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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2)
2022년 8월 21일 / 마태복음 16:21-28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다. 그중에서도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것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은 공생애가 거의 끝나갈 무렵, 십자가를 지실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시지 않고, 끝 무렵에 가서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고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헌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께 요구하기보다는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여 ‘지금까지 지낸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까? 어떻게 하면 더 충성할까?’라며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충성을 다짐한다.
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밤낮 달라고 징징거리며, 감사하기보다는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어 복 받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평안하고, 잘되는 것은 좋아하지만 조금이라도 어렵게 되면 곁으로는 체면 때문에 말을 못 하지만 속으로는 ‘예수 믿어도 별 볼 일 없네, 예수 믿어도 장사가 잘 안되네, 예수 믿어도 병도 낫지 않네.’라고 투덜댄다. 심지어 시험과 환란이 많다고 원망하고 비난하다가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만일 제자들이 믿음이 없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너희들도 십자가를 지라’라고 하셨다면 누가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겠는가? 지레 겁을 먹고 다 도망쳤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성장하여 반석과 같은 신앙에 서서 신앙고백을 하기를 기다리신 후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손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제자들이라면 자원하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왜 그럴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난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모른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겪어야 할 고난이 있다.
사도행전 14:22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등 들르는 도시마다 모든 신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어떠한 박해가 오더라도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도 좁은 길을 걸으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등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령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1.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십자가이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인 경우도 많다. 예수님께서도 가족들의 핍박을 아시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까지 말씀하셨다(마 10:36).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첫걸음부터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각오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권능에 붙들려 사역하는 사도나 선지자라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은 극과 극이다. 즉 물과 기름 같아서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뜻은 쉽게 융화될 수 없는 관념의 차이 때문이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칭찬까지 받았지만 곧이어 벌여진 일은 큰 충격이었다.
마 16:21-23 /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절히 말하였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23)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평신도라 할지라도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어느 한 사람이 믿게 되어, 조상 앞에 제사를 거부하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제사 때 음복을 거부하여 가족들과 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데 화합이 이루어지겠는가?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하셨다(마 10:34).
교사로 봉직하시다가 은퇴하신 존경스러운 장로님 한 분을 만나 뵈었다. 이분은 부모님이 너무나 엄하셔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매를 많이 맞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기 때문에 자녀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자녀들이 다 잘 되어 큰아들은 대학교 학장으로, 작은아들 부부는 의사로 있으며, 그렇게 자신을 혹독하게 매질했던 부모님도 결국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때로는 화평이 도출될 때에 아픔이 따르기도 한다. 그래서 다투는 자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 식구인 것에 괴로울 때도 있다. 진정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진리를 붙듦으로 되는 것이지 단순히 일시적으로 다툼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믿으면 믿지 않는 자와 이런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믿고 붙들면 결국 화평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는 어느 정도 수용이 가능하지만, 유대교 당시에는 출교를 당하는 등,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였으니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준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2.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할 때 받게 되는 고난의 십자가이다.
자기 자신만 조용히 믿다가 천국에 가려는 사람에게는 없는 고난이다. 이 고난은 자발적으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고난이다. 사실 전도하고 선교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는지 모른다.
사도 바울의 경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의 학문을 공부했기 때문에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 가는 곳곳마다 매를 심하게 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받았으면서도 중단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끝내는 순교했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을 겪을 때 예수님이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백 배의 축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막 10:29-30 /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재산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은 박해를 받을지라도 장차 그 버린 것의 백 배로 돌려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계 20:4 / 또 나는 높은 이들이 앉는 자리에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 때문에 목이 잘린 사람들의 영혼과 그 악한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 받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다시 한번 예를 들며 교훈을 얻고자 한다.
■ <쿼바디스>라는 영화에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말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로 황제는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사람으로 자신이 사는 로마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상관없이 로마를 다시 만들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의 비난과 원망이 쏟아지자, 당황한 네로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방화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그래서 평소에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고 떠들지 않았느냐며 결국 불을 지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임이 틀림없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하여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원형극장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불을 지른 것은 네로였는데 피해는 기독교인들이 봤다. 이때 베드로도 사람들과 함께 일단 위기를 잠시라도 피하고자 급히 로마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가 예수님께서 로마를 향해 가시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한다.’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로마로 향했다.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을 수 있겠느냐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사람이 살기 위해 도망가다가 붙잡혀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야 순교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선포했다.
