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 (마르코 12,13-17) “Repay to Caesar what belongs to Caesar and to God what belongs to God.” They were utterly amazed at him.
말씀의 초대 토빗은 동포들의 시체를 매장하고 잠을 자던 중 참새 똥이 눈에 떨어져 시력을 잃고 만다. 그의 아내가 품을 팔며 일을 하고 생계를 돌보지만, 토빗은 율법의 준수와 선행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아내는 토빗의 선행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힐책한다(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이 세금으로 바치는 은화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유다인은 이것을 일종의 우상 숭배로 여겼다. 그 때문에 유다 지도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실증법 위반이냐, 우상 숭배냐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까지 대동해서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합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자, 그때도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궁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마르 3,6 참조). 그때와 같은 무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올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헤로데 당원들은 당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 임금의 측근들로, 로마 식민 정권에 아부하며 권세를 누리던 헤로데의 협조자들입니다. 당시에 갈릴래아의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납세 거부 운동을 벌인 뒤, 납세 문제는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납세를 열렬히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하느님의 백성이 이국인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한 열혈 당원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열혈 당원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폭력적 저항을 피한다는 구실로 애매한 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온갖 칭송을 하며,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납세 문제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악한지요? 더구나 그들이 헤로데 당원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직접 고발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쪽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올가미에 걸리고 말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지혜로운 대답을 하십니다. 황제가 우상으로 그려진 화폐는 황제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제 자신이 황제에게 속할 수도, 하느님께 속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로 이야기하면, 돈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속의 편’도 되고, ‘하느님의 편’도 된다는 뜻입니다. ☆☆☆
로마 시대의 화폐는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새로운 황제는 화폐에다 얼굴을 새기고 좋은 말을 삽입하게 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숭배하게 한 것이지요. 어떤 황제는 자신을 ‘신’이라고 선전하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폐의 초상과 글자가 누구 것인지 물으십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서슴없이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즉시 답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복음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황제의 것도 주님께서 주셨기에 존재합니다. 그러니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마음의 주인은 언제라도 ‘주님’이신 까닭입니다. 황제의 것은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쉽게 눈에 띄고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과는 포장이 다릅니다. 세상일에 기쁨과 적극성으로 다가간다면 ‘교회 일’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에 충실하면 ‘세상일’에도 충실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어떤 기운도 넘볼 수 없는 ‘하늘의 에너지’를 주십니다.
☆☆☆ 고대 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느 임금이든 집권하면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게 했습니다. 그러니 임금의 얼굴이 새겨진 돈은 분명 그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시면서도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것도 있으니 잊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화폐에 임금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면, 사람의 몸에는 그의 영혼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현실에서는 국가법을 따라야 하지만, 영혼의 문제에서는 주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황제의 것은 가득한데 하느님의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지, 물질적 바람은 많으면서 은총에 대한 기대는 적은 것이 아닌지, 세상일에는 적극적이면서 교회 일에는 말만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각자가 곰곰이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황제의 것에도 충실하고 하느님의 것에도 충실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우리 생활 속의 어떤 부분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면서, 기도와 성사 생활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도록 노력합시다
한 젊은 남자가 병원의 수술실에 누워 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 수술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수술을 집도할 의사는 손을 환자의 어깨에 살며시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 내가 솔직히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인데 자네 병명은 설암으로 판명이 났네. 자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자네 혀를 절개 해야만 하겠어.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도록 하게. 자네는 이제부터 말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이 젊은 남자에게 의사의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이 순간 떨리면서 창백해지고, 입가의 근육은 경련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 글을 보면서 ‘내가 마지막으로 할 말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 역시 이 젊은이처럼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젊은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을 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요. 