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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2021대학원합격자
중국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친구랑 동북공정과 현재 상황(게임에서 한복을 조선족 전통 복장이라고 하고 한국섭에서는 한복을 지우는 일들 등등)에 대해 단톡에서 열나게 욕하다가 친구가 이거 괜찮다며 링크를 올려줬고, 이걸로 중국애들이 한복이 지네꺼라고 우겨대는거의 팩트체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공유하고 퍼뜨리고자 글을 쓰게 되었어. 바쁜 여시는 맨 밑에 요약한거 있으니까 스크롤 내려도 상관없음!
최근 중국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조선의 갓 문화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근거없는 낭설을 인터넷을 통해 퍼트리고 있다. 이들이 내새우는 근거는 주로 이러하다. "조선 이전에는 갓을 쓰는 문화가 없었다."라던지 "명나라의 립모(笠帽)와 조선 전기의 립모를 비교해보니 조선의 갓은 명나라의 갓에서 분화되어 발전한 아류문화로 보인다." 라던지 "중국은 고대부터 챙이 달린 모자를 착용해 왔기에 중국이 원조"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처럼 한국의 갓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일까? 중국의 이런 주장들에 대해 팩트체크를 해보자.
1. "중국은 고대부터 챙이 달린 모자를 사용했고, 갓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라는 주장
일단 저들의 주된 논리는 "형태의 유사성"이다.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복식의 발달 과정을 추적하는데 많이 쓰이는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수 세기나 차이나는 유물을 이런 식으로 엮으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중간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면,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다른 요인들은 배제한체, 오로지 형태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전후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오류가 당나라(618년~907년) 시절의 멱리(冪䍦)나 유모(帷帽)를 가져다가 갓의 원조라고 우겨대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타당한지 살펴보겠다.
멱리라는 것은 원래 중국 서북방 민족들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만든 모자인데, 이것이 점점 짧아지면서 유모로 발전한다. 이 모자들은 갓과 형태만 비슷할 뿐, 쓰임새나 발전 과정이 조선의 갓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히려 이런 모자들은 고려와 조선에서 별개의 모자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몽수(蒙首)와 너울이다.
말을 타는 부인[女騎]
부인이 출입할 때에도 노복과 말이 지급된다. (중략) 검은 비단[皂羅] 몽수[蒙首]를 쓰는데, 몽수 끝이 말 위를 덮으며 쓰개[笠]를 쓴다. 왕비와 부인은 오직 붉은색으로 장식하지만 수레와 가마[車輿]는 (사용할 수) 없다. 옛날 당(唐) 무덕(武德)·정관(正觀) 연간에 궁인들이 말을 탈 때 멱리[冪䍦]를 넓게 펼쳐 전신을 가렸다고 한다. 지금 고려의 몽수[蒙首] 제도는 아마도 당(唐) 멱리[冪籬]의 유법인 듯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2 풍속[雜俗] 1.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도 고려의 몽수를 보며 당나라의 멱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기록만 보아도 갓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 이전에는 갓을 착용하는 문화가 없었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챙이 달린 모자는 고대 중국에서만 확인된다고 하지만, 이런 주장은 타국 유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고대 동북아시아의 유물을 살펴보면 립형 유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한국은 물론이고 몽골과 일본, 동남아에서도 챙이 달린 모자가 확인된다.)
아래는 조선 이전의 립형 유물 일부를 모아놓은 것이다.
2-1 삼국시대
2-2 남북국시대
원성대왕(元聖大王)
이찬 김주원(伊飡 金周元)은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재상이 되었는데 꿈 중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자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형틀을 쓰게 될 조짐이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스러워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아찬 여삼 혹은 다른 본에서 여산(餘山)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하여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재차 청하여 말하기를 “한번만 뵙기를 원합니다.”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자,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근심하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니 아찬은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은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冕旒冠)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왕은] 이에 따랐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第二).
2-3 고려시대
주인(舟人)
[고려의 두건(頭巾)은 다만 무늬비단[文羅]을 소중히 여긴다. 두건 하나의 값은 쌀 한 섬[石]에 해당된다. 따라서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재물이 없고, 또 〈두건을 쓰지 않은〉 맨머리[露頭]는 죄수(罪囚)와 다르지 않아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죽관(竹冠)을 만들어 쓴다. 〈죽관의 모양은〉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본래 일정한 규격이 없다. 짧은 갈옷[褐]을 몸에 걸치지만, 아래에는 바지[袴襦]를 입지 않는다. 배마다 10여 명이 밤에는 손잡이를 울리고 노를 두드리고[鳴榔鼓枻] 함께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니 거위·오리들이 우는 것 같아 시끄럽다[嘵嘵].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풍속이 그러하다.
선화봉사 고려도경 권 19 백성.
