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1223. 묵상글 ( 12월 23일. - 노화의 시간은 정련의 시간,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39 추가
----------------------------------------------------
251223. 12월 23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23 04:35
- 노화의 시간은 정련의 시간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태생 소경이나 벙어리가 아니라 지금 와서
제가 귀머거리와 벙어리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뭣을 선택할까? 뭣을 선택해야 할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면 오늘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는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쓸데없는 나쁜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제겐 큰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제가 진실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그런 입은 열려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즈카르야가 바로 이렇게 된 분입니다.
그의 입에서 불신의 말이 나오니 말문이 막혔고,
불신이 정화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자 말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화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늙어 가는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천사가 나타났을 때 즈카르야가 “저는 늙은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요?
어쩌면 이때 즈카르야의 나이가 지금 제 나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독서 말라키서는 주님께서 당신에 앞서 당신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 사자가 정련사로서 레위의 자손을 깨끗하게 할 거라고 예언하지요.
그런데 다시 올 엘리야 곧 세례자자 요한이 바로 그 사자이고,
세례자 요한이 주님에 앞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는 존재라면
그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다른 누구보다 더 깨끗하게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늙어 가는 것이 정련의 세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즈카르야뿐이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저나 세월이 갈수록 정련된 곧 깨끗하게 된 존재여야 하고
그래서 나이 먹을수록 그 입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익어갈 뿐 아니라 깨끗해져 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
251223. 12월 23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평생 화두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오늘은 대림 제2부 마지막 일곱째 날, <O후렴> 역시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청원하는 내용입니다. 찾아 오시는 주님에 앞서 우리의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열정의 사랑도 항구하고 열렬해야 함을 배웁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주년의 궤도따라, 리듬따라> 진행되는 전례화한 삶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이 주는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나면 때가 타고 닳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잘못 길을 들이면 헐거워지고 바스라진다.”<다산>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놓아버려 마치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 같으니, 날마다 베어버리면 어찌 아름답겠는가?”<맹자>
결코 죽을 때까지 놓아서는 안되는, 꼭 붙잡고 살아야 하느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의 끈>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의 “하느님 현존의 수행(The Practice of the Presense of God)”이란 가르멜회 로렌죠 수사의 책 서문의 다음 요약이 참 유익합니다.
“로렌죠 수사는 우리에게 날마다 하느님의 현존안에서 삶의 기쁨을 살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매일 삶의 기쁨을 살 것을 가르치는 주님의 전례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손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전례주년의 리듬따라 살아 갈 때 전례영성의 생활화요 세월의 풍화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며 한결같은 열정과 순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노래한 오래전 <사랑>이란 시가 새롭게 마음에 다가옵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이, 오늘 탄생을 기뻐하는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 사랑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때 늘 새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라기서는 구약성경의 끝에 나오는데 바로 여기 엘리아의 재림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예고됩니다. 말라기 예언서의 말씀이 박진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치지 않으리라.”
바로 이런 엘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세상에 온 것이요 초기교회 신자들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었기에 요한의 회개의 선포에 전폭적으로 즉각적으로 응답했습니다. 바로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감동한 이웃과 친척들은 엘리사벳과 함께 기뻐하니 그대로 마을의 축제이자 예수님 탄생의 예표가 됩니다.
작명과정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 즈가르야의 이름을 따서 즈가르야로 부르려 하자 엘리사벳의 주장이 단호하며 그의 남편 즈카르야도 이에 화답합니다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성령에 감도된 엘리사벳에 주장에 이어, 즈카르야는 판을 달라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
이라 쓰자, 즉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바야흐로 즈카르야의 화답과 동시에 그의 장기간의 침묵피정은 끝나고, 주님 찬미의 기쁨의 빛을 온 주위에 발산하니 온 이웃이 복된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 일은 유다의 온 산악지방에 화제가 됩니다. 정녕 자비하신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시기에 사람들은 이 모두를 마음에 새기며 되뇌이니 당대 이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마찬가지 주님의 손길도 우리를 보살피시니 우리를 향해 자문하게 됩니다. 대림시기 화두로 삼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때 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평생 날마다 물어야 할 화두입니다. 화답송 다음 시편이 이 화두에 대한 좋은 답이 됩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
251223. 12월 23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당신 손길로 저를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아오셨고
알아보지 못하여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응답하지 않아도 돌보아주셨고
배척할 때도 떠나지 않고 늘 품고서 기다리셨습니다.