왜 자신에게 이렇게 커다란 아픔과 고통을 주시냐고 항변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한 세상의 말이 아닌, 긍정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 역시 내 뱉는 말이 세상의 말일수도 또 하느님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참 생명의 길은 하느님의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가까워지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더욱 더 곤란하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다가가 오늘 복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헤로데 당원들은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백성이 이국인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해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로데 당원들에게 고발당할 것이며, 세금을 내라고 하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앞서 말이 세상의 말도 또 하느님의 말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돈 역시 황제의 것도 또 하느님의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말과 행동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과연 하느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사용하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 길섶에 핀 풀꽃, 담벼락을 적시는 달빛, 그것들은 모두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이외수)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 -신대원 신부-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은 국민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지도자들은 이 세금으로 나라를 경영하며,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골고루 보살펴 줍니다. 이 세금을 통하여 모든 국민들이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도자들의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그 지도자는 더 이상 국민을 위하는 일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들여다보면,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께서는 세금 문제에 있어서 탁월한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신 이 말씀으로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 진리와 거짓, 참된 신앙과 우상숭배를 한꺼번에 식별해 내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느 것이 하느님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롭고 참다운 기쁜 소식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것인가요 - 이은명 수사- 어두운 밤에 드넓은 겨울 바다를 바라본 적 있으신가요 ? 글쎄 …. 어두운 밤에 바다가 잘 보이냐고요 ? 저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한적한 겨울 밤바다를 좋아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거대한 파도들이 꿈틀거리며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한테 맡겨진 몫에 변함없이 충실한 파도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파도가 만들어져 미련 없이 그리고 후회 없이 부서지고 거품으로 잔해가 뿌려질 때 또 다른 파도는 앞의 파도가 그랬던 것처럼 뒤에 오는 파도를 위해 하얀 거품으로 자신을 마무리합니다. 자신의 흔적에 연연하지 않고 남김없이 처음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자세는 파도의 부서지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친구나 여러 관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것에 미련과 애착을 많이 안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부서지고 거품이 되기를 꺼립니다. 자신의 우월감을 앞세우고 하느님의 것을 잊어가는 요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우리한테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지식과 정보, 지위와 안락함, 부요함 …. 이러한 것이 생겨난 근원지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그분께 기도합니다. 또한 내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많은 것도 주님이 주신 소중한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선행의 대가는 없다. -김찬선신부- “오순절 밤, 나 토빗은 죽은 이들을 묻어 준 다음, 몸을 씻고 내 집 마당에 들어가 담 옆에서 잠을 잤는데, 뜨거운 참새 똥이 내 두 눈에 떨어지더니 하얀 막이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네 해 동안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은 참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였지만 눈이 멉니다. 이에 토빗의 아내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합니다.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품삯도 받고 염소도 가외로 받았는데 토빗이 훔친 염소인 줄로 여기고 의심을 하고 화도 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아내의 입장에서 더 화가 나는 것은 자기가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신세 때문에 더 화가 납니다. 다른 집들을 보면 남편이 나쁜 짓을 하든, 뭣을 하든 먹고 살 걱정 안 하게 가족을 잘 먹여 살리는데 자기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저 남 좋은 일만 하고 그 대가로 맹인이 되고 자기는 여자의 몸으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꾹 참았던 불만을 이 김에 탁 털어놓습니다.
선행의 대가가 도대체 무엇인가? 남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잇속 차리며 사는 사람들은 잘 살고 더더군다나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좋은 일 많이 하는 착한 사람에게 왜 고통이 있느냐? 뭐, 이런 불평불만이고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지요. 남편에 대한 불평불만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하느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하는 질문이고, 그런 경우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지요.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참으로 선이시라면 어찌 선한 사람은 불행해지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득세를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행의 대가는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행의 대가는 이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행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선행의 대가는 돈이 아니라 선을 나눌 수 있는 풍요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선행의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선행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선행은 앞으로 얻게 될 그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많은 것을 받아 자기는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래서 선으로 풍요하고 행복한 사람만이 그 결과로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쪼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저히 선을 나누지도 선행을 하지도 못합니다. 돈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선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행을 하는 사람은 돈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선을 많이 소유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지상선, 충만한 선,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산 주변에 사는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금 섞인 광석을 채집해 오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들은 아침 일찍 수레를 끌고 광산을 향했지요. 그리고 광산에 도착해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방식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선 성질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둘째는 수레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금이 섞인 정도에 아랑곳없이 닥치는 대로 돌멩이를 모았고 따라서 순식간에 수레를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분한 성격의 맏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금이 많이 섞인 것을 하나하나 골랐고, 따라서 해질 무렵까지 애를 썼어도 수레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두 아들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렸지요.
‘저 집은 둘째가 맏이보다 낫구먼. 둘째는 수레를 가득 채워서 가는데, 맏이는 반도 채우지 못했어.’
