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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묵상글 ( 12월 22일. - 가장 낮은 자에게 가장 풍성한 은총.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6:0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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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22 05:11
- 가장 낮은 자에게 가장 풍성한 은총
저는 성사의 은총을 믿고 실제로 성사를 주면서
제가 은총을 받는 경험도 아주 많습니다.
고백성사를 줄 때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분도 은총을 받으셨지만 저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특출함이 없는 분이고 그래서 자신을 아주 비천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뭘 해도 자신이 없었고 하고 나서도 남의 평가나 눈치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가 싫다고 했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분이야말로 성탄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번에 성탄의 은총을 받게 될 거라는 격려를 해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아기 예수로 오실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인간에게 칭찬을 많이 받아 의기양양한 사람은
아기 예수로 비천하게 오시는 주님을 절대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런 주님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인간에게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이
하느님을 칭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가 칭찬받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칭송하겠습니까?
자기가 받는 칭찬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 것이기에
하느님께 인정받고 구원받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오늘 마리아처럼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봐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을 칭송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지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듯
가장 좋은 하느님의 은총도 가장 낮은 자에게 흘러 가장 풍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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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빈자(貧者)의 영성
<노래의 힘>
성서의 ‘가난한 이들’(anawim)의 노래들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6일째 12월22일 <O후렴>의 간절한 기도가 흡사 성서의 가난한 이들인 ‘아나빔(anawim)’의 기도같습니다. 어찌보면 하느님 앞에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생노병사의 인생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인 가난입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들, 이것이 인간의 정의이며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옛 현자들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인간은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바탕이 드러난다.”<다산>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알게 된다.”<논어>
가난의 밑바닥에서 진짜 그의 영성이 드러납니다.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의 영성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구원의 하느님을 향해 희망의 노래를 기쁘게 부르며 인간 품위를 유지했습니다. 흡사 불암산 바위산에 무수히 억척스레 뿌리 내린 <작은 푸른솔들>과도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른 희망을 노래하며 부정적 비관적이 아닌 긍정적 낙관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정부부처의 업무보고시 대통령에게 극찬을 받은 산업통상부 장관의 <30% 가짜일 줄이기> 프로젝트에 감탄했지만 빈틈이 없는 완벽한 실용주의적 관점에 우려감도 들었습니다. 일이든 사람이든 매사 완벽할 수 만은 없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쓸모있는 30%도 함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적당한 <복된 빈틈>입니다. 물이 너무 맑아 투명하면 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가을 바위>란 시가 생각납니다.
“듬직한 바위
굽이굽이 타고 오르던 담쟁이들
붉게 물드니 꼭 머리에 화관을 쓴 듯 귀엽다
바위에도 낭만이 있네
멋쟁이 바위네
담쟁이들 은혜 갚네
허허 웃는 바위
붉게 물들어 가는 얼굴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있음의
편안함이여!
아름다움이여!”<2000.10. >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의 쓸모있음의 편안함을,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보호자되어 주시는 사회의 보석같은 존재들이요 이들이 있어 유지되는 사회입니다. 인공지능(AI) 만능의 윤리 부재의 시대! 실용적 관점의 잣대시 반드시 드려다 봐야 할 <영성의 결핍>이요, 역설적 진리인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의 내적현실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이들이 바로 가난한 어머니들입니다. 성서만 아니라 예로부터 우리뿐 아니라 가난한 민초들은, 어머니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이들이 가난을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게 했던 것이 노래였습니다. 노래의 힘이 이 가난한 어머니들을, 민초들을 살려냈습니다. 시의 힘, 노래의 힘은 이미 우리의 <아침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우리의 숱한 민요들도 이에 대한 빛나는 증거입니다. 중국의 시경 역시, 성서의 시편집처럼 가난한 이들의 노래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가난과 절망의 질곡에서 구원해 낸 것이 바로 이런 노래였고 우리 가톨릭 교회 가난한 이들의 노래집이 바로 시편집입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확연히, 선명히 대비되는 우리 성서의 가난한 이들, 아나빔의 노래입니다. 비관과 절망중에 한풀이 노래와는 달리 하느님을 향해 희망과 기쁨의 구원을, 불의한 압제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 가난한 이들의 승리를 노래했으니 바로 찬송가(canticle)입니다. 어찌보면 불순하고 불온한 혁명을 부추기는 노래로 들릴 듯 하지만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영적혁명의 찬송가였습니다.
바로 그 좋은 증거가 오늘 제1독서 한나의 노래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가난한 민초들의 염원을 두 가난한 어머니들의 입에 담아 자기들의 노래로 삼아 부른 가난한 민초들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제1독서에서 한나가 실로의 주님의 집에 사는 엘리에게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봉헌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찬미가입니다.
그대로 마리아가 예수 아들을 잉태한 후 바치는 오늘 복음의 찬미가의 예표가 됩니다. 마친 한나와 마리아는 주님 찬미의 여전사, 믿음의 여전사같습니다. 이들의 영적무기는 바로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이들의 노래는 가난한 공동체들의 노래이자 개인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단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한나의 노래는 다음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됩니다.