고통과 상처를 눈물로 씻어주시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는 바닥이 되어 떠받치셨습니다.
침묵으로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제 심장에 들어와 당신 손길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손길이 되어 맡겨진 이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
251223. 12월 23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성탄을 다시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탄을 앞둔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초대 교회가 보여준 이상적인 공동체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소개합니다. ‘말씀, 친교, 성찬, 기도’ 이 네 가지는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둥이며, 성탄을 준비하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둘째, 모든 차별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가족이 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을 받는 사건은 성령이 모든 장벽을 넘어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성탄은 차별을 지우는 사건이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하느님의 잔치입니다.
셋째, 복음의 올바른 토착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심을 존중하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의 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은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을 틔웁니다. 넷째, 모범적인 선교자와 목자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경제적 짐을 지우지 않았고, 약한 이들을 먼저 돌보았으며, 받기보다 주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눈물로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했고, 낮에도 밤에도 형제자매를 걱정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 모든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성탄 준비의 마음가짐입니다.
다섯째, 복음이 평화의 길임을 삶 안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과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고, 평화를 이루는 종교임을 밝히고자 노력합니다. 힘없는 이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살길을 찾는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구원의 보편성’, 즉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문을 여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을 들었고, 마리아의 찬미가를 들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축복하는 사람이 되고, 마리아처럼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며, 감사의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참된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이사야의 믿음과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본받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가 말씀과 친교와 성찬과 기도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시며,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은총을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게 하소서.“
----------------------------------------------------
251223. 12월 23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22일 월요일- 쉰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 만물 안에 내재하시는 초월적 현존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초월적 현존으로, 그들 안에 머무시며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였음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란 태초부터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 안에 깃드신 하느님의 현존을 뜻합니다.
20세기 영국의 신비가 캐릴 하우슬랜더(Caryll Houselander)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그분 안에서 모든 생명은 의미를 지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디에나 계시며 영원하시다는 계시는 성경(콜로새서 1장, 에페소서 1장, 요한복음 1장, 히브리서 1장)과 초기 교회 안에서 분명히 확인되었습니다. 그때는 신앙의 기쁨이 창조적이고 확장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깊은 시각을 일종의 ‘회복의 과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054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대분열을 겪은 이후, 서방 교회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방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깊은 이해를 점차 잃어버렸습니다. 대신 우리는 점차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님의 단일한 육신에만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현존은 빛처럼 어디에나 충만하며, 인간의 경계로는 결코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이 조금이라도 의미를 지닌다면, 온 우주 만물 안에 내재하시는 초월적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일상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서구 문명이 결핍을 느끼며 갈망하는 깊고 보편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소수의 특별한 계시에만 의존하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자연스러운 종교’로 다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G. K. 체스터턴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종교는 우리가 속한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그 자체입니다. [2]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감추시는 동시에 드러내시는 자리임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은 우리에게 집이 되고, 안전하며, 신비로 가득 차 은총을 깊이 바라보는 이들에게 베풉니다. 저는 이러한 깊고 고요한 시선을 ‘관상(觀想)’이라 부릅니다.
종교의 본질적 기능은 우리를 모든 것과 깊이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라틴어 re-ligio = 다시 묶다, 다시 연결하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이해는 누구와도 경쟁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포용합니다(사도행전 10,15.34).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온 우주에 합당하신 하느님으로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이해 안에서, 창조주의 사랑과 현존은 창조된 세계 안에 뿌리내리며, ‘자연적’과 ‘초자연적’이라는 정신적 구분은 무너집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창조적이고 영원하며 사랑 가득한 힘 안에서 지탱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 모든 물질, 모든 공허, 그리고 어둠에도 참된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시며, 우리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창조를 체험하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로서 아시는 그 체험을 즐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로서 아시는 것을 즐기는 것만큼이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순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Heather C.
