 될 수 있지만, 부정한 것은 절대로 성화될 수 없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성화되어 거룩한 존재로 남아 있도록 요구받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한 관계로 부르신 뒤, 이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다른 민족들과 구분했다. 이러한 사실은 윤리 영역에서뿐 아니라 제의적인 방법으로도 표현되어야 했다. 타락과 죄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피할 대상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유지해야 했다.
레위기에서 제물의 피는 일반적으로 정결과 성화와 연결되어 등장한다. 피는 대부분 이스라엘 제사 의식에서 속죄 도구였고, 제의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모세 율법은 제사를 바로 드리는 모습에 신경을 쓰면서도, 단순히 의식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 효과를 보장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통해 속죄와 용서를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 자체의 기계적인 결과물이 아니었다. 정결은 그의 말씀을 복종하는 이들,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었다.
예배와 예루살렘 성전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성궤와 성막은 다른 어떤 제의적 장치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들이 자리한 성서는 '여호와의 성소, 이스라엘 연맹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전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성막처럼 성전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했고, 이들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함께 하심과 만백성을 위한 복의 통로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고 세우셨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었다.
하나님의 지상 ‘거처’인 성전
예루살렘 성전이 출애굽 전승을 기초로 한다는 점은 성전 봉헌 의식에서 잘 나타났다. 언약궤와 거룩하게 꾸며진 성막은 이제 성전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식하면서도 이 땅의 성전에 제한될 수는 없는 분이라는 생각은 성전 봉헌기도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있음을 보여준다. 성전 건물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이들과 계속되며, 이들을 축복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하나님 백성의 미래
희생 제사와 성전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예언자들은 시온 산 성소에서 그의 백성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백성을 적들로부터 지키고 이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이라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보호가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예언서의 소망 속에 등장하는 제사와 성전
예언자들의 설교는 이스라엘이 믿음의 시험을 이겨 내도록 도와준 것이 틀림없다. 이들은 하나님이 심판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때가 되면 용서와 회복으로 역사하셔서, 남은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영광스런 성전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세워질 것이라는 생각은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들 중에서도 꾸준히 발견된다. 이 밖에도 다른 전승들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의 성전을 이 땅에 가져와, 부패한 성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한다.
결론
예배에 대한 구약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 나서서 먼저는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나중에는 출애굽 사건과 시내 산 경험을 통해 민족 전체에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러한 강력한 상징들-언약궤, 성막, 성전 등을 통해 예배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실과 동행하심을 깨닫고 누리게 하는 도구임을 보여 준다. 제의 규정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복종은 삶에서의 복종으로 자연스럽게 인도된다. 이스라엘이 원하시는 만큼 제의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제대로 맞물리지 못하게 되자, 포로생활이라는 끔찍한 심판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과 만백성에 대한 복을 말하는 예언자들의 소망은 결국 회복된 성전 안에서 갱신된 예배의 비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장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숭배함
이제는 핵심 용어의 의미와 중요성을 분석하여, 구약 시대에 사용된 ‘하나님과 맞물림’ 예배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예배하면 제사 드리고 성전에 가거나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점에서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예배는 종교 의식이나 제의 순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예배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하나님과 관계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사로 드리는 복종 혹은 경의의 표시로서 예배
헬라어 성경에 주로 나오는 예배란 단어는 ‘프로스키내인’이다. 이것은 ‘뭔가를 향하여’를 뜻하는 ‘프로스’와 입맞춤을 뜻하는 ‘키내인’의 합성어로, 이 합성 구조를 볼 때 원래는 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를 향한 존경의 입맞춤이나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을 표현한다고 생각해 왔다.
다른 피조물이나 천사들에게 인사 혹은 경의를 표함
일부 구약 본문에서는 존경을 담은 간단한 인사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 밖에 본분에서는 경의나 비굴함에 더 가까운 모습을 의미했다. 이 밖에 감사로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 문맥상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위대한 존재 앞에서 탄원이나 호소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신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
구약에서 ‘하나님께 엎드림’이란 표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복종의 자세를 의미한다. 또한 많은 본문이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말씀과 행동을 통해 은혜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때도 많았다.
제의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함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명령은 하나 밖에 없는데, 허락하신 성소에서 첫 열매를 드리는 사건과 같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후손들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조상들의 예를 따라 했는데, 이를 통해 땅은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면서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도록 했다.
무릎을 꿇거나 얼굴을 숙이는 행동은 아주 종요한 사건이나 큰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히스타하와’가 아닌 다른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된다. 후자가 다른 이들 앞에서 계약을 맺는 관계를 표현하는 독특한 용례도 있다. 그러나 ‘히스타하와’나 ‘프로스키내인’이 하나님, 믿음, 의지, 복종을 대상으로 할 때는 대부분 탄원보다는 감사와 관련된다.
일반적인 예배, 추상적인 예배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의미의 동사가 사용되지 않고, 다른 신체적인 활동을 암시하는 분위기도 아닐 때는, 보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의 ‘예배’를 뜻할 수 있다. 종종 ‘히스타하와’는 또 다른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와 병렬로 등장할 때도 있다. 특히 이런 경우는 이스라엘이 우상과 관계하는 것을 절대로 금지하는 구절이나 이러한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건에서 발견된다. 이것을 ‘예배를 드리며 섬기다’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엎드려 섬김’이 표현상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엎드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신에게 진심으로 섬긴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결론: 경의 혹은 감사와 복종의 표현으로서의 예배
구약 성경에서는 허리를 굽히거나 엎드리는 자세는 존경의 인사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지위가 낮음, 타인에게 복종하겠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이런 인사는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고, 복종과 간청을 의미할 때도 있었다.
기도의 응답을 받거나, 용서의 확신이 설 때, 승리의 약속을 받았을 때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갑자기 경험하게 될 때도 이와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동행하심뿐 아니라 계시된 모습을 배워 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예배 의식의 한 요소가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는 자세는 그에 대한 헌신과 복종을 삶으로 표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섬김으로서의 예배
헬라어 성경에서 '예배'로 번역되는 또 다른 동사는 '라트래우애인'이다. 이 단어가 성경 외 자료에서 사용된 예를 보면, ‘섬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신약 시대까지 이 단어군은 주로 종교적, 제의적 의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헬라 작가들은 주인에 대한 노예의 의무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둘래우애인'이란 단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이것은 ‘노예로서 섬기다.’란 뜻으로 특히 소속에 강조를 두는 표현이었다. 이 동사의 파생어들은 개인 선택의 자유를 배제한 전적인 의지와 복종을 의미했다. 그래서 헬라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섬김을 표현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반면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자들은 적극적으로 ’둘래우애인‘을 사용하여, 인간 주인에 바쳐야 할 섬김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합당한 당연한 섬김을 표현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둘래우애인‘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개념과 연결시켜서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둘래우애인‘이나 명사 ’둘래이아‘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할 때는, 제의를 통해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하는 자세를 암시한다.
이스라엘의 섬김
출애굽기에 따르면, 노예생활에서 구원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음자신을 드러낸 산에서 그를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라트래우래인’ 이나 ‘라트래이아’를 하나님에 대한 예배란 뜻으로 사용할 때는, 거의 대부분 백성 전체의 예배를 의미했지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사역을 뜻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섬김
제사장들이 사람들을 대표할 때는 수혜자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제사장의 중계를 통해 제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을 통해, 제사장은 백성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 의식의 대상이었다.
