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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建國大學校, Konkuk University] | ||
1931년 5월 12일 사단법인 민중병원을 창설하여 경영하던 독립운동가인 유석창(劉錫昶)이 1946년 5월 15일 오성학교 교사 395평의 건물과 대지 667평, 전.답.임야 등 263480평을 기본재산으로 1908년 도산 안창호 등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출신의 신흥지식인 33인이 구국 정치활동과 문화계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북학회의 회관'에서 조선 정치학관으로 개교한 ‘민족 사학’이다. 교훈은 성·신·의이다. 1948년 5월에 재단법인 조선정치학원과 조선 정치대학관을 설립하였으며, 1949년 재단법인 정치학원과 정치대학이 승격되였다. 1959년 2월에 재단법인(현재의 학교법인) 건국대학원으로 개편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교명을 건국대학교로 변경하였다. 1980년 충주에 충주대학(분교) 설립을 인가받았고, 1990년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개원하였다.
유석창 [劉錫昶, 1900년∼1972] 의사·교육가. 호는 상허(常虛). 함경남도 단천 출생. 뒤에 정규대학인 건국대학교로까지 발전시켜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1985년 '사학연금지'가 근대사학 백 돌을 맞이하여 근대사학 100년 동안에 사학인 중의 사학인으로 귀감이 될 사학 설립자로 선정한 13인 중의 한 사람이다.
경희대학교 [慶熙大學校, Kyunghee University] 1949년 배영대학관(培英大學館)과 신흥(新興)전문학교를 합병하여 신흥초급대학으로 설립하였다. 1949년 배영대학관(培英大學館)과 신흥(新興)전문학교를 합병하여 신흥초급대학으로 설립하였다. | ||
교훈은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이다. 6·25전쟁으로 경영이 악화되자 | ||
1951년 조영식(趙永植)이 인수한 후 4년제 단과대학으로 개편하여 교명을 신흥대학으로 개칭하였고, | ||
1953년 현 교지를 확보하였다. 1955년 문리과대학·법과대학·정경대학·체육대학의 4개 | ||
단과대학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고황재단으로 재단명칭을 바꿨다. | ||
1960년 경희대학교로 개칭하였다. 1965년 동양의과대학을 합병하고 의과대학 및 약학대학을 신설. 1979년 국제캠퍼스 신설을 인가받았다. | ||
조영식(趙永植, 1921년 11월 22일 ~ ) | ||
1921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1947년에 월남,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 ||
1951년에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교육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학교법인 경희학원을 중심으로 경희 | ||
대학교와 경희고등학교, 경희중학교, 경희초등학교, 경희유치원 등 전일적 교육체제를 갖춘 교육기관을 | ||
구성하였다. 1950년대에 ‘잘살기운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운동으로 나아갔다. | ||
세계대학총장회의의 창설을 주도하고, 1975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4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 ||
인류사회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보스턴 선언문을 채택하고 ‘밝은사회운동’(GCS운동)을 제창하였다 | ||
1990년대 이후에는 ‘제2의 르네상스’를 제창하고,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전개하였다 | ||
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 Korea University] | ||
1905년 이용익(李容翊)이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이는 한국인에 의해 | ||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당시 2년제 법률학·이재학(理財學)의 2개 전문과를 두었다가 | ||
1907년 법률학과와 이재학과를 법학과·경제학과로 고치고 3년제로 연장하였다. 교훈은 자유·정의·진리이다. | ||
1915년 전문학교 시행규칙에 따라 교명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하였다가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 | ||
설립하여 보성전문학교로 다시 개명하였고, 1922년 조선교육령에 따라 전문학교로 정식 인가되었다. | ||
1932년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의 경영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중앙학원 | ||
으로 재단을 확립하였다. 1934년 교사를 현 위치로 이전하고, 1944년 일제의 강요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 | ||
교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보성전문학교로 환원하였다. | ||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하고, 정법·상경·문과의 3개 단과대학을 두었다. | ||
1971년 학교법인 우석학원을 합병하여 우석대학교 및 부속·병설 기관을 흡수하고, 1980년 충청남도 | ||
연기군 조치원읍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 ||
이용익(李容翊) | ||
1854년(철종 5)∼1907년. 한말의 정치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보부상으로 | ||
행상하여 약간의 자금을 모아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 | ||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한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연락을 재빨리 하여 주었기 때문에 고종의 | ||
신임을 얻어 단천 부사가 되었다. 1902년 탁지부 대신으로 이 준·민영환·이상재와 개혁당을 조직했으며, | ||
친러파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 ||
그 후 용암포의 조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도록 적극 주장하였으며, 내장원경이 되어 화폐를 남발하고 | ||
광산 채굴권·인삼·전매 등의 사업을 잘못 감독하여 독립협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 ||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병사하였다. | ||
김성수 [金性洙, 1891.10.11~1955.2.18] | ||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인촌(仁村)이다. 1891년(고종 28)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 ||
송진우(宋鎭禹)·백관수(白寬洙) 등과 교유하였고,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 ||
