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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주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June 28,1912 – August 14,1996)
루마니아 태생의 지휘자.
1996년 8월 14일, 첼리비다케의 죽음과 함께 단원들이 ‘쏴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지휘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유독 첼리비다케에게만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첼리비다케는 ‘구시대적 지휘자’로서의 면을 다 부여잡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도 채 안되어 뮌헨 필은 그의 뜻을 어기고 녹음들을 팔아치웠다.
물론 그 녹음들이 첼리비다케에 대한 세기적인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만들고 음악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라는 첼리비다케의 말처럼 음악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첼리비다케는 "자유롭기 위한 인간혼의 예술" 이라고 말했다.
..."음악이라는 것은 살수도 팔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영상이 있다고 해도 단순히 손이나 머리카락의 흩날림, 흔들리는 지휘봉, 연주자의 몸짓 등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나는 결코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지휘자의 인격이나 예술혼을 레코드나 영상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웃고 울고 감격하는 이 모든 것, 레코드란 단순히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비록 내가 제국의 변방에 태어나 변두리에서 자라 그의 음악을 비롯해 유수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는 기쁨이란 것을 음반을 통하지 않고는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겠지만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란 생각이다.
음악을 본질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란 현장에서 듣고, 가슴에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추억이 얽힌 음악이 있다는 것도 결국 그런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지 않는가?
연주는 '그 순간만이 살아있는 것'인데 어떻게 생명력을 복원해 둘 수 있냐는 그의 말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음악의 생명은 현장에서 연주하는 일회성인 것이지,내일 다른 곳에서 똑같이 연주될 수는 없습니다.
레코딩은 음악가에게 선전효과와 돈을 가져다 주겠지만 그것은 이미 진짜음악이 아니지요."...
그렇다.
첼리비다케의 말대로 스튜디오에서 수십 번의 연습을 거쳐 잘된 부분만을 요리조리 편집하여 만든 음반은 단지 듣기에는 좋겠지만 '진짜가 아닌' 음악이다.
모름지기 음악에는 작곡자와 지휘자의 혼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철저히 현장주의적인 그의 음악 철학에서 그가 진정한 음악의 수호자였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한다.
현대 기술 문명이 가져다 주는 어떤 음향의 연속적인 머무름에 대항해서 단 한 번이기에 획득되는 청중과의 교감을 높이하고 음악만이 존재하는 거룩한 시간의 순간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청중에 대한 음악가의 의무여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간혹 짖궂은 사람들이 첼리비다케와 카라얀을 비교하곤 한다.
첼리비다케 역시 살아 생전에 이런 비교 혹은 조롱섞인 질문을 받곧 했다.
한 번은 어떤 이가 첼리비다케에게 녹음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카라얀만큼 유명하지 못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때 첼리비다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코카콜라도 유명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레코딩을 기피하고 혹독한 연습 끝에 울려 나오는 그의 음악은(열 번의 연주 중에서 아홉을 버린다 해도) 연주자의 혼이 느껴지고 눈물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단 한 번의 연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첼리비다케를 진정한 거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첼리비다케의 음악을 이젠 연주회장에서 들을 수 없다.
첼리비다케는 자신의 연주 레파토리 중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 전통의 교향곡들을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또한 루마니아 태생답지 않게 프랑스 음악의 연주에서도 상당한 해석을 보여 주었다.
1970-1980년대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필의 군주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후임자 문제를 두고 한창 입방아를 찧은 적이 있었다.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던 카라얀을 두고 벌어진 토론이라 결국은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항상 마지막 해답으로 남았던 이름은 바로 루마니아 출신의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도 극도로 엇갈렸다.
거의 몰아지경으로 첼리비다케를 음악의 구세주라고 찬양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고집불통 마에스트로로부터 베를린 필을 수호하기 위해 모병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반대파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첼리비다케의 추종자들이나 그를 헐뜯는 파들이나 한 가지 부정할 수 없었던 사실은 그가 음악의 구세주든 악마의 화신이든간에 음악적 진실을 찾기 위해 고독한 투쟁을 벌여온 ‘이 시대의 마지막 마에스트로’라는 점이다.
첼리비다케에게 중요한 것은 연주 자체가 아니라 음악의 미학과 윤리를 수호하고 순수한 음향예술을 구원한다는 명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상업적인 음반 녹음은 물론 표피적인 내용의 기사로 일관하는 언론에 대해 극도로 거부감을 보이곤 했다.
첼리비다케가 신으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부여받은 선택된 예술가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40년대 젊은 첼리비다케에게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신들린 음악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도 했다.
여기에 발칸의 고집불통이라는 악의적인 별명도 있다.