섬김을 표현하는 다른 헬라어들
헬라 문헌에서는 ‘대라패우애인’ 단어군이 어려운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고 보살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경우에 따라 ‘치유하다.’란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 이 단어군은 주로 신의 호감을 얻기 위해 섬기고 보살펴야 하는 상황을 전제한 종교적 섬김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결론: 섬김으로서의 예배
봉사 관련 단어들은 하나님이 위대한 왕이며, 그에게 속한 자들로부터 신실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의 제의는 하나님께 걸맞은 총체적인 복종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제의 활동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헌신하는 방법이었다. 제의적인 타락은 이스라엘의 윤리적 사회적 생활의 타락과 같이 했다. 제의적 활동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경배보다는 봉사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예배는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태도가 필요함으로 암시한다. 현대 사회는 ‘예배’를 주로 경배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이를 가지고 ‘히스타하와’와 ‘프로스키내인’의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 때문에 영적 관점에서 보면, 예배는 삶 전체를 복종으로 드리는 섬김과 경배의 구체적인 행위가 동시에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경외 혹은 존경의 표시로서의 예배
헬라어의 종교 관련 단어는 모두 ‘샙’ 어근에서 나왔다. 이것은 신들에 대한 경외 혹은 존경을 표시할 때 쓰는 말이다. 여러 자료들은 이 단어가 두려워 떠는 모습보다는 너무 존경한 나머지 주춤하는 자세에 가깝다고 확인해 준다.
구약 성경은 신의 계시를 실제로 접할 때는 두렵고 떨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의미의 존경과 경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목소리에 복종하고 그의 길을 걷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제의 의식을 지키는 도 이러한 섬김의 한 방법이었다.
헬라 종교와는 반대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구체적으로 언약 명령에 성실과 복종으로 반응한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포보운’이나 ‘포보스’ 단어를 통해 등장할 때가 많다.
결론
한편에서 보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배란 하나님을 위대한 왕으로 경의를 표시하거나 숭배하는 태도를 말한다. 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드러내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함 보다는, 두려움 혹은 감사의 섬김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러한 제도들에 따라오는 제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같이 하심을 인정하는 자연스런 제의적 표현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합당한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의미했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는 곳에서는, 민족과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종과 신실함을 요구한다. 또한 제의 활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복종한다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 혹은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던지는 요구 앞에서 신실과 복종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제의를 통해서도 표현되지만, 주로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합당한 예배란 찬양, 일, 경외가 다 같이 포함되며,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3장 예수와 새 성전
복음서는 철저하게 1세기 유대교를 배경으로 쓰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공적으로 세워진 제사장들에 의해 제사 의식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더해 기도와 성경 연구의 중심지로서 회당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각 가정도 신앙을 가르치고 예배하는 자리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전, 회당, 가정 같은 조직과 갚이 관련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관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와 예수의 잉태 및 이름을 짓는 과정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란 말과 함께 등장한다. 이 족보를 보면 역사적으로 다윗 가문의 등장과 몰락 이후, 예수를 통해 다윗 가문의 통치가 다시 회복됨을 암시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유대인들의 소망을 배경으로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마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로 눈을 돌린다. 예수의 잉태와 탄생 사건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간섭했고, 이것은 주님의 천사들을 통해 드러나고 설명된다. 이 사건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 약속의 성취가 기대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이 다윗과 성전보다 더 위대한 존재이며, 사람의 아들이자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는 장면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마태복음의 주제에 최절정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이 땅에 적용될 모든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를 통해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제자들은 ‘예수가 지상 사역을 하는 동안에는 해 본 적이 없는 범세계적인 사역’으로 불림을 받는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인정하고 우주적 권세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경의를 표함
마태복음은 노골적으로 첫 장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동방 박사들이 경배에 대해 부여했던 의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음을 알기 원한다. 박사들이 예수에게 보인 반응은 부활하신 주님께 온 세계가 복종하게 될 것임을 예시하는 행위이자, 마태복음 28장 16-20절에 따르면 제자도의 본질이기도 했다.
마태복음의 결론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감성적인 방응’을 자극하는 내용이다. 부활한 주님을 만났다면 예배와 확신으로 반응해야 정상이며, 이것은 모든 권세가 메시아이신 예수께 주어졌음을 분명히 깨달을 때 나오는 결론이기도 한다. 저자는 독자들이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예배하고, 마지막 때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길 원한다. 이 때문에 선교 사명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독자들을 제자의 길과 모든 민족의 복음화 기회로 초대한다.’ 정리하자면, 마태복음은 예수를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할’ 대상으로 그린다.
사람들은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는 예수를 그의 이 땅에서의 삶을 볼 때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로 깨닫게 된다. 바로 그분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도 나타나신 것이다. 여기서 불신자들도 예수의 참 정체를 깨닫고 나아갈 때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들도 구원자이자 모든 민족의 주인이신 이에게 감사로 복종하며 자신을 드리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그리스도는 이러한 예배로 우리를 인도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고백하고,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그의 천국 권세를 선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를 깨닫게 하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예배했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성전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바람에, 복음서에 따르면 이제 예수가 구원과 만민의 복을 위한 대안이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기원후 70년에 오게 될 보다 극적인 심판을 예시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는 새로운 길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예루살렘이 버림을 받고 성전이 파괴될 것라고 분명히 예언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임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두어 사람이 모인 곳은 아무리 초라해도 같이 하리라고 약속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배경은 메시아적 공동체 안에서 인간관계와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죄를 지은 ‘형제’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예수가 설명하는 장면이다.
복음 전파에 함께하는 두세 사람에게 약속된 그리스도의 함께하심은, 기도를 위해 모이거나 성경을 공부하거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관계 문제를 해결할 때도 함께 한다.
결론적으로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함께하는 자리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여기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또 성령을 통해 함께하신다.
요한복음의 시각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네 번째 복음서는 예수가 구약의 예배 제도를 대체하신 방법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
예언자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영원히 세우실 것이라고 외쳤다. 요한복음은 이 약속이 영원하신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다.
예수를 통해 초대 교회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데, 구약 성경에서는 이 영광이 주로 시내산, 성막, 그리고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어 등장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온 인류'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믿어졌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의미하는 모든 역사적 의미를 뛰어넘는 기준을 제시한다.’
성전 대체를 예언하는 예수
요한복음이 보기에는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참다운 성전, 만백성이 기도하는 집으로 오신 것이 분명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새로운 시대의 성전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 받고 부활하신 아들을 의미한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요한은 예수가 참다운 성막이며 참다운 성전이라는 생각에서 나아가, 예수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산의 이상을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예수와 유대 절기
놀랄 만큼 다양한 상징과 구약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단어를 이용해서, 요한복음은 마지막 때에 신자의 삶과 예배의 중심은 예수임을 보여준다.
결론
새로운 성전을 고대하던 예언자들의 희망은 예수의 사역 속에서, 동시에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 속에서 참다운 완성을 보게 된다. 예수는 생명과 이 땅의 갱신을 위한 근원으로 오셨고, 만백성이 모이는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체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이 결정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되심으로써 그 역할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져다준 가장 실제적인 결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치고 배워야만 한다는 점이다. 불신자는 예수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달을 때에, 그리고 이를 통해 구원자이자 자신의 주인으로 보고, 그가 선물한 영생을 받을 때 ‘참다운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포된 복음을 통해 그의 아들을 드러냈고,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과정 속에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신다. 예수와 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으로 서야 한다. 이것은 개인, 가족, 교회 모두 마찬가지다.
4장 예수와 새 언약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하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암시하고, 이 점은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설명된다.