고전 15:31 / 사실 나는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 일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순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순교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순교자 못지않은 상급을 받게 될 줄 믿는다.
3. 모든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십자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 왜 그래야 하나?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서를 보면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수 주위에도 여러 성이 있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이들은 경쟁 관계로, 때로는 칼과 창을 들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신체 일부를 잃기도 했다. 그러니 원수가 오죽 많았을까? 나의 부모를 죽인 이도 원수고, 형제를 죽인 이도 원수다. 남편이나 처자식을 죽인 이도 철천지원수다. 그런 원수를 향해 2천년 전의 유대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다.
마 5:44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복수해도 속이 풀릴까 말까 한데 말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잊어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 예수님의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높다란 바위 언덕에 있는 예루살렘 성벽은 탄탄했다. 유대인들은 항전을 택했다. 폼페이우스는 안식일까지 기다렸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 물론 군사 행동도 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는 그 점을 노렸다. 안식일에 그는 성을 공격할 공성 병기를 위해 높은 토담을 쌓았다. 이를 기반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을 무너뜨렸다. 탑과 함께 성벽이 무너졌고, 벽이 갈라진 틈으로 로마 병사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됐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유대인들에게 로마 제국은 원수였다. 자신들의 거룩한 종교 행위를 전쟁의 아킬레스건으로 활용했으니 로마에 대한 증오심이 오죽했을까? 전쟁에서 패한 뒤 유대인들은 로마에 많은 곡식을 바쳐야 했다.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보내지고, 숱한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를 원수로 여긴다.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에 품었을 감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갈릴리 언덕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청중은 모두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터이다. 누구에게는 로마의 군대이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이웃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원수들을 향해 예수님은 파격적인 행동을 제안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마 5:45).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이들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만 하면 무조건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율법만 지키면서 그 길을 간다고 생각했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착각과 무엇이 다른가? 예수님은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어쩌면 그건 역사 속의 위대한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실제 원수를 그처럼 사랑한 사람도 있었다.
■ 산돌 손양원(1902~1950) 목사는 1948년 좌익과 우익이 충돌한 여수ㆍ순천 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좌익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두 아들이 좌익 학생에 의해 학살당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리기 위해 직접 구명 운동에 나섰다. 급기야 그 원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아들에게 못다 준 사랑을, 아들을 죽인 ‘아들’에게 건넸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손 목사는 몸소 따랐다.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에 우리는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는다. 그러면서 되묻게 된다. ‘그건 성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지고 볶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사람들은 아니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사람들까지 부담을 느낀다. 목표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는 마치 만년설이 쌓인 수천 미터 높이의 거친 산봉우리에 꽂힌 깃발처럼 아득하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 깃발을 뽑아라’라고 하는데, 우리는 발도 떼지 못하는 형편이다.
왜 그럴까? 첫 단추를 끼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두 번째 단추만 안다. 정작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첫 단추는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서를 관통하는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이치가 담겨 있다. 그 이치가 생략될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저 따라야 할 명령이 되고 만다. 그때는 복음도 짐이 된다. 유대인들의 어깨를 짓눌렀던 ‘율법의 짐’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했을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다음 구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예수님이 찍은 방점(傍點)은 ‘완전함’이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바람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셨다.
이제 첫 단추가 보인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첫 단추가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 첫 단추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처럼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전함이란 뭘까?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으라’라고 할 때 ‘완전함’이란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를 ‘완전함’이라 하셨다.
이제야 보인다. 예수님이 굳이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 말이다. 우리는 ‘절반의 그릇’이다. 내가 생각하는 선(善)만 담고, 내가 생각하는 악(惡)은 쏟아버리는 그릇이다. 하나님은 다르다. ‘절반의 그릇’이 아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빛을 비추는 그릇이다. 그러니 ‘절반의 그릇’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그릇을 키우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그릇이 되라는 말이다.
