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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워 ―金昌龍대위는 金安一 과장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했습니까? 『그는 1연대 정보주임이었는데 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수사를 거쳐서 하였습니다. 행정적인 처리는 저를 거쳐서 하였습니다. 朴正熙 등 육군 사관학교 내 세포에 대한 수사를 金昌龍이 한 것은 1연대가 그 학교와 가까운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꼭 살려야 할 사람은 살리기가 곤란했고, 꼭 잡아야 할 사람은 잡아놓기가 힘들었습니다. 수사에 협조하여 이제는 풀어주어도 공산주의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살리자고 건의하면, 위에서는 여순반란 사건 때문에 내 부하가 얼마나 희생되었는데 살려준단 말이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친한 부하를 구속시키려면,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호를 해주고… (월간조선 1989년 12월호, 조갑제) |
1989년 12월 조갑제씨가 쓴 월간조선에서도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워’라는 소제목이 나옵니다. 박정희가 죽었어야가 아니라, 원래 박정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습니다.
‘영남유격사력관 박정희? 특무과장
김창룡이 박정희 살리자고 했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는 진짜 남로당 프락치였을까요? 조갑제씨와 이동욱 월간조선 기자가 쓴 ‘박정희 전기’에 이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니, 남의 교수부장을 빨갱이라고 잡아가면 어떻게 하오?’ ‘아닙니다. 그놈은 빨갱이가 틀림없습니다.’ ‘증거가 있소?’ ‘예, 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김창룡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웬만한 사람의 키를 넘을 만큼 큰 차트에는 남로당 수뇌부를 정점으로 하여 밑으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퍼져 나간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조직원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박원석 대위의 이름은 박정희 소령 밑에 올라 있었다. ‘아니, 박원석이가 무엇을 했길래?’ ‘드러난 것은 없지만
박정희의 세포입니다.’ 김정렬이 ‘박원석은 물론이고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가 아닌 것 같은데….’라고 했더니
김창룡은 ‘아닙니다. 그는 확실합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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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공산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 사람들과 접촉했고, 숙군 수사를 통해 체포된 사람들과 연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된 사람 대부분도 무죄라고 밝혀야 할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를 수사했던 김안일 소령은 박정희의 구명을 김창룡
대위가 직접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안일 소령은 나중에 백선엽 당시 육군본부정보국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건의했다고 밝혔고, 백선엽은 김안일
소령의 주선으로 박정희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朴正熙가 나를 통해서 白국장을 만났다는데 그런 기억은 없고 朴소령 수사담당자인 金昌龍(김창룡)대위가 나를 찾아와
수사에 협조해준 朴대위를 살려주자고 해서 내가 직접 朴소령을 만난 뒤 金대위와 둘이서 白국장에게 구명을 건의한 기억은 납니다』 (박정희 수사
책임자 김안일 특무과장) 숙군의 일단계 작업이 완결된 즈음인 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金安一소령이 나에게 『박정희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 봐줄 것을 요청했다. (전쟁과 나, 백선엽) |
결국, 박정희는 1949년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이후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가 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나 강제 예편됐다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나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합니다. 박정희처럼 남로당 프락치로 연루된 사람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정희를 살린 것은 친일파 출신
만주군 인맥이었다’
박정희가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군내 좌익 숙군 수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만주군에서 활동했던 만주군 인맥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의 구명을 건의했던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 보조원으로 출발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으로 공산주의자를 잡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라면 이를 갈았던 그가 유독 박정희는 살려줬습니다. 박정희의 구명을 도와준 백선엽 또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만주군 중위였습니다.
박정희 수사 책임자였던 김안일 당시 특무과장은 백선엽과 김창룡이 박정희의 구명을 위해 연대보증을 섰다고 밝혔습니다. 박정희, 백선엽, 김창룡은 모두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만주군 출신이었지만 숙군 수사로 처형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달리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 명단을 털어놓았고, 전향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백하고 만주군 인맥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살아남은 것입니다.
1989년 12월 월간조선에서 조갑제씨는 박정희 수사
책임자였던 김안일 당시 특무과장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창룡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4.19혁명도 불가능했다고 밝혔습니다.
조갑제씨는 그런 이야기보다 ‘김창룡이 박정희 소령을 살려주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가 더욱 흥미있는 가상을 부를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박정희는
죽었고, 5.16쿠데타는 발생하지 않았고,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지 못했으니 박근혜 대통령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홍구 교수의 발언이 이
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친일파 헌병 출신 김창룡은 김구 선생
암살을 주도하면서 민족지도자는 살해하면서, 정작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는 살려줬습니다. 조갑제씨의 말처럼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역사에서 만약은 없겠지만, 국사 역사교과서 논란의 과정에서 나왔던 한홍구
교수 사건을 따져본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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