“그분께서는 통치자들을 왕자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처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반전되는 혁명을 노래한, 희망이라곤 하느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을 향한 소원과 갈망과 희망과 기대를 담아 노래한 감사와 찬미의 영적혁명가입니다. 바로 이런 성서의 가난한 이들, 아나빔의 후예가 가톨릭교회의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이요, 이런 빈자의 영성을 살고자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매일 저녁성무일도시 부르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찬송가입니다.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참된 정신이자 영성은 바로 아나빔의 <가난과 겸손, 찬미와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가난한 아나빔의 생명과 사랑의 잔치가 이 고마운 미사전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아나빔인 가난한 우리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Rejoice in the Lord always).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4;4,5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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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당신 영혼이 주님 앞에서 용약하며 기뻐하는 이유를 참으로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7-48)
이는 마리아의 관상을 잘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가 관상한 하느님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하신 하느님입니다. 곧 작고 비천한 자리에 들어오시기 위해, 더욱 더 작아지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해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보다 더 작고 비천한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기보다 더 작아지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작고 비천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 작고 비천함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준 복된 자리임을 알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의 진원지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낮고 어둡고 보잘것없는 자리, 곧 ‘변방(邊方)’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분 영광의 자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빛나고 높고 큰 자리, 곧 ‘중심(中心)’은 하느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이 노래는 “변방”의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앞에 열어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현존, 곧 당신 자신의 ‘크심’을 아낌없이 내려놓으시고, 아주 작고 보잘것없고 허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작은 모습으로 계신 하느님이요. 뿐만 아니라 있는지도 없는지도 그 존재를 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마치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현존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가 되거나 뭔가를 이루어 내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랑의 충만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정, ‘자신보다 작아진 주님’을 만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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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종대왕은 1446년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했습니다. 580년 전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불편해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 28자의 글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사용하기 쉽게 했다.”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트랜스 휴먼’이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생체공학을 이용해서 인간의 몸에 자동차의 부품처럼 심장, 손, 발을 대체합니다. 유전적으로,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와 질을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유전적으로 손이 없던 여성은 생체공학 팔을 부착한 후에는 바느질과 같은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색을 구분할 수 없던 남성은 색을 소리로 변환할 수 있는 칩을 머리에 이식해서 색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심장질환으로 심장이식을 받아야 했던 환자는 완벽한 인공심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체공학은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의 세대는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뉴욕에서 손을 움직이면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 런던에 있는 팔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고 합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생체공학으로 몸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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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첫 번째 육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21일 일요일- 쉰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육화를 단순히 하느님이 예수님으로 태어나셨다라는 사건으로만 이해하면 너무 좁은 해석이 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지혜를 바탕으로 리처드 로어 신부는 육화가 예수님의 탄생보다 훨씬 이전, 곧 우주의 탄생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창조의 첫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완전히 보이지 않는 분이셨을까요? ‘이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하셨을까요?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주 자체가 영원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일까요? — 마치 예수님 자신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창조의 ‘어떻게’나 심지어 ‘언제’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주로 답하려는 질문은 ‘왜’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창조에는 어떤 신적 의도나 목표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창조주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영원한 지혜 전통들 대부분은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설명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물질적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래는 영(Spirit)으로만 존재하던 어떤 근원적 원천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근원은 어떻게든 자신을 유한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흘려보내어, 바위에서 물, 식물, 생명체,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분께서 물질적 창조 안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이 사건이 바로 ‘첫 번째 육화’(영이 육체 안에 깃드는 모든 사건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였으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두 번째, 인격적 육화’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화(Incarnation)’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은 예수님의 탄생을 떠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급진적으로 하나 되셨음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첫 번째 육화가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된 순간이었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물질적 우주와 하나 되시며 모든 것 안의 빛이 되신 그 순간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창조 첫날의 주제가 ‘빛’인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육화(Incarnation)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되신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일반적인 말인 ‘살(flesh)’로 묘사합니다(요한 1,14). 요한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인간들 안에서, 산과 풀잎, 혹은 찌르레기와 같은 피조물 안에서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온 존재 안에 깃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태초의 본형(Primordial Template)’ 곧 로고스(말씀)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이러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제 종교적 믿음을 새롭게 틀지어 주었고,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더 넓게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들 가운데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는 점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창조적이고 영원하며 사랑 가득한 힘 안에서 지탱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 모든 물질, 모든 공허, 그리고 어둠에도 참된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시며, 우리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창조를 체험하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로서 아시는 그 체험을 즐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로서 아시는 것을 즐기는 것만큼이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순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Heather C.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21), 12–1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ciej Wodzyński,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여름의 데이지 꽃과 겨울의 얼어붙음은 모두 하느님의 숨결로 존재하며, 각각은 신적 펼쳐짐의 빛나는 표현입니다. 곧, 우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육화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전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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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
겸손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낸 마리아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마리아의 이 말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며 자신이 온갖 복을 받은 것은 모두 거룩한 은총 덕분이라 믿었음을 드러냅니다. 자기 스스로 볼 때는그리스도의 비천한 여종에 지나지 않지만, 거룩한 은총과 관련해서는, 모든 민족이 한목소리로 경탄할 만큼 일시에 높은 자리로 들어 올려지는 영광을 입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6
성령은 빠르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를 신화시킨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시편 46,4).
