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오
7,21-29)
Only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말씀의 초대
아직 이사악을 얻기
전, 아브람은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를 통해서 아들을 얻는다. 아들을 낳은 하가르는 사라이를 업신여기다가 구박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가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어 그를 돌보시고 그에게도 후손을 약속해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독서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이는 자기 여종인 하가르를 통하여 남편 아브람에게 아이를 낳아 주려고 합니다. 사라이의 태도는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그 법전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몸종을 남편의 소실로 줄 수 있었고 그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지략을 통하여 사라이는 자신의 불운한 처지와 난관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사라이의 계산과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곧 사라이는 하가르가 낳은 자식으로 자신의 지위가 올라갈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하가르에게서 괴로움을 겪게 되고 이를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절정은
불의를 당하던 사라이보다는 그것 때문에 구박받는 하가르에게 하느님께서 오히려 호의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하가르는 주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로서, 천사와 만나는 것은 곧 구원의 체험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천사와 만남은 일정한
장소나 시간에 매여 있지 않으며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지요. 천사가 하가르에게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로 부르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가르가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가르가 부르짖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가 소리가 되고, 하느님은 바로
그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라이와
하가르의 상황은 묘하게 대조됩니다. 곧 사라이는 자기 힘을 믿고 괴로울 때 ‘내가 겪는 불의에 책임을 지라.’고 아브람에게 호소합니다. 반면
하가르는 하느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으나, 그 소리가 하느님께 들려 하느님께서 그 호소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불의와 갈등, 고통의 진정한 해결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을 독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도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마음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하느님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엄청 큰 이익 볼
삶은
-이기정신부-
자녀들 교육에
최선을 다 한다지만 뭐가 최선인지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과외하고 점수 잘 받고 1등하고 유학가고 유명대 나오고 뭐 그런 거지요. 사람 되기에
선행될 것이 돈 머리 학벌 그리고 말 잘하기로 보지들 않나요?
그런 것보다 더
선행될 게 몸과 정신의 건강 그리고 인간성 품격이지요. 죽으면 말짱 꽝이 될 일에 전념했다면 엄청 큰 손해 볼 인생 아닌가요? 죽은 후
영원세상에서 엄청 큰 이익 볼 삶은 하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오
7,21)”
일치(一致)의
길
-이수철신부-
개인이든
공동체든 삶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일치는
생명의 길이고 분열은 죽음의 길입니다.
참으로
극심한 분열사회입니다.
남북,
영호남, 계층간, 세대간, 노사간, 빈부간, 정치권내 등 분열의 골, 감정의 골이 참 깊습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닌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삶은
본질은 전쟁이다 싶을 정도로 총칼만 안들었지 서로간의 대치상태는 치열한 전쟁상태같습니다.
오늘은
6.25사변 발발 65주년이 되는 날로 우리는 남북통일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혹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좋은 전쟁보다 낫습니다.
주간경향에서
읽은 기사를 나눕니다.
1950년
8월, 학도병 71명이 포항에서 인민군과 싸우다 48명이 전사했고
그중
열일곱살 먹은 학도병 이우근(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이 남긴 글입니다.
어머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도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외적 일치의 평화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어제
읽은 기사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내적 분열상과 불평등의 현실을,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질 만족도'가 지난해 세계 145개국 가운데 42단계나 추락하면서
거의
최하위권인 117위로 곤두박질쳤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4일 공개한 '2014년 세계 웰빙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전년도인 2013년 75위에서 117위로 무려 42단계나 추락했다.
<갤럽>은
보건컨설팅업체 <헬스웨이스>와 공동으로
145개국의
15세 이상 남녀 14만6천명을 대상으로
인생목표,
사회관계, 경제상황, 공동체, 건강 등 5개 항목에 걸쳐
삶의
질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국의
웰빙지수 117위는
장기
내전중인 이라크(102위, 12.1%), 기니(116위, 9.4%)보다 낮은 수치다.
최하위인
145위는 오랜 내전에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이었다.
항목별로
보면
인생목표
96위, 사회관계 112위, 경제상황 53위, 공동체 113위, 건강 138위를 기록했다.
경제상황만
간신히 중위권을 유지했을 뿐, 나머지는 세계 최하위권으로 추락한 셈이다.
2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파나마는 그 비율이 53%에 달했다.
이어
코스타리카(47.6%), 푸에르토리코(45.8%), 스위스(39.4%), 벨리즈(38.9%), 칠레(38.7%),
덴마크(37%), 과테말라(36.3%),
오스트리아·멕시코(35.6%) 순이었다.-
주목할
것은 삶의 질 만족도가 높은 나라 중 대부분이 미국 아래에 위치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민낯입니다.
얼마나
내외적으로 부실한 오늘의 현실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일치의 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일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단
가톨릭의 종교인뿐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해당된 일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제각기
살길을 모색함)의 지옥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실
공동운명체이기에 각자도생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눈들어
하늘보며 기도하라고 눈들면 하늘에 직립인간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마음을 하늘 높이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아니곤 자기로부터 벗어나 객관적 시야를 갖게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비단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책임적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애당초 겸손도 없습니다.
하여
성경이 우리 모두에게 권하는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수도원
설립 29년 째를 맞는 요셉수도공동체가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어 살 수 있는 단하나의 비결 역시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끊임없이
회개하십시오.
회개할
때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회개합니다.
기도의
자연스런 열매가 회개입니다.
한번의
회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매일 회개하는 것입니다.
기도
따로 회개 따로가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은 그대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네탓이
아닌 내탓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날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절대적으로 결핍된 것이 회개의 겸손입니다.