이런 소리를 들은 둘째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지요. 따라서 콧노래를 부르며 수레를 힘차게 끌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맏아들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아들 중에서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아무 돌멩이나 수레를 가득 채운 작은 아들일까요? 아니면 비록 수레의 절반밖에 채우지 못했지만 금이 섞인 돌멩이를 채운 맏아들일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떤 아들을 칭찬하겠습니까?
당연히 맏아들이지요. 정성껏 금이 섞인 돌멩이를 채운 맏아들의 수레에서는 주먹만한 금덩이가 서너 덩이나 나왔지만, 아무 돌멩이나 채운 둘째의 수레에서는 조금의 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지요. 하지만 그 모습이 과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은 모습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나라의 공공사업을 위한 세금 징수권이 황제에게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만큼 황제의 세금 징수권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지 못합니다.
이제 주님의 것은 주님께 돌려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 실은 우리들의 수레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에 대한 것으로 비유될 수 있는 주먹만한 금덩이가 가득 나올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위대한 일도 열정 없이 성취된 것은 없다.(헤겔)
위대한 십일조! - 최인섭 신부- 개신교 신자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 `봉헌정신`이다. 그들은 은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십일조를 봉헌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원도 최전방 군종신부로 살 때 가까이 있던 개신교 연대교회 한 달 수입액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당 한 달 수입의 5배가 넘는 액수였다. 성당은 사단 규모(군인 1만 명에 성당 한 개)이고 교회는 연대(군인 2,500명에 개신교회 한 개) 규모로 크기는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수입은 어마어마했다. 부러웠다. 물론 병사들은 헌금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 각지 개신교회에서 도와주는 각종 후원이 정말 대단하다. 사단 훈련소에 거의 매 주일 여러 교회에서 피자와 통닭을 가져와 훈련병들을 유혹하고, 공연위문단의 노래와 춤이 훈련병들의 넋을 빼놓는다. 신병교육대 훈련병을 싹쓸이해 가는 모습에 화도 났다. 군대 내 내신교 신자 숫자가 압도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지 않아도 군종신부 숫자보다 군목숫자가 3배가 넘어서 활동력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 데에 후원금과 후원품도 절대적으로 적으니 선교에서 백전백패다. 모든 것이 열약한 군대사목에서 이런 구조적 열세에 부딪칠 때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상실된다. 군대에서 간식 품질과 양이 곧 선교와 직결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조직력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우리 천주교회 아닌가? 미래 교회의 주역이 청소년이라고 목소리 높여 부르짖는 천주교회가 아닌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가? `천주교`란 이름이 천 원짜리 지폐만 봉헌한다고 생긴 이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게 돌려드리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 도리요 구원의 길이다. 죽을 때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니다. 하루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 어렵지만 이 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하느님의 것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에 대한 논쟁입니다. 주민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 주민은 누구나 내야 하는 인두세였습니다. 그런데 열혈당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민세 납부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주민세 납부가 로마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느님 홀로 주권자라는 그들의 신념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민세는 반드시 은화 데나리온으로 바쳐야 하는데 여기에는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지존한 아들”이라는 각명과 황제를 가리킨 ‘대사제’란 각명이 있어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세금 납부에 대한 문제는 자칫 하느님께 대한 정통신앙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그것을 옹호하다간 로마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아주 어려운 사항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17절)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으로 함정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의도를 무너뜨리십니다. 황제의 것인 데나리온은 황제에게 주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분배정의의 원칙을 밝히시면서 현실 정치의 상대성과 하느님 나라의 절대성을 보여주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전삼용신부-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 생활을 해야 하는 동안 감옥신세를 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살인을 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는데 사람을 살해하는 총을 들고 사람 죽이는 훈련을 하고 또 전쟁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법보다 하느님의 법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전쟁이 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가톨릭교회 때에도 하느님의 법을 더 우선시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목숨을 바쳐야했습니다. 하느님만을 섬겨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내며 죽은 이들에게 음식을 차려 바치고 절을 하는 등의 예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인으로 볼 때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람이 만든 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위의 모습들이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고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로마에 세금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일제치하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일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조선 사람으로서 당연히 바쳐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아마 매국노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나라를 빼앗고 그 나라가 세금까지 강요하는데 그 요구하는 대로 잘 따라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애국심이 발동하여 남의 나라를 침범한 로마에게 우리가 그들이 부당하게 책정하는 세금까지 꼬박꼬박 왜 내야하느냐고 대답하셨다면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그들이 데리고 온 헤로데 당원들에게 끌려가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걸려들지 않으시고, 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쳐라.’