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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여김과 드림
롬 6:6-14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6-14 / 우리의 악한 옛 욕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사랑하던 우리의 육신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거나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7)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 어떻게 죄의 유혹과 세력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8) 그리고 죄를 사랑하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다시 죽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도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세력을 꺾기 위해 단 한번 죽으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계속 사귀시면서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산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2)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의 나약한 육신을 죄의 지배에 내맡겨 육신의 욕망에 빠져 들어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13) 여러분은 육신의 한 부분이라도 죄에 내맡겨 악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처럼 여러분을 전부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일에 쓰일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14) 죄가 다시 여러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율법의 속박을 받으며 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기 위해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6-11) 우리의 옛 사람인 죄의 몸이 죽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종노릇이라는 것은 죄에 자기의 뜻이 굴복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이 죄에게 종이 되었을 때 즉 예수님과 연합하기 이전의 모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7).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죄에 대한 우리의 채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변제해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죽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는 사망이 그 사람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에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지만 그의 살으심은 계속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재 시제로 사용함으로써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직 아닙니다. 그래서 “여길지어다”라고 말합니다(11). 이는 자신이 죄에 대해 가지는 현재의 관계를 끊임없이 생각하여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기억하게 합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12-14) 본 단락은 11절의 내용 ‘...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첫째는 죄가 우리의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죽을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몸 안에는 본질적으로 욕심이 있고 욕망이 존재합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때에는 이런 사욕에 맞설 힘이 없었지만 이제는 맞설 힘이 있습니다. 전에는 불의의 무기로 우리 지체를 죄에게 내어주었지만 이제는 의의 무기로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죄가 아주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의 활동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용: 죄는 지금도 당신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런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 더 폭 넓게 나눠보세요(히 12:4).
사람이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보다도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많은 돈을 벌고 권력의 정상에 앉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안아도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이 없었으며 그 확신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예레미야 39:17-18, 로마서 6:6-10 / 이성희 목사
유명한 유대인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죄로 인한 결과(Whatever Become of Sin?)’라는 책에서 현대인에게 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 “다 그럴 수 있지”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죄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란 어떤 것입니까? 작지만 큰 죄도 많고, 사람들이 악해지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탈법이나 편법을 너무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도 매일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예사로 여겨 안전을 위협합니다. 최근 불거진 원자력발전소 불순부품 문제를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악한 일을 했는지 ‘원전 마피아’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런 악을 조장하는 일이 이제는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도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하여 무딜 때에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단 선지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듣고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어 회개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는지 베벼개를 적시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짐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죄의 압박 때문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죄에 대한 민감성이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편 78:38에는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긍휼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이셨고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조문은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조문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암송문이 아니라 실천문입니다. 암송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실천해야 참 기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죄’라는 말을 마태는 ‘빚’으로, 누가는 ‘죄’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의 표현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라는 말입니다. 죄란 빚입니다.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갚아줘야 하는 큰 빚입니다. 이 빚을 예수님은 갚을 수 있고, 십자가에서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가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조 원 정도 됩니다. 일백 데나리온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요즘 돈으로는 500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낸 세금이 일 년에 800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필연입니다. 누구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죄의 몸이 죽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6절에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십자가에서 옛 사람인 죄의 몸이 죽어 죄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옛 사람이 죽습니다. ‘십자가’에 박혀야 죄의 몸이 죽어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죄 사함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며 자유입니다.
에베소서 4:22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을 입습니다.