신명기의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예나
이제나 회개해야 하는 인간의 본질은 불변입니다.
아,
불운의 운명을 바꿔주는 것도 기도를 통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돌아감이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회개요,
주님을
말씀을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듣고 행할 때 바꿔지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셋째,
용서하십시오.
끊임없이
용서하십시오.
회개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 용서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은 용서뿐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나도 치유되고 너도 치유됩니다.
용서야
말로 신적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이 되어야 용서입니다.
하느님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저절로 용서도 뒤따릅니다.
회개-용서가
순리이지만 때로는 용서의 사랑이 회개를 촉발시키기도 합니다.
하여
무조건적 용서를 권합니다.
오늘
복음 중 베드로와 예수님의 주고 받은 문답에서도 예수님은 끝없는 용서를 명하십니다.
-베드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용서해야 서로가 삽니다.
용서를
통한 내외적 일치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끝없는 용서의 여정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명한 일치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기도하십시오.
2.회개하십시오.
3.용서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일치를 이루어 주시고
기도와
회개, 용서의 삶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
하루빨리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남북의
온 겨레가 함께 모여, 기쁨의 잔치를 나누며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반석위에 지은
집
-반영억신부-
청주교구에 있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은 189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30년에 대성당을 지어 매괴성모님께 봉헌하였는데 7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터를 닦고
3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1934년에는 석조 건물로 사제관을 지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관리를 잘하여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제관은 그야말로 반석위에 지어져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 줍니다. 더군다나 대성당을 시작하기에 앞서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일 따름입니다.’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하시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셨으니 지금도 여전히 그 믿음이 살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월요일에는 사무실 정리를
하였습니다.
교구청에 온지 2년가량 되었습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고,
책장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이번에 사무실 정리를 하면서 책장에
쌓인 먼지를 보았습니다.
문이 닫혀 있었어도 먼지는 뽀얗게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은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먼지가 쌓이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것들이 우리들 마음에 쌓일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물건을 구입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원 가입을 해야
하고,
정해진 약관에 동의를 해야
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안심하고 결재할 수 있도록 인증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차분하게 정해진 순서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을 성격이 급하기 때문에 몇 번씩 다시 해야 했습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편리한 만큼,
보안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절차를 따르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세월호’
사고도 어쩌다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사고였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배는 불법으로
개조하였고,
화물은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이
적재하였습니다.
차량과 화물을 고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법을 지키지
않았고,
지금의 편리함을 위해서 안전을 위한
수고를 회피하였습니다.
정부는 우왕좌왕
했습니다.
올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메르스’도 그렇습니다.
정해진 절차와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메르스는 지구촌에 함께 사는
바이러스입니다.
다만 메르스가 들어왔다면 잘 막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를
공개하고,
병원을 공개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왕에 메르스에 노출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고,
격리된 사람들은 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병원의 이익을 위해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인간의 욕심이 먼저였기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려진다고
하셨습니다.
빛은 됫박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오늘 복음 환호송의 내용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기억하며 지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심흥보신부-
오늘 6월
25일입니다. 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은 날입니다.
다 여행들 하시면
한 번 쯤 보셨겠지만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 가보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는 부제 아래 한국 전쟁에 파견된 병사들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불굴의 용기를 보여줬다."는 등의 좋은 글귀가 쓰여져 있긴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한 겨울에 반팔과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미국 전쟁 지도부가
미군을 한국에 파견할 때 한국의 날씨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팔 하의를 입은채
한국전쟁에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알을 맞아 죽은 이도 있지만,
북한 지역의 추운
겨울 날씨에 얼어 죽은 이도 많다고 전합니다.
비단 전쟁
뿐만아니라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 천안함 침몰 사건, 세월호 침몰 사건,
또 요즘 메르스
사태 등을 바라보면서 많은 수의 인간...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며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탐욕과 잘못된 선택에 의해
많은 이들이
그야말로 억울하다고나 할까 무가치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상황을 돌아보며
아픈 마음을
쓰다듬게 됩니다. 원치 않게 역사의 한 순간에 맞닥뜨려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발의한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채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했던
그래서 다소
억울하게 느껴지고,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고 존귀하며,
가치가 있는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가치없는 이들처럼 스러져가는 역사의 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는 인간이
그렇게 존중받거나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쓰라리게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환호송
알렐루야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3,34)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 마음 속에 주 하느님의 모습을 심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마음, 주님의 선성을 심어주셨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고 존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지지만,
주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믿음의
의식 속에서 되새기면서,
의미없이 가치없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간 분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보내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에페 4,29)
-오상선신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25
동존상잔의 비극이 시작된지 어언
65년이나 되었네요. 그
비극이 가져다 준 분단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네요. 그놈의
이념이 뭐길래 좌익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치고박고 싸운 결과가 이토록
오랫동안 큰 아픔을 주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 않나요?
지금도
진보니 보수니 이념논쟁을
하고 종북이니
친미니 하고 있으니 그
영령들이 기막혀하지 않을까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이념논쟁을
당장 그만두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나쁘다,
틀렸다, 우리편이 아니다 하지
말고 서로에게
배울려는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
입에서 다른 이에 대해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된답니다.
-한상우신부-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에서 기본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는 건강한
믿음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올바른
마음일
것입니다.
마음의
기초공사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시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
내면을 파고듭니다.
우리의
삶을 잡아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모순적인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잘못된
기초를 바로 잡는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말만하지
않습니다.
실행하는
신앙만이 반석 위에
지은 신앙이
됩니다.
기본 중에
기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이분이
기본이며 기초이며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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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