예수의 예배
예수는 복종의 삶을 통해 예배의 가장 완벽한 형식 혹은 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희생적인 섬김의 모범만은 아니었다. 예수의 복종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
누가는 여러 번 기도를 통해 예수가 아버지와 인격적 대화를 나눈 장면을 부각시킨다. 예수는 종종 조용한 장소에 숨어 기도했다. 때로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고 때로눈 남을 위해서 기도했다. 기도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그냥 되는대로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예수의 지상 사역의 진행 과정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예수와 회당
회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 다시 말해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정리된 구전법과 구약성경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지역사회를 신앙적으로 교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고, 언약에 따른 복종의 의미를 실천했다. 회당 예배는 신명기 6장 4-9절에 근거한 ‘쉐마’를 암송하고, 기도하고, 모세오경을 뜻하는 율법, 예언서 등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예수와 모세의 율법
예수는 구약 예언자들처럼 율법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지만 동시대의 의식과 전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어쨌든 전통주의자들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돕기 위해 생겼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반전통주의에서 가장 급진적인 면은, 율법의 계속적인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겉보기에는 ‘율법을 거역하고 사는 삶을 가르친 적은 없지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삶을 사는 법에 대해 가르쳤다.” 물론 율법을 따르는 삶도 간접적으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결과 부정
예루살렘이 기원전 587년에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기 전까지 활동을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조상들이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이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시작한 분이기에, 주권적인 은혜로 언약을 다시 회복하실 수도 있다. 예레미야의 표현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계속적인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하나님 사이의 특수 관계를 강조한다. 하나님만이 반역으로 점철된 백성에게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기회를 주실 수 있다.
안식일 준수 문제
예수가 죽을죄로 고소된 이유는, 동시대인의 시각에서 안식일을 범한 죄보다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과 사역, 궁극적으로 그의 죽음을 통해 율법을 초월하고 완성했던 것이다.
복음서와 예수의 죽음
예수의 사역이 보여주는 구속의 의미들
예수의 이름으로 만백성에게 회개와 죄의 용서가 선포되는 사건은 그의 고난과 부활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영화는 고난과 부활이라는 서론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성취임을 많은 구절이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구속의 의미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 와서야 분명해진다.
최후의 만찬
이른바 예수의 성만찬 말씀은 '예수의 자기 계시‘의 핵심으로, 그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신학적으로 유월절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과 함께 역할이 끝났다. 예수는 유월절 떡을 나누고, 적어도 잔들의 하나를 건네며, 자신만의 해석을 다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음식은 예수의 임박한 죽음과 이를 통해 성취될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이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얻어질 혜택에 대한 예시이자 상징을 보여 준 것이다.
이 책이 가장 주목하는 점은 잔과 관련된 말씀이 예수의 피를 통한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성전과 제사 제도를 대체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았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의 전제된 언약 관계를 새로운 기초 위에 다시 세우는 방법이었다.
예수와 함께 왕국 만찬의 교제에 같이 한 열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출발을 의미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약속에서 최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그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현실화시킬 속죄의 도구이자, 언약을 세우는 희생제사로 선포된다.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심
하나님께 감사하며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는, 유대 문화에서는 일반적인 감사기도 방법이자 식사를 시작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예수는 익숙한 유월절 예배 의식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자들과 나눈 식탁 교제에 구원론과 종말론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성만찬을 할 때마다 일정한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데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작 성만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이 먹고 마시는 행위였다. 이를 통해 ‘구체적인 외적 행위’와 함께, 새 언약 속에 사는 것이 현실이 되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져다 준 혜택은 구속받은 이들의 공동체 속에서 믿음을 통해 경험된다.
생명의 떡 예수
예수는 자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고난 받은 인자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 성령을 부어 줄 때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성육신과 희생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믿을 수 있고, 그가 시작한 영생을 받을 수 있다.
5장 사도행전에서의 성전과 공동체
현대 기독교는 사도행전이 초대 교회의 삶과 발전에 대해 말하는 내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사도행전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가 이스라엘과 만백성의 생명과 복의 근원임을 설교할 때는, 당연히 예수가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중심이었고, 하나님께 나가는 성전과 기타 기존 방법을 완성하고 대신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제자들과 성전
성전과 계속해서 관계하다
사도행전은 성전을 ‘계시의 자리’로 계속해서 그린다. 분명한 사실은 성전 뜰에서 제자들이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고, 예수에 대한 복음을 일반인들에게도 가르쳤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성전에서 중요한 환상을 통해 성전에서 등을 돌리고 만백성을 위한 참다운 예배의 중심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성전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공공 기도의 장소’로 취급되었다. 초대교회는 ‘집을 돌면서’ 같이 먹고 메시아의 공동체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정해진 기도 시간에는 성전으로 향했고 전통 유대 종교와 관계를 유지했다.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성전에서 마지막 시대의 소망과 예수를 밀접하게 관련시켜 설교했다.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부어 주었고 그리스도가 하늘의 주인임을 증가했다. 예수 안에서 ‘마지막 시대’의 복은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초기 설교자들은 예수만이 마지막 시대의 구원의 유일한 열쇠임에 초점을 맞추고, 이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여기서 성전은 “복음에 대한 반대와 핍박을 경험 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중심이 부활 하신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이를 통해 예수가 성전과 관계된 모든 예배의 기능을 완성하고 대신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메시지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서 배척당하고 회당에서도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스데반 설교의 급진성
스데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전체가 복음을 거부한 상황을 보여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한다. 스데반은 ‘율법에 반했다’는 고소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스데반 설교의 대부분은 ‘성전에 대한’ 죄를 반박하는 내용이다. 스데반은 유대인의 불순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성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차지한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추방된 이유가 그리스도를 선포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성령의 오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들
스데반 설교는 이스라엘에게 성전으로부터 부활과 영광 받으신 인자에게 돌아오라는 초청이었다. 스데반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주 예수에 초첨을 맞춘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다른 설교들과 일맥상통한다.
베드로 설교는 부활 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의 증거로 약속된 성령을 받았다고 선포한다. 이에 따라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성령강림절에 성령이 임하는 장면은 제자들의 선교적 소명과 관계가 있다 성령의 오심은 모든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예언적 선포와 ‘방언’의 은사의 확인되었다.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주인으로 부르는 이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을 것이 약속된다. 그리고 이들 자신도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새 언약의 혜택을 받아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에 같이하게 된다. 사도행전의 관점에서 보면, 영광 받으신 주 예수는 하늘과 땅의 새로운 접촉점이며, 그 기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 이제 초점은 제사 제도를 완성한 그의 구속 사역과 함께,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가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들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는 기독교 예배 신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원한다면, 복음이 세상과 교회 속에 선포 될 수 있도록 각별이 신경 써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과 맞물리는 경험이자 그분만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이 만남의 열쇠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새 언약의 축복의 초대이자,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이방인을 포함시킨 사건
이방 종교의 세계
기독교의 첫 번째 세기 동안 로마는 수많은 인종과 종교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옛 종교들과 공존했고, 때로는 시간이 가면서 섞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모든 중요한 현상은 신 덕분이며, 서로 다른 신들이 삶의 특정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었다. 기도는 신이 우리 바람에 반응하도록 하는 도구라고 생각되었다. 예언은 자연현상을 통해 신의 뜻을 알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했다. 전통 종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융성과 함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철학자들은 제사의 전통적인 정의가 비논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발견과 대중 종교를 조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울의 이방인들을 향한 설교
아덴에서 바울 사역은 기독교 메시지가 이방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어떻게 설교되어야 했는지 어느 정도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예배였다. 사도바울의 결론은 우상숭배로부터 돌이켜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들에게도 ‘살아계신 참다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기회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죽음에서의 부활, 예수는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초기 기독들의 도전은, 헬라-로마 세계의 다원주의 와 상대주의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언약 아래서 경배와 봉사
승천하신 주님께 대한 경배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자, 제자들은 ‘그를 예배 했고’, 큰 기쁨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이들은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예배의 패러독스를 잘 보여준다. 찬양은 영광 받으신 주님에게 드려졌지만,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전통적인 배경에서 조상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최초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이스라엘 동포들에게 예수를 ‘성령을 주시는 분’, ‘생명의 주인’, ‘이제 올 심판의 유일한 구원자’ 임을 바로 인식하라고 외치면서,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자신들이 그랬듯이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주님, 구원자로 고백하는 내용은 초기 기독교 설교의 핵심을 차지한다. 이러한 고백은 복음 설교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초대 공동체에 속하길 원했던 이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고백이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도구이며,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 인자 로 받아드려지면, 당연히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에게만 부여된 예배 대상의 자격이 부여되어야 했다. 정리한다면 이들은 ‘전례 없는 방법으로 유일신 하나님과 함께 예배할 두 번째 대상을 포함 시키는 개혁’을 했던 것이다.
