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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침묵]] -下-
15.
1970년대에 츨판된 문고본, 엔도 슈사쿠의 책을 다시 펴들었다.
그의 수필집인데 그 중 ‘성지순례’편의 기행문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총,균,쇠’에서 문명의 우열은 인종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요소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파하였다.
총(총)과 균(菌)과 쇠(鐵)라는, 환경이 만든 상징적 요소들에 의하여.
그런데. 엔도 슈사쿠는 자연환경이 종교의 유형을 만들어 냈을거라는 독특한 생각을 얘기하고 있다.
‘깊은 강’에서 충분히 묘사되었지만, 엔도 슈사쿠가 인도에서 본 것은 어머니의 유방처럼 풍만하게 흐르는 강물이었다.
<“화장터 바로 옆에서도 힌두교도들이 미역을 감고, 물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는다. 거기서는 너절한 문명이 만들어낸 청정이라던가 불결이라는 감각이 성스러운 것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었다. 교도들은 시체들이 그곳에 잠겨지고 시체의 재가 배설물과 함께 가라앉은 더러운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떠서 그걸 마시고 그것으로 입안을 헹구어 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갠지스강이라고 하는 사자의 고향과 일치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힌두교도가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그 감각만은 동양인으로서 나름대로 알수있을 듯 싶었다”>
반면 유대광야에서 그가 본 것은,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황량한 산과 숨막힐 듯 무더운 갈색 땅 뿐이었다. (엔도 슈사쿠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1970년대 초)
그 곳에서 엔도 슈사쿠는 자연이 인간을 냉혹하게 거부하여 인간을 초월해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대땅에는 강다운 강도 없었다.
가장 큰 흐름은 북방의 갈릴리호에서 유다 황야에 있는 사해(死海)에 이르는 요르단강인데, 이 강조차도 내(川)이지 강은 아니어서, 폭도 수량도 보잘 것 없을뿐더러 기름진 경작지도 만들지 못하였다.
해골같은 산과 쨍쨍 내려쬐는 가열한 햇볕 속에서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히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는 사람은 다만 두려움과 전율과 고독을 느끼던가, 혹은 그것을 정복해 보고자하는 투지를 불태우던가 할 뿐이다.
요컨대 이곳에서는 어머니다운 것은 일체 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사람은 죽은 후에 어머니인 갠지스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유대에서는 죽은 다음 황야나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유대땅은 어머니의 사랑 속과 같이 편안히 휴식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 있는 자연이 아니고, 유대의 자연은 외포감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신의 이미지는 아버지 신 ‘야훼’다.
‘야훼’는 노여워 하는 신, 심판하는 신, 벌을 주는 신이지 결코 용서하는 신, 사랑해 주는 신의 이미지는 아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죄를 두려워 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심판받을 것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그 분의 노여움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아버지의 종교밖에는 발생할수 없을 것이라고 엔도 슈사쿠는 생각하였다.
그곳 광야에서 엔도 슈사쿠의 귀에는 세례요한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어머니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
성경에는 두가지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율법주의 구약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이고 복음주의 신약은 ‘어머니 하나님’ 이미지라 하지만, 구약에도 ‘어머니 하나님’의 이미지가 없지 아니하고 신약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시퍼런 서슬이 없지 아니하다.
16.
지향하는바 종교의 효용은 어느 곳에 있을까.
살아 생전(生前)인가, 아니면 죽은 다음(死後)인가.
모든 종교는 고유한 교의로써 죽음 그 너머를 이야기한다.
그 정체가 영(靈)인지 혼(魂)인지 넋(魄)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후에도 어떤 형태의 '나'(自我)가 연장된다는 것.
백년을 못사는 인간은 삶의 시간이 아쉽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것이다.
죽음 후에 어떤 형태로라도 존재하는 '나'는 산 것들의 본능적인 열망이다.
그리하여 어떤 종교이건, 믿음에 따른 보상체계로서 사후의 비젼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비젼이 없다면 태반의 신도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사후의 비젼이 없는, 하나의 완벽한 도덕률(道德律)을 기본으로 하여 종교가 생성될수 있을까.