신적 은총의 감화를 받아 신적 고귀함을 “맛본” 영혼은 이제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 곧 언짢고 역겨운 것들을 만나지만, 만물 중에서 최고의 것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영혼이 자기보다 높은 데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로, 나는 영혼이 자기보다 높은 하느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립니다. 설령 영혼이 다른 모든 것을 벗어나 지극히 높은 자유에 이르고, 자신의 순수하고 신적 본성으로 하느님을 건드린다고 해도, 하느님이 몸소 영혼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영혼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영혼은 결코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고귀함과 본성이 영혼보다 뛰어나기는 하지만, 피조물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혼은 자신이 하느님을 이해할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훔친 물이 다른 물보다 더 달콤한 맛을 낸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완전한 영혼은 다른 것과 결부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혼은 만물에게서 벗어나서, 신적 자유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만이 영혼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53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묵시 7,9-17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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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 즉 마니피캇을 함께 묵상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구원 역사 안에서 한 젊은 여인이 드린 가장 위대하고 겸손한 찬미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기억하게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천한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큰 구원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같은 희망을 줍니다. 세상에서 작은 이들,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는 이들... 그 모두를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에 대한 정의를 말합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개인의 감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하시는지에 대한 선언입니다. 주님은 교만한 이들을 낮추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느님의 정의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믿음의 확신에서 나오는 기쁨의 고백입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이루어질 구원을 확신하며 찬양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면, 반드시 완성하십니다. 아직 응답받지 못한 기도 속에서도, 우리는 미리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을 노래하는 대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구원을 노래하라고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믿고, 이미 주어진 은총을 찬양하며, 정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마리아의 노래를 이어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미사와 기도를 통해 드리는 모든 찬미가 마리아의 마음과 함께 하느님께 닿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슬픔은 이기는 게 아니야.
어떤 드라마의 대사였던 것 같습니다.
‘슬픔은 이기는 게 아니야.’
정확한 의미를 가늠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이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슬픔은 이기는 게 아닙니다.
슬픔은 외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은 떨쳐내는 것도 아니고
슬픔은 묻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은 함께하는 동반자입니다.
슬픔은 위안이 필요한 내 모습이며
슬픔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슬픔은 그저 나의 친구입니다.
슬픔을 통해 다가오는 은총이 우리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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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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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가톨릭 신부로 산 지 벌써 27년째입니다. 신부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과분한 존중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중해 줍니다. 갓 신부가 되었던 30살에서부터 “신부님” 하며 존경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분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존대해 주셨고, 어린 나이와 설익은 인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옛날이야 교육받은 사람이 적었기에 고학력이라 할 수 있는 신부가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사제의 독신은 특별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를 따져봅니다.
딱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종종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처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의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것처럼 착각했음을 인정합니다.
신부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과 재주로 사는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성무일도 저녁 기도 때마다 바치는 그 아름다운 찬가, 그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인사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사무엘기 상권 2장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합니다. 불임이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바친 찬양을, 이제 구세주를 잉태한 마리아가 완성하여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내가 무엇을 했다’라는 성취감이 아닌,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루카 1,49)라는 경이로움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보통 삶 안에서 자기가 한 일에 관한 성취감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바라보는 것에 더 집중하십니다.
성모님의 진정한 겸손함입니다. 즉, 스스로 ‘비천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우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한 곳에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누우실 가장 따뜻한 구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자기 능력과 재주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드러낼 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덕분에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일상의 성실함에서 성취되는 행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짜 행복입니다(정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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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엄청난 부족함에도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삶~~~
겸손은 스스로 “내가 겸손하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이미 사라집니다. 겸손은 자기 과시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을 드러내려는 행위 자체가 겸손을 부정합니다. 오래 전 한 설교자가 “나를 지금의 사람으로 만든 것은 나의 겸손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겸손을 자랑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로드 롱퍼드(Lord Longford)가 인용한 일화에서는 어떤 사람이 “겸손에 관한 최고의 책은 내가 직접 쓴 작은 책이다”라고 답합니다. 이 역시 겸손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랑을 드러내는 아이러니입니다.
마리아의 말, 곧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겸손과 영광이 동시에 드러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차이는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 베다(†735)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판단으로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겸손한 종이었지만, 은총에 의하여 자신이 들어 올려지고 복되다 선포된다고 말한다….”
또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은총은 자기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선업이나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수 세기 뒤 성 베르나르도(클레르보, †1153)는 같은 점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라도, 하느님의 마음 안에는 다른 평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비의 아버지,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의 아버지시여! 왜 우리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저는 압니다,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보물이라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습니까? 당신 눈에는 우리 모두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당신 앞에서는 그렇지만 당신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진리의 판단에서는 그렇지만, 당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길은 당신의 계약과 성실을 찾는 이들에게 자비와 진리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계약이며, 진리의 성실입니다.”
