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가이버칼(Swiss Army Knife)과 스위스 용병
빅토리녹스사의 128년 장수 히트상품, 스위스 아미 나이프
이 이름은 1891년부터 스위스 군대가 정식으로 이 칼을 장병들에게 보급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폭발물 해체에서 가구조립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이 나이프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연합군 병사들의 폭발적인 수요에 힘입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영화 맥가이버에서 주인공이 위기상황에 처할 때마다 애용하는
서바이벌 키트로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스위스의 명품은 시계, 맥가이버칼. 그리고 은행이다, 그러나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최고의 수출은 용병이었다 유럽전쟁에 가장 많이 용병으로 참여한 민족이 바로 스위스 인이다. 알프스산속 깊은 곳에 위치하다보니 경작지가 부족하고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높은 보수를 받는 용병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영세중립국 스위스는 그런 젊은 용병 위에 피어난 국가이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를 끝까지 지킨 이들이, 바로 스위스 용병이다, 프랑스 궁전수비대가 다 도망을 가도 그들은 끝까지 남아서 전사했다. 시민혁명군들은 그들에게 도망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계약기간이
6개월이 남아서 도망갈 수 없다"며 그들의 고용주를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
.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
마크 트웨인은 이 조각상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조각"이라고 표현했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의 영혼을 기르기 위한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끝이 부러진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와 스위스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부둥켜 안고있는 사자의 모습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과 루이 16세에 대한 충성심을 내려놓지 않았던 스위스 용병들의 최후를 연상케 한다. 당시 전사한 용병이 가족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도망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은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끝까지 계약을 지키겠다."
스위스 인들은 시계를 만들던, 맥가이버칼을 만들던, 용병을 하던 간에 그 일에 대한 장인정신을 보인다. 그것이 오늘날 스위스를 만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은 교황이 사는 곳이다. 그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들 모두 스위스 특수부대 출신들이다.
스위스에 용병제도가 창설된 것은 16세기였다. 그들이 맡은 처음 일은 프랑스에 고용되어, 이탈리아를 침략하는 일이었다. 프랑스가 스페인, 독일 연합군을 이끌고 교황청을 침범했을 때 교황을 지킨 것도 역시 스위스 용병이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교황청을 지키고 있다. 침략한 프랑스의 용병도, 교황청을 지켜낸 것도 모두 스위스 용병이었던 것이다.
여의도에는 금융가가 모여있다. 그중 튀지 않으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은행이 스위스의 UBS은행이다. 불법자금을 숨기는 곳,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금할 수 있는 곳, 스위스은행은 절대로 고객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다. 징역14년. 스위스에 가장 큰 범죄는 개인정보 유출이다, 스위스의 은행은 예금을 모아 어디엔가 투자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은행에 보관해주면서 보관료를 받는 개념이다. 용병을 해서 어렵게 번 돈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은행업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할 때도 스위스은행의 예금은 안전했다. 히틀러의 탱크와 대포도
스위스은행을 굴복시키지 못했다고한다.
바티칸의 근위대 (스위스 용병)
바티칸 근위대 문장
우측 하단은, 바티칸 근위대를 창건한 율리우스 2세의 문장으로 영원한 붙박이 문장이고
좌측 상단은,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문장이며, 중앙은 현 바티칸 근위대장의 문장이다.
1506년 1월 22일 율리우스 2세가 창건해 510년째 내려오는 바티칸 근위대
매년 5월6일, 바티칸에서는 스위스 신참용병들의 교황과 교회에 대한 충성서약식이 거행된다
근위대의 충성서약을 받은 교황 프란치스코
바티칸 스위스 용병 전통은 1506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추기경 시절 이들 스위스 용병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6월 교황청을 지키는 상비군으로 용병을 파견해줄 것을 스위스에 요청했다. 이에 150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무려 720㎞를 걸어 이듬해인 1506년 1월 22일 교황청에 도착해 임무수행에 들어갔다. 바티칸을 지키는 군대인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의 공식명칭은 '코홀스 헬베티카(Cohors Helvetica)'이다.