파충류나 곤충을 보면 허물을 벗고 새 단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허물을 벗어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허물을 벗는 것은 아니지만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습니다. 밤에 잘 때 입는 잠옷을 벗어야 아침에 일하는 새 옷을 입습니다.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새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하여 헌 옷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4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상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집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집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아본’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고 각자 자기 길로 갑니다. 과녁에서 한참 빗나가 살고 있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세상에는 죄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사함도 받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인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최대 역설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죄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치유 받지도 못합니다.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도 받지 못합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용서함을 받아야 진정한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소녀가 자신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살아 있는 성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면담이 끝나자 주교는 진짜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는지 검사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지난번 고해성사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분께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교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얘야,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뭐라고 고해성사를 했는지 여쭤봤니?”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던데요”. 주님의 죄 사함이란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7절에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면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의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은 아담 이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과 죄의 고백은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죄의식을 많이 가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의 항법사 폴 버거만은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의 죄의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유대교는 죄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와 인간에 대한 죄입니다. 성경의 율법인 토라에는 56종류의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여러 종류로 나누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죄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무슨 죄든 다 범할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인격적 세력이 있습니다. 틈새를 만드는 재주꾼인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틈새를 벌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틈새를 다시 없애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재창조하십니다. 이 재창조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로를 잇는 긴 막대기와 가로를 잇는 막대기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에게 일 년 중 가장 성스러운 날은 바로 속죄의 날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와 단식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아뢰고 사함을 받는 속죄와 용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행동은 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존재를 완전히 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교회가 지닌 가장 큰 선물은 죄 사함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초기 수사 시절에 자질구레한 죄와 건전치 못한 생각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몇 시간에 걸친 자기반성으로 고해 신부의 진을 빼놓곤 했습니다. 루터의 선배 수사 한 명이 홧김에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이보게, 하나님이 자네에게 화나신 게 아닐세, 자네가 하나님에게 화가 난 걸세”. 하나님은 우리의 산더미 같은 죄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천근 같은 무거운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몽테뉴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법의 기준을 들이댔을 때, 평생 교수형에 열 번 정도 처하지 않을 만큼 착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죄와 항상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게 하시고 우리 모두를 단번에 용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종살이에서 해방되려면 속전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자기 몸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종노릇하지 않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두십니다. 모래 위가 아닌 십자가 위에 남겨두십니다.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피로 쓰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메시지는 단 세 글자입니다. ‘죄 없음’. 예수님이 남기신 이 메시지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죄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39:18에는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원받게 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결 론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성경을 번역할 때 죽기를 각오하고 곁에 해골을 두고 하였습니다. 이 분의 이름을 영어식으로는 제롬이라고 하므로 제롬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롬이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 제가 정성을 다해 주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 주님께 기쁜 선물이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롬아, 하늘과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제롬은 예수님께 졸라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만약 그대가 진정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면 그대의 모든 죄를 나에게 다오. 이것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이보다 내 마음을 더 기쁘게 해줄 다른 선물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말고 다 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룬 죄 사함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밑에 우리 죄 짐을 벗어버리고 용서받은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죄에 종 노릇하지 말라
로마서 6:6-7 / 김남준 복사
Ⅰ.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3,4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를 얻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다룬다. 5장에서는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천국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이어 6장에서는 천국시민으로서의 삶을 가능케 하는 복음적 삶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Ⅱ.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분의 백성으로 살게 된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이다.
A. 죄를 용서해주심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인간의 죄는 그 크기가 무한하다. 이 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불순종으로 더럽혔고, 온 세계에 죄의 영향력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하였다.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 이 세계를 다스리고 가꿀 수 있던 지위도 상당부분 잃게 하였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평생 하나님과 원수 된 처지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없이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모든 죄의 값을 대신하여 치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죄의 용서는 신자가 천국시민으로 살게 하는 근거가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구원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무한대의 순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B. 의롭다 해주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다. ‘의롭다 해주심’ 곧 ‘칭의(稱義)’는 명목상 칭의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준다. 이전에는 죄의 사슬에 매여 아무리 애써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아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라 살려 하는 믿음의 성향, 사랑의 성향을 생겨난다. 또한 믿음의 방편을 참여하여 계속 은혜가 부어질 때 이 성향은 날로 더 강해져, 날마다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된다.
Ⅲ. 십자가로 구원하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의 사슬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살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없애준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이라 부르는 ‘옛 사람’에게 아직 죄가 남아 있다. ‘옛 사람’은 죄 가운데 살던 옛 본성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죄를 지으려 한다. 그런데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매우 나쁜 것이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매우 좋은 것이다. 신자는 이 죄를 인식할 때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에 다시금 깊이 감격하게 된다. 또한 죄는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한다. 이 죄의 힘은 절망할 것은 아니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은 예배, 기도, 말씀 등 은혜의 방편에 참여할 때 이 죄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여전히 남은 죄의 몸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주인 삼은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게 하신다. 십자가에서 구원하심은 이렇게 매일 매일 나는 죽고 주님은 사시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심이다.