References
[1] Caryll Houselander, A Rocking-Horse Catholic (Sheed and Ward, 1955), 139.
[2] G. K. Chesterton, Irish Impressions (John Lane, 1920), 215. Chesterton wrote “A religion is not the church a man goes to but the cosmos he lives in.”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21), 1–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ciej Wodzyński,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여름의 데이지 꽃과 겨울의 얼어붙음은 모두 하느님의 숨결로 존재하며, 각각은 신적 펼쳐짐의 빛나는 표현입니다. 곧, 우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육화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전개입니다.
----------------------------------------------------
251223. 12월 23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X X X X X
----------------------------------------------------
251223. 12월 23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이름이 주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바로 이 이름 속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온 인류에게 베푸실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찾아오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침묵과 두려움, 죄로 인한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요한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임하신다. 그분의 자비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요한의 탄생은 새 시대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첫 신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길을 여는 자입니다. 그의 사명은 뚜렷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다른 이를 위한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이름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부르신 표징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이름, 그 이름 안에 담긴 부르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의 이름은 놀라움과 감탄을 불러오는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늙은 부부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시작하셨고,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모든 것이 늦어버려 불가능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은 조용히 일하시며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오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잊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에게 자비로우시다.”
우리가 요한처럼 세상과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돕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 각자의 이름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름 모를 꽃다발
이곳 성지에 발령을 받은 후 거의 매주 그림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림 공부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화투’ 치냐? 라며 웃기도 하지만 진짜 그림 그리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몇 점을 완성하면 이곳의 다른 학생들 작품과 함께 전시회를 합니다.
전시회를 시작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성당으로 내려갔는데 제 이름으로 꽃다발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축하한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맙고 예쁜 꽃다발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은인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응원을 보내고, 기도로써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누군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도 있고 그대 주변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 주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
251223. 12월 23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새로운 시간이 매번 내게로 옵니다. 이 시간을 사용하기에도 벅찬데, 과거의 시간까지 안고 있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의 새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이 담아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병으로 투병 중이신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분,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암 투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제 미련도 없다.”
일주일 뒤, 신부님께서는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후회 없음은 그만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후회 없이 지금을 잘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따르려 하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장남의 이름은 가문의 정체성을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습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관습을 깨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습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행위는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사의 예고를 이제 온전히 믿고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의 순간, 닫혔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관습을 깨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너의 길을 가락.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단테).
----------------------------------------------------
251223. 12월 23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인내하며, MUTE(음소거)의 순간을 견디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인의 탄생일이 아니라 죽음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날이 성인이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완전히 들어가 “은총 안에서 완성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전례에서 이를 종종 ‘하늘 생일(dies natalis)’이라 부르며, 세상에서의 공로보다 하느님 안에서의 결실을 기념합니다. 예외인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은 구원 역사 안에서 두 사람의 독특한 역할—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구세주 탄생의 문지기인 요한—을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해마다 두 번 특별히 기념됩니다. 하나는 탄생 축일(6월 24일), 다른 하나는 순교 기념(8월 29일,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의 탄생 축일은 하절기의 절정 직후로, 그 이후로 낮이 점차 짧아집니다. 전례 전통은 이를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요한의 말과 연결해, 그리스도의 빛이 커지고 요한의 역할이 겸손히 물러남을 상징적으로 묵상합니다. 요한은 자기 사명을 끝까지 수행한 후, 그리스도 중심성을 위해 자신을 비워낸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덕을 가르쳐 줍니다. 그 핵심은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인식하며,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은총을 인정하되 우리의 본성을 잊지 마십시오. 