스위스 용병의 용맹함은 13세기말 시작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부터다. 그후 모르가르텐 전투, 라우펜 전투, 젬파르 전투, 네펠스 전투, 알베도 전투, 성 야콥 엔 비르스 전투, 모라 전투, 마리냐노 전투, 파비아 전투, 카펠 전쟁 등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항상 스위스 용병이 함께 했다.
또 1527년 스페인 군대가 교황청을 공격했을 당시 스위스 용병 189명 중 147명이 사망하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도피를 도운 일화는 유명하다. 또 나폴레옹군대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스위스 용병은 1798년 교황 피우스 6세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대부분 전사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로마에 진격했을 때도 죽음으로 독일군들의 바티칸 진입을 막아냈다. 루이 16세 역시 자신을 지키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을 고용했다. 스위스 용병은 1792년 8월10일 궁전으로 쳐들어온 반란군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가 약 500명이 모두 숨졌다. 프랑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근위대 제복의 색상에서
파랑과 노랑은 율리우스 2세의 델라로베레 가문을, 빨강은 레오 10세의 메디치 가문을 상징한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르네상스시대 화려한 복장에 타조 깃털을 꽂고 있는 바티칸 근위대는 스위스 군대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19~30세의 로마 가톨릭 신자 중에서 선발한다. 근위대에 뽑히면 칼과 창은 물론 권총 등의 현대 무기 사용법과 테러진압술까지 배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가장 신용할 수 없는 것이 용병”이라고 말했다. 염불보다는 잿밥(급료)에 관심이 많은 용병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도 용병들의 배반 때문이었다. 503년 동안 바티칸을 지켜오고 있는 스위스 용병은 스위스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Swiss Army Knife (一名 맥가이버칼)의 양대 메이커
빅토리녹스(Victorinox)와 웽거(Wenger)
웽거와 빅토리녹스 로고
빅토리녹스(Victorinox)
빅토리녹스의 '스파스탄'
맥가이버가 드라마 속에서 사용하던 빅토리녹스 나이프의 종류는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주로 사용하던
빅토리녹스 나이프는 주로 '스파르탄' 모델이다. 스파르탄은 빅토리녹스에서 가장 대중적인 제품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나이프와 병따개, 와인용 스크류를 가지고 있는, 빅토리녹스하면 떠오르는,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 바로 스파르탄이다.
빅토리녹스의 '사이버툴'
빅토리녹스 나이프가 레더맨의 자동차를 고치는 데 적합하진 않았지만, 지난 130년 동안 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사이버툴은 컴퓨터의 위기와 생명을 구하는데 좋을 물건이다. 이름처럼 전자기기를 위한 툴이다.
특히 드라이버 팁을 내장하고 있어 육각과 십자드라이버 등 풀고 조이는 용도로 적합하다.
멀티툴(Multi Tool)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스위스의 빅토리녹스(Victorinox)는 1889년 독일어권의 슈바이츠에서 설립되어 1891년부터 스위스 육군에 도검류(刀劍類)의 납품을 개시했다. 빅토리녹스의 회사이름은 설립자 칼 에스너가 모친의 이름 '빅토리아(Victoria)'와 스테인레스를 뜻하는 프랑스어 '이녹시다블르(Inoxydable)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들었다.
빅토리녹스는 37명으로 구성된 '스위스 칼 조합'을 결성하여 1891년 스위스 군대에 칼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1897년에는 조금 더 가볍고, 코르크 마개를 딸 수 있는 스크루를 넣어 장교용 칼을 만들면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 PX에서 판매되어 대량으로 팔리게 된다. 특히 미국의 36대 대통령인 린든 존슨이 나이프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 4000명의 손님에게 증정했으며, 도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 대통령도 이를 따랐다.