Ⅳ.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사랑을 입증한다. 따라서 눈을 들어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여 주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김광욱 목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죽을 죄인일지라도, 그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피를 흘려 희생 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까지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로마서 6장부터 8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절)]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5장 20절 하반절에 “죄가 더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을 듣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을 대비해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죽을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죄에 거한다는 것은 로마서 3장 8절에서 궤변론자들이 말하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라는 궤변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기 위해서 죄를 짓자’는 궤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단호히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이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앞으로도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오만에 빠지지 말라는 차원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란 죄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아니 될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데 어떻게 죄의 노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연합하였다고 해서 성도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죄의 권세가 성도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더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이 된 사람이라면 과거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3절은 예수님과의 연합이 세례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3-7절)]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세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곧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 되므로 죄의 권세 아래에 놓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함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속하여 죽으셨듯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로부터 분리, 죄 씻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 죄에서 분리된 사람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4절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죄의 몸이 죽고,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새사람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5절 말씀은 3, 4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하여 확증하는 말씀인데 그 안에 ‘같은 모양’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한 형태로’ 죄의 몸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유사한 형태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4절 말미에 “우리로 또한 새 새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새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일은 많이 있겠지만 본문에서 찾아본다면 6절과 12, 13절에 그 일이 있습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포함해서 로마 교회 성도와 오늘날 성도들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옛사람을 죽게 하심은 우리에게 더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7절은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옛사람 죄인이 아닙니다. 성도인 우리는 새사람 의인입니다. 그렇다면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8-11절)]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3,4,5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10절의 ‘단번에’입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단번에 죽으심이요’는 한 번 죽으셨다는 의미와 동시에 완벽한 희생 제물로서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은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미래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의 죄를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존재했거나 존재할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사에도 적용됩니다.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힐 것을 염려해 1~2절로 말했던 것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0절에 ‘살아계심’은 ‘죽으심’과 대조를 이루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죄에 대하여’ 대조를 이룹니다. 삶과 죽음이 상극이고 하나님과 죄가 상극입니다. 어떻게 죄가 하나님을 맞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2절과 13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12-14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첫째는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이며 둘째는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죽을 몸’이란 이 땅에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죄의 몸이 죽고 의의 몸으로 살아 가더라도 유한한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의 몸은 결국 죽을 몸입니다. 이 몸이 더이상 죄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의 ‘지체’는 문자 그대로 눈, 코, 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킵니다. 지체를 죄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눈으로 보암직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고, 코와 귀로 탐욕을 자극받고, 입으로 범죄하고, 손과 발로 악행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보자,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손으로 그 열매를 따먹고 먼저 먹은 사람이 손으로 건네주고 또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 입으로 먹는 행위를 통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이렇게 몸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선한 것을 보고, 우리의 귀로 선한 것을 듣고, 우리의 입으로 선한 것을 먹고 말해야 합니다.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 말씀을 선한 양식으로 먹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바울은 다시 한번 더 예수님과 연합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죄가 성도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않고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항상 자신이 예수님과 연합한 존재, 죄의 몸이 죽었고 의의 몸으로 살아난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 예수님 안에서 나를 만들고 세우셨음을 늘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식하며 인자하시고 긍휼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며 배우기에 힘쓰십시다. 매일매일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빠지지 않고 묵상하심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게 하시고, 희생 제물이 되어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과 연합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과 연합함으로 죄의 몸은 죽고 의의 몸으로 살아났음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더이상 죄가 저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정욕대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몸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손으로 예수님 안에서 지음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존재임을 잊지 않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는 자의 성화-죽음과 부활의 삶
로마서 6:1-14 / 최종혁 목사
유평교회의 목표는, ‘모두가 주님을 만나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입니다. 