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말씀하셔서 당신의 대답을 흠잡을 수 없도록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옳게 해석하면 세금, 그런 것은 내라는 대로 내고 믿는 사람은 우선 하느님께 대한 의무에 더 충실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이라고 하여 세상의 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권력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그 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노예도 도망치지 말고 주인에게 충실하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노예법이란 인간의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과는 반대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그 법까지 존중하라고 하는 것이고 예수님도 오늘 세상의 법에 저항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들에겐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던 것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다 끝나고 나서야 제사를 허용하였습니다. 교회도 나중에서야 세상의 법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은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나라에 산다면 그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여 나라를 보호해야합니다. 이는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법입니다. 성자께서도 세상에 사시기 위해서는 세상의 법을 따르셨습니다. 육체를 지니셨고 숨을 쉬셨고 옷과 음식을 입고 잡수셨고 당시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인 부모에게 순종하셨으며 세금도 내셨고 또 부당한 죽음에 항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사시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당당히 받아들이시는 그 모습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계시가 드러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드립시다. 먼저 태어났다면 선배 대접을 해 주고 직장 상사에게는 순종하고 사회에서도 해야 할 의무를 다 합시다. 이는 이 사회에 머물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세상의 질서를 깨지 않기 위해서이고 우리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음을 더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험 -박영봉 신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과 신뢰를 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유혹에 동의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다지기 위하여 인간의 내적 성장에 필요한 ‘시련’과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유혹’을 분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이용하면, 우리는 유혹의 거짓된 가면을 벗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유혹의 대상은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럽지만’(창세 3,6), 실제로 그 열매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돌릴 것은? -김희경 수녀-
물질이 풍족한 시대에 사는 요즘, 더군다나 한번 클릭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세상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또한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돈의 흐름만 잘 잡으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리라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능력이 있어 좋은 직장을 찾고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이 최상의 목표가 된다. 투자를 잘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렇듯 돈줄을 잘 탔는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로 사는 이들을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른다.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도록 부모들은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왕이면 돈 잘 버는 직장을 잡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라는 부모들의 꿈과 기대가 숨어 있다. 이 시대를 반영하듯 매일 읽는 신문은 경제 흐름과 투자 경영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관련 서적과 새로운 강좌를 소개해 준다. 하지만 공부방 친구들의 가정, 그들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대다수 부모들은 두 개의 직업을 갖고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열심히 일하지만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임금 경쟁에서 불리한 이들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간신히 한 달 생활비만 나오는 정도다. 아이들은 학교 친구들과 비교할 때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많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의기소침하다.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기본 조건이 다른 입장의 경쟁은 더 가지고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한꺼번에 쥐고 살다가도 이 생을 마무리할 땐 모두 두고 가야 한다. 돈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쓰는 모든 것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질문해 보고 싶다. 세상의 것에만 온 마음을 쓰고 있는 이들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우리가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닙니까?”라고.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 -문성호 신부-
새로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젊었을 때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있기에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에너지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지니고 안주하려는 성향을 짙게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를 일깨우시고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온전히 우리 삶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참으로 큰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너무나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그분은 너무도 파격적인 분, 너무도 충격적인 새로움이었기에 자신들의 고착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간직해왔던 율법을 계속 파기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분신, 목숨과도 같았던 안식일 규정을 자주 깨트리셨습니다. 그뿐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당시 유다인들이 벌레처럼 여기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 창녀, 세리, 이방인들과 서슴없이 만나시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던 죄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더욱 유다인들이 못마땅했던 일은 예수님께서 틈만 나면 자신들의 아픈 곳을 끊임없이 찔러댄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참으로 직선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겉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너희는 마치 회칠한 무덤 같구나. 동족들에게 큰짐을 지워놓고 너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대단히 예민해진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그분이 선포하시는 말씀들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내지 않는 것이 옳으냐는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올가미로 씌울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황제(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친 올가미를 지혜롭게 헤쳐나가십니다.