과연 종교의 의의(意義)를 어디에 두어야 할런지, 유교(儒敎)가 종교인가 사상인가라는 논의는 부박한 내 사유로서는 들이대기 버겁다.
어쨌든 사후 비젼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중 하나를 이룬다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그 비젼의 허술함에 나는 혀를 찬 적이 있다.
아주 오래 전 마석 모란공원, 내 할머니 갓 묻힌 무덤가에 수십명의 일가친척들이 둘러 섰다.
순복음교회 교인인 삼촌들 고모님들 숙모님들 사촌들.
당회장 조용기목사가 서교동 숙부의 저택에서 발인예배를 집도하였고, 하관예배는 그보다 젊은 목사가 집전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무덤가에서 행한 그 목사의 설교 요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고인은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계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고인은 임종하기 전에 분명하게 예수님을 주(主)로써 고백하였습니다. 고인은 지금 틀림없이 하늘나라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몇번이나 “믿쓥니까? 믿쓥니까?”물었고, 고모 숙모님들은 입을 모아 “믿쓥니다! 믿쓥니다!”하며 화답하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돌아가실 무렵 목사님의 질문에 ‘예’하는 대답 한마디로 우리 할머니는 참 엉터리처럼 천국에 가셨구나. 이것을 믿을수 있단 말인가. 참 엉성하다. 저 목사님이나 고모님 숙모님들 자신들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저토록 된발음으로 ‘믿쓥니까? 믿쓥니다!’를 연발하며 자기최면에 의탁하는 것일테지.”
당시 내게는 순복음교회 특유의 된발음의 어투가 기분학적(?)으로 굉장히 싫었고, 그보다 우리 할머니는 크리스찬이 아니었다.
딸들의 극성으로 말년에 몇 번 교회로 모셔졌을 터이지만, 할머니는 늙마까지도 ‘나무아미타불’을 입에 달고 사신 독실한 불자(佛子)였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집을 드나들었고 보생의원 안방에는 수시로 낯익은 스님들 묵어 가곤 하였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으흠, 놀랍지 아니한가, 엄정한 스콜라 철학이 정립하였을 기독교의 교의가 우리 할머니를 받아들이는 그 관대함이.
사후(死後)에 대하여 리얼리틱한 언어로서 들려주거나 그 이미지를 영화의 스크린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종교는 없지 싶다.
들려주고 보여주더라도 그 언어는 난해하게 포장되어있고 그 이미지는 추상화(抽象化)의 모호한 포름일 뿐이다.
구상화(具象畫)가 있더라도 그것은 과장된 형태로 부풀려진 공갈(지옥)이거나 유혹(천당)이기가 십상이다.
사후(死後)는 온갖 상징체계와 다양한 은유의 언어로서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그 디테일은 종파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죽은 혼백이 인간세계를 떠도는 중유(中有)의 상태로 있어 49 재를 기다린다던가.
카르마(業)에 따른 억겁의 윤회(輪廻)의 시스템 속에 들어간다던가.
죽는 순간 다른 생명으로 전이되어 곧바로 환생(還生)을 한다던가.
신불(神佛)이나 조상신으로 화(化)한다던가.
예수 재림시 죽은 자는 천사의 나팔 소리에 의하여 다시 살아나고 예수믿는 산자들은 휴거가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인지.
죽자마자 심판에 의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인지.
오래전 보았던 티비 어떤 다큐멘타리 영상이 떠오른다.
주검을 연구하는 미국의 연구소.
사체가 어떻게 변화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서 흙으로 돌아가는지를 필드에 버려진 사체를 향하여 고정된 카메라의 렌즈는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사후경직이 있고, 부풀어 오르고, 꺼지고, 벌레가 끓고, 미생물에 의하여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과정.
생명이 사라진 한덩어리의 고기, 해체와 부식과 그리하여 서서히 無에 이르는 과정.
가감없이 보여주는 물리적 현상의 냉정한 현장이었다.