왕이 수강궁에 행차하다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하였다. 왕이 군소(群小)를 가까이 하고 연회의 즐거움에 빠졌으므로 행신(倖臣) 오기(吳祁)·김원상(金元祥)과 내료 석천보(石天補)·석천경(石天卿) 등이 음악과 여색으로 환심을 얻었으니, 관현방(管絃坊)의 대악(大樂)과 재인(才人)이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하고는 행신들을 여러 도에 나눠 파견하여 관기로서 미색과 재주가 있는 자를 선발하고 나아가 성 안의 관비와 무당 가운데 가무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적(籍)을 궁중에 두었으며,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갓[馬尾笠]을 씌워 특별히 한 무리를 만들고는 남장(男粧)이라 칭하며 새로운 노래를 가르쳤다. 그 노래에서 말하기를, “삼장사(三藏寺)에 등을 밝히러 가니 사주(社主)가 내 손을 붙잡네. 혹여 이 말이 절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상좌(上座)에게 이것은 네가 말한 것이라고 하겠네.”라고 하고 또한 말하기를, “뱀이 용의 꼬리를 물고 태산 봉우리를 지나갔다고 들었네. 만인이 각기 한 마디씩 이르나, 짐작할 만한 것은 두 마음 속에 들어있다네.”라고 하였는데, 그 높낮이와 완급이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왕이 수강궁에 행차하면 석천보 무리들이 그 곁에 장막을 치고 각자 이름난 기생들과 사통하며 밤낮으로 무례하고 방자하게 가무하면서 군신의 예(禮)를 갖추지 않았으니, 접대하고 사여하는 비용을 이루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4(忠烈王四) 충렬왕(忠烈王) 25년 5월.
위의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와서야 갓을 쓰게 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한국 복식학계에서는 갓(笠)의 기원을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갓과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백화수피제 채화판에서 찾는데, 후에 몽골풍과 결합하여 조선시대 갓의 원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3. 조선의 갓은 명나라의 갓을 배낀 아류 문화인가?
한족주의자들은 명나라 갓의 기원을 고대 중국의 유물들에서 찾고, 조선의 갓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하는데, 유독 원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꺼려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명나라에 이르러 원나라(몽골)의 호풍을 몰아내고 한족의 풍습을 회복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수많은 문화가 서로 융합되었다. 때문에 원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복식이 비슷해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족주의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조선과 명나라의 갓이 유사해보이는 것은 몽골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 고대 한족 문화를 배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나라의 복식에는 몽골풍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데, 모자부터 시작하여 철릭이나 답호, 관복에 쓰이는 흉배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한국이나 중국이나 고대에 챙 모자는 있었겠지만,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몽골풍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다. 조선은 조선 나름대로 고대부터 이어졌던 립형 모자에 몽골풍을 더해 발전한 것이고,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주의자들은 몽골의 유산을 부정하면서, 송나라를 비롯한 한족의 체제를 회복한 것이라고 주장하니 참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듯 조선과 명나라는 겉으로 보기에 서로 유사한 복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청나라의 발흥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복식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명나라의 복식은 만주족의 문화와 융합되면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나갔고, 조선은 조선 전기의 복식을 계속 발전시키고 유지시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한국, 중국의 전통 복식들은 사뭇 달라지게 되었다.
4. 마치며
나는 한복이 100% 한국 고유의 옷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국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영향도 받고 다른 나라의 영향도 받은 게 맞지만, 모든 것이 중국 복식의 아류문화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족주의자들은 조선전기의 갓과 명나라의 갓을 비교하면서 교묘하게 자신들이 원조인 것 마냥 서술한다.
이들은 "중국과 비슷한 복식 문화를 공유했던 한국"이 중국의 짝퉁에 불과하며, 한국 문화의 원조는 곧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특히나 최근에 한류가 유행하면서 조선시대 한복이 세계에 알려지자 이런 류의 날조글은 더욱 많아졌는데, 이것은 명백한 '문화공정'이고 '한복공정'이다.
요약
1. 일부 한족주의자들이 조선시대 갓은 중국이 원조라고 우김.
2. 챙이 달린 모자는 중국에만 있던게 아니라 고대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다 있었음.
3. 한국이나 중국이나 각자 발전하다가 원나라 때 몽골풍의 영향으로 서로 비슷해짐.
4. 청나라가 등판해서 한국하고 중국하고 달라짐.
문제있으면 한푸 치파오 전부 한국꺼
다음 편은 <한푸라는 신조어와 범위의 모호성> 으로 찾아오겠음.
더 많은 내용은 출처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어!
첫댓글 Hey Chinese! BE INDEPENDENT FROM KOREA!! especially culturally~~
글 진짜 좋다!!!!!! 요약을 영어,중국어로 번역해서
달아야겠어!!
무작정 변발 love yourself 하는것보다
이렇게 조목조목 따져야 외국인들도
괜히 중국편 안들것 같아.
기모노도 중국꺼랬다가 외국인들이 중국말 무시하니까 이제 안 그러잖아
ㄱㅆ 오 혹시 게녀가 번역하게??? 대단쓰한 실력이야,,,
지들도 몽골에 영향 받아놓고 그건 인정하긴 싫나보네 그러니 논리가 개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