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삶이며 곧 도(道)이고 선(禪)이다.
鍊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연득신형사학형 천주송하양함경
我來問道無餘說 雲在靑天水在甁
아래문도무여설 운재청천수재병
몸을 단련하여 마치 학의 형상과 같고,
천 그루의 소나무 아래서 두어 함의 경전을 두고 있네.
내가 와서 도를 물었는데 아무런 말이 없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고 하네.
해설
어떤 학자가 도(道)를 잘 안다는 선사(禪師)를 찾아가서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사는 아무런 말이 없고 다만 손으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가리키고 나서,
또 병에 있는 물을 가리키었다. 그러나 이 학자는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다시 물었더니 “구름은 저 하늘에 있고 물은 저 병 속에 있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학자는 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눈을 떴다.
그리고는 이 시를 지었다.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도란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물론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간단명료하고 쉽고 가깝게 드러내 보인다면 곧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그리고 상대자와 공유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며 곧 도다. 도를 아는 사람으로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든,
그것에서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가 사람의 삶인 줄 알면 그걸로 족하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살아가는 이 사실이 그대로 도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개입시키면 오히려 도와는 멀어질 수 있다.
이 시는 그 학자가 그 선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모습과 광경을 그리고 있다.
몸이 여위고 여위어 마치 학처럼 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천 그루의 노송이 둘러있고 옆에는 두어 함의 경전을 두고 있다.
참으로 신선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리 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거나
도를 너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도란 물론 이와 같은 분위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삶이든 마찬가지지만 굳이 구두선(口頭禪)을 빌어
좀 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도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도는 첫째 조건이 간결하고 소박한 것이다[간소(簡素)].
그리고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자연(自然)].
속기를 멀리 벗어던진 탈속한 모습이다[탈속(脫俗)].
또 그 끝을 모르도록 깊고 그윽해야 한다[유현(幽玄)].
준엄하고 고고해야 한다[고고(孤高)].
우주가 갑자기 멈춰버린 듯한 정적(靜寂)이 있어야 한다[적정(寂靜)].
그리고 변화가 없는 고정된 관념을 철저히 거부한다.
예측불허의 변화무쌍한 것도 도(道)의 한 조건이다[변화(變化)].
한 번은 구름을 가리키고 한 번은 병을 가리킨
그 간결하고 소박함과 탈속함과 우주의 무게와 같은 정적은 차라리 사람의 숨을 멎게 한다.
그러나 이 시를 단지 그렇게만 이해한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사람으로서는 일상적 삶이다. 상인이 물건을 거래하고 흥정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농부가 밭을 갈고 김을 매는 일이나 다름없다. 부전스님이 목탁을 치며 예불을 올리는 일과 똑같다.
목사가 열심히 설교하는 것과도 다를 바 없다.
사무를 보는 사람이 열심히 기록하고 계산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빨래하고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일과
그 선사의 구름을 가리키고 물을 가리키는 일은 억 만분의 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일이 곧 사람의 삶이며, 곧 도(道)며, 선(禪)인 줄을 모르고
다른 데서 도와 선과 불법과 삶을 찾으려고 밖을 향해 헤매는 데 문제가 있다.
돌아보면 모든 부처님이나 모든 도인이나 모든 선사도 역시 그들은 그들대로의 한 삶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는 그대로 그렇게 살았고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살뿐이다.
그는 그대로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나는 내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데서 무엇이 더 부족한가.
방하착(放下着)하고 조고각하(照顧脚下)하라.
- 무비 스님 - <명언명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