주님을 섬김
‘스가랴의 노래’를 보면, 메시아의 구원이 의도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 혹은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나온다. 메시아의 구원이 선포될 때마다,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을 섬길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초기 기독교 모임의 성격과 기능
사도행전 2장 42절은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최초의 기독교 모임의 활동을 간단하게 요약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배움과 교제, 떡을 떼고 기도에 힘썼다고 한다. 일부 성경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나오는 네 가지 요소를 초대교회의 예배 순서라고 이해하고, 당시 모임은 정기적으로 가르치고, 교제하고, 성찬식을 한 뒤 기도로 마쳤다고 생각했다.
사도적 가르침의 중심성
제자들이 가장 먼저 신경을 쓴 문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었다. 이들은 성전 마당에 모였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집에서도 가르침의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초기 개종자들은 신앙적으로 격려받기 원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스라엘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나선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방인들 사이로 교회가 퍼져 나갔을 때도 중심 활동이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을 통해 전해지는 주 예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이후 세대들을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결과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진정한 맞물림, 예배 경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설교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활동이자 하나님의 역사다. 이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동체 예배’라고 부르는 활동의 핵심이 바로 여기 있다. 말씀 공부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는 예배 혹은 봉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기도, 찬양, 복종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합당한 예배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다. 이것은 교회에서나 일반 삶에도 적용된다.
신앙적 교제의 표현
헬라어에서 ‘코코이논-’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단순히 관계를 넘어 ‘누군가와 뭔가를 나누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참여하는 모습, 성령 안에서 같이하는 모습, 혹은 복음의 도전과 축복을 같이 나누는 모습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히 공동체 소속원 간에 상호 교제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재산과 소유를 나누는 모습이 자발적이고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로서 모여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교제를 실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기도, 찬양, 고백, 혹은 나눔과 구제 같은 공동체의 여러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된 교제에 참여하는 표현이라고 가르쳤다. 구약에 보면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도 참 다운 예배라고 가르친다.
같이 먹는 것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오는 ‘떡을 떼었다’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그들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나누었다는 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가족 전체’가 메일 모였다. 아마도 그렇게 한 것은 공동체 안에 실제적으로 궁핍한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자들의 모임은 주로 개인 가정에서 열렸기 때문에, 같이 먹고 교제를 나누는 장면은 자연스런 일부였다.
‘예수의 지상 사역 동안 따르던 이들과 나눈 식사의 교제 기억을 되살린다는 면에서, 종교적 의미’가 없을 수 없는 식사가 된 것이다. 신자의 교제는 예수가 의도했듯이 일찍부터 식사같이 평범한 활동을 통해 표현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식사는 때로 가르침이나 기도, 찬송 등을 동반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식사의 처음이나 마지막 부분에 드리는 기도는 주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이를 통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의 근거를 확인했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성찬식을 공동 식사와 완전히 분리해 버렸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좀 더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성찬 방법을 개선할 수 있을까? 지금의 교회 문화가 실제 식사를 통해 성찬식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식탁의 교제 같은 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서로를 섬기고 돌볼 수 있을까?
기도와 찬양
교회는 단지 시대의 박해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 언제라도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새롭게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가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승천하신 주님의 자비, 영광, 능력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현대 교회에게 던져진 과제는 이런 기도를 더 많이 늘리고,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비전을 공유하고, 성도 개인을 격려하여 교회의 공적 모임 외에도 다양한 환경에서 기도를 위해 모이는 것이다.
결론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전은 초대 교회를 위한 계시와 기도의 장으로 계속 기능을 했고, 예수에 대한 선포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마지막 시대의 언약의 완성 장소로, 예언된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지, 그리고 특정 장소에 매여 있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열어 갔는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6장 바울과 복음적 예배
이장은 바울의 글에 숨겨진 예배신학을 찾는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마지막 시대를 준비하는 인생으로 인도한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선포된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예배할 수 있게 했다. 바울이 사용한 제의 용어들을 보면, 과거의 제의적 시각은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보여준다.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 와 세상과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을 자신을 버리며 섬기는 모습’ 외에는 거룩하다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회심한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방식으로서 예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상 숭배에 등을 돌리는 결단부터 있어야 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방향 전환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 내용은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고, 조만간 재림하여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데살로니가 지역에 번성하던 다양한 종교들과 구별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의식이나 비밀 제의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헌신된 생활 방식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이 ‘밤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성도들은, 긴장하고, 절제하고, 사도들이 준 말씀의 도전과 약속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을 강조했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의 표현으로 성도를 서로 섬겼다. 또한 기쁨으로 계속 기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성도 중에 발견되는 성경의 예언 사역을 무시하지 말도록 권장된다.
합당한 예배와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로마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배신학을 말한다. 바울의 예배신학은 인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거짓 종교와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당시의 익숙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합당한 예배와 복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구약의 관점을 따른다. 우상숭배는 창조자와 바른 관계를 거부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성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그의 자기 계시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 그분의 거룩하심, 위엄, 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을 뜻한다. 동시에 하나님만이 받으실 찬양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드러난 일부 성품을 선포하고, 생활을 통해서 표현하도록 요구되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는 감사의 요소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고,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우리는 빚진 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이어서 창조 세계와 구원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는 합당한 반응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경외와 두려움과 헌신의 대상이 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희생 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모든 악함, 왜곡, 위선, 불의가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의 열매를 인간이 먹도록 하심으로써 자신의 진노를 표현했고, 이를 통해 심판 날의 최종적인 진노가 어떨지 미리 맛보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과 결과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하나님은 이 파국을 돌리기 위해 어떻게 움직이셨는지 나온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먼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을 통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방법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최종적인 희생물, ‘속죄의 피를 희생물’로 주시고, 이를 ‘믿음을 통해 받게’ 하셨다. ‘그의 피를 통해’라는 표현은 그의 죽음이 가진 속죄의 효과를 가리킨다.
예수는 죄인 된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어 줌으로 그런 결과를 이루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관계 할 수 있다.