우리의 에고는 전략적 목적을 위해 겸손한 척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된 겸손이라는 아름다운 덕 절대 가질 수는 없습니다. 참된 겸손은 에고가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에고를 넘어서는 것에 진지한 관심이 없다면,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풀어보면, 사실 교만한 자란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며, 그들의 에고가 하느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 자기 생명과 사랑의 원천을 거부하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머튼은 기도를 단순히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겸손한 태도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의 행위이다. 참된 기도는 우리의 빈곤을 드러내며, 그 빈곤 속에서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겸손은 기도의 본질이며, 기도는 겸손을 실천하는 가장 깊은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기도는 내 욕망이나 지향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매 순간 '나'를 찾아오시는 그 하느님을 내 존재의 자리, 즉 '내' 마음에 맞아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언제나처럼 이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간 두 사람의 비유(루카 18,5-14)를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기 자신에게만 향해 있었고, 그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을 트림하며, 취기에 들뜬 냄새를 내뿜었다”고 아우구스티노는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지만, 그가 눈을 들지 못한 바로 그곳에 그의 마음이 있었다.”
오늘은 토마스 머튼의 짧은 묵상 글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창조된 우리]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지 않은 데도 사랑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억지로 그런 어떤 환상을 믿도록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엄청난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솔직히 얼마나 많은 면에서 사랑스럽지 못한지를 인식해야 하지만 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현실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국은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렇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순수한 겸손으로 이루어진 삶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우리는 우리가 아닌 바와 우리인 바를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가 실제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겉만 번지르르한 값싼 옷과 같은 외적인 가짜 자신을 벗어 던져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 진정한 자신이 갖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든 부족함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거대하고도 매우 단순한 품위 안에서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창조되었고, 본래부터 우리에게는 하느님 당신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이기심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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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대림 4주간 월요일 -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존재
(Week 04. 기다림 속에서 완성되는 선물 / 임신 29–40주 / 대림 4주)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존재
#머무름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기다림
루카 1장 46–56절의 마니피캇은 대림시기의 정점에서 울려 퍼지는 영혼의 찬가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감사의 표현을 넘어, 하느님께서 어디에 머무시기를 선택하셨는가를 드러낸다.
마니피캇은 최초의 감실인 동정녀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 세상에 울려 퍼진 첫 신앙 고백이며 첫 복음 선포다. 마리아의 자궁은 신성과 인성이 만나는 첫 번째 성전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실존의 가장 연약한 순간, 아직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는 태아의 상태로 인간성을 취하셨다. 이 육화의 신비는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거처로 삼으신 하느님의 선택을 보여준다.
마니피캇은 특별한 만남의 자리에서 불려졌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임신 6개월이었고 마리아는 막 임신한 상태였다.
마리아의 인사를 듣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이가 기쁨에 차서 뛰놀았다. 그리고 그 직후, 마리아의 노래가 시작된다.
이 장면은 단지 두 여인의 만남이 아니다. 두 태아의 만남이기도 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서로를 인식하고 반응한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태아를 단순한 생물학적 단계로 보지 않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존재, 은총을 주고받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증언한다.
현대 의학은 후기 임신기의 태아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구별하고, 외부의 소리에 반응하며, 안정과 불안을 감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성경이 증언한 태아의 인격성은 현대 과학을 통해 다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임신 29주에서 40주에 이르는 시기는 생명이 완성을 향해 깊어지는 시간이다. 태아는 더 빨리 나아가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머무른다.
이 머무름 속에서 감각은 정교해지고, 호흡은 준비되며, 세상과 만날 준비가 이루어진다.
마니피캇은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노래다.
교만한 이들, 권세 있는 이들,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선포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지킬 힘도, 자신을 주장할 말도 없는
가장 무력한 태아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셨다.
29주 이상의 태아는 이미 살아 있으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바로 이 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선택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존엄은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율성이나 생산성에서도 오지 않는다.
존엄은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바라보신 사실에서 시작된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마리아는 약 40주 동안 자신의 몸 안에 하느님을 품고 기다렸다.
이 기다림은 수동적인 대기가 아니었다. 마리아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생명을 보호하고, 자라도록 허락하는 능동적인 협력의 자리가 되었다.
임신 29주에서 40주까지의 시간 역시 그렇다.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 가장 깊이 보호받아야 할 시간이다.
나는 대림시기에 이 태아의 여정을 함께 묵상하며
모든 생명이 지닌 신성함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대림의 촛불처럼,
태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희망의 표징이다.
비천한 이의 기도
비천한 종을 돌아보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가장 작은 생명 안에 머무십니다.
어머니 태중의 아기들을 축복하시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이루게 하소서.