'주머니 속의 작은 칼'이라 불리며 128년이 넘는 시간동안 위험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으며, 우주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웽거(Wenger)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이 제품의 정식 명칭은
'웽거 16999 자이언트 스위스 아미 나이프'이다. 길이, 너비, 폭이 각각 30cm, 27cm, 11cm인
이 제품에는 족집게, 이쑤시개, 송곳, 리머,드라이버,나이프, 돋보기, 손톱깎이, 렌치, 오프너 등
87종의 각종 공구가 장착되어 있다. 이 도구들을 이용해 141가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1914년 2월 19일 출시한 웽거의 마지막 나이프 "Evo Wood 10'
웽거(Wenger)는 1893년 프랑스어권의 레몽에서 테오 웽거에 의해 만들어졌다. 1889년 스위스 부대는 새로운 소총을
도입했고, 소총을 분해할 수 있는 공구가 필요했다. 빅토리녹스의 공급량으로는 스위스의 부대에 대량 납품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8년 스위스는 두 브랜드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군부대에 절반씩 납품하기로 결정, 두 브랜드는 모두
동일한 사양으로 군인들이 사용하게 된다.
2013년, 멀티툴 시장 세계 1위와 2위를 다투던 두 브랜드는 통합되었다. 빅토리녹스가 웽거를 인수합병한 것이다.
이전엔 빅토리녹스는 'Original Swiss Army Knife' , 웽거는 'Genuine Swiss Army Knife' 라고 표기했으나, 현재는
'Victorinox Swiss Army Knife'로 표기하고 있다.
맥가이버칼은 어떻게, 누가 만들었나?
웽거(Wenger) 나이프
빅토리녹스 최고 히트 상품인 '스위스 챔프'
19세기 후반 400여년간 전쟁에 휩싸이지 않고, 영세중립국으로 살아온 스위스이지만, 그 평화 뒤에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않고, 군인들의 개인물자에 까지 신경 쓰고 있던 때였다.
1886년 스위스 육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제식 나이프를 갖추게 하기로 결정했다. 이 나이프는 소총 앞에 끼어 넣고 적진 앞으로 달려 가는 총검이 아닌 그야말로 작은 나이프이다. 그 당시엔 한 개의 칼로만 이루어진 휴대용 나이프였고, 곧이어 병사들과 그들의 장비 모두를 조사한 후 곧 그들의 소총을 분해결합 하는데 필요한 스크류드라이버를 추가 하였다.
1889년 새로운 형식의 제식소총이 등장함에 따라 군 전체의 장비로 제식나이프를 통일 하기로 했다. 이때 스위스군은 소총 악세사리, 다용도 나이프의 새 모델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것은 칼과, 송곳, 스크류드라이버, 그리고 병따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1890년 솔져나이프라는 것이다.
솔져나이프는 스위스 칼 생산업자들의 대량생산 능력부족으로, 독일의 칼 생산 산업의 중심지인 졸링겐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그 때 스위스 칼 장인 중 한사람이 '스위스군대는 스위스 칼을!' 이라는 모토에 도전하게 된다. 그가 바로 칼 에스너이다. 그는 1884년에 나이프 생산 공장을 설립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빅토리녹스(Victorinox)의 모태가 된다. 그는 다른 동업자들의 도움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위스 각 지역 37명의 장인들과 함께 스위스 칼 제조업길드를 만들었다.
그들의 노력은 성공했으며, 군은 엄격한 요구사항을 기초로, 스위스제 군용나이프를 채용하기로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베른에 위치한 Fabrique nationale d’armes가 생산을 거부해 칼 에스너가 공급기회를 잡게 되었다. Forges de Vallorbe와 길드의 다른 여러 칼 장인들 역시 공급자로서 이름이 올라갔다.
1890년, 칼 에스너를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장인길드 친구들이 솔져나이프를 군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93년, 2번째로 Jura지방의 Courtetelle에서 스위스 칼 장인들이 스위스 아미나이프의 납품업자가 되고자 집결하게 된다. 그 후 1908년 스위스군의 정식 공급자가 되었다.
당시 스위스는 무려 4개의 언어(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사용하는 복잡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 비는 각각 64%:20%:8%:1%로 이루어졌다. 비록 독일어 사용주민들보다는 수가 적지만 2번째로 다수를 이루는 프랑스어 사용 주민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스위스 정부는 바로 프랑스어 사용지역인 Jura지방의 Courtetelle의 장인들의 아미나이프 군납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로서 이 두 메이커를 제외하고는 어떤 회사도 십자표시의 스위스 문양을 아미나이프에 적어 넣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빅토리녹스는 "Original Swiss Army Knife" 라고 부르게 됐고, 웽거는 "Genuine Swiss Army Knife"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