이런 엇갈린 표현들이 한데 어우러져 첼리비다케의 신화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1912년 6월 28일, 루마니아의 이아시에서 태어난 첼리비다케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천재성을 보였다.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그의 음악인생은 오늘날의 신화를 생각할 때 참으로 엉뚱하게도 부카레스트에 있는 한 무용 교습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취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3류 무용교습소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 첼리비다케는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후에 베를린으로 옮겨온 그는 철학과 수학을 계속 전공하는 한편,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여 중세 말기 복합음 체계 부분의 대가로 불리는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의 지휘 테크닉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미 학업 당시부터 훤칠하고 날씬한 체구에 정열적이면서도 비애가 서린 이국적 마스크로 주변의 눈길을 모았던 첼리비다케는 발칸반도 출신다운 급한 성질과 못말리는 고집으로 당시부터 이미 상당수의 적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우아한 제스처에 투우사의 고독한 신비를 지닌 첼리비다케는 원보에 충실하면서도 지고의 미를 창출하는 데 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청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연주자들에게는 독재적 기질과 흑표범처럼 포효하는 불 같은 성격으로 되도록 멀리하고 싶은 기피 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1946년 전후 폐허더미가 된 베를린에서 34세 열혈 첼리비다케에게 일생일대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우상이기도 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가 나치 협력 전과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직을 반강제로 내놓은 후, 후임자로 뽑힌 레오 보르카르트(Leo Borchard)가 취임 직후인 1945년 8월 23일 거리에서 한 군인이 실수로 발사한 총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해 8월 29일 처음으로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잡은 첼리비다케는 1946년 단원들의 투표를 통해 임시직 상임지휘자로 베를린 필에 등극했다.
1952년,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 무대에 복귀할 때까지 첼리비다케는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베를린 음악계에 독일 작곡가는 물론 차이코프스키,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에서 프랑스 인상파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로 베를린 필에 새로운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사면되어 다시 돌아온 푸르트벵글러와 그의 부재 7년간 베를린 필을 갈고 닦아놓은 첼리비다케 사이의 긴장은 피할 수 없었지만, 1954년 11월 30일 마지막 연주회까지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 단원들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첼리비다케의 이런 믿음은 푸르트벵글러 타계 후,1 957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선거에 의해 그 후임으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선출되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는 첼리비다케 일생을 통해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그는 투표결과를 자신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단원들의 범죄적인 (첼리비다케의 표현) 음악관에서 나온 실수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첼리비다케의 음악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단원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야단치고, 고함을 질러대며 레퍼토리 선정에서 편협하고 고집을 부리는 데다가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솔리스트들에게까지 신랄한 야유를 보이는 태도 등으로 첼리비다케는 이미 단원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오페라는 음악도 아니라며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배제시켰고, 돈벌이가 되는 음반 녹음 계약이 들어올 때마다 가차없이 거절해 버리는 것에 단원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첼리비다케 대신 한참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카라얀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당시로서는 깊은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오페라 반주나 음반 녹음도 가리지 않는 상업적 감각을 지닌 현대적 지휘자였다.
반면 첼리비다케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인물로 평가됐다.
베를린 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첼리비다케는 곧바로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북구·남미 등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카라얀이 버티고 있는 베를린이나 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 음악계를 상대로 한 그의 고독한 싸움은 시작됐다.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예리한 그의 말솜씨는 곧 음악계의 메가톤급 독침으로 불리게 되었다.
때로는 타락해가는 음악계 판도를 통탄하고, 때로는 단순히 남을 비난하며 내뱉는 그의 언사는 날카로운 관찰과 사고가 근저를 이루고 있지만, 가끔은 터무니없는 독단과 응석에 불과하기도 했다.
아방가르드 음악과 베를리오즈, 말러에 대해 독설을 퍼붓고 오페라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음악이라고 가차없이 깎아내리는가 하면 점점 커가는 음반시장이 진정한 음악을 죽이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첼리비다케의 유명한 독설에 희생된 지휘자들과 정치인들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그를 두고 한 비평가는 아무도 없는 사막에 홀로 서서 지칠 줄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는 주책이라고 비난한 적도 있다.
1961년, 첼리비다케는 오랜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스웨덴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를 맡으며 다시금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1975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독일로 돌아왔다.
음반녹음이라면 알레르기를 보이던 그가 하필이면 라디오 방송 오케스트라를 두 번이나 거친 속사정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첼리비다케는 1979년 루돌프 켐페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직을 수락하면서 음악인생의 절정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는 지난 17년 동안 혼신을 다해 뮌헨 필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악관을 독일과 러시아,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해석을 통해 다큐멘터리로 남겼다.
첼리비다케는 독일음악의 전통을 고수해온 지휘자이다.
어두운 색조로 밑바탕을 칠한 후 베이스로 단단한 기초를 다지고, 여기에 유기적인 복합음 체계를 형성해 가며 간간이 부드러운 관악기로 감칠맛을 낸다.
그러나 극적인 효과는 일체 배제했으며, 음악적 도금은 금기시했다.
또한 그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좋은 연주가 나온다는 대명제를 신봉하고 있었다.