그리스어 성서를 찾아봤다.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뭘까?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완전함’은 그리스어로 ‘텔레이오이(teleioi)’이다. 거기에는 ‘완전한(perfect)’의 의미도 있지만, ‘완숙한, 성숙한(mature)’의 뜻도 있다. 그러니 쪼개진 절반의 그릇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인 그릇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진 것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짚어봐야 한다. 여기에 담긴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원수라 여겼던 상대로 인해 내가 더 큰 그릇이 됨을 말이다.
참고 / 중국 무협 영화를 많이 보면 대충의 줄거리를 알게 된다. 악당이 주로 주인공의 부모 혹은 스승을 죽인다. 주인공은 혹독한 훈련 끝에 무술의 고수가 된다. 그리고 악당을 찾아가 원수를 갚는다. 이럴 때 우리는 ‘원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철천지원수, 이런 말은 영화에나 등장하는 말로 생각한다. 나라를 짓밟거나, 부모를 죽이거나, 역사 드라마나 무협 영화에서처럼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한 ‘원수’는 그런 원수만이 아니다. 우리가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 있는 작은 원수까지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어떻게 되나? 내 안에서 먼저 미워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그 감정은 주로 독기로 가득한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쏘아볼 때, 그 눈빛에 서려 있는 독기. 그런 독기가 내 안에서 먼저 올라온다. 그 다음에는 그 독기를 상대방에게 쏘아댄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런 화살을 쏘고 또 쏘고 또 쏘다 보면 이상하게도 내가 점점 힘들어진다. 화살은 분명히 원수를 향해 쏘았는데, 구멍은 자꾸 내 가슴에 생긴다. 왜 그럴까? 독화살의 유통 과정에서 우리가 빠트린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면에서 미워하는 감정을 끌어올릴 때, 그 독기에 젖는 1차 피해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원수를 향해 날아가기 전에, 독기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적시게 된다. 그래서 독기를 뿜을 때마다 내가 먼저 취한다. 상대를 향해 날리기도 전에 나는 이미 독기에 젖게 된다. 그게 자꾸 반복되면 어찌 될까? 그렇다. 내 가슴은 독화살로 빼곡하게 박히게 될 것이다.
자꾸 초보적인 얕은 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하지 말고 길고, 깊고,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라.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자. 그리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자꾸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의하여 말씀을 행하려하니 힘든 것을 뛰어넘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18:21-22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다. 보통 후하게 생각해도 3번 정도이지만 베드로는 7번까지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하셨다. 이 말은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8:35).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옵고’(마 6:12)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다 용서한다. 내가 이렇게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주실 줄 믿는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기독교의 위대한 사랑이 있다.
다른 종교에는 이런 말이 없다. 특히 이슬람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악을 악으로’라고 철저하게 피의 보복을 명령한다. 사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한이 많이 맺힌 민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용서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고 있다. 어떤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의 생명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될 것이다. 참자! 참자! 참자! 그리고 사랑하자!!!
■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왕좌에 오르기 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적들이 무척 많았다. 루이 1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원수 노릇을 했던 사람들은 큰일 났다.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며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명단이 하나하나 작성되고 그 이름 옆에 왕이 직접 십자가를 일일이 긋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당사자들은 극형인 십자가를 생각하며 파리를 떠나 어디론가 도망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왕이 표시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십자가이다.
누가복음 14장 26~27,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27-29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사실 베드로는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주님께 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에 보면 때로는 선지자도 순교하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했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만을 토하기도 했다. 사실 환난과 핍박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신앙을 지킬 수 없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없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보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에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고 밑으로 파고 들어가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이 땅에서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도 영광이 있다.
로마서 8:16-18 /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시며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의 재산을 분깃으로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면 그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하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18)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상속받고 예수님과 함께 받을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고난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과 상급으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고난을 극복하자.