지난달에 우리는 첫 번째 목표인 ‘모두가 주님을 만나고’에 해당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라는 목표에 맞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롬6:1-14을 통해 ‘믿는 자의 성화-죽음과 부활의 삶’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거하기 위함이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하나님의 기준, 거룩함에 이를 수 없고, 우리 중에 다른 누구도 그런 능력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세상은 기쁜 소식(복음)이 아닌 절망적인 소식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하나님이 먼저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행위로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의 복음이 로마서 1-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을 어떻게 의롭게 하셨는지, 인간이 어떻게 칭의를 얻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정죄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이것은 복음이 값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르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 ‘은혜로 받는 구원’은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종교도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신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하거나 그에게 무언가를 바쳐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세상의 종교와 다르지 않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의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해 말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사해져서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가 그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을 죽여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묻습니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심지어는 ‘죄를 지으며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으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더욱 죄를 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위와 같은 논리로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야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료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6:2)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강한 부정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강하게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논리적인 전개가 두드러집니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며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느냐’에 대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신 사람들로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됩니다. 최호의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분리된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에 ‘나는 죽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여기 ‘세례를 받은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물로 받는 세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고,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이 실제로 함께 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예수님과 합하여 예수님에게 잠겨있다(침례)는 것, 예수님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은 ‘영적인 침례’입니다. ‘육적인 침례’, 즉 물로 받는 세례는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성도들 앞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교회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인정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해 죄를 지어서 인류가 죄인이 되었듯,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표하여 죄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순간으로 가서 우리도 죽은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 우리가 죽은 이유는 ‘새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데 그가 이미 다른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가진 생명이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해, 죄에 대해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새생명에 대해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것은 기존의 무엇이 잘못되어서 고친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고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전의 삶이 죄를 따라 가고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그렇게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6).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잊었던 사실은,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라 ‘낡고 소용이 없어진 쓸데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런 쓸데없는 사람,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은 죽었습니다.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죄의 몸은 옛사람과 같은 의미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몸을 가리킵니다.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 죄의 몸이 죽었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에게 아무리 무언가를 요구하더라도 그것에 순종하고 싶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고 새생명을 입은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을 졌는데 빌려준 사람이 그것을 담보로 나에게 이것저것을 시킵니다. 빚진 것 때문에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다 갚거나 다른 사람이 갚아줬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전에 빌려줬던 그 사람이 와서 이것저것을 명령하더라도 ‘나는 너한테 빚진 것이 없다’, ‘너는 나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6:8,9)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사망이 뭐라 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우리의 죄값은 단번에 영원히 치러졌습니다. 그 다음은 마침표입니다. 내가 더 죄를 지은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죄값이 치러짐과 동시에 죄의 모든 권세도 파괴되었습니다.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하듯이 그와 연합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생명의 삶은 죄에 대해서 죽은 삶이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멀어져서 하나님께 향해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는 내 안에 죄와 옛 정욕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6:1,2)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올바른 모습, ‘성화’입니다.
그러나 나는 왜 여전히 죄를 범하고 때로 쓰러지기도 하는 것일까요? 아직 우리는 완전히 변화된 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옛 기억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마치 콜라병에 물을 담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병에 아무리 새롭고 깨끗한 물을 부어도 그것은 예전에 콜라병이었기 때문에 그 냄새가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달라졌지만 육신은 예전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여전히 콜라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1-13절에서 “여기라”와 “드리라”는 두 가지 명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6장 11절은 로마서에 등장하는 첫 명령입니다. “여기라”는 말을 오해해선 안 됩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확실히 붙잡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있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이런 생각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염려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 영적인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함으로, 진리를 듣고 그것을 곧 잊어버림으로 우리의 삶과 생각을 흐트려 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고 죄를 짓는 것이 즐거움을 준다면 여러분의 구원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새사람이 된 사람은 쓸데없는 것을 쫓아가며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않은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콜라병에서 냄새를 빼내는 방법은 여러 번 물을 넣고 빼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죄의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6:12). 죄는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자신이 지배권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지체라는 것은 우리 몸의 각부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내 손이 불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무기는 사단을 기쁘게 하는 무기이고 의의 무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기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의지적인 결정을 내려 여러분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큰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작은 것은 포기하지 못하곤 합니다. 나는 아내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피곤한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은 힘들어 합니다. 가정의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남편의 의견을 따르지만, 뒤에서 다른 여자들과 남편을 흉봅니다. 교회에서는 큰일을 하고 있지만 가정이라는 작은 왕국의 왕이 돼서 다른 가족에게 상처를 줍니다. 큰 결단은 잘 내리지만 매일매일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무기로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의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 말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것도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 육신의 소욕에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체 하나 하나가 예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강해져서 자신을 드려 강력한 의의 무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큰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4) 여러분이 스스로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은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기준을 주고 방법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낳았지만 은혜의 구원은 거룩을 낳습니다. 구원을 받으시면 여러분은 거룩한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19-21).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육의 열매가 줄고 성령의 열매가 삶속에 더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부활한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