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암호해독과 향가해독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9호(2021.06.15)
글쓴이: 김영회 (무역76-80) 향가연구소 소장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에니그마’라는 암호 만드는 기계에서 생성된 암호를 해독해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내는 전설적인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에니그마가 만드는 암호를 해독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라는 인물입니다. 앨런 튜링은 해독과정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발명합니다. 그는 당시 법에 금지된 게이였습니다. 그래서 처벌받습니다. 앨런 튜링은 최근 들어서야 사면을 받았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정당하게 평가 받게 됩니다. 연합군의 2차 대전 승리는 앨런 튜링이 히틀러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가능해졌다는 평가까지 받습니다.
암호해독에는 앨런 튜링과 같은 천재적인 수학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학과 출신 등 우수한 수학 전문가들이 다수 참여하는 것이 세계 암호해독 분야의 실정입니다.
해독은 첫 단서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첫 단서의 포착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단서는 의외로 사소한 데서 발견되고, 해독이 본격 진행되면서 수학 전문가들이 달라붙는 게 효과적입니다. 만일 첫 단서가 잘못되면 점점 늪으로 빠져 평생을 헤매도 해결 못 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암호해독 실패입니다.
만엽집과 향가 해독과정을 검토해보면 이 꼴이 났습니다. 지난 천년 이래 일본의 만엽집 연구자들은 첫 단서로 한자를 표음 문자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지금까지도 지옥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향가 해독도 일본 꼴이 났습니다. 일본의 표음 문자 해독법을 양주동 박사가 이어받았고, 양 박사님과 후계자들은 향가의 한자를 일본인들과 같이 표음 문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향가 연구자들도 지난 백 년 동안 개미지옥 속에 빠진 개미들처럼 모래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첫 단서의 중요성이 실감 나시죠?
저의 책 ‘일본 만엽집은 향가였다’의 향가해독은 이러한 암호해독의 생리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앨런 튜링이 에니그마의 암호해독을 푼 첫 단서도 암호를 만드는 자가 ‘하일 히틀러!’를 습관적으로 암호문의 첫머리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해독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첫 단서를 ‘원왕생가’에서 발견했습니다. 정말 우연입니다. 단서는 ‘향가는 표의 문자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서가 발전되면서 마침내 향가는 암호 풀듯이 풀려나갔습니다. 원왕생가에서 얻은 첫 단서는 다음의 두 글자입니다. ‘月下(월하)’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달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자가 표의문자로 쓰여있다고 생각한 거죠. 향가해독의 제1법칙, ‘한자는 표의문자다’라는 가설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양주동 박사는 ‘月下(월하)’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할 때의 ‘달아’로 보았습니다. ‘한자는 표음 문자로 되어 있다’라는 잘못된 가설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이 두 글자가 향가와 만엽집 해독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달 아래’로 보느냐, ‘달아’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물론 단서발견 뒤에도 엄청난 시간과 연구가 있었지만요. 어떠시나요? 향가해독과 암호해독에 비슷한 점이 있나요? ‘이미테이션 게임’ 한번 감상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