예수님이란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비울 줄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어제의 낡은 우리와 결별하고 늘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매일 변화되고 쇄신되려는 노력, 그것만큼 우리 신앙인에게 필요한 노력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민감해질 때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에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께 던지는 빈틈없는 질문이 나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볼 때, 예수께 던지는 교묘한 함정의 질문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란 서기 6년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임금 아르체라오스(헤로대 대황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주민세를 거두어 로마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민세란 인두세로서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주민은 누구나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지배하에 있는 점령지역이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로마의 속국이면서도 문제성이 없는 지방은 의회에 속한 총독이 지배하였고, 또 하나는 문제성이 있는 지방은 로마 군대가 주둔하여 황제의 직활지로 되어서 지방장관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남쪽 이스라엘은 후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직접 황제에게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온건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세금 문제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으나, 갈릴래아 출신 가우로니떼의 유다 같은 사람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과세는 노예제도 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일어나라! 하느님은 우리를 지지하고 계시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시며 주님이시다. 로마인에게 공물을 바치지 말라. 다른 이를 주라고 부를 바에야 차라리 즐거이 죽음을 선택하겠다." 하여 열혈당을 조직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다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만을 섬겨온 백성들의 마음속에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마음 내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안내면, 황제의 군대들에 의해 처벌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 하면 자기 민족을 저버리는 발언이요, 비겁자가 되는 것이며, "바치지 말라!" ... 하면 로마 황제를 거슬려 군대에 의해 처벌되는 시대적 배경이 있는 난처한 질문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주조한 데나리온을 보시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황제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는데, 예수께서 받아들은 데나리온에는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카이사르" 뒷면에는 "대제관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 있으면서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화페에 대해서 고대인들은 세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1) 화폐는 권력의 상징 : 누구나 한 나라를 정복하거나, 반란에 성공했을 때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하여, 자기 주권과 권력의 보증으로 삼았습니다. 2) 화폐가 통용되는 곳에 그의 권력이 잘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 어느 왕의 지배 범위를 알려면, 그의 화폐가 통화로서 효력이 어느 지역까지이냐를 알면 되었다. 3) 화폐에는 왕의 머리 초상화와 그의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왕의 소유물로 생각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 해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음으로 여하튼 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을 황제에게 바쳐라!" 그러나 "인생"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돈은 카이사르의 초상이 있으니 정당한 국가 권력에 따르라. 창세기 1 ; 26-27에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속함으로 사람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이봉하수사-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때때로 한적한 곳이나 외진 곳에 가서 며칠 동안 여행 삼아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오히려 무기력과 답답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시골 사람들도 도시로 나들이를 오게 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도시생활과 시골생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여유가 있고 좋을까요? 두 곳의 생활을 비교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경제와 문화의 차이를 떠나 도시생활은 도시생활대로, 시골생활은 시골생활 그 자체로 각자 다른 삶의 모습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답답하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년에 며칠을 시골에서 지내보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힘을 다한다 하여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여유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유가 많다고 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서도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일상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은 엉뚱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양승국신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씀>
언젠가 복음서를 쭉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만 한번 추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유형별로 구분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말씀들을 하셨더군요. 수많은 비유들, 제자들의 특별 교육용 일화들, 정신 못 차리던 제자들 혼내시던 말씀들, 잘 알아듣지 못하던 군중들을 위한 재미난 이야기들,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셨던 대화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들, 그 많은 위로의 말씀들, 희망의 말씀들...
예수님의 말씀을 유형별로 정리하다가 느낀 바입니다.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상황 상황에 너무도 적절했고, 기지로 넘치는 말씀이어서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올가미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계책을 마련해서 다가왔을 때, 그래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때,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지혜로 흘러넘쳤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언변은 더욱 빛을 발했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용감하게도 홀로 맞서셨습니다.