졸업하였다. 귀국 뒤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 ||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자립과 민족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1920년 《동아일보》를 | ||
창간했다. 1932년 보성전문(普成專門)을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 ||
19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同)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 ||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 ||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 ||
글을 쓰거나 강연했다. | ||
1945년 8·15광복 뒤에는 미군정청 수석고문관을 거쳐, 1946년에만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총재, 동아 | ||
일보사 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47년 신탁통치반대 | ||
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어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 | ||
으나 이승만(李承晩) 독재에 반대하여 이듬해 5월 사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 ||
되었으며 그 후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Sogang University] | ||
1948. 한국가톨릭교회의 발의와 비오 12세 교황의 윤허로 대학교의 창립이 기획됨. | ||
1954. 예수회원 Theodor Geppert, S.J.박사(독일인)가 서울에서 창립준비에 착수함. | ||
1955. 예수회 총장 신부 Johann Janssens,S.J.께서 예수회 위스컨신 관구로 창립 사업이 이관되며, | ||
위스컨신 관구장 신부 Leo Burns,S.J.께서 한국에 와서 한국가톨릭교회와 함께 대학 설립과정 | ||
을 시작함. | ||
1956년 인가된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1960년 서강대학으로 설립하였다. | ||
교훈은 '진리에 순종하라'이다. 초대학장으로 케네스 킬로렌(Kenneth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 ||
영어영문학·사학·철학·수학·물리학·경제학의 6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1964년 사립학교법에 따라 | ||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197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 ||
예수회 [Society of Jesus] | ||
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부터 | ||
유래하며 1540년에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 ||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을 때는 | ||
예수회원이 거의 1,000여 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 ||
하며, 한국에서는 중국식 음사(音寫) 그대로 야소회(耶蘇會)로 써왔다. | ||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혁명이 일어나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카톨릭의 부패와 | ||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루터와 칼뱅의 등장으로 | ||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으며 | ||
가톨릭(구교)의 반성과 혁신을 주장하였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 ||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 ||
예수회는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어 1547년 처음으로 예수회 대학을 개설한 이래, 세계 100여 개 국가에 | ||
진출하여 226개의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을 설립하였으며, 4,000여 개의 중·고교와 기타 교육기관 | ||
등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이 수도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4년이며 1960년에 서강대학교 | ||
1962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1974년 수원에 ‘말씀의 집’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 ||
서울대학교 [Seoul National University] | ||
1945년 10월 16일 이후 서울대를 구성하게 될 경성제대 의학부의 학장과 각 전문학교의 교장이 | ||
미군정청에 의해 임명되었다.[2] 한편 1945년 10월 17일 미군정청에서 경성대학에 미국인 학장으로 | ||
A.Croft 미 해군대위를 임명하였다.[3] 1945년 10월17일 경성제대를 경성대학으로 개칭하였다. | ||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간호학교 개교하였다. 12월25일 경성음악학교(서울대 음대 전신)가 설립인가가 | ||
되었다. 이로써 서울대를 구성하게 될 모든 학교가 생겼다 | ||
1946년 7월 13일 국대안 발표가 있자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일부 교직원과 학생들은 맹렬한 반대운동을 | ||
펴기 시작했고, 7월 31일 조선교육자협회와 전문대학교수단연합회가 공동으로 전국교육자대회를 열고 | ||
국대안 철회를 요청하였다. | ||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102호)의 공포로 서울대학교가 | ||
설립되었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공업 | ||
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경성여자사범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 ||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사립), 경성약학전문학교(사립) 등 관`공, 사립 학교들을 | ||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초대 총장으로 미군정청이 미육군성에 추천하여 구 경성대학 | ||
총장이 되었던 엔스테드(Harry B. Ansted)해군대위[5]가 취임하였다. 대학원장에는 윤인설, | ||
문리과대학장에는 이태규를 임명하는 등 국대안을 강행하였다. | ||
국대안 반대의 집단행동이 본격화된 것은 1946년 9월 해당 대학교들의 학생들의 등록을 거부하고 제1차 동맹휴학에 | ||
들어가면서부터이고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 ||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 ||
1947년 3월 개학 후 서울대학교 일부 단과대학에서는 동맹 휴학을 중지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서울대 이사회는 | ||