잘 봉사했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태양은 제 일을 하고, 달은 순종하며, 천사들은 그들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해 주신 도구였던 사도 바오로도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했기에 사도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코린 15,9)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요한의 겸손은 단순한 소극성이나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겸손은 진리 안에서 자신을 보는 덕—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받은 소명과 한계를 인식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으로 이해됩니다. 요한은 큰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중심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막지 않고 오히려 권했습니다. 겸손은 소명을 질투 없이 전달하는 투명성이고, 그 투명성이 공동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요한의 삶을 언뜻 보면 거친 옷차림과 금욕적 삶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복음은 그를 기쁨의 인물로 증언합니다. 그 기쁨은 쾌락의 충족이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 관계의 기쁨입니다. “신랑의 벗”이라는 이미지는 세례자 요한의 영성을 가장 잘 요약합니다. 그는 공동체를 신랑께 인도하고, 신랑이 오면 한 걸음 물러나며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이런 기쁨은 겸손에서 솟아납니다. 겸손은 ‘비워짐’이기에, 하느님이 채우실 공간을 남깁니다. 그래서 권력이 주는 폐쇄적 만족과 달리, 겸손은 넓고 개방되어 참된 기쁨을 담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내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찬가는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노래합니다: 낮아짐이 곧 하느님의 시선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 말씀을 통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숙고할 내용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새겼던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이이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경외심을 갖고 이를 새겼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자기들 이웃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경외심을 가지고, 또 겸손한 마음으로 깊이 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덕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피조물이며, 모든 선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영혼은 자기 능력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내와 연결됩니다. 인내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덕이며, 겸손한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의 덕을 수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소리, '내' 생각, '내' 의지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텔레비전에서도 mute(음소거) 기능이 있지요?! 잠깐 다른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소리를 끄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우리의 의지로가 아니라 삶의 과정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소리를,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의지를 내려놓아야 할 시기를 겪게 됩니다. 그 순간은 메마음과 응답 없는 기도의 순간일 수 있고, 고통과 불확실성의 순간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절망과 무너짐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의 의미는 "주님께서 기억하신다."이고, 엘리사벳의 의미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두 이름을 합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맹세를 기억하신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오랜 세월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축복을 거두셨던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결코 그들을 잊지도 않으셨고, 더구나 그들을 위한 당신의 축복을 거두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국 그들에게 "소리"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아들의 이름을 "요한", 즉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가 겪은 침묵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침묵, 아니 온 세상이 지금 겪고 있는 침묵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탄생은 그 침묵을 깨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은 이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Mute”가 해제된 것입니다. 목소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은 목소리로 태어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원의 실현, 희망의 서막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희망과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인내하며, MUTE의 순간을 견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삶 안에서도 은총과 기쁨의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251223. 12월 23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대림4주간 화요일 - 이름이 불리는 순간
(Week 04. 기다림 속에서 완성되는 선물 / 임신 29–40주 / 대림 4주)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이름 #머무름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기다림
루카복음 1,57-66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전한다.
긴 침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즈카르야는 아홉 달 동안 말을 잃은 채 살아왔다. 천사의 약속을 믿지 못한 대가로, 그는 침묵 속에 머물러야 했다. 아내 엘리사벳의 임신을, 날마다 커져가는 생명의 신비를 오직 눈으로만 지켜보았다. 말없이 그저 바라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다.
여드레째, 할례식이 있는 날. 사람들은 전통을 따라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 '즈카르야'를 붙이려 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 순간, 모든 시선이 말 못 하는 아버지에게 향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또렷하게 썼다.
"그의 이름은 요한"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정체성이며, 사명이며, 존재의 의미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뜻이다. 이 아이는 조상의 이름을 잇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
사람들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름 지어진 첫 번째 존재.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회적 관습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나 전통보다,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위해 정해두신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순종의 순간, 침묵이 끝났다.
임신 29주에서 40주 사이, 태아는 세상 밖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가족들의 말소리를 구별한다. 이미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기억하고, 안정을 느낀다. 부모들은 아이와 교감하며 태명을 지어 불러주기도 한다.
이 태아에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생명을 환대한다는 의미다.
"너는 우리가 기다려온 아이야. 너에게는 의미가 있어. 너에게는 사명이 있어."
모든 아기는 그렇게 이름을 받으며 이 세상에 초대받는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이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명은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통계나 숫자로만 기록된다.
태어나기 전 사라지는 생명들,
"계획에 없었다"거나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생명들.
