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거리는 여름 - 오인순 수필
마당에 서서 팔월 정오의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빨갛다 못해 가시 돋친 흰빛을 내뿜는다.
주춤하던 무더위가 무색하다. 아스팔트 도로는 의식을 잃어가고 이웃집 반려견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매미만이 늘어진 나무에서 저 혼자 활기차고 즐겁게 노래한다.
매미의 하울링 울음은 어쩌면 무더운 날의 청량제라고나 할까. 여름의 소리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가린다. 어둑해진 하늘에 날카로운 번개가 번쩍 섬광을
긋는다. 잠시 숨을 돌렸더니 천지가 흔들리고 굉음이 쏟아진다. 어느 순간 굵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낭자하다. 성난 비바람은 광나무 잎들을 두드리고 화단의
금계국과 루드베키아를 후려친다. 텃밭 작물들은 사르르 떨며 옹골차지 않은 열매들을 내어놓는다.
다시 햇살이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팔월, 짜릿하고 대담하면서 솔직하다. 이파리 하나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낸 밤거리의 여인 같다. 텃밭의 코끝에 스치는 더운 바람이
고소한 맛을 솔솔 풍긴다. 몸을 휘감고 있는 높은 불쾌지수를 털어내고 내 품에 뛰어들라 유혹한다.
텃밭의 빛깔을 읽는다. 살랑살랑 흙바람을 일으키며 작물들이 익어간다. 초록이던 고추는
주렁주렁 하나씩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다. 가지는 짙은 보라 빛으로 선명하다. 호박
넝쿨도 담장을 더듬으며 뻗어가더니 둥근 열매를 맺고 누렇게 영글어 간다.
비가 지나간 뒷자리에 습기가 가득하다. 습한 공기로 창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 문을 연다.
이열치열이 아니던가. 더위는 더위로 몰아내고 싶다. 지난 여름날 기력이 소진된 남편을 일으켜
준 밥상이 불쑥 기억을 파고든다. 땀을 줄줄 흘리며 음식을 먹던 그 희열은 응어리진 감정을
배출하는 카타르시스였다. 그래서 텃밭의 열매들을 따서 조리대 앞에 섰다.
재료들을 다듬고 도마와 칼을 꺼낸다. 도마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 자국. 서슬 퍼런 칼이 남긴
흔적이다. 도마 위에서 춤추는 칼의 무예는 주방 탱고라고 할까. 나의 손에서 움직이는 현란한
장단은 거룩한 먹거리를 알리는 기적소리다. 칼의 난타로 후려친 재료와 도마를 보니 한 끼의
음식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호박은 껍질을 벗겨 듬성듬성 썰어 끓는 물에 데쳐 호박 나물을 만들었다. 보랏빛 통통한
가지는 찜통에서 쪄서 쭉쭉 찢어 양념장에 무친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뜨거운 김이 모락
모락 오르니 더위는 가증된다. 숨은 턱 막히고 구슬 같은 땀이 뺨에서 잠시 머뭇거릴 새도
없이 연신 흘러내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무더위의 불쾌감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젖은 손이 빨라진다. 싱크대라는 도화지에 무채색이던 시간이 오미의 빛으로 물들고 있다.
음식들이 먹음직한 작품으로 쾌감을 불러온다. 더위가 가져다 준 무기력함이 음식의 맛과
향에서 나를 다독거리고 있다.
통통한 고구마순은 부드럽게 삶아 줄기의 섬유질을 벗긴다. 껍질을 쭉쭉 벗기면 숨 막히는
더위로 움직이기 싫었던 가슴에 등물해 주던 아버지처럼 시원한 길이 트이는 것 같다.
벗긴 고구마순은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쳐 구수한 나물을 만든다.
향긋한 깻잎도 미리 만든 매콤한 양념장에 한 장씩 켜켜이 발라 깻잎 김치로 완성시킨다.
어느 김치 못지않게 입맛을 다시게 한다. 국물은 뜨거운 국 대신 더위를 식혀줄 냉국이 안성
맞춤이리라.
얼음 동동 띄운 오이 미역냉국은 불려서 썬 미역에 오이 채 썰고 간한 멸치육수에 소금과
식초를 넣는다. 청량하고 식감이 아삭하다. 기력회복에는 고기음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풋고추와 채 썬 양파를 매콤하게 재워 둔 돼지고기와 함께 넣어 달달하게 볶는다.
드디어 요란한 모노드라마가 막을 내리며 주방의 불꽃은 꺼진다.
선뜻 내어놓은 텃밭 재료들로 만든 음식은 수고보다 고마움으로 다가온다. 식탁 위에
호박꽃을 꽂아 환하게 장식하고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제철 재료로 여름밥상을 차렸다.
더위에 상차림을 하는 과정은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몸이 원하는 음식으로 입
꼬리가 올라갈 남편의 얼굴을 보는 기쁨은 나도 다정한 미소로 답할 수 있었다.
요리 과정은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깨달음이었다. 삶은 언제나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어 늘 갈등하며 아파한다. 하지만 하나의 일에 몰입하다 보면 그런 갈등을 멋지게
먼지처럼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내일도 폭염이란다. 처서도 지났지만 햇살 따갑고 땅의 공기는 숨 막히다.
상추쌈 냄새로 더운 땀 씻어내다 보면 날빛도 고개를 숙일 것이다. 태양의 고도는
점차 낮아지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있다. 정열 속에 머물던 여름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시원한 바람 한 줌이 부드럽게 살갗을 적신다.
출처: 제주신문 2023. 09. 0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