남의 것으로부터 느끼는 유물론적 리얼리즘.
그 영상은 감동적이었지만, 거기 대입된 나의 사체가 연상되어 결코 유쾌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나도 저렇게 무(無)로 돌아가는구나.
주검은 육신일뿐, 영(靈)이건 혼(魂)이건 넋(魄)... 무언가는 영원히 무(無)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고 싶다.
뉘라 알겠는가, 죽음의 정체를.
그것은 무(無)일까? 의미(意味)일까?
간디가 설파하였듯 모든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이어져 내려온 것,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라도 사후의 구체성이 제시될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후(死後)는 인간의 사유가 접근할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섭리(攝理-종교와 물리법칙등등을 포괄한 만물에 작용되는 어떤 절대원칙의 개념으로 나는 이 어휘를 쓴다)의 영역이다.
죽음의 정체는 영원한 신비함으로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섭리에 대한 이단(異端)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죽음이어야 한다.
설명되어 질수 없는 그곳에, 영원한 신비로써 감추어져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상태가 보여지는 죽음, 설명되어 지는 죽음.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곳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라는 개념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그렇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란 것도 없다.
삶이 삶이기 위하여 죽음은 죽음이어야 한다.
이것이 섭리의 뜻이다.
나의 존재는 막연하나마 이것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미지(未知)의 것으로.
비옵나니 섭리여, 나의 죽음을 가득한 기대감으로 맞는 나이기를.
그러니까 종교는 죽음을, 상징과 은유의 현란한 종교적 장식성(裝飾性), 현란한 색감의 추상화(抽象化)로서만 표현하여야 한다.
산 것들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죽음을 설명하여서는 안된다.
종교의 진실도 미지(未知)의 것이므로, 그게 최선이노라.
17.
결국 종교의 효용은 삶에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피조물(被造物)로서 인간, 그 삶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공(陶工)이 진흙 덩어리를 이겨서 만들어진 요강.
볼이 붓고 입을 비쭉이면서 ‘나는 왜 상감청자로 만들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만든 도공에게 항변을 한다.
바울은 그런 요강더러 “네가 무엇이관대 너를 만드신 분을 힐난하느뇨?”라고 나무란다.
뒤이어 예정론(豫定論)을 펴들고 칼빈은 요강에게 일갈(一喝)한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무얼 만들든 엿장수 마음대로이다. 네 운명이고 팔자소관이다’라고 욱박지른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 속에서라도 직수굿이 자신을 만드신 분의 처분에 순복하는 욥을 보여준다.
욥은 오로지 창조주를 찬양할 뿐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아, 실존(實存)이 이러한 신앙적 자각(自覺)을 획득함으로써 납득되어 진다면, 인간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이랴.
그렇지만 실존이란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다.
생(生)과 노(老)와 병(病)과 사(死) 뿐이랴.
억압과 소외와 빈곤..... 뭇 구체성인 것들로 점철(點綴)된 것이 산다는 것이다.
삶의 구체성 앞에서 종교는 어떤 능력을 행사할수 있는가.
아니, 종교가 삶의 구체성에 대하여 한줌 설명이나마 할수 있는가.
그 무엇을 실존(實存)에게 납득시킬수 있는가.
로드리고가 전율로써 경험하였던 신의 ‘침묵’
한 여름, 피바람의 처형후 그 때에 일본식 뜨락의 그 청승스러운 매미소리를 당신께서는 로드리고에게 납득시켰는가.
“인간의 절망 불행 억압 학살 수탈 슬픔 욕망등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책임을 지는 신이란 없다.”-이문열 ‘사람의 아들’-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삶의 구체성 앞에서 시시때때로 회의(懷疑)에 사로잡혀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시종일관. 조금의 흔들림없이 여일하게 주님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이비(似而非) 신앙인이다.
광신도 역시 이단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심하는 신앙인이다.
회의가 없다면 광신(狂信)이거나 부두교의 주술적 마취에 흐느적거리는 허깨비일 따름이다.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는 고백하였다.
