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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작품해설 / 장희창
1. 방랑자 차라투스트라
니체는 서슴없이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철학자다. 희미하게라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자는
지상에서 스스로를 방랑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 목표가 어디라고 말하지는 않
는다. 애초에 그런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 또한 여행자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은 돌아가 안주할 곳이 없음을 말한다. 자기 손으로 이미 자기 집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한 손에 청진기 다른 손에 망치를 든 채 자유정신을 가두어놓았던 형이상학의 견고한 성과 그 모든 우상과 종교적 독단을 진단하고 투들겨 부수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의 죽음은 곧 '차라투스트라는 이 렇게 말했다'의 출발점이며, 이후 그의 반항과 여정도 신
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눈앞에 펼쳐질 인간의 대지에 대한 탐색이다. 폐허의 신전 그 자리에 이제 주체적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가치의 창조한 달리 말하면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니체에게 해석은 지배적 가치라는 닫힌 공간을 헤치고 들어가 그것에 균열을 내는 실천이고, 인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정신의 냉철한 시선이며. 또한 관점을 설정하는 힘이다.
이전에 신의 율법은 인간의 선악을 규정하는 절대 명령
이었다. 선악 그 자체는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겨겼고, 그것에 대한 반성적 인식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도덕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 하에 주어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주인 노릇을 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제 니체는 그 전도된 관계를 역전시키면서 모든 가치의 전환을 시도한다.밝은 눈과 경쾌한 걸음으로 도덕의 광막하고 아득하며 숨겨져 있는 땅을 탐사하기 위한 여행에 나선다. 그것이 니체의 도덕 계보학이다. 니체의 계보학은 말하자면 가치의 발생과 유래를 추적함으로써 기원과 목적을 신성화하기 위해 가해졌던 폭력과 겹겹이 쌓인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령 인간의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허무주의의 원천
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문제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이렇다. 죄의 감정은 원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개인 관계, 즉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빛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통해서 쾌감을 얻게 되고 그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채무자도 그것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축제의 잔인함은 거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채권자의 덩치가 커짐에 따라, 다시 말해 종족의 권위가 더욱 거대해질수록 채무자의 부채 의식도 점점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 공포가 마침내 신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도저히 빛을 갔을 수 없게 되었다. 채무를 감지 못할 경우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잔인한 쾌감을 얻음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던 저 거친 자유의 본능은 이제 발산되지 못하고 내면에 유폐되었다.신이라는 폭력. 국가라는 폭력에 의해 수천 년 동안 내면화되고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억눌리고 뒤로 물러서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만 발산하게 된 자유의 본능, 그것이 양심의 가책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 현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양심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타고난 동물성을 학대한 상속인이다. 요컨대 양심의 가책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며. 타고난 원죄라는 것도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신은 죽었다!' 라는 선언은 이러한 의미다. 신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빈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스스로를 빈약한 존재로 오해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2. 초인ㅡ 미래의 인간
산을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초인의 존재를 가
르친다. 하지만 군중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차라
투스트라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연설한 장소가 시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이야말로 오늘날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느냐를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시장 바닥에서 왜소해지고 균일화된 현대의 인간들을 말종 인간(der letzte Mensch)이라고 부른다. 그들 모두는 똑같은 것을 원하고, 똑같을 뿐이며, 삶의 유일한 목표는 자기 보존이다. 그들은 남들이 행복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남들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시장 잡상인들의 딸랑거리는 동전 소리에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덮여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건강한 자는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의 최고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인은 말종인간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은 이러한 말종 인간과 초인 사이에 있는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초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길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천 개의 오솔길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을 지나간다. '차원 높은 인간'들과의 만남도 그 중 하나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채로 무궁무진하게 남아있는 것이 인간이며 인간의 대지다. 그 방랑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관점들의 교차와 상호 충돌이 무성한 숲을 이루며, 그것이 이 책의 몸으로 형성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천 년 동안 제 길을 찾지 못하던 인간의 의지를 새로운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해 과감하게 매듭을 맺는 선구자, 미래의 인간이 초인이다. 나폴레옹과
미라보 같은 인간이 그 전형이다. 이들은 선악이라는 꾀죄
죄한 카테고리를 넘어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유형이다. 니체는 미라보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경우라면 몸속으로 파고들었을 많은 벌레를 단 한번에 혼들어 떨어버린다. 도대체 이 지상에 진정으로 '적에 대한 사랑' 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러한 인간에게서만 가능할 것이다."("선악의 저편.)