하지만 하느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을 부르신다.
요한이 그랬듯, 예레미야가 그랬듯, 예수님이 그랬듯, 모든 생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 불려진 존재다.
"내가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 하였다." (예레 1,5)
하느님은 이미 그 생명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
즈카르야의 입이 열렸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찬미였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오직 하느님을 찬미했다.
침묵의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듣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말을 잃은 동안, 그는 더 깊이 보았다.
아내의 몸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은총, 모든 것이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짐을.
우리도 때로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하지만 그 침묵은 끝이 아니다. 준비의 시간이다.
대림시기는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요한이 세상에 이름을 얻었듯, 예수님도 곧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름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도, 하느님께 불려진 이름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우연이 아니다. 실수도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 부르신, 사랑받는 자녀다.
대림의 마지막 날들을 걸으며, 나는 묻는다.
나는 내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나는 그 음성을 알아듣는가?
침묵 속에서도, 기다림 속에서도,
하느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부르신다.
그 이름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름을 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주님, 당신은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아셨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우연이 아니라,
당신의 뜻 안에 존재합니다.
모든 생명이 이름을 받고,
환대받는 세상을 이루게 하소서.
침묵 속에서도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께서 주신 사명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251223. 12월 23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사람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아기의 할례식에서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한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 집안에는 없는 이름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한 번 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확정하며
그때에 그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똑같이 주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기가 받은 이름은
그의 집안에는 생소한 이름입니다.
사람에게서 온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아기가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을 좋아하고
낯선 방식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익숙한 방식이 편안하고
낯선 방식은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우리의 방식을 모두 무시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에게 좀 낯설기도 합니다.
성령을 통한 동정녀의 잉태는
여느 인간의 방식과 다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예수를 계속해서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지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은
우리에게 익숙함을 깨고 낯설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 모두 무시되지는 않지만
낯설음을 함께 생각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고
그렇게 우리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익숙함과 낯설음의 그 긴장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251223. 12월 23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7-66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이제 성탄도 이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참된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 그 ‘원천’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받아 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게 되지요. 오늘 복음의 배경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아기를 얻은지 여드레 째 되는 날, 온 가족이 모여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주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이란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생동안 살아내야 할 ‘사명’을 부여하는 일종의 ‘예언’으로서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래서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는가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가문일수록,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가문의 전통과 정신이 깃든 공동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기가 가문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물려받는 대신,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심지어 즈카르야는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판에 직접 글씨까지 써가며 아기 이름을 반드시 요한으로 짓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지요. 즈카르야의 혀가 묶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한 것에 따른 ‘벌’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입을 닫음으로써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보는 ‘묵상’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제 고집과 뜻을 꺾지 못하고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지었겠지요.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으로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 편견과 선입견, 상식과 전통이라는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되어야 합니다. 나를 세상에 옭아매는 모든 고리를 끊어버리고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시선의 노예’가 된 상태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건 내가 속한 세상을, 내가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과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가 마주하는 모든 일들과 내가 관계맺는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대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좋고 싫음’이라는 개인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께서 참으로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시게 됩니다.
----------------------------------------------------
251223. 12월 23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 - 하느님의 은총
오늘 복음은,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구원 의지에 관한 예고 말씀을 접했던 또 다른 증인, 즈카르야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말을 못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문제에서, 비록 세속의 전통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즈카르야는 이번에는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릅니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13). 즈카르야는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았고,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 자식 없는 서러움에서 자식을 품게 된 은총, 불신에 대한 응벌로 말을 못하게 된 상태에서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송하게 된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결국 이 일로 주변 사람들조차 두려움에 떨면서도 요한의 미래를 내다보는 은총,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필 것이라 확신하는 은총 속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 역시, 왜 그러한 일이 내게 닥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뜻 앞에 서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거나,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임에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 앞에 서게 되는 경우 등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경우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보고,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힘과 용기가 나고, 잘 다스려 나갔던 시간들, 그토록 무겁게 다가왔던 짐이 그렇게 가볍게 지나갔던 시간들,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을 고백하고 찬미의 소리를 높였던 시간들 말입니다. 내적인 평화가 나를 휩싸고, 주님과 깊고 넓은 친교를 나누었던 시간들 말입니다.
