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600억' 조국 독립에 바친 '우당 이회영' 구민경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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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의 후손’ ‘명동성당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거부’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 어마어마한 재산, 높은 신분, 명망 있는 집안.
여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차가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는 한 가족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일가입니다.
1910년 경술 국치, 나라를 잃은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가문의 모든 재산을 조국 독립을 위해 쓰기로 결심합니다.
일본 정부의 회유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 만주로 떠난 것입니다.
처분한 재산은 40만 원. 지금 기준 600억 원의 돈입니다.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 원에 달합니다.
그 전 재산을 들여 만주에 세운 학교. ‘신흥무관학교’ 그곳에서 길러낸 3500명의 독립군은 척박한 만주 땅에 자리 잡은
독립투쟁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학비와 식비는 전액 무료. 더 많은 독립군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이회영 선생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회영 선생과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가난한 시달렸습니다.
하루에 죽 한 끼조차 먹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견뎌야 했던 건 가난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그의 형제 중 4명이 항일 운동 중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주저앉을 없었던 이유. ‘대한 독립’ 이회영 선생은 어떤 시련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2년, 그가 66살이 되던 해. 밀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게 잡힌 이회영 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2. 생애[편집]
"뿌리 깊은 양반가문의 정통 유학자였지만 혁신유림의 정신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했습니다.
-2019년 6월 6일 문재인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 중"
이회영의 며느리 조계진은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외동딸로, 고종의 조카딸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폐풍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우당의 선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 때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만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 모두가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집안의 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전 재산을 급처했더니 당시 소 13,000마리 값이었다. 당시 40만 원이었으며 현재 시세로 환산했을 때 600억 원 정도이다. 소 값이 현재가 과거에 비해 평가절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이 값은 2조 원에 달했을 것이다. 또한 물가 상승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이 당시에는 전 세계에서 돈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은 나라였음을 감안한다면 상상 이상의 돈이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급히 처분한 재산이었고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 갔다.[3]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4] 건립에 참여했고 국내,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했으며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서간도 지역 한인 단체는 사실상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된 셈.
대개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내부 분열시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합류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와 권리를 외치는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 연맹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이회영 자신은 임시정부 수립을 처음부터 회의적으로 봤다. 그 까닭은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통령이니 국무총리니 하면서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이 감투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좌진과 면담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며 반응은 좋지 않게 보는 편이었다고 한다. 1932년 만주에서 활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다롄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 했으나 밀정들이 이회영이 다롄에 온다는 사실을 미리 일본 영사관에 알려서 체포당했고 결국 4일만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1913~2005)이 아버지를 죽게 한 밀정들을 추적한 끝에 이규서와 연충열이라는 사람들이 이회영이 다롄으로 간다는 사실을 밀고한 밀정들임을 밝혀냈다. 이규서는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차남이었고, 연충렬은 연미당의 동생이자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이규서는 이규창 입장에서는 사촌지간이었던 것.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물단 활동을 하다가 암살당한지라 이석영에게는 남은 혈육이 이규서뿐이었다. 그러나 이규창은 용서하지 않고 이규서와 연충열을 처단하였고 결국 이석영의 대는 끊기게 된다.[5] 이회영의 재산은 독립운동 8년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3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참고로 중국 정부로부터 항일 혁명의 영웅으로 훈장을 받았다.
3. 가족과 후손[편집]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본래 이회영 일가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으로 부친 이유승이 이조판서, 우찬성, 중추원일등의관, 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인 둘째 이석영은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최고 갑부였던 사람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6]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하였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상하이 밀정에게 걸려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7]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으며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고는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과 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인인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비밀 연락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때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이다.
이회영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3남 이규창[8]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일제에 밀고한 밀정인 사촌을 처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밀정들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고 국내에 잠입해 밀정 이용로를 처단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몰래 만들어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4년간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게 되며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해평(莊海平)[9]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4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10]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 겸 5선 국회의원인 이종걸이다.
https://youtu.be/DxcGOy_Kg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