로마서 6장 1-10절에서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그와 같이 또 그를 위해 예수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는 뜻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된 것은, 예수가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드린 행위, 그의 백성을 위해 예수의 속죄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것이 가르치는 윤리적인 교훈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새로운 복종의 생활이 의무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죽음이 가져온 제의적 의의를 통해, 그의 성령이 거룩하게 바꾸어 나간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됨으로써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이 열렸다.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특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나고, 성령을 주고, 불성실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 은혜 속에서 잘 드러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참다운 영적,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만이 경배드릴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은 회개, 믿음, 복종이었는데, 특별히 그의 공동체 안에서 의와 거룩함을 바로 세우는 노력을 통해 드러나길 기대했다. 제사 제도는 이러한 반응을 격려하는 도구이지, 죄를 덮는 도구가 아니었다. 후기 유대주의에서는 제의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면서도 사랑의 행동, 금식, 기도, 율법 연구 같은 활동도 성전의 제사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취급한다.
바울의 관점에서 이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성, 그 이상이다. 그가 호소하는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갱신된 정신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믿음의 복종이다. ‘이 시대’의 가치, 태도, 행동, 삶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의 정의다. 문맥을 보면, ‘복음의 진리로 무장된 예배’ 혹은 복음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이들의 예배를 의미한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권고에 대한 반응
기독교인의 희생 제사는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를 통해 표현된다. 전도를 제대로 정의하면, 불신자에게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기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여기서 등장하는 명령조는 기독교 예배의 진정한 반응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처음 드리는 결단은 회심이나 세례의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계속 갱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시고, 성령이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이미 거룩한 제사가 되었다. 거룩한 삶으로 부름 받은 소명을 실천해야 한다.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더 이상 봉헌자와 분리된 물질적인 제사가 아니라, 몸과 이 땅에서 삶 전체를 드리는 제사, 봉헌자와 분리될 수 없는 제사를 드린다. 여기서 거룩함에 당연히 따르는 윤리적 생활은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님께 참으로 합당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에 자신을 드림으로써 거룩함을 받은 삶을 말한다. 매일의 관계와 책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삶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부터 강조되어야 하며, 이것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도록 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그렇다면 복음 중심의 가르침과 격려는 교회 모임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복음 사역은 기독교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
새롭게 된 영에서 흘러나온 예배, 새롭게 된 영이 이끄는 예배, 우리의 모든 것으로 관계하는 예배가 기독교 예배라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란 표현은 바울의 사도적 사역을 염두에 둔 말이다. 바울의 사도적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구체적 표현이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성막이나 성전의 제의에 따라다니는 찬양과 비교될 수 있다. 도고 기도는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의 일부였지만, 문맥을 보면 복음 설교는 그의 모든 활동의 초점이자 목적임이 잘 드러난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설교를 제의적 활동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바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도구로 사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설교와 복음적 진리 위에서 등장한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예배’ 혹은 교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중요한 활동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독교 ‘예배’의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복음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적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비유적, 영적 요소들로 기독교 사역을 설명하다 보면, 사역의 본질을 가릴 위험이 있다.
제사, 믿음, 성령
기독교 믿음의 ‘제사적 기능’
복음 사역을 위한 제물 같은 기능을 하는 헌금은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복음 사역과 궁극적인 제사
바울은 빌립보 교인의 믿음으로 드려진 헌신의 예배 때문에, 자신도 제사를 드릴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순교가 빌립보 인들에게서 받은 도전 때문이라며, 이를 보며 자신과 함께 기뻐하도록 권면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배하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통해 그저 참다운 영적 예배와 이스라엘의 외적 의식을 대조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할례 받은 자’란 명칭을 새로운 뜻을 담아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한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소유된 공동체로서 기독교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예배’란 기도와 찬양 이상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가르침에서 성령은 새로운 생활양식을 깨우치고 힘을 더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장은 복음의 시대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유지하는 사역이라고 설명한다. 본문이 말하는 핵심은 성령이 가능하게 하는 예배란 근본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는 믿음의 표현과 이런 믿음을 격려하는 사역들이야말로 복음의 시대에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다. 이것은 복음 선포를 통해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종류의 예배였다. 예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온전한 제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시키고 대체했다. 전도는 자신을 통째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도전하는 일이었다. 성령은 복음의 약속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모든 민족이 새 언약의 공동체로 하나님과 성도 서로가 거룩한 관계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우리를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모든 관계와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이다. 복음 설교는 말과 행동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도전하기 위해 선포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면, 가족, 직장, 여가 활동 역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구현해야 할 자리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광범위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예배로 복음 선포와 복음 사역 지원에 초점을 잃지 않았다. ‘복음 사역’이란 단순히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시작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은 신자들이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서로를 섬기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무장시키신다. 사도적 가르침에 복종하고, 믿음과 복종으로 덕을 세우는 사도적 사역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와 가지게 된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전도와 성도를 강건하게 하는 일, 덕을 세우는 사역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의 우선순위 속에 포함되어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7장 하나님 백성의 모임 안에서의 예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위한 희생적 사역 속에는, 복음 선포는 기독교인들의 ‘예배 이해’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이것은 교회 모임이나 매일의 삶 양쪽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교회가 모였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는 그의 인격과 뜻에 복종하는 모습이 계속 따라야 하며, 이것은 복종, 믿음, 희망, 사랑의 개인적, 집단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 안에서 덕을 세우는 사역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예언
사도들은 절대적인 신적권위를 가진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이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도전했던 예언자적인 전통의 참다운 상속자였다. 이들의 사역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찬양, 방언, 통변, 가르침 같이 말로 하는 다른 사역들도 비슷한 기능을 했다.
하나님 백성 중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바울은 교회 모임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역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고 믿었다. 복음에 근거한 모든 권면과 훈계 사역은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과 만나는 도구다. 성경이 공식적으로 설명되고 가르쳐지거나, 성도들이 비공식적으로 복음에 복종하며 살도록 권면할 때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은 현실화된다. 성령은 신자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로 묶는다.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은사와 동기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그분과 계속 만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감사, 기도, 찬양
바울의 기도의 동기와 표현의 주요 재료는 초기 기독교 설교에서 나오며, ‘복음’, ‘하나님의 말씀’, ‘은혜’, ‘믿음’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바울이 독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감사하는 모습은 ‘복음 혹은 복음의 바른 이해가 기초가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복음의 메시지는 자신과 이웃들을 위해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포함한다. 이런 기도는 현재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의 표현이다. 기도는 어떤 시험에도 믿음과 복종으로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다.
성령의 전으로서 교회
지역 교회의 신성함
신약 성경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특별한 건물이나 성소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백성 안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바울은 경외와 성스러움의 개념을 장소에서 그곳에 모이는 공동체로 옮겨 놓도록 만든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서로 헤어져서 평범한 삶을 살 때도,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전히 남아, 예수의 이름으로 같이 모일 때보다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능력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는 성령이 만들어 놓은 연합을 열심히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분열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짓이며, 성소가 더럽혀지면 결국 폐기처분된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같이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신 거룩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늘의 존재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경험하며, 이미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 이방인 신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가족과 성도들과 동료 시민들’이 되어, 영적 관계를 이루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난다.
모든 기독교 모임은 천상 교회가 이 땅에서 표현된 예로 보아야 한다. 메시아가 세운 공동체의 일원인 성도 간의 거룩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나타날 미래의 예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하늘의 도성, 혹은 ‘새 예루살렘’ 공동체의 예시다. 이 도성에서 성전의 이상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을 경험한다. 새 창조가 일어나면, 열방이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하나가 되는 구약의 소망도 성취된다. 이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모이는 자리를 통해 먼저 경험된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교회 안을 챙기는 것이나 세상과 세상의 필요에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위와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한다.
덕을 세움과 교회의 모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집 혹은 전이라는 개념과 항상 같이 나타난다. 이 속에서 ‘세운다’는 개념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성장과 연관을 맺는다.