마리아처럼 생명을 품고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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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마리아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녀는 비천함을 경험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비천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표현합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은 비천함으로 끝나지 않고
들어 높여지기 때문인데
그렇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마리아 자신도 비천함에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마리아가 경험한 하느님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어려움을 생각하면
우리는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우울에 빠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더 힘든 이유는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즉 고통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을 경험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우울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한계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이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은 희망의 하느님이기에
마리아는 꿈꿀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믿음은
우리가 꾸는 꿈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우리는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꿈꿀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서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탄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가장 큰 선물은
희망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추운 겨울 날씨지만
하느님께서 오시기에
마음만은 따스한 나날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을 받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기쁨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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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46-5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주님의 탄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에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맞이하는 그 참된 기쁨을 온전히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부터 알아야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기쁨에 벅차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성모님의 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걸러내야 할 거짓 기쁨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참된 기쁨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쁨은 마음이 흡족하고 즐거울 때 느끼는 긍정적이고 행복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그가 지닌 성격이나 지향, 가치관에 따라 그 감정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달라지지요. 세속적인 성공이나 명예를 최고로 여기는 보통의 세상 사람들은 다분히 ‘이기주의적’인 기쁨을 누립니다. 어떤 일을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낸 것임에도, 자기 실적은 최대한 커 보이게 부풀리고 다른 이들의 도움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뒤로 숨깁니다. 그렇게하여 그 일이 주는 성취감을 독차지하고 다른 이 앞에서 자랑하기에 바쁠 뿐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반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할 줄 아는 ‘덕’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일을 이룬 것이 다른 이의 도움 덕분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압니다. 그 겸손과 감사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일으켜 모두가 함께 느끼는 기쁨이 커지고 상대적으로 오래 가지요. 그러나 이 역시 인간적인 기쁨이기에 그 크기와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이와 다릅니다. 성모님의 마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덕’이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에 감사할 줄 아는 수준이라면, 마음 속에 ‘신앙’을 갖추고 계신 성모님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생겨도, 그로 인해 큰 희생을 치르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게될 지라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마저 반드시 ‘선’을 이루실거라 믿기에 자신을 그 소명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넘어 ‘찬미’를 드리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누리는 기쁨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기쁨보다도 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참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참된 기쁨은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얻어지는 만족 같은 게 아니라, 나를 만드신 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가장 좋은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보람과 행복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나라는 존재를 충만하게 채워주고 완전하게 만들어 주지요. 어떤 일을 내 힘으로 해냈다는 성취감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 성취감이 오히려 내 행복을 갉아먹습니다. 성취감이 클수록 욕심도 커지고 교만해져서 왠만한 것으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만 늘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이 점점 더 크고 강한 자극을 찾다가 아예 기쁨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참된 기쁨을 하느님의 뜻에서 찾아야겠습니다.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가 돌보셨던 성모님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그래서 모두 함께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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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2월 22 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오늘의 복음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정확하게 말해서 감사 송가 또는 감사 시편으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담고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마리아가 하느님을 향하여 올리는,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이 표현됩니다(46-50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사실 마리아는, 하느님이 당신에게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신 만큼, 당신을 사랑하셨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을 수 없는 충동에 싸여, 하느님이 당신을 채워주셨으며, 그분은 당신에게 매우 좋으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책임을 부여하거나 놀라운 선물을 건네줄 때,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대접을 받기에 부족한 몸입니다.” 하는 겸손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올리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개별적으로 사랑해 주시며 신뢰하고 계심을 깨닫기 위해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놀라운 일들을 마음을 다하여 진솔하게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그 찬송의 영역을 더 넓혀 갑니다(51-55절).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 보이신 구원의 몸짓들을 연이어 찬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선성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곧 아브라함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당신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을 향하여 세세대대로 펼쳐집니다: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 곧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당신의 자비로 거두어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마리아를 통하여, 전능하신 분께서 이제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큰일, 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데서 출발해야 함을 새깁니다.
오늘 하루, 자신이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자랑하는 하루, 비천한 존재를 통해서 하느님은 큰일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외치는 하루, 그럼으로써 곧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할 수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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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45
12월2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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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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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정호철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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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찬가 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상봉하는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기구하고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 길을 걸어 찾아온 여인은 10대 미혼모입니다. 맞이한 여인은 놀랍게도 노산(老産) 중의 노산을 앞둔 호호백발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서로 상봉하자마자 기쁨 충만한 찬가를 주고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두 여인의 뱃속에 든 아기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만남인 듯 한데,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비결은 활기차고 충만한 성령의 현존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옛 백성 전체를 대변한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새 백성 전체를 대변합니다. 이로서 인류의 두 위대한 어머니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의 서막을 찬양하는 동시에, 마리아의 놀라운 믿음을 칭송하고 축복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2-45)
엘리사벳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 ‘주님의 어머니.’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노래에 이어 마리아께서도 응답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신약 성서 내 여러 찬가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찬가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는 라틴어로 ‘찬미하다.’(Magnificare)라는 동사의 3인칭 Magnificat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마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을 향한 마리아의 찬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위업(偉業)을 노래하는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역사(役事)하심, 그분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니피캇은 종말론적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개인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부족한 자신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후반부는 공동체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제 막 체험하게 될 종말론적 대사건의 해설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니피캇은 마리아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 각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홀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기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 찬미가를 부를 것을 기대하십니다.