“내 믿음은 어디 있는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텅 빔과 어둠밖엔 없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날 용서하기 바란다. 천국을 생각하려 애써 봐도, 공허함이 엄습하면서 그 생각이 날카로운 칼처럼 되돌아와 내 영혼을 벤다. 이 남모를 고통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내겐 믿음이 없다. 사랑도 열정도 없다. 내가 뭘 위해 일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여, 당신은 가짜다.”
회의하면서 신에 귀의(歸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하는 진정한 신앙의 몸짓이다.
좌뇌가 의심할지라도 우뇌는 신앙한다는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기독교 변증(辨證)의 천여편의 방대한 아포리즘 ‘팡세’를 쓴 빼어난 이성인(理性人) 파스칼.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신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같이 있다는 것도,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인지,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것인지도 불가해하다. 원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가해하다. 신을 직감하는 것은 심정이고 이성은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고 심정에 직감되는 신.”
18.
소설 ‘침묵’은 로드리고의 독백으로 종장(終章)을 맞는다.
“나는 그들(교회)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예수)을 배반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여태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게는 그 사랑의 오의를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카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 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비록 그 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 분과 함께 있었다. 그 분의 말씀을, 그 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강’에서 오쓰의 독백이었을 것이다.
로드리고는 신앙의 가치, 그 효용(效用)을 깨달았다.
신앙은 하늘나라 천국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
인간을 연민(憐憫)하는 예수의 면모로써.
착한 것, 연민하는 것, 사랑하는 것.
무한한 우주(宇宙)에 충만한 어떤 긍정적인 기운(氣運).
태초에 인간성 속에 깃든 영성.
삶을 수렴하는 태도에 그 영성(靈性)의 깃들임.
그것이 신앙이라는.
그리고 사랑의 연대(連帶).
인간을 향하여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찬, 눈물 그렁그렁한 예수의 눈망울.
그 눈망울을 자신의 실존으로 받아 들이고 불쌍한 산 것들끼리의 동류의식.
연민.
연민으로서의 연대.
생명의 자각.
그 자각하는 연대로써 생명은 생명일수 있다는 것.
생명의 자각이란 에고(ego)의 감정이 아니다.
쉬바이처의 자각이다.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키치지로에게서 나를 본다.
나는 사소한 고난 앞에서도 당신의 얼굴을 밟을 사람이다.
청컨대.
당신께서는 기치지로를, 그리고 나를 야단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나약한 것들을 정죄(定罪)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명(生命)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너는 살고자 하는 슬픈 ‘그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당신께서 만드신 그대로.
창조하신 섭리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신앙한다.
파스칼의 권고.
“무한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알 수가 없다. 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신의 본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내기를 걸라.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하는가? 그대가 만일 존재한다는 편에 걸어 그대가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진다 하여도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은 존재하다는 편에 내기를 걸라"
19.
나가사키 소토에 마을.
그곳 언덕에는 작은 돌에 새겨진 엔도 슈사쿠의 글귀가 있다.
침묵의 비(碑).
그 비 곁에 서서 나는 푸르른 바다를 보고 싶다.
“人間はこのように悲しいが
主ょ, 海があまりにも青いです”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가슴 시린 하이쿠(俳句).
내 생애 만난 최고의 절창(絶唱)중 하나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과 창조주를 향한 외경(畏敬)
피조물의식과 창조주를 향한 찬양이 넘친다.
생노병사 뿐이랴. 관계의 고통등등 인간사 무릇 한탄이 서려 있다.
화무십일홍이 상록(常綠)을 대하는 자포(自暴)의 한숨이 있다.
찰나가 영겁을,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존재의 속성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득하다.
주님을 향한 그윽한 사랑.
어머니에게 바치는 응석서린 어리광.
지극한 찬송의 노래.
이것은 창조주를 신앙하는 가장 인간적인 기도이다.
도그마를 벗어난 욥과 베드로와 스테판의 신앙고백이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
그는 이 절창(絶唱) 하나로서도 내게 족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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