교회의 기초, 유지, 발전
로마서 15장 20절을 보면, ‘오이코도매인’은 주로 바울의 전도와 교회 개척 사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0장 8절, 12장 19절, 13장 10절 등에 나오는 ‘오이코도매’의 용례를 보면, 전도로 나서는 모습 외에도 가르침과 권면을 통해 덕을 세우는 일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세우는’ 사역의 일환으로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하고 발전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의 초기 서신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란 표현은 지역 교회를 뜻했다. 고린도 교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을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개념과 지역 교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사역의 목표이자 모든 신앙 모임의 목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도들이 같이 준비하는 것이다. 모든 사역은 이러한 종말론적 목표와 시각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신자는 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항상 ‘사랑’ 안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머리되신 이를 향해’ 성장해 가는 것은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진리를 고백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있다면,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으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섬기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믿음, 소망,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 격려할 때 일어난다. 목회자-교사는 이러한 상호 간의 사역을 격려하고 장을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로 인해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야 한다는 표현을 통해, 바울은 동시대의 의학적 지식으로는 다 이해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영적 진리를 표현한다.
교회 안에서의 사역
바울은 방언보다도 예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중에도, ‘덕을 세운다.’란 개념에 큰 무게를 둔다. 바울의 목적은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를 제대로 섬기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믿지 않는 외부인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이를 통해 믿어 회심하길 기대한다. 이 본문을 보면, 모든 신앙 모임은 근본적으로 불신자를 맞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집중적으로 덕을 세우는 곳, 다시 말해 하나님 백성을 공동체로서 격려하고 강화시키고, 지켜내는 일을 하는 곳이다. 이러한 덕을 세움은 외부적으로도 향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초대하거나 혹은 반문한 이들의 회심으로도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사역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제대로 보일 때, 덕을 세운다고 할 수 있다.
덕을 세움에 대한 결론
덕을 세우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교회 생활 전체에 있어서 성도들이 변화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 성령은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향한 그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교회의 덕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짓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신자들이 같이 모여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서로를 섬길 때,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비춰지고, 유지되고, 발전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배에 대한 여러 현대 관점과 실제 적용 방법이 과연 합당한지, 도움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교회 모임을 주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돕는 도구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이야기했다. 이런 문제는 가톨릭교회, 복음주의 교회, 오순절 계열 할 것 없이 어디서나 발견된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서로 의지하며 만나고, 교회가 건강하고 튼튼해지는 것을 교회 모임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도록 권면한다. 찬양과 기도를 나누고, 서로를 섬기는 사역 속에서 다른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교회 모임 후에 커피나 한 잔하면서 그럴듯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고린도 교회의 성찬식
이들의 공동체 식사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방 종교 만찬에 참석하지 말라는 권면에서 발견된다. 바울이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유대인들이 잘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신자 간의 교제의 식사와 연결시켜 사용했고, 이를 통해 마지막 만찬과 공식적으로 연관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시작된 언약의 복을 나눈다는 말은, 초대 교인들이 이 식탁을 제사가 드려지는 제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자리에서, 믿음으로 예수가 드린 희생을 돌아보며, 이를 통해 얻어진 복을 자기의 삶 속에서 다시 깨닫는 ’교제의 식사‘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사람들이 같은 이해나 이상을 위해 모인 일반적인 클럽 같은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혜택을 같이 나누는 과정에서 나타난 모임이기 때문이다. 은사와 사역의 활용이 이런 공동체 식사와 관련이 있다면, 메시아의 공동체의 의미도 이를 통해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주의 만찬은 교회사를 통틀어 하나님과 신자들의 인격적인 교제를 심화사키는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통해 하나님뿐 아니라 성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이며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 같이 참여하는 표시로 서로를 섬기기 위해 모였다. 이 점에서 ‘사랑의 식사’, ‘성찬’, ‘공동체 식사’, ‘성만찬’이란 명목 하에 그 기능을 나누는 것은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는 벗어난 셈이다.
결론: 교회와 세상에서 드리는 예배
바울이 예배 용어를 새롭게 정의해서 그리스도의 사역, 복음, 설교 그리고 신자의 새로운 삶의 방향 전환에 적용하는 모습은, 이제 새로운 종류의 예배관이 등장했음을 보여 준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성령 안에서 나눌 수 있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속된 것’이 따로 없다.
예배 용어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복음을 섬기는 도구로 그리고 삶의 방향에 관한 문제로 사용하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신앙 모임의 중심에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적용하려는 노력, 하나님이 먼저 뻗으신 은혜의 손길에 계속 초점을 맞추는 것, 구원하는 믿음을 도전하고 유지하는 노력, 모임과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와 찬양은 우리가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같이하는 예배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도와 찬양도 성도들을 세우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예배는 삶 전체로 드리는 반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것이 새 언약의 예배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과 맞물리기 위해 혹은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는 의미도 산다. 이것은 사역을 주고받고, 이러한 사역에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배의 많은 부분은 삶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정의되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안에 거하시고 교제하시는 그리스도는, 교회가 모여 하나가 될 때 더 분명하고 특별히 경험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복종의 생활을 통해 자기를 계속 버리는 모습이야말로, 보다 포괄적인 예배의 목적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우주를 향한 구원 계획의 중심에 자리한다. 예배는 어떤 방해나 오점도 없는 참다운 섬김이 가능해질 새 창조의 교제를, 임시적으로 경험하는 자리다. 하나님 백성 중에서 사랑으로 감당하는 사역은, 이미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변화의 능력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사역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을 올리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 모임의 초점이 사역으로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해도,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개인적으로 그분의 요구에 따라, 그분과 새롭게 관계하고, 성령이 열어 놓은 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사역의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을 맘대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모임의 일부만 ‘예배 시간’으로 취급되고 다른 부분은 ‘사역 시간’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우리가 두 가지 방향으로 예배를 같이 보기 원한다.
교회가 모일 때 일어나는 관계
기도나 찬양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역과 덕을 세우는 사역이란 개념은 신약 성경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시편과 찬양과 영적 노래’도, 서로를 가르치고 훈육하는 도구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한 그의 은혜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표현 방법이다.
8장 히브리서와 예수를 향한 예배
히브리서는 신약 전체에서 가장 잘 짜인 예배신학을 보여준다. 구약의 예배관을 보여주는 개념들-성소, 제사, 제단, 제사장,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설명되고, 대체된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어떤 책보다 새 언약을 통해 모세 율법 아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방법이 완성되고 대체되었다고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다른 어떤 자료보다 예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사역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기초라고 말한다.
예수의 최종적 예배
대제사장 예수
하늘의 중보자의 비유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단번의’ 제사의 혜택이, 모든 시험과 환란 속에서도 신자들에게 계속 적용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주기 위해 쓰였다. 이러한 격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교제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려는 유혹 앞에 선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의 제사장적 사역은 자신을 직접 완벽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약속에 기초한’ 새 언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사역보다 우월했다.
그리스도는 ‘단번의’ 속죄제를 통해, 옛 언약의 제사가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예레미야가 말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용서를 허락했다. 이를 통해 예수는 예레미야가 강조한 마음의 복종 관계로 이끌어, 심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회복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관계가 주는 현재적 복을 누리고, 영원한 나라의 영광을 나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뜻이다.
새 언약의 ‘예배’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성됐다는 관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규정의 의미와 목적은 성령이 주신 특별한 지혜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첫 장막’ 혹은 외부 장막도 성소의 일부였지만, ‘지성소로 가는 길’을 숨기는 역할을 했다. 말 그대로 첫 장막은 두 번째 장막을 숨기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참다운 성소는 이제 예수의 죽음과 그의 승천을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났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첫 번째 장막은 유대교 제사 제도 전체를 의미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 바로 영원히 갈 수 있는 길을 숨겨 두었던 것이다.