■ 시골에 사는 여 집사님이 너무나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집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듭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힘겹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다. 집사님은 예수님께 “주님! 주님은 목수시잖아요. 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요. 그러니 조금만 잘라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주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주셨다. 그래도 무거웠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주님께 더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사님이 잘라달라는 대로 말없이 다 잘라주셨다. 어느덧 천국에 다다랐다. 이 집사님이 천국에 와서 보니 각 사람이 모두 십자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 크기에 따라 상을 받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집사님의 십자가는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매우 작은 십자가였다. 그 순간 이 집사님은 깜짝 놀라 잠을 깼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는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예수님을 믿어도 그저 복이나 받고 평안하게 믿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도 조금도 수고하지 않고 천국에 간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결 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을 때 오는 위로와 평강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즐겁게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하며, 기독교 초대 순교자에 대한 글과 요한계시록 21:1-4 말씀으로 설교를 마친다.
■ 기독교 초대 시기에 순교한 분으로 먼저 폴리캅을 들 수 있다. 황제 트라얀 시기에 순교한 안디옥 감독 익나티우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그가 섬겼던 교회는 서머나 교회였고, 그곳의 감독으로 약 168년에 순교했다. 순교를 당하기 3일 전, 기도하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 곁에 있는 기둥을 보았는데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폴리캅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형을 당할 것으로 여겼다. 검거된 폴리캅은 암피트리테 (amphitrite) 사형장에 들어서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오, 폴리캅! 남자답게 강하고 담대하라! 고통에서 담대하라!’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에게 들려진 음성을 들었다. 곁에 서 있는 총독은 그에게 물었다. ‘나이를 고려하여 봐줄 테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는 것이 어때?’ 이 말을 듣자 폴리캅은 즉시 대답했다. ‘나는 86년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한 번이라도 부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모든 사악한 것에서 나를 보존하시고 나를 구원하실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화가 난 총독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폴리캅은 담대하게 말했다. ‘저의 뜻은 불변합니다. 환난을 받는다고 해서 선이 악으로 변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총독은 화가 치밀어서 그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폴리캅은 담대히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불로 위협합니다. 아쉽지만 그 불은 단지 얼마동안만 저를 불태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심판의 불은 영원토록 불경건한 자들을 불태울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야생동물이나 불을 지피십시오. 무엇을 명하시든지 저는 결코 저의 주님이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을 피우기 위해 건초들을 놓는 것을 보자 폴리캅은 옷을 벗고 신발을 벗었다. 장작더미에 세워둔 기둥에 그의 손에 못을 박으려고 하자 저항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자세에 사형관들도 감동을 받고 못을 박지 못하고, 줄로만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불을 지펴지고 화염이 치솟자 폴리캅은 외쳤다.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아들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신 당신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영원하신 제사장, 사랑하신 성자, 그리고 성령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자 화염은 그녀를 삽시간에 불태웠다. 이때가 약 168년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순교를 하였는데, 12명의 무명의 기독교인들이 폴리캅과 함께 순교했다. 여인들도 함께 순교했는데 잘 알려진 여인은 ‘블란디나’이다. 블란디나에 대해서는 라은성 교수가 쓴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특별히 58~59페이지에 나온 글이다.
블란디나는 끝까지 남아 있으면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만나자고 권면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마치 야생동물에 의해 죽기로 되어 있는 것보다 마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채찍에 맞아 온몸이 피로 물들었고 몸을 지탱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 후, 그녀를 불에 달구어진 의자에 앉혔다. 기력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몸이 타는 것을 알고도 저항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통과 공포가 오고 갔던 그녀는 이제 기진맥진하여 죽기 직전의 모습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그녀는 황소가 갇혀있는 감옥에 던져졌다. 황소는 자신의 뿔로 그녀의 온 몸을 쳐 받아서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채찍에 맞아 피에 물들고, 불에 탄 그녀의 온몸은 사람의 형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끝나고 순교를 당한 뒤 그녀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녀의 시신은 6일 동안 시민들에게 진열되었다. 그런 후, 그 시신은 불에 태워졌고 재로 만들어져서 론 강에 뿌려졌다. 이것은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계 21:1-4 / 그런 뒤에 나는 지금까지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져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선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바다가 없었습니다. 2) 그리고 나 요한은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에 단장한 신부가 내려오듯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3) 그때 나는 보좌에서 들려 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영원히 다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