적대자들은 논리 정연한 예수님의 말씀, 순금과도 같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 어쩔 수 없이 승복해야하는 진리 앞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뺍니다. 그리고 치를 떨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갑니다. 눈앞에 놓여있던 먹잇감을 놓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 강경하게 맞서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약자들이 상처받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으로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셀 수도 없이 구해내셨습니다. 박해자, 위선자, 이교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우셨지만, 길 잃고 방황하던 양떼들에게 그분의 말씀은 한없이 감미로운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오랜만에 좋은 건수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잡아넣을 수 있겠구나, 드디어 소원성취 하는구나, 하면서 희희낙락,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고발되어 구속될 상황이었습니다.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그 인간들 분명히 예수님을 유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이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나온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예수님의 대답은 난감한 상황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장황하게 이것 저것 설명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한마디 강력한 말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황제의 권위도 존중해주시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우위성, 하느님의 우선권에 대한 강조도 놓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찌 그리 힘이 있는지요? 어찌 그리 지혜로운지요? 어찌 그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지요? 어찌 그리 감동적인지요? 그 배경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오랜 기간 나자렛에서의 깊이 있는 수행생활 탓도 컸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진리를 깨쳐나가셨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일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일치상태에 계셨는데,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길은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난감하고 절박한 상황 앞에 설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단 하루만에도 엉뚱한 말, 허황된 말, 거짓말, 일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돌아서면 후회할 말, 이웃들에게 상처 주는 말, 그래서 이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들을 셀 수도 없이 내뱉는 우리들의 언어생활 앞에서 예수님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건네주셨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고,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군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늘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심사숙고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버지의 도움, 하느님의 견해를 구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시라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런 경우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원하실까, 늘 고민하셨습니다. 그 결과 단 한마디도 버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기양 신부-
복 음 : 마르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미움에 끌려 다니게 되지요. 미움이라는 놈이 나를 마구 흔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잘못되었을 때 더 기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직위가 높거나 나이가 먹었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요 신앙인이라고 해서 초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미움을 털어 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 역시 이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묻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ꡒ말로 올무를 씌우려는 것ꡓ(마르12,13)이었지요.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 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다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수석 사제 및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ꡒ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ꡓ(마르12,14)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 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ꡒ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ꡓ(마르12,16)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ꡒ황제의 것ꡓ(마르12,17)이라고 대답하자, ꡒ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ꡓ(마르1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했을까요? 예수님보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백성들의 존경도 훨씬 높고 많이 받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대로 순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종교적 관습이나 권력자들의 잘못을 들쳐내고 비판하셨지요. 우리가 하듯이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알면서 넘어가고 모르면서도 지나는 거지. 너무 따지며 살지마. 너만 피곤해져.’하는 투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려 하셨기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그를 따르게 되자 더 이상 두었다가는 그들의 권위가 도전 받을 것 같고, 또한 시기심에 예수님의 언행이 용납되지 않자 트집을 잡아서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집권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시자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에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 원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잘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무조건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써가며 간교한 올가미를 놓게 됩니다.
ꡒ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ꡓ(마르12,14)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지나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앙인이지만 최소한 양심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까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마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못 박았던 것처럼 하느님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미움이 있다면 빨리 털어버리십시오. 미움의 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온 몸을 조정하여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새로운 삶과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은... -박상대신부-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교 장상들과 벌이신 두 번째 논쟁인 세금납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기 6년 로마의 황제, 즉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민세를 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주민세는 어린이와 노인과 노예를 제외한 백성의 인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구호아래 로마에 대한 납세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헤로데 당을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오늘의 논쟁은 유대교의 장상들인 원로들과 대사제 및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작정으로 몇몇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로데 당원들은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권과 함께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뜻하므로 납세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속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고대하면서도 그들의 종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두려워 겉으로는 세금을 착실히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묻는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로마총독관헌에 고발할 혐의를 찾게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다면, 헤로데 당원들은 실망할 것이고, 심지어는 군중들을 종용하여 예수와 결별을 선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동전의 초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대에 로마제국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로마제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황제의 화폐라면 황제에게 돌려야 하며,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사물을 보고 우리 인간의 시각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세운 질서와 하느님의 창조적인 질서를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권리는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의 권리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정권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우선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교회가 국가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교회가 순교할 각오로 이에 맞서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요,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이지만, 하느님의 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늘나라에 계신 하느님께서 아직 한번도 세상에 가보지 않은 천사 셋을 불러, 세상에 내려가서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명하신 적이 있었답니다. 첫 번째 천사가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들에 피어난 아주 아름다운 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꺾어 갔습니다. 두 번째 천사는 군중 사이를 날아가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를 발견하고, 그녀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세 번째 천사는 어느 시골 마을 창가를 날아다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젖을 먹이는 엄마를 발견하고,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었을까요? 하늘나라 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던지 도중에 꽃은 시들어 버렸고, 아가씨는 늙어 할머니가 되었고...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것은 바로 어머님의 마음이요,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 사랑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 넓은 마음, 남을 위하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열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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