성탄대축일이 곧 다가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담겨 있다면, 즈카르야를 다시 한번 보고 배우도록 합시다. 의심했지만, 그래서 말을 못하는 응벌의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이 시간을 새로 태어남의 시간으로 극복하여, 끝내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물게 된 즈카르야는 우리의 새로남, 우리를 성탄의 길로 인도하는 탁월한 증인이요 안내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당신 은총의 수혜자가 될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께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
================================================
“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46
12월23일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유성현 베드로(연안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슬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 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와 '본성'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자 드라마인 『뿌리(Roots)』에 아주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옵니다. 백인 주인은 그에게 '토비'라는 노예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며 강요합니다. "네 이름은 뭐야?" "쿤타 킨테!"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을 외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어 몇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름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뿌리 (아프리카 전사)와 영혼을 잃고 백인의 소유물(노예 본성)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한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습이자 혈통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단호하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즈카르야는 처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핏줄을 이어받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 '요한(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순간, 아기의 본성은 '인간 즈카르야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주는 대상이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 관계의 신비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아",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담은 이름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로 가서 '꽃',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책임지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며 사느냐'입니다. 개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개가 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개를 사람 대하듯 할 수 있지만, 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짖거나 문다면) 결국 개일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잊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셨습니까?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센'이라는 가명을 줍니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부모님과의 기억,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이었습니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릴 뻔하다가, 하쿠의 도움으로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녀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모님을 구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나의 근원인 부모님과 연결되는 생명줄임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전쟁터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다 잡혀 온 병사를 만났습니다. 대왕이 이름을 묻자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도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용기와 정복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쓴다면 그 본성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우리 본성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뜻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이 거창한 이름을 받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절뚝거리며 형 에사우에게 나아가 일곱 번 절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여 뒤에 숨는 비겁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이긴 사람답게 당당하고 겸손하게 문제와 직면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하느님을 이긴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즈카르야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줌으로써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이것입니다. 세례명을 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만으로는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 세례명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프란치스코라면 가난을 사랑하고, 요셉이라면 의롭게 행동하며, 마리아라면 순종하십시오. 이름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거룩한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제 곧 주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성탄을 다시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탄을 앞둔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초대 교회가 보여준 이상적인 공동체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소개합니다. ‘말씀, 친교, 성찬, 기도’ 이 네 가지는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둥이며, 성탄을 준비하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둘째, 모든 차별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가족이 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을 받는 사건은 성령이 모든 장벽을 넘어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성탄은 차별을 지우는 사건이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하느님의 잔치입니다.
셋째, 복음의 올바른 토착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심을 존중하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의 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은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을 틔웁니다.
넷째, 모범적인 선교자와 목자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경제적 짐을 지우지 않았고, 약한 이들을 먼저 돌보았으며, 받기보다 주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눈물로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했고, 낮에도 밤에도 형제자매를 걱정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 모든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성탄 준비의 마음가짐입니다.
다섯째, 복음이 평화의 길임을 삶 안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과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고, 평화를 이루는 종교임을 밝히고자 노력합니다. 힘없는 이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살길을 찾는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구원의 보편성’, 즉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문을 여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는 엘리사벳의 축복을 들었고, 마리아의 찬미가를 들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성탄입니다. 엘리사벳처럼 축복하는 사람이 되고, 마리아처럼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며, 감사의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참된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이사야의 믿음과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본받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가 말씀과 친교와 성찬과 기도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시며,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은총을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게 하소서.“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성탄의 신비가 깊어지는 오늘 전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름이 운명이다.”라는 라틴 말 표현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 1,78)를 드러낼 아기의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장차 ‘말씀’이신 분께 ‘소리’를 내어 드리게 될 아기는 이 이름을 받으면서 아버지에게 말을 되찾아 줍니다.
