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夫人 스크랜튼 여사
이화학당과 Mary F. Scranton

Mary F. Scranton 여사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 설립을 주도하는 등
한국 여성의 교육과 의료 복지를 위해 헌신했다.
1832년 12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출생하여,
1855년 코네티컷 주 뉴헤븐의 제조업자인 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1856년 5월 29일 외아들인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을 낳았다.
1872년 남편과 사별하고, 52세 되던 해인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1869년 설립)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한국에 파송된 첫 여성 선교사가 되었다.
미국 예일대학 출신으로 뉴욕대학에서 의과학을 공부하고
클리브랜에서 개업을 하고 있던
윌리암 스크랜튼이 감리교선교사로 임명받자
평소 선교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 부인도
아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고
1885년 6월20일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52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이래
한국의 여성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전력하다가
1909년 10월 8일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조선의 어머니로 살았던 대부인.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회의 여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튼 여사를 대부인(大夫人)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조선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의 이름은 메리 벤튼이었는데,
벤튼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전통 있는 감리교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조카도 미국 감리교회 뉴잉글랜드연회의 목사였다.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한 스크랜턴은 내한하여
봉건제도에 얽매여 있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한국 여성의 전통적 미덕과 품성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시키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이화 역사의 호수’
시대 순으로 이화여대의 변천사가 연못에 담겨있다
1886년 2월부터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5월경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1월에 완공한 한옥건물은 여선교사들의 거처이자
한국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구심점이 되었다.
1887년 명성황후는 스크랜턴 대부인의 교육사업을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화라는 교명은 고종께서 하사한 것으로 정동일대가 배밭이었고
이화정이라는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이 배꽃같이 순결하며
배맛같이 시원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는 스크랜튼 선교사의 학당 설립정신을
왕실에서 보여주는 최대의 찬사였고 학당의 발전을 기대하는 은혜였다.
1886년 5월31일 하인을 거느린 정장한 한 부인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1년을 기다리던 학생과 1대1로 3개월간 영어공부를 하였는데
그 학생은 고관의 소실인 김부인이라는 기혼여성이었다
그 부인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공부를 했으나
석 달이 못되어 떠나갔다.
한 달 늦게 조별단이라는 극심하게 가난한 소녀가 찾아왔으니
그가 실질적으로 첫 학생이다.
조별단의 아버지는 수위겸 청소부였고 어머니는 부엌일을 맡았었다
1886년 10월에는 4명이 늘고 그 해 말에는 7명이 되었다.
1890년대 들어 개화파 지도자인 박영효의 딸이 학당에 들어와서
스크랜튼과 기거하며 빈민출신과 함께 공부를 했다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들의 건강을 아들이 경영하는 시병원에서 보살피게 하다가
여의사인 메타하워를 초청하여 한국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을 운영하였다
이 보구여관은 민비가 하사한 이름이며
후에 동대문에 있는 이화여대 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을 통한 그의 교육사업은
불평등과 삶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통하여 자기 개발과 인간해방을 맛보게 하며,
불운한 여성, 비천한 계층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소외를
사회 참여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승화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크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남성들과 여성들이 함께 예배나 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1888년 1월에 여성들만의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조직하여,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1904년에 중등과가 설립되고 190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가,
1910년에는 대학과가 차례로 추가되었다.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은 1908년에 배출되었고,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은 1914년에 배출되었다.
1918년에는 보통과가 이화보통학교로,
고등과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립되었다.
대학과는 중등과가 이름을 바꾼 대학예과와 1925년에 병합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교했다.
1928년에 마지막 남은 유치원사범과가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여
각급 학교가 독립적인 학제로 운영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은 1928년 정식으로 폐기되기에 이른다.

설립 당시의 이화학당

1900년 완공된 이화학당 메인홀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이화학당 100주년기념비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는 본관 일대
(이화학당의 발상지)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사진


2009년 이대교정







도서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은 1923년 16,000여 권의 장서로 시작하여
현재 148만여 권의 단행본 10,000여 종의 인쇄본 저널,
25,000여 종의 전자 저널과 각종 비도서 자료 11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앙도서관과 더불어 분관도서관으로써
사범대학 교수학습자료관, 음악도서관, 의학도서관,
법학도서관, 신학도서관, 국제정보센터가 있다.
학생 한 명을 두고 수업을 시작한 이화학당
그로부터 123년이 지난 오늘날
졸업생 17만 명을 배출하며 한국에 여성시대를 열고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 자리매김한 이화여대 도서관
지식정보화 시대에 이용자 중심의 서비스체계를 갖추고
이용자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도서관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서관 이용환경을 대폭 개선하고 아름다운 문화공간
고급 까페에 버금가는 이용자를 위한 쾌적한 휴게실 등
이용자 중심의 『열린 도서관』이다

중앙도서관 전경

편리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공부하고있는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멋진 도서관장님

알맞는 조명아래서
부담없이 공부하는 학생들


자유롭게 컴퓨터를 이용하는
복많은 학생들

휴계실에서도 열씸히 공부하고있다
2009 이화사진전
이화 캠퍼스, 이화인의 삶’(Ewha Campus, Ewha Life)
전시회의 모든 사진은 교직원과 학생,
홍보과 사진PD가 직접 촬영한 것으로
연못에 시대 순으로 이화여대의 변천사가 전시된
‘이화 역사의 호수’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사진집
‘This Ewha’ 등 136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특히 전시방법이 일반 전시회와 다르게
작품을 벽에거는 대신 대부분의 작품이
카운터에 놓여있어 매우 정겹고 흥미로웠습니다
이배용 총장은 “123년의 이화 역사와 더불어
다채로운 학생들의 모습을 한데 모아
생생한 오늘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전시”라고 말했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기념촬영과 즉석인화를 해주는데
저희들도 한 컷을 부탁했습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이화가
지금의 국제적인 사학이 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우리는 고아, 가난한 학생을 위했던
스크랜튼 여사의 사랑의 정신을
메리 F. 스크랜튼 서거 100주년을 맞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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