같은 해 6월 13일 제적학생에 대한 조건부 복교를 결정했다. 복교원을 제출한 학생 가운데 | ||
10~20%는 복교가 불허되었다.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바꾸라는 국대안 반대세력의 요구에 따라 | ||
같은 해 10월 이춘호가 총장으로 선임되었고 국대안 파동도 일단락되었다 | ||
이어 1950년에 사립 서울대학(구 경성약전)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으로 독립시켰다. | ||
1970년부터 동숭동(문리대학·법과대학·예술대학 미술부), 연건동(의과대학), 공릉동(공과대학), 경기도 | ||
수원(농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소공동(치과대학), 남산동(예술대학 음악부) 등지에 | ||
흩어져 있던 캠퍼스를 통합하기 위하여 관악캠퍼스 조성에 착수하였고, 1975년부터 대학본부와 단과 | ||
대학들이 이전하였다. 2003년 수원 상록캠퍼스에 있던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도 관악캠퍼스로 이전 | ||
하였고, 의과대학·간호대학이 있는 연건캠퍼스는 존속하여 지금에 이른다. | ||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SungKyunKwan University] | ||
1398년(조선 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 ||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했다. 경학과(經學科)는 | ||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 ||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 | ||
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 | ||
로 승격시켰다 | ||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 ||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 ||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고 재단이사장에는 백범 김구선생이었다. 학봉 李錫九선생이 재단법인 | ||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1946년 | ||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 | ||
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 ||
1965년 삼성문화재단에서 운영에 참가하였으며 이사장에 호암 이병철선생이 취임하였으며, 수원으로 | ||
학교이전 문제에 의한 학내분규로 1977년 삼성 문화재단 운영 포기.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79년 부터 1991년까지 봉명재단 운영 | ||
1996년 삼성재단 운영에 다시 참여 | ||
김창숙(金昌淑, 1879년 ∼ 1962년 5월 10일) | ||
경상북도 성주 대가면 사월리 영남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 ||
“김창숙만 한 인물 있기에 조선 유학 헛되지 않았다.” " 이시대의 마지막 선비" | ||
100번 꺾어도 꺾이지 않았던 민족지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사진) 선생. | ||
그는 종합대학 성균관대의 설립자이자 초대총장(1953∼56)이다. 해방 뒤 미 군정청은 경성제국대학을 | ||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든다. 반대운동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산은 전국 유림인 대회를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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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내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대학 설립의 기초를 다진다. | ||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유림 대표가 빠진 걸 천추의 한으로 여긴 심산은 중국 상하이로 | ||
망명해 줄기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 와중에 두 아들과 전 재산을 역사에 바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의정원 부의장, 만주 독립군조직의 군사부 고문을 지낸 그는 네 차례에 걸친 옥고로 앉은뱅이가 되고 | ||
만다. 벽옹(<8E84>翁:앉은뱅이 늙은이)이라는 호가 거기서 유래했다. 모진 고문에도 굴복할 줄 몰랐던 | ||
그는 감옥에서 일본인 전옥(典獄) 마야사키에게 절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무릇 절이라고 하는 | ||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일본인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게 | ||
심산의 생각이었다. “포로로서 당당히 죽겠다”며 무료변호사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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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기에 심산처럼 시종 곧은 절개를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총독부 반대방향으로 | ||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 허리를 굽히기 싫어 꼿꼿한 자세로 세수한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심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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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3절(三節)’로 불린다. 하지만 만해나 단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 ||
해방을 맞고 남북 분단이 계속되자 심산은 ‘통일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라’는 내용의 | ||
절창(『김창숙문존』)을 남겼다. 58년 이승만 대통령은 공병대에 명하여 김구·윤봉길·이봉창 등 일곱 | ||
열사의 묘를 이전하고 그 자리에 운동장을 조성하려 했다. 심산은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가서 ‘차라리 | ||
나를 죽이라’며 1인시위를 벌였다. 그 덕분에 축소된 형태로나마 지금의 효창공원이 유지될 수 있었다. | ||
고은 시인은 ‘조선 유교 이만 한 사람 있기 위하여 500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만인보1』,1983년)고 | ||
기록하고 있다. 2001년 김수환 추기경은 수유리 선생의 유택(幽宅)을 찾아 큰절을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 | ||
연세대학교 [延世大學校, Yonsei University] | ||
1885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H.N.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초기의 이름은 광혜원) | ||