주님께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오십니다. 첫 번째로 역사 안에서 태어나시고, 두 번째로는 역사의 종말에 오십니다. 세 번째로 날마다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당신 교회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늘 깨어 그분을 기다립니까? 아니면 문에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써 붙여 놓지는 않았나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바야흐로 코앞에 다가온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우리의 설렘을 더욱 커지게 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출산을 앞둔 성모님의 심정이 어떠셨을지를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분명 설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기쁨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1,32)을 낳는다는 떨림으로 보낼 이 시간을 성모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1.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와 새 창조의 예표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다.(59절) 구약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표징이었지만(창세 17,12),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할례는 여드레째 되는 날에 이루어졌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여드레째 되는 날, 곧 주일에 부활하시어 새 창조의 시작이 되심을 예표한다.”(Epistula ad Fidum, 64) 따라서 요한의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무가 아니라, 새로운 계약과 부활의 빛을 미리 드러내는 사건이다.
2. 이름의 신비: 요한(은총)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친족들의 전통을 거슬러 아이의 이름을 “요한”(하느님의 은총)이라 정한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의 이름은 그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은총을 뜻하며, 그가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을 예고한다.” (Homilia in Matthaeum, IV,6) 요한은 이름 자체로 이미 하느님 은총의 증언자이다.
3.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확정하는 순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한다. 믿지 못했던 사제가, 아들의 탄생으로 믿음을 회복한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묵상한다. “말씀을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는, 은총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다시 말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닫으셨던 입술을 은총이 열어 주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I,34) 즉, 요한의 이름 안에 담긴 은총이 즈카르야의 혀를 풀고, 찬미로 이끌어 준 것이다.
4. 백성의 두려움과 경외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65절). 이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경외심이다. 요한의 탄생이 이미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의 기적적 탄생은 단순히 한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시작하셨음을 느꼈기 때문이다.”(Sermo 293,3)
5. 영성적 적용: 길을 준비하는 삶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그의 사명은 언제나 단순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성탄을 준비하면서 요한처럼 살아야 한다. 할례가 새 계약을 예표하듯, 우리는 세례로써 새로운 창조 안에 산다. “요한”의 이름이 은총을 드러내듯, 우리의 존재도 은총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즈카르야가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했듯, 우리의 입술은 감사와 찬미로 열려야 한다. 이웃이 경외심을 가졌듯,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는 말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닦는 삶이었다. 오늘의 신자들도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Jesus of Nazareth, vol.1)
요한의 탄생과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례가 아니라 새 창조의 예고이며, 이름 속에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그의 탄생은 즈카르야의 찬미를 끌어내고, 백성 안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의 모범이 되고 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이으신 사람의 길>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으신 사람의 길>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63)
하느님께서
이으신
사람 사이의
길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하느님 몸소
걸으시는 길이요
사람과 사람
오고감에 앞서
하느님께서
오가시는 길이니
하느님께서
이으신
사람과 사람
맞닿은
사람의
길은
하느님의
길이요
사람이 앞서
누리기보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드려야 할 길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생의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57-66)
1)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고(루카 1,76),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곧 끝난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틀 뒤가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인생의 대림 시기’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시간입니다. ‘재림’은 떠나셨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오신다.’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면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떠나신다.’도 되기 때문에,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2)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메시아 강생’과 ‘요한의 사명’을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 덕분이지만(루카 1,41.67), 마리아의 증언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루카 1,39-55) 그래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고, 엘리사벳이 그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것은, 자신이 천사의 말을 믿게 되었음을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은, ‘기쁜 소식’을 선포할 자격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또 사제의 자격도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62절의 ‘손짓으로 물었다.’라는 말은, 즈카르야가 ‘듣는 능력’도 잃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주어진 표징이 왜, ‘말을 못하다가 다시 하게 되는 것’으로 주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를 증언하는 일인데, 그 일은 일차적으로 ‘말’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64절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라는 말은, 68절-79절에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가리킬 것입니다.