매일 저녁 기도 때 마다 마니피캇을 노래하는 모든 수도자와 사제,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업적을 큰 목소리로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새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이 노래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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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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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 항상 기쁠 수 있는 이유>
찬미 예수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중국 황제에게 일본 천황이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 나이팅게일'을 선물합니다. 태엽만 감으면 언제나 똑같은 박자로 완벽한 노래를 부르는 기계 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감탄했고, 숲에 살던 진짜 나이팅게일은 초라해 보여 숲으로 쫓겨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떻게 되었을까요? 황금 새의 부품이 마모되어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고, 황제는 병이 들어 죽음의 문턱에 섰습니다. 그때 숲에서 진짜 나이팅게일이 날아와 노래합니다. 기계 새는 누군가 조작해야 노래하지만, 진짜 새는 생명으로 노래합니다. 황제는 그 생명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건강을 되찾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숲으로 쫓겨났던 진짜 새는 슬펐을까요? 아마 잠시는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속 노래했을 테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받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가짜 새는 다릅니다. 상품성이 떨어지고 태엽이 풀리면, 더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화려해도 내면은 늘 불안합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기쁨을 세상에 팔리는 '상품성'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창조주에게서 오는 '은총'에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조화'의 인생이고, 후자는 '생화'의 인생입니다.
오늘 복음과 마태오 복음 6장을 연결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들판의 꽃 한 송이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의 옷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든 명품, 즉 상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위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걸친 것이었습니다.
입을수록 낡아지는 조화와 같습니다.
반면 나리꽃은 아침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이슬과 햇살을 머금고 새로 피어납니다. 살아있는 생화는 언제나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기에, 그리고 그 덕분에 누군가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기에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쁨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조화가 되기도 하고 생화가 되기도 합니다.
생화는 타인의 시선보다는 창조자에게서 오는 기쁨에 초점을 둡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가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비천한 여종이었지만, 성령으로 구원됨을 느끼며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받으려 했기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 진열대에 올리려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보상과 인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 끝은 자신이 그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좌절감뿐입니다.
세기의 아이콘 마릴린 먼로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조화'였습니다. 그녀는 화려했지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늘 불안했습니다. "나는 대중의 것입니다. 내 몸도, 내 웃음도."
그녀는 자신을 대중에게 팔려야 하는 상품으로 여겼기에, 인기가 떨어질까 봐 극도의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생명수)을 느끼지 못했기에, 약물과 알코올로 시든 꽃잎을 억지로 붙이고 있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이클 잭슨, 어니스트 헤밍웨이,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최근의 지드래곤까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조화가 아닌 생화로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동화 『벨벳 토끼 인형』에 아주 감동적인 대화가 나옵니다. 장난감 방의 반짝이는 새것들 사이에서 낡은 토끼 인형이 지혜로운 말 인형에게 묻습니다. "진짜가 된다는 건 태엽이 감겨서 움직이는 건가요?" 말 인형이 대답합니다. "아니란다. '진짜'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아이가 너를 오랫동안 진심으로 사랑해 줄 때 일어나는 일이야. 털이 빠지고 눈이 떨어져 나가도, 사랑받는 존재는 낡아지는 게 아니라 '진짜'가 되는 거란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세상의 눈에 우리가 조금 낡아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진짜 생명'이 됩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매일 강론을 씁니다. 하지만 저는 강론을 '잘' 해서 여러분께 박수받는 상품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강론을 쓰기 위해 묵상하는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성령의 깨달음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강론을 들어주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가 주님 앞에 앉아 사랑받음을 느끼고, 그렇게 저는 비로소 사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생화)가 열매를 맺기 위해 스스로 끙끙대며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지의 유일한 의무는 나무(예수님)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조화는 붙어 있지 않기에 스스로 빛나야 하지만, 생화인 가지는 붙어 있기만 하면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 곧 성령이 저절로 꽃을 피웁니다.
오늘 하루, 세상의 진열대에서 내려와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이 말씀에 머무를 때, 우리는 비로소 향기 나는 생화가 되어 세상에 참된 기쁨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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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종대왕은 1446년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했습니다. 580년 전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불편해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 28자의 글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사용하기 쉽게 했다.”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트랜스 휴먼’이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생체공학을 이용해서 인간의 몸에 자동차의 부품처럼 심장, 손, 발을 대체합니다. 유전적으로,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와 질을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유전적으로 손이 없던 여성은 생체공학 팔을 부착한 후에는 바느질과 같은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색을 구분할 수 없던 남성은 색을 소리로 변환할 수 있는 칩을 머리에 이식해서 색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심장질환으로 심장이식을 받아야 했던 환자는 완벽한 인공심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체공학은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의 세대는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뉴욕에서 손을 움직이면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 런던에 있는 팔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고 합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생체공학으로 몸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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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한나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아들 사무엘을 봉헌하고자 사제에게 가는 내용인 오늘 독서와, 한나의 찬가로 이루어진 화답송은 복음에서 듣는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의 예표입니다. 한나가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죽이시기도 살리시기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높이시기도 하십니다.(1사무 2,6-7 참조) 한나는 그런 주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교회가 날마다 시간 전례의 저녁 기도에서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인간적 가치들이 뒤바뀜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권력과 부유함을 내세우는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고 겸손과 비천함과 가난을 고백하는 이들을 선택하십니다. 마리아의 공로는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은 데에 있습니다.