을 모체로 하여 1899년 한국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 자유이다. | ||
1904년 L.H.세브란스에게 기증받은 기부금으로 근대식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고 의학교육기관으로서의 | ||
체제를 갖추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2년 | ||
일제의 강요로 교명을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변경하였으나 1945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 ||
복귀하였으며,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6년제)으로 개편하였다 | ||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재한 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에서 | ||
서울 YMCA 내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으로 개교하였다.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 | ||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고, 1923년 신교육령에 따라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4년 | ||
대학의 1944년 대학의 재산을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한 총독부가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 ||
고쳤으나, 1945년 8·15광복 이후 연희전문학교로 복귀하고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57년 | ||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발족하여 초대총장에 백낙준(白樂濬)이 취임하였 | ||
취임하였으며, 1977년 원주에 제2캠퍼스를 설립하였다. | ||
중앙대학교 [中央大學校, Chungang University] | ||
1918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의 중앙교회에 설치한 중앙유치원을 모체로 1928년 중앙보육학교로 | ||
인가되었다.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철도학교로 개칭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중앙여자전문학교로 | ||
승격하고, 1947년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설립자 임영신)을 발족하여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하였다가 | ||
1948년 남녀공학 중앙대학으로 다시 개편하였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81년 경기도 안성시 | ||
대덕면에 제2캠퍼스를 설립하였다. 교훈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이다. | ||
1987년 재일교포 김희수박사 학교운영에 참여하며 이사장 취임. 2008년 두산그룹에서 학교운영에 참여 | ||
임영신(任永信, 1899년 11월 20일 금산 - 1977년 2월 17일 ) | ||
호는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온 승당(承堂)이다.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며, 1914년∼1918년 | ||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 등을 거쳐 미국 | ||
으로 유학 1925년~1930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1931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 ||
대학원을 수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일때 이승만은 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 ||
그녀는 교육활동 외에 독립운동에도 종사하였으며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 ||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됐고 1949년에는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가하였다가 이승만정권 붕괴 | ||
후 야당으로 활동했다. 중앙전문학교 학장과 중앙대학장,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을 하다가 1963년 이후에 | ||
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 ||
한양대학교 [漢陽大學校, Hanyang University] | ||
1939년 김연준(金連俊)이 동아공과학원으로 설립, 1941년 동아고등공업학원으로 인가되었다. 1945년 8·15 | ||
광복과 함께 교명을 건국기술학교로 바꾸었으며, 1947년 재단법인 한양학원을 설립하여 한양야간공업 | ||
대학으로 개편하였다가 1948년 한양공과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59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면서 현재의 | ||
현재의 교명으로 개칭하고, 1978년 경기도 안산시 대학동에 제2캠퍼스를 설치하였다. | ||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 ||
김연준 [金連俊, 1914.2.20~2008.1.7] | ||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호는 백남(白南)이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 ||
그해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으며 1948년 동아공과학원의 후신인 한양공과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 ||
1952∼1973년 기독교 세계봉사회 이사 겸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1959∼1973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 ||
이어 1961∼1973년 대한일보사 사장, 1964년 한국정책연구소 소장, 1968년 대한체육연맹 회장, 1975 | ||
∼1980년 한양대학교 총장, 1976년 국제PTP 한국본부 총재 등을 지내고 1980년 이후는 한양대학교 재단 | ||
이사장으로 있다. | ||
한양대학교·한양여자대학·한양고등학교·한양중학교·한양초등학교 등을 세워 교육에 힘썼으며, 또한 작곡 | ||
가로도 활약하여 《김연준 가곡 1600곡집》과 《성가곡집》 등 총 16집을 출간하였다. 2001년에는 자신이 | ||
곡을 붙여 이미 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시 80여 편을 실은 시집 《청산에 살리라》를 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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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족사학 건국대학교가 빠지는게 있을수있는일이냐?
양심없는색히
정리해줘 올려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