구약 제사는 제한된 수준에서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들의 장단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으로써 이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장래 좋은 일의 대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는, ‘새롭게 하실 때’를 준비하신다. 그의 업적은 유대교 대 제사장이 속죄일에 하는 일과 자세히 비교되면서 설명된다. 그의 사역이 더 우월한 이유는 예수를 통해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의 장막을 통하지 않고, 다양한 천상의 영역을 통해 ‘대 성소’로 들어갔다. 이것은 나중에 하늘로 표현되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혹은 함께하시는 자리로 이해됐다. 그의 속죄 방법이 더 우월한 이유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우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 이것은 ‘매년마다 드려야 하는 반복적이고 제한된 속죄’와 대조된다.
예수의 피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이를 통해 예수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 확신을 가지고 신자들도 ‘지성소’에 들어갈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신자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그를 섬길 수 있도록 준비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서는 양심의 정결과 합당한 예배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드리는 경배의 예배
신약의 다른 부분처럼, 히브리서 1장도 승천하고 영광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다른 예배 용어들을 쓰는 방식을 보면, 좀 더 발전된 개념이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과 복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를 합당한 예배의 도구로 더 자주 표현하는 것이다.
성도들과 함께 예수를 예배하는 자리
히브리서의 초점은 예수가 자신의 삶, 죽음, 승천을 통해 아버지께 드린 예수의 온전한 예배에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 덕분에, 신자들도 새 언약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감
하나님 백성은 인간 제사장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 중재하신 바에 의지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며, 계속되는 신뢰와 의지의 관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스도가 죄 용서를 위해 드린 온전한 제사는 죄의식까지 없애줄 힘이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인해 더렵혀진 우리 양심을 정결하게 해주어, 살아 있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만든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제대로 섬기기 전에 먼저, 필요한 죄 용서를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피의 약속을 통해서만이 ‘정결하게’ 된다.
기독교 예배의 실용성
히브리서 13장 1-7절의 다양한 권고들은 앞에서 요구한 사랑과 인내의 믿음의 구체적 표현과 계속 함께하라는 도전을 담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의 제사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 밖에서 드려졌으며, 이 점에서 ‘성막 밖에서’ 드린 ‘부정한’ 제사였지만, 새 언약 아래서 우리를 ‘정결하게’ 했다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뒤에 따라오는 ‘찬송의 제사’란 표현이다. 신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 역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로서,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 저자는 새로운 정의의 예배 언어를 사용하여 참다운 신앙에 이런 행위들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저자의 마지막 강조는 모든 면에서 합당한 예배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공동체 모임
지역 공동체 혹은 가정 교회 모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미 모인 천국 공동체가 지상에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동체 모임은 우리가 메시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모여, 정결하게 되고, 성화된 종말론적 공동체에 같이 참여하는 표현의 한 방법이다.
상호 격려
히브리서의 초점은 일반적으로 성도는 모두 서로 돌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모임의 특별한 목적은 순례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궁극적으로 향하는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이며, 이 목적지에서 벗어나게 할 어떤 일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의 특징 중에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아야 할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 포함된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은 성도라면 서로를 돌보고,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았다면 서로를 권면해야 한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공동체 모임의 목적은 마지막 때에 초점을 맞춘 상호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사역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 간에 서로 섬기는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과 격려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통해 지금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공적인 설교와 교회에서의 교육은 현재의 필요를 반영하여 성경적 진리를 심도 있게 다시 정리하는 노력과 함께해야 한다. 현대 교회는 보다 비정형화되고 덜 경직된 방법으로 성도 서로가 격려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함께 나아감
히브리서 저자는 상호 격려를 위해 같이 모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의 전체적인 논리를 보면 공동체 모임의 수직적인 차원도 잊지 말라고 도전한다. 공동체 모임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면, 복음의 선물을 새롭게 누리고 죄의 공적 회개가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지고, 용서를 구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따라와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신앙 고백 속에 소망을 굳게 잡자
히브리서 저자의 관심은 고백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가 아니라, 독자들이 이미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한 ‘호모로지아’로 표현된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신자들은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와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잃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결론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기ㅃ게 하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지는 복종, 그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려지는 복종이다. 이러한 예배는 사랑의 실천과 다른 이들에게 하는 여러 형태의 사역 그리고 기도, 찬양, 신앙 고백 등을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그리스도의 완결된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이 땅에서도 예배하기 원한다면 그의 백성들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신자의 경주를 달려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의지하고, ‘이제 올 나라’의 완벽함을 주님과 함께 나눌 기쁜 소망으로 살아가야 한다.
9장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배
요한계시록 저자는 하늘의 주인에게 드리는 예배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을 전체적으로 보면, 일상 속에서 제자로 살아야 할 신자들의 책임을 배경으로 예배신학이 제시된다. 합당한 예배란 누구에게 충성할지를 선택하는 갈등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는 모습이기도 하다.
거짓 종교의 유혹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태로 목회적 감수성을 담아, 예언자적, 종말론적 의도로 서술형으로 쓴 묵시’로 정의된다. 먼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잘 나타나듯이,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헬라-로마 세계의 문화적, 종교적 요구들과 갈등이었다. 요한은 이방 사회와 타협하거나 동화할 위험을 경고한다.
황제 숭배의 도전
황제 숭배는 통일된 제국을 상징했다. 전통 종교로부터 차용했지만 황제에 초점을 맞춘 의식들을 통해 로마 시민들의 충성심을 강화시켰다. 요한은 황제 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바다에서 나온 한 짐승’에게 예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두 종류의 예배자
요한계시록의 주제 중의 하나는 참 예배와 우상 숭배의 구별이다. 요한은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누어, 큰 용과 짐승을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는 자로 분류한다. 요한의 묵시에 따르면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인간이 무엇을 따르는지를 보여주는 예배를 가운데 놓고 벌어진다. 사탄은 거짓 종교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구조를 통해서도 역사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몰아간다.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부름 받음
이 땅에서 짐승을 예배하지 않은 이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늘 예배에 같이할 것이다. 요한은 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이미 강조됐던,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배의 갈등을 상기시킨다.
영원한 복음
첫째 천사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언어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선포한다. 이 ‘영원한 복음’은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을 창조자, 역사의 주인, 모두의 심판자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둘째 천사는 ‘큰 바벨론’의 멸망을 알리며 ‘심판의 시간이 왔음’을 다시 강조한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 형상을 예배하지 않거나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박해받고 죽기까지 할 것임을 환기시킨다.
사탄에게 하는 예배를 의미하는 짐승의 예배는, 요한계시록 13장의 표현대로 황제숭배를 뜻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충성을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 말은 황제 숭배도 문제지만, 삶의 방향이 더 큰 문제라는 뜻이다.
하나님 백성의 제사장적 역할
하나님께만 예배하라는 천사의 권면은 넓은 의미에서는 창조자께 복종하고 그에게만 충성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프로스키내인’을 그리스도인이 현실 속에서 해야 할 것과 그 이상으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하늘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롭게 사용된다.