이 노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 부분과 예수님 탄생 이야기 사이에 자리하기에 기대와 성취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이 노래에서는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미 이루어졌음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구세주이시자 전능하신 분 그리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그분의 속성을 한 낱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비’입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는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한 두 여자가 만나 단순히 서로 격려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리아가 신약의 구원자를 엘리사벳이 속한 구약으로 모셔 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구원자를 모셔 갈 때, 마리아처럼 복된 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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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1.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는 노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크기를 자신의 전 존재, 곧 영혼과 마음으로 찬양한다. 이 찬미는 단순한 입술의 노래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응답이라는 점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리아의 영혼은 주님을 위대하게 하고, 마리아의 정신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자신 안에서 그분을 드러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I,26) 즉, 마리아의 노래는 단지 자신의 은총 체험을 넘어, 그리스도를 품은 모든 이들의 찬미의 모범이다.
2. 겸손과 은총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대목을 해석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대하게 한 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겸손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Sermo 10 de Sanctis, 3) 이 고백은 마리아가 단순히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넘어, 은총의 전형으로 세워졌음을 보여 준다.
3. 교만한 자와 가난한 자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여기서 굶주린 이는 단순히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반대로 부유한 자는 스스로 충만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신비로 해석하며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음식으로 주셨다. 그러나 자기 배를 채운 자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Adversus Haereses V, 34,2) 곧, 하느님은 굶주린 자들의 양식이시며, 성체성사 안에서 이를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신다.
4.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
“그분께서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마리아의 찬미가 끝맺음은 언약의 성취를 선언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가르친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의 자비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충만히 드러났는지를 보여 주는 노래이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되었다.”(Deus Caritas Est, 41) 마리아의 노래는 곧 언약의 성취를 노래하는 교회의 찬미이다. 그래서 교회는 매일 저녁 기도(성무일도)에서 이 노래를 바친다.
5. 영성적 적용
마리아는 단순히 말씀을 잉태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시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품고, 말씀을 삶으로 낳아주셨다. 따라서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신앙은 곧,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마리아는 믿음 안에서 복되신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교회가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이다. 교회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봉헌하며,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다.”(RM, 43) 마리아의 찬미가 마니피캇은 겸손한 영혼의 찬미, 언약 성취의 노래, 교회의 일상적 기도의 핵심이다. 마리아가 성탄을 준비한 방식은 바로 말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었고, 이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성탄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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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에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
그때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ㄴ-49ㄱ)
믿음께서 나에게
믿게 하셨으니
나는 믿음이렵니다
희망께서 나에게
희망하게 하셨으니
나는 희망이렵니다
사랑께서 나에게
사랑하게 하셨으니
나는 사랑이렵니다
기쁨께서 나에게
기뻐하게 하셨으니
나는 기쁨이렵니다
온유께서 나에게
온유하게 하셨으니
나는 온유이렵니다
자비께서 나에게
자비롭게 하셨으니
나는 자비이렵니다
베풂께서 나에게
베풀게 하셨으니
나는 베풂이렵니다
돋움께서 나에게
돋우게 하셨으니
나는 돋움이렵니다
이룸께서 나에게
이루게 하셨으니
나는 이룸이렵니다
살림께서 나에게
살리게 하셨으니
나는 살림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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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받기를 원하면, 메시아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46-56)
1)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 자신의 개인적인 찬양이 아니라, 공적인 찬양입니다. 즉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마리아가 ‘주님의 구원 사업을 찬양한 찬미가’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곧 모든 신앙인의 기쁨이고, 마리아의 행복은 곧 모든 신앙인의 행복입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고백한 말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메시아 강생’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구원하려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신 일입니다.
2) ‘마리아의 노래’의 내용은 뒤의 6장에 있는 ‘참 행복과 불행 선언’ 말씀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 6,20ㄴ-21ㄴ)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카 6,24-25ㄴ)
‘참 행복 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고, ‘불행 선언’은 심판받을 것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 약속과 경고가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감사드리면서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3)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드리고 찬양했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감사드리고 찬양한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의 구원 사업은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도 회개하고,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낮추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재물을 하느님처럼 떠받들면서, 절대로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 모든 것을 잃고 허무하게 멸망할 것입니다.>
4)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하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을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난 때문에 더 재물을 원하고, 더 탐욕에 빠지고, 부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부유하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권력과 재물 편에 서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더라도 가난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하느님 나라만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 쪽으로 가시는 분이니, 우리도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지만, 그 구원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만 받게 됩니다.(50절)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권력이나 재물 같은 것에는 관심 갖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에만 집중하는 이들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 즉 구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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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탄이 코앞에 다가왔다. 낯선 카드와 선물을 받으며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직 카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과분한 선물을 받기만 하며 빚을 진다. 전화기를 이용해 소식을 받고 전하는 데 익숙하여 따뜻한 정을 잊었다. 어느새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받는 것에 익숙한 자신을 성찰하며 거듭 태어나는 성탄을 맞이한다.
