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시집 『김현승시초』, 1957)
[작품해설]
김현승의 시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언어에 의한 관념의 육화(肉化)로 압축시킬 수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탓으로 어려서부터 서구적 생활환경에 익숙해 있던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시에 소멸과 영원성의 교차를 통한 이원적(二元的)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주로 관념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이미지를 통해 그 관념을 수용, 형상화하였기에 추상적 세계에 머물지 않고 구체화됨으로써 보다 큰 시적 마감을 획득하고 있다.
한편 그의 시가 수용하는 자연은 흔히 동화와 순응이라는 의미의 동양적 자연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을 통해 변형시킨 자연으로 자신의 지향 의식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가을도 단순히 소멸의 시간이 아닌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시간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 시의 전체적 구조는 봄과 가을의 대응 체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조적 진술의 대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시상이 전개된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추상적인 시간 의식을 구체화함으로써 대비 방식이 지니는 단조로움을 극복, 시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한다.
1연의 ‘가까운 땅’ · ‘숨결’과 2연의 ‘머나먼 하늘’ · ‘차가운 물결’은 각기 등가성(等價性)을 이루고 있으며, ‘일다’와 ‘밀려오다’의 대립에 의해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봄의 보조 관념으로 등장ㅎ나 ‘숨결’은 얼어붙은 대지에 불어넣는 따스한 기운을 뜻하며, 가을의 비유로 나타난 ‘물결’은 대지를 다시 동토로 되돌아가게 하는 차가운 기운을 의미한다. 이것은 화자의 지향 의식이 땅에서 하늘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3연에서는 봄의 ‘꽃잎’이 지닌 유한성과 가을의 ‘보석’이 지닌 항구성(恒久性)이 대립된다. 즉 봄은 ‘꽃잎을 익 빚은 살’처럼 아름답기는 해도 쉽게 지나가 버리는 유한적 존재인 데 비해, 가을은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보석’처럼 항구성을 지닌다. 결국 봄은 유한적 존재인 육체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지만, 가을은 사색 속에서 영혼을 성숙시키는 시간임을 의미한다.
4연에서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켜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결합시킨다. ‘눈동자 먼 봄’은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세계를, ‘입술을 다문 가을’은 영혼의 세계, 차가운 이성의 세계를 표상한다. 또한 이 가을은 자아 성숙을 위해서 외부 세계와 절연하고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이므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고독의 시간이기도 하다.
5연에서는 봄이 언어로 불려진 ‘노래’라면, 가을은 그 노래를 헤치고 골라낸 ‘언어의 뼈마디’에 해당한다며 봄의 ‘노래’와 가을의 ‘언어’를 대립시킨다. ‘언어의 뼈마디’란 ‘살’에서 물과 기름을 제거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뼈’처럼 가장 본질적인 언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입술을 다문 가을’의 ‘고요한 밤’에 ‘보석’처럼 단단한 사색의 핵심인 ‘언어의 뼈마디’를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봄과 가을의 대응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숨결’ · ‘꽃잎’ · ‘살’ · ‘노래’ 등으로 형상화된 봄은 공간적으로 ‘땅’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실적 · 감각적 · 육체적 · 현상적 · 소멸적인 것을 의미한다. 반면 ‘차가운 물결’ · ‘별’ · ‘보석’ · ‘언어의 뼈마디’ 등으로 형상화된 가을은 공간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상적 · 이성적 · 정신적 · 본질적 · 영원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작가소개]
김현승(金顯承)
남풍(南風), 다형(茶兄)
1913년 광주 출생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중 시 「쓸쓸한 겨울 올 때 덩산들」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됨.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5년 한국문학협회 중앙위원
1960년 숭전대학교 문리대 교수
1973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사망
시집 : 『김현승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전집』(1974), 『마지막 지상에서』(1975), 『김현승』(1982), 『김현승전집』(1985), 『김현승의 명시』(198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