요한의 묵시에 나오는 제사장적 역할은, 특히 곧 오실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이 있다. 그 때가 오면 죄를 짓고 타협하려는 유혹도 모두 사라진다. 요한은 모든 우상숭배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부른다. 이런 정황에서 볼 때, 이들 구절은 기독교 예배를 ‘매일의 삶 속에서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하늘의 예배
하늘 궁전은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복종과 경배를 실천함으로써 예배하는 곳이다. ‘프로스키내인’과 동사 ‘피프태인’ 혹은 ‘프로스 키네수신 애노피온 수’와 계속 같이 등장한다는 점은 시사 하는바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제시된 예배는 단순히 머리를 숙이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가 보여주는 그의 성품과 목적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창조자 하나님께 찬양 드림
요한의 묵시에서 중요한 대목마다, 하늘 잔치의 주인들은 특별한 자격과 역할을 한다고 암시하고, 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말하고 노래하는 뜻의 동사들이 ‘프로스키내인’과 함께 계속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찬양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배경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대한 절대 주권을 드러내고, 모든 생명이 그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함을 알려준다.
하늘 보좌를 배경으로 하는 찬양은 하나님의 보다 위대하고 강력한 왕권을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큰 복을 인정하고, 모든 적들이 무너질 마지막 때를 소망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어린 양의 주권은 이 땅의 통치자들의 허풍과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뛰어나다. 왕 중 왕이며 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광은 어떤 사악한 모방도 비교될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양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하나의 예배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천사들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과 같은 종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천사를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도, 예수의 예배를 막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5장은 하나님과 어린 양께 드리는 찬양을 하나의 예배 안에 집어넣고, 창조된 모든 것으로 반응하는 장면과 함께 막을 내린다.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찬양
어린 양이 인을 떼어 이 땅을 향한 일련의 심판을 시작하면, 열방의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한편 천사와 장로, 네 생물은 얼굴을 땅에 엎드리고 또 다른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구약 성경의 소망과 약속의 성취에 대한 찬양
요한의 묵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늘의 존재들이 구약의 약속과 소망을 성취하는 것을 선포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여기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모습은, 모두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와 경배의 모델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경배와 찬양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도 예시되거나 혹은 조금씩 드러난다. 찬양과 경배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혜택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하늘과 땅의 연결점
요한의 묵시에 등장하는 송영, 탄성, 찬양의 찬송들은 오랫동안 많은 기독교 찬양과 예배 서식에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 때문에도 그랬기 때문에, 가장 손쉽게 교회의 필요를 위해 차용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확인
하늘의 예배가 표현하는 근본적인 신학적 메시지는 다른 신약 성격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요한은 독자들에게 마지막 시대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미 도래했음을 증거한다.
요한의 목적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잘 지키고, 우상 숭배와 배교의 유혹을 모두 이겨 내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주권과 어린 양의 승리를 강조하는 찬양 자료들은 원독자들에게 원했던 바를 이루는 데도 매우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모임의 신학을 발견한다.
하늘의 예배를 같이 나눔
같이 모여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 읽혀지는 것을 듣고 토론하는 장면은, 원독자들에게도 같은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쓰인 것 같다. 이러한 예언을 듣고 모임 안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은, 탄성과 찬양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양하는 것은 신자가 보여야 할 중요한 모습이다.
결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부족과 언어와 민족과 나라에서 나아온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다 함께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할 이스라엘의 운명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들에게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도구로 이용하도록 격려한다. 새 언약의 공동체가 가진 ‘제사장적 역할’은 이들의 찬양이 중심이 된다. 이것은 믿음의 백성들이 같이 모일 때나 매일의 삶과의 관계 속에서도 똑같이 드러나게 된다.
10장 예배와 복음: 총정리
성경은 합당한 예배를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과 가능하게 하신 방법을 통해 나아가는 것, 혹은 ‘맞물리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숭배하며, 하나님과의 독점적인 관계를 가지는데 방해가 되는 자세나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포함된다.
신약 성경은 일차적으로 최초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예배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다음 단계로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과 이후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는지 보여 준다.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는 참다운 예배자를 세우셨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 신학은 진정한 기독교 예배신학의 핵심이다. 성부 하나님과 각 위들은 새 언약의 시대에 합당한 예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본적으로 신약의 예배는 복음을 믿고, 삶 전체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 아들의 인격과 사역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도는 하나님께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처음 인도하는 도구다. 신약 성경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동기와 준비를 갖추려면, 복음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 권면과 계속 접촉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하나님 말씀은 제대로 예배하기 위한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요소다. 예배 용어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지만, 선교를 위한 설교, 복음의 진리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 사역을 지원하는 것도 교회를 섬기는 사역의 일부이자, 예배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성경은 이해한다.
신앙 모임의 목적은 양육 혹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성령이 주신 은사를 성경이 가르치는데 사용하며 서로 섬긴다. 양육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찬양하거나 기도할 때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교회모임은 마지막 때 혹은 하늘에서 있을 하나님 백성의 교제를 미리 맛보여 준다. 이것은 예배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과 서로를 섬기는 사역이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복음은 신약 성경의 예배관을 설명하는 열쇠다. 예수는 시내산 언약이 정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체계를 완성하고 대체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교훈과 실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갱신했다. 이것은 메시아의 사역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복음을 통해 그리고 그의 성령을 통해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가 된다.
나가는 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원하는 교회라면 드리는 예배 내용을 계속 점검하고, 성경에 비추어 개혁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건강한 변화를 시도하는 교회를 보면, 설교는 현대 사회와 관련된 주제로, 가족 캠프는 성경 적용을 격려하는 시간으로 준비되고, 다양한 사역에 새로 시도할 수 있도록 돕고 감독하기 위해 소위원회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간다.
어떤 교파에 속한 교인이라도 예배에 대한 성경의 깊고 넓은 가르침을 정기적으로 접해야 하며, 이것이 전도, 양육, 믿음, 목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의 시각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의 시각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합당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하나님과 맞물리는 경험이다. 예배는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복음을 위해 섬기며, 생활에 기반을 준 활동이다.
평가
피터슨은 그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니콜스를 인용하여 “예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며 양보할 수 없는 사역이다”라고 서두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예배란 무엇이며, 또 신앙의 다른 쟁점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어서 ‘우리는 기독교적 예배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중요 질문의 답을 찾아, 이를 통해 보다 포괄적인 정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알아가고 다가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그 분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예수의 오심이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시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교회에서의 모임과 일상 속의 예배라는 개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면서 동시에 다음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살아 계시고 참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는 명제다.‘라고 전제하였다.
그는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1장과 2장에서는 구약을 중심으로 예배를 표현하는 주요 용어의 용례를 살피고, 다음 장에서부터는 다양한 신약 저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예배를 표현하는지 살펴보고, 배경을 자세히 검토하여 각자의 예배신학의 특징을 찾는 순서로 진행하였다.
피터슨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합당한 예배란 찬양, 일, 경외가 다 같이 포함되며,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함께하는 자리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여기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또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지막 장인 ‘예배와 복음: 총정리’에서 그의 연구결과를 정리하면서 ‘성경은, 합당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하나님과 맞물리는 경험이다. 예배는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복음을 위해 섬기며, 생활에 기반을 준 활동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원하는 교회라면 드리는 예배 내용을 계속 점검하고, 성경에 비추어 개혁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현대교회의 성찬식에 대해 ‘이를 공동식사와 완전히 분리해버렸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좀 더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성찬 방법을 개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기고 있다.
피터슨이 서두에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가장 적실한 문제이며, 또한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모든 주를 믿는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가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 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성경에 사용된 용례를 연구하여 이를 밝히고자 한 것은 대단히 유익하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연구방법을 통해 예배의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었으며, 이는 우리에게 또 다른 예배의 개선을 추진할 귀한 자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피터슨이 연구를 마치며 제시한 몇 가지 질문들은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을 위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것이며, 그의 헌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예배의 갱신을 위한 후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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