정확한 연주를 위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험했고, 따라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지휘자를 둔 덕에 뮌헨 필 단원들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실신상태 직전까지 갔지만, 그를 통해 음악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지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차원을 넘어 철학과 음향학의 원칙들을 실현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는 에드먼드 허셀의 현상학 이론과 선불교의 종교철학을 기본으로 하여 음이 태초에 태동했던 과정을 거슬러 찾아 올라가 작품 스스로가 말하도록 만드는 것을 음악적 완성으로 보았다.
첼리비다케는 악보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으며, 멜로디와 반주로 구성된 단순한 도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음향의 수평·수직적 관계, 리듬과 하모니, 음의 색채와 구성 등 섬세한 디테일까지 추적함으로써 음악의 위대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첼리비다케 특유의 느린 템포는 많은 비평가들에게 공격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말년에 오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는데,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을 지경까지 늘려진 그의 거북이 템포는 대다수 청중들에겐 일종의 고문이었다.
그러나 첼리비다케는 복잡한 악보일수록 정확히 연주하기 위해서 템포를 늦추어 음악적 공간을 확대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지휘하는 연주회는 늘 예정보다 엄청나게 늦게 끝나는 일이 허다했지만, 청중들이 더 이상 고문을 참아낼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신비스럽게도 서로 겹쳐져 함께 흘러가는 선불교적 체험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첼리비다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비밀스런 매력이다.
음반 녹음을 음악의 패스트푸드라고 비난했던 그에게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청중간에 오가는 은밀한 감정의 교류와 피부에 와닿는 음악적 감동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첼리비다케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사망하기 2년 전부터 심장질환으로 고생해 온 데다 얼마 전부터는 디스크 증세까지 겹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죽음에 가까워서는 자기 생전에는 절대로 뮌헨 필 무대에 세울 수 없다는 지휘자들의 명단인 악명높은 ‘첼리비다케 블랙리스트’까지 철회한 노거장의 심경변화를 두고 주변 인물들은 죽음이 임박한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제 남독일 음악계의 대부로 추앙받던 마에스트로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음악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전 인생을 음악적 진실을 지키기 위해 고독한 투쟁으로 점철했던 첼리비다케의 사망에 대해 로린 마젤(Lorin Maazel)은 “세계 음악계는 금세기 가장 위대했던 음악의 수호자를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뮌헨 필의 이사인 헬마 슈틸러는 첼리비다케를 이 시대 마지막 남았던 공룡에 비유하면서 그의 위대한 음악성과 카리스마가 아니었다면 뮌헨 필이 세계를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는 그동안 첼리비다케의 후임자를 둘러싸고 무성했던 소문과 억측으로 노거장이 심적으로 타격을 받았던 것을 가슴 아파하며, 벌써부터 후임자 문제에 관해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언급을 회피했다.
이미 오래 전에 독일 국적을 취득했던 첼리비다케의 여권에 최근까지도 주거지가 베를린으로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그를 제치고 카라얀을 택했던 죄의식에 시달려 온 베를린 음악인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다.
고집불통에 일방통행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변할 줄 몰랐던 첼리비다케는 그토록 믿었던 베를린 필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38년간이나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
1992년에 가서야 당시 독일 대통령이던 폰 바이츠제커의 중재로 베를린 필과 화해의 연주를 했던 그는 연주장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홀이 아닌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를 고집했었다.
끝까지 그 불 같은 성질은 못 버린다고 코웃음쳤던 베를린 필 단원들은 40년 이상을 베를린에 대한 애정을 혼자만 속으로 지키고 살아왔던 마에스트로의 죽음 앞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첼리비다케의 시신은 8월 17일 토요일 파리 시내에 있는 묘지에 안장됐다.
기계복제시대의 예술가는 버림받은 존재이다.
그것은 대중에게 봉사한다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대중의 입맛을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하는 아픔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통조림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그것에는 유통과 수요와 공급과 시장이 있다.
그리고 배후에는 체제가 있고 돈이 있는 것이다.
첼리비다케의 사후 그의 음반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생전에 녹음된 음악을 그토록 혐오했던 첼리비다케였지만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깡통에 담겨 일반에게 유통되었다.
푸르트벵글러와 첼리비다케가 고전 음악의 내면적 전통에도 충실한 구시대의 음악가들이었다면 카라얀은 시대의 흐름을 따랐지만 음악적 전통이란 점에서는 나름대로 충실했던 음악가였다.
어쩌면 첼리비다케는 그가 살아 생전에 심취했었다는 불교 철학에 입각해서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기록의 예술이 아니라 순간(찰나)의 예술인 음악의 본질에 가장 충실했던 음악가였을 것이다.
이제 와서 카라얀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음반과 영화, 비디오 등을 통해 불멸을 꿈꾸었던 카라얀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첼리비다케도 기억한다.
인간은 기억함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욕심이 한낱 부질없이 느껴지는 것, 동시에 그의 욕심이 이해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첼리비다케가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줄 새로운 괴짜들이 없는 시대가 슬프다.
이제 푸르트벵글러도, 카라얀도, 첼리비다케도, 게오르그 솔티도 떠났다.
신들의 시대에 황혼이 내린다. - 출처:진화영 / ‘객석’ 베를린 통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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