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1892]王勃(왕발)-送杜少府之任蜀州 (송두소부지임촉주)
王勃 <送杜少府之任蜀州>
[작자 소개]
王勃(650~676)은 자가 자안(子安)이고
강주(絳州) 용문(龍門, 山西省 稷山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어 천재 소리를 들었다.
고종(高宗)의 여섯째 아들인 패왕(沛王)의 수찬(修撰)을 지내다가
고종의 노여움으로 해직되어 수년간 사천 지방을 유랑하였다.
28세 때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던 부친을 만나러 가다가 익사하였다.
정치적인 좌절로 인한 불만을 토로한 작품이 많고,
시형은 오언율시(五言律詩)와 오언절구(五言絶句)가 많다.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이라 불린다.
<送杜少府之任蜀州>
-촉주로 벼슬 가는 두소부를 전송하며
城闕輔三秦, 風煙望五津.
與君離別意, 同是宦遊人.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無爲在歧路, 兒女共霑巾.
삼진이 둘러싸고 있는 장안 성궐에서
바람과 안개 가득한 오진을 바라본다.
그대와 이별하는 이 마음
우린 다 같이 벼슬살이로 떠도는 사람이지.
천하에 지기만 있다면야
하늘 끝에 있어도 이웃과 같으리니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아녀자같이 눈물로 수건을 적시지 마세.
[주석]
1. 杜少府(두소부) : 미상. 소부(少府)는 현위(縣尉)의 별칭이다.
참고로 촉주(蜀州는 사천 숭주(崇州)를 가리킨다.
2. 城闕輔三秦(성궐보삼진) : 장안의 성궐이 삼진(三秦)에 의해 보좌되다.
삼진은 장안성 부근의 관중 지역으로 지금의 섬서성 동관(潼關) 서쪽 지역이다.
원래 진나라의 땅이었는데,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망시킨 후
관중 땅을 세 명의 진나라 장수에게 분봉해 주어 삼진이라 부른 것이다.
일설에는 삼진을 경성(京城) 장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이 구를 ‘장안 성궐이 경사를 보호하다’로 풀이하기도 한다.
3. 五津(오진) : 민강(岷江)에는 백화진(白華津)ㆍ만리진(萬里津)ㆍ
강수진(江首津)ㆍ섭두진(涉頭津)ㆍ강남진(江南津) 등 다섯 개의 나루터가 있는데,
이를 합칭하여 오진(五津)이라 하며 모두 촉에 있다.
4. 宦遊人(환유인) : 고향을 떠나 벼슬길을 나선 사람.
5. 海內(해내) : 온 세상, 천하.
6. 存知己(존지기) :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7. 天涯(천애) : 하늘 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비유한다.
8. 比隣(비린) : 이웃.
9. 無爲(무위) : 하지 마라. ‘무(無)’는 금지명령사.
10. 歧路(기로) : 갈라지는 길.
11. 霑巾(점건) : 수건을 적시다.
[감상]
이 작품은 상당히 성숙된 오언율시에 근접해 있다.
평측이 근체시 시율에 수련의 앞부분에서 송별 장소를 밝히고
동시에 우인에 대한 작자의 관심과 동정을 표현하고 있다.
‘풍연(風烟)’은 아득히 먼 길을 묘사한 것이지만 우인이 떠나는
벼슬길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함련은 우인의 신세가
물위를 떠도는 고주(孤舟)와 같음을 묘사하면서 작자 자신도
관직을 찾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작자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통해 우인을 위로하고 있는데,
바로 ‘지기(知己)’라는 시어가 이것을 의미하고 있다.
送杜少府之任蜀州 송두소부지임촉주
王勃 왕발
城 闕 輔 三 秦 성 궐 보 삼 진
風 煙 望 五 津 풍 연 망 오 진
與 君 離 別 意 여 군 이 별 의
同 是 宦 遊 人 동 시 환 유 인
海 內 存 知 己 해 내 존 지 기
天 涯 若 比 隣 천 애 약 비 린
無 爲 在 岐 路 무 위 재 기 로
兒 女 共 沾 巾 아 여 공 첨 건
送杜少府之任蜀州 송두소부지임촉주
王勃 왕발 649 - 676 = 27세.
送杜少府之任蜀州 王勃
城阙辅三秦,风烟望五津。
与君离别意,同是宦游人。
海内存知己,天涯若比邻。
无为在歧路,儿女共沾巾。
城闕輔三秦,風煙望五津。
與君離別意,同是宦遊人。
海內存知己,天涯若比鄰。
無爲在歧路,兒女共沾巾。
송두소부지임촉주 왕발
성궐보삼진,풍연망오진。
여군리별의,동시환유인。
해내존지기,천애약비린。
무위재기로,아녀공첨건。
送杜少府之任蜀州 / 送杜少府之任蜀川
朝代:唐代
作者:王勃
原文:
城闕輔三秦,風煙望五津。
與君離別意,同是宦遊人。
海內存知己,天涯若比鄰。
無爲在歧路,兒女共沾巾。
王勃(649或650~676或675年),唐代詩人。漢族,
字子安。絳州龍門(今山西河津)人。
王勃與楊炯、盧照鄰、駱賓王齊名,世稱“初唐四傑”,
其中王勃是“初唐四傑”之首。
왕발[王勃]
요약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 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다.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등을 남겼다.
출생-사망 650 ~ 676
자 자안(子安)
국적 중국 당(唐)
출생지 중국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주요저서 《왕자안집(王子安集)》
자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이라고 한다.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나
쓰촨[四川] 지방을 방랑하였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양형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발 [王勃] (두산백과)
왕발 [王勃]
출생 - 사망 650년 ~ 676년
자가 자안(子安)이며 강주(絳州) 용문(龍門 = 현 산서(山西) 직산(稷山)) 사람이다. 6세 때부터 문장을 쓸 만큼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교지령(交趾令)으로 좌천해 간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가다가 26세 때에 강물에 빠져 요절하였다. 왕발은 수의 유명한 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며, 시인 왕적(王績)의 조카로 시문에 뛰어났다.
특히 그의 「등왕각서(呻王閣序)」는 변체(騈體) 산문으로, 당대 변문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백세에 전해질 불후의 가작이다. 전해 오는 그의 시가 많지 않으나, 5언시 30여 수는 나름대로의 시의 높은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다음 「산중(山中)」은 고종인 이치(李治)의 아들이 투계(鬪鷄)를 좋아하자, 이를 풍자하여 「격영왕계문(檄英王鷄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고종의 미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한 뒤 강가에 노닐 때에 여수를 읊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슬프다! 장강에서 이렇게 오래 머뭇거리다니,
만리 밖에서 돌아갈 것을 생각한다네.
또다시 가을의 소슬한 바람 불어 오고,
산마다 단풍잎은 날리는데.
長江悲已滯, 萬里念將歸.
況復高風晩, 山山黃葉飛.
[네이버 지식백과] 왕발 [王勃]
[출처] [한시] 送杜少府之任蜀州 / 送杜少府之任蜀川 王勃 송두소부지임촉주 왕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