3)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라는 말과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이 아직 ‘메시아 강생 소식’을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 소식을 들었고, 믿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기뻐했을 것이고, 또 주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65절의 ‘두려움에 휩싸였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4)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뜻과 계획을 믿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다시 전해 주는 생활입니다. 즈카르야가 처음부터 천사의 말을 믿었다면, 곧바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아기가 태어난 후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불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천사의 말을 바로 믿었고,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바로 알렸습니다. <엘리사벳에게 가기 전에 먼저 요셉에게 알렸을 것이고, 가족에게도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게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가 아니라 태어나시기 전에 부른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계시를 받게 됩니다.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시일 수도 있고, 그냥 사적이고 작은 일에 관한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듣는 말씀 한 마디, 한 구절이, 또는 어떤 체험들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시는 계시입니다. 신앙인은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각자 자신이 받은 계시를 자신의 삶으로 실행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전하고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다>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았고 함께 기뻐하였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하느님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으로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된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혀가 풀렸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렸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다. 즈가르야는 입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여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하고 말했다. 그 아기는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고,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되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지니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하며 구세주 오심을 외쳤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고정관념, 편견 등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려야 하고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다. 하느님께서 주신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자!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길 바란다. “저희가 깨꿋한 마음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경축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
[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
[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아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새로운 시간이 매번 내게로 옵니다. 이 시간을 사용하기에도 벅찬데, 과거의 시간까지 안고 있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의 새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이 담아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병으로 투병 중이신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분,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암 투병으로 생의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제 미련도 없다.”
일주일 뒤, 신부님께서는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후회 없음은 그만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후회 없이 지금을 잘 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할례식에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사람들은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따르려 하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지시대로 ‘요한’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장남의 이름은 가문의 정체성을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조상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습과 달리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합니다. 관습을 깨는 엄청난 용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습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행위는 단순한 작명이 아니라, 천사의 예고를 이제 온전히 믿고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순종의 순간, 닫혔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관습을 깨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63,64)
‘야훼 기억하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즈카르야를 주님께서는 기억하시어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기를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맹세이시다’라는 뜻을 지닌 엘리사벳의 충실함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멸시받던 여인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애환을 들어주신 주님께서는 “야훼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인 요한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주님’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요한은 ‘자비로우신 주님’께 회개하여 되돌아오라고 광야에서 외치다가 세상의 권력자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자비로운 주님’에 대한 새로운 선포입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살면서 자비보다는 무자비함을 더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폭력에 더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자비로우신 주님’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기보다 내 뜻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여기며 힘으로 억누르는 사람들과 살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빨리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적인 대화의 힘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열차는 사고가 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가 시간을 좀 더 가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 즉. ‘주님은 자비하시다’라고 쓰자 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심은 모든 것을 풀리게 합니다. 그러나 무자비함은 사람과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관계를 경직시키며 더 큰 희생만 가져옵니다.
성탄을 앞두고 ‘자비로우신 주님’을 광야에서 선포하는 ‘요한’의 외침에 응답하며, 우리도 영육 간에 춥고 배고픈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삶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당신 손길로 저를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아오셨고 알아보지 못하여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응답하지 않아도 돌보아주셨고, 배척할 때도 떠나지 않고 늘 품고서 기다리셨습니다.
고통과 상처를 눈물로 씻어주시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는 바닥이 되어 떠받치셨습니다.
침묵으로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제 심장에 들어와 당신 손길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손길이 되어 맡겨진 이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오늘 복음(루카 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기쁜소식, 곧 엘리사벳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소식을 믿지 못해 줄곧 벙어리로 지냈던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그의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주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탄생에 앞서 선택된 도구로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러 온 선구자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1.23-24)
이렇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으로, 그의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에 앞서 태어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화답송 후렴)
주님의 성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습니다. 내일 밤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말년에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를
향합니다.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의 때가
왔다는
첫 신호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탄생하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않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요한의 삶은
메시아가 아니라
길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빛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기다리고
존중하라는
구원의
초대입니다.
해산은 서두를 수도,
미룰 수도 없습니다.
때가 차야
일어납니다.
이렇듯
한 생명의 탄생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공동체의 역사를
움직입니다.
또한 우리 삶에는
조급함으로
앞당길 수 없는
하느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말로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라고 요한의
탄생은 말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