보통 인간이든 차원 높은 인간이든 대체로 반동적인 힘
에 끌려들기 마련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이 만들어 놓은
생성의 공간에서 반동적으로 뒷걸음친다. 중력의 영에게
이끌려 간다. 중력의 영이란 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도, 선과 악 같은 것이다. 이것이 작품 중에서 차원 높은 인간들이 차라투스트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시 우상을 섬기게 되는 나귀 축제의 의미다. 자기 극복이냐, 자기 보존이냐의 갈림길에서 차원 높은 인간들일지라도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생성의 공간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은 인간적 형태의 온갖 우상 숭배의 종식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전하는 곳에서 초인을 가르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초인으로의 변신은 자기 바깥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그것에 복종해 온 인간이 마침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됨을 말한다. 초인은 문자 그대로 넘어서 나아가며 끊임없이 한계와 제약을 돌파해 나가는 커다란 육체적 이성의 주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니체의 비전은 긍정적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인간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3.영원의 오솔길에서
니체에게 있어서 생명 그 자체는 힘의 의지다. "나는 생명 넘치는 자를 발견할 때마다 힘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시중드는 자의 의지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자기 극복에 대하여, 중에서, 본문 제2부. 201쪽)
이 힘의 의지는 그 질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능동적
힘은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베푸는 것이다. 반면에 반동적 힘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다. 니체가 힘의 의지의 질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상승과 하강, 귀족적인 평가 방식과 노예적인 평가 방식, 자율적인 평가방식과 가축 떼의 평가. 넘치는 건강에서 나오는 해석과 결핍과 고통에서 나오는 해석.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표현은 긍정과 부정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 나오는 익살꾼과 줄타기 광대, 차라투스트라와 중력의 영이 의인화된 난쟁이, 초인과 말종 인간이 각각 그러한 긍정과 부정의 힘을 대변한다.
부정적 힘의 의지는 무엇보다도 행위에 대한 금지와 부정, 그리고 단념을 조장한다. 부정적 힘의 의지는 법이나
제도. 관습과 도덕에서 자신의 유용한 도구를 발견한다.
반면에 긍정적 힘의 의지는 스스로 만든 선과 악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율법의 재판관인 동시에 복수하는 자인 자신과 더불어 홀로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니체의 표현대로 황량한 공간 속에, 얼음과 같은 고립의 숨결 속에 하나의 별이 내던져진 것과 같다. 이처럼 창조자의 길은 고독하다. 그리고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이러한 내적 동력은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이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영원희귀는 다시 말해 긍정적 힘의 의지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소멸의 반복을 새로음과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끼는 것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진 그리스의 철학자 해라클레이토스를 이어받은 이유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영원회귀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무상함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 '긍정'이다. 허무주의의 원천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영원회귀를 '다시 한번'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용기'다. 자기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와 물고 늘어지는 뱀의 대가리를 과감하게 물어뜯어 버리는 용기, 그것이 차라투스트라를 초인의 경지로 변신케 하고,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불협화음적인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로 해소하게 하는 동력이다. 그때 용기가 내뿜는 힘은 저절로 춤이 된다. 그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게 된다. 자신의 발 아래로 강제와 목적과 죄책감이 비처럼 자욱한 가운데. 밝은 눈으로 저 아래틀 향하여 미소 짓는다.
4. 걷고 뛰고 춤추는 독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힘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은 신의
죽음과 가치 상실에 직면한 근대 세계에 대한 니체의 처방
으로 인간의 강화와 극복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의 철학은 서구 형이상학의 극복이 아니라 그 정점에 해당한다고 본다. 들뢰즈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실천의 반복. 즉 차이의 지속적 생산이다. 이로써 들뢰즈는 니체를 다양성과 차이의 철학자, 서구의 형이상학을 해체한 철학자로 만든다. 또한 데리다는 니체의 영원회귀의 공간을 어떤 권위도 중심도 없는 ㅂㅂㅂ수많은 해석의 놀이를 가능케 하는 무대로 본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려 니체 철학의 행보를 어슴푸레
하게나마 더듬어보자. "정신도 덕도 지금까지 수백 번 시
도하고 수백 번 길을 잃었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시도
였다. 아, 그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의 몸이 되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헛되이 공중으로 날아간 덕을 다시 이 대지 위로 데려 오라. 몸과 삶이 있는 곳으로 다시 데려 오라." 요컨대 니체는 몸의 '기원' 을 말하고 있고 또한 그 몸의 '해방'을 말하고 있다. 정신이라는 좁은 섬에 안주하면서 저 바다의 정체는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리지 말고. 곧장 배에다 온몸을 던져 출렁이는 대양의 한가운데로 항해하라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체는 우리더러 떠나라고 하지만. 다시 그에게 기대기로 하자. 그는 책이라는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펼치라고 말한다. 그가 권하는 독서법은 걸어가거나 춤을
추라는 것이다. "책 사이에서. 책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사
상을 더듬어가는 자들은 아니다. (....) 종이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지 말고, 책 사이로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며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즐거운 학문.) 이러한 독자라면
곧 니체의 친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