마리아는 시골의 보잘것없는 여인으로,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7-48)
주님께서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고 희망이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한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위축되어 힘들어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알고 계시며 인정해 주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지금은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빛나는 존재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하고 고백하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충실한 삶을 살았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길 바란다. “저희가 믿음을 증언하는 삶으로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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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면,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칭송에 노래 형식으로 응답합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역사를 찬양하면서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주님을 향한 찬송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일을 완성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강함을 보여 주시려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를 누리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으며, 부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낮은 이들을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자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세상의 권세와 부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권세에 취하여 교만하고 부유한 이들이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낮은 위치에 두고자 하십니다.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낮추신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를 통하여 실현된 ‘역전’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하느님 체험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낮은 이가 되어 하느님의 위대함과 자비를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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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가져다준 기쁨과 놀라운 믿음을 지닌 여인들의 찬미가를 들려줍니다. 우선 루카 복음서는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 노래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 가장 복되시며”(1,42)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기쁘게 칭한 데에 대한 마리아의 답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선물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마리아의 믿음을 선언하며 마리아의 찬미를 유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가 됨을 기리는 마리아의 말은 엘리사벳에 대한 답례를 넘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상황과 주제 그리고 작성법의 세 가지 측면에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와 비슷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 찬미가를 부르기 직전, 한나가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약속대로 주님께 바치려 엘리 사제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수직적인 자비와, 비천한 이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속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수평적인 자비를 찬양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하느님의 구원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동정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지만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속 회개의 시간인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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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가톨릭 신부로 산 지 벌써 27년째입니다. 신부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과분한 존중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중해 줍니다. 갓 신부가 되었던 30살에서부터 “신부님” 하며 존경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분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존대해 주셨고, 어린 나이와 설익은 인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과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옛날이야 교육받은 사람이 적었기에 고학력이라 할 수 있는 신부가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사제의 독신은 특별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를 따져봅니다.
딱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종종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님처럼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의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것처럼 착각했음을 인정합니다.
신부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과 재주로 사는 것처럼 착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성무일도 저녁 기도 때마다 바치는 그 아름다운 찬가, 그 유명한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의 인사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사무엘기 상권 2장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합니다. 불임이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바친 찬양을, 이제 구세주를 잉태한 마리아가 완성하여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내가 무엇을 했다’라는 성취감이 아닌,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루카 1,49)라는 경이로움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보통 삶 안에서 자기가 한 일에 관한 성취감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바라보는 것에 더 집중하십니다.
성모님의 진정한 겸손함입니다. 즉, 스스로 ‘비천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우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한 곳에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누우실 가장 따뜻한 구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자기 능력과 재주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드러낼 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덕분에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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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 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시편 35,9)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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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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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장 낮은 자에게 가장 풍성한 은총>
저는 성사의 은총을 믿고 실제로 성사를 주면서 제가 은총을 받는 경험도 아주 많습니다.
고백성사를 줄 때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분도 은총을 받으셨지만 저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특출함이 없는 분이고 그래서 자신을 아주 비천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뭘 해도 자신이 없었고 하고 나서도 남의 평가나 눈치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가 싫다고 했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분이야말로 성탄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번에 성탄의 은총을 받게 될 거라는 격려를 해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아기 예수로 오실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인간에게 칭찬을 많이 받아 의기양양한 사람은 아기 예수로 비천하게 오시는 주님을 절대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런 주님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인간에게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이 하느님을 칭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가 칭찬받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칭송하겠습니까?
자기가 받는 칭찬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 것이기에 하느님께 인정받고 구원받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오늘 마리아처럼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봐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을 칭송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지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듯 가장 좋은 하느님의 은총도 가장 낮은 자에게 흘러 가장 풍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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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우리도 하느님께 감사 찬미가를 불러드리자!>
오늘 복음(루카1,46-56)은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저녁기도를 바칠 때 부르는 '성모의 노래', 곧 '마니피캇(Magnificat)'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찬미가'입니다. 비천한 종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드리는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6-48)
마리아가 하느님 아버지께 바친 감사 찬미가인 '성모의 노래'는 우리가 매일, 아니 매순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려야 할 '감사 찬미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나의 주파수, 곧 나의 몸과 마음이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져 있으면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쏟아집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주파수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기도 생활'이고, 바로 '내가 미사에 참례하는 이유'이며, '매일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물이 많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성탄입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허물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 밖에도 우리가 받은 크고 작은 감사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은총에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을 찾아내서, 우리도 성모님처럼 감사의 찬미가를 불러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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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마리아의
고백에는
어떠한
과장도 변명도
없습니다.
그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큰일은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큰일을 하신 분은
전능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어진 은총에
우리가 진실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참된 큰일은
우리가 애써 만든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큰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은총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보고,
그 은총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참된 은총입니다.
하느님만이
전능하시고
위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조용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삶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때
구원의 역사는
가장 깊이
진행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내어드림과
내어주심이
만나는
큰일의 참된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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