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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 지리산의 암자를 찾아(3)
무욕(無慾)의 침묵, 금대암(金臺庵)
마천면사무소에서 남원방향 실상사 쪽으로 난 60번 지방도를 1km 남짓 가다보면, 오른쪽에 금대암
을 알리는 표지석이 버티고 서 있다. 智異方丈第一金臺(지리방장제일금대)...
지리산 제일의 수행처, 천하제일의 명당임을 알리는 표시다.
이곳에서 금대암까지는 2.5km정도의 거리다.
가파른 산길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차량으로 이동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걸어서 간다면
2시간은 족히 걸어야 한다.
금대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년)
행우(行宇)조사가 창건하였으며, 도선(道詵: 827∼898)국사가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
으로 이름이 났다.
암자를 오르는 길끝 주차장 앞의 조망안내판
금대암을 지리산의 마천루(摩天樓)라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다.
해발고도는 준봉들에 미치지 못하나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의 장엄한 영봉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큰 소리를 지르면 금방이라도 메아리가 다중 채널의 스피커처럼 되돌아 올 것 같다.
주차장에서 암자로 난 50여 m의 호젓한 자갈길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끝이 한여름 폭포에서
날리는 물방울처럼 시원하다.
불교의 정토경(淨土三部經)은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
陀經) 등 3종의 대승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금대(金臺)는 이 정토경에서 유래된 이름이다,공덕이 있는 사람이 임종할 때 서(西)쪽으로부터
수많은 성중(聖衆)과 아미타불이 나타나는데 가장 공덕이 높은 사람은 금대(金臺)에 그 다음은
은대(銀臺)에 앉힌다고 한다.
금대선원(金臺禪院)
암자입구의 공양간을 지난 왼쪽에는 금대선원(金臺禪院)이 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선원은 지금의 마당 한 가운데쯤에 있었다가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고, 방향도 지금처럼 대웅전 옆을 바라보게 바뀌었다.
팔작지붕의 선원은 단촐한 여염집 사랑채같은 모습이다.
이 작은 암자에 선원이 있게된 연유가 무엇일까...
금대암은 벽송사의 산내암자 중 하나였다.
조선중기의 벽송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양대법계에서 솟아지는 수많은 조사가 벽송사를 행화
처로 삼으니 가히 한국 조계선종의 최고의 조정으로서의 선풍을 유감없이 진작시키고 있었다.
환성지안대사에 의해 중건되고 사세를 일신하는 계기가 된다. 환성대사는 벽송의 7대 법손이며,
청허의 5대 법손이 되는 벽송산문 선맥의 중심에 있는 조사다.
환성대사의 중창으로 말미암아 벽송산문은 또 한번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로 수많은
종장들이 벽송조정으로 달려와 선교의 종풍을 선양하게 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 강점기까지 지속되니, 근 2백년
동안 벽송사는 조선불교의 선교의 중심도량이 된 것이다.
금대암 전나무
금대암을 소개하는 글들을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금대암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아직 길은 유지되고 있지만 길이 가파르고 힘들어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는 옛날 출입로였던 쪽으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나무
가 현재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된 전나무다.
금대암의 이 전나무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산맥을 잇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수령은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0m, 둘레 2.92m로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
래 되었고 또 가장 크다고 한다. 본래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1998년 무렵에 낙뢰로 부러
져 없어지고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저 나무를 비롯한 금대암의 송림을 보고 지리산 제일관문 오도재의 시비(詩碑)에 등장하는 영남
사림파의 탁영 김일손,일두 정여창, 뇌계 유호인 등이 금대암을 찾은 답사기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맑은 날이면 전나무 너머로 지리산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져 보일 것이나, 흐린 날 내 눈 앞에
드러난 것은 건너편 창암산의 자태 뿐이다.
대웅전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1980년대 중반에 지었다.
특이한 것은 옆면의 오른쪽 법당 출입문외에도 별도로 있는 왼쪽의 커다란 여닫이 문이다.
이것은 주거공간으로도 쓰는 인법당(因法堂)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대웅전에는 보통의
법당과는 달리 앞쪽에 툇마루 1칸이 덧대어 있다.
인법당(因法堂)이란 넓은 법당이 없는 사찰의 다용도 공간이다. 생활공간에 법당을 차린 것이다.
문을 닫고 가로 질러 잠그는 나무를 ‘빗장‘이라 하는데, 이 빗장을 밀어 넣기 위한 구멍을 파서 문작에
댄 나무를 둔테(빗장걸이)라 한다. 법당 왼쪽문의 둔테는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거북이는 물과 땅을 넘나드는 동물로서 화재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딱딱한 등껍질로 집을 수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도선국사가 일찍이 유력한 참배지로 선정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보조 지눌,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보조 지눌의 법맥을 이은 제자인 무의자(無依子) 진각 혜심
(眞覺 慧諶)이 금대에 앉아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가 되었는데도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신이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육체를 잊어버린채 수행했다고 전한다.
호(號)가 '걸침이 없다'는 무의자(無依子)인 진각 혜심은 화두모음집 선문염송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금대암 앞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혜심이 수행하던 눈 내린 날에도 저 대나무 숲은 그자리에 있었
을 것이다. 그가 남긴 글이다.
竹尊者(대나무 어른이 좋아)
我愛竹尊者(아애죽존자) 내가 죽존자를 사랑하는 것은
不容寒暑侵(불용한서침)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음이라
經霜彌勵節(경상미려절) 서리 겪을수록 절개 더욱 굳세고
終日自虛心(종일자허심) 세월 깊을수록 마음은 비는구나
月下分淸影(월하분청영) 달빛 아래 맑은 그림자 만들어내며,
風前送梵音(풍전송범음) 부처님의 말씀을 바람에 전하고,
皎然頭載雪(교연두재설) 머리에 하얗게 흰 눈을 이고
標致生叢林(표치생총림) 숲속에 빼어난 자태 드러내기 때문이라
금대암 동종(銅鐘)
대웅전의 오른쪽 마루에 있는 두 개의 동종 중 오른쪽 것은 조선시대 범종으로, 크기는 높이 59㎝,
입지름 43㎝다. 종 꼭대기에는 우리나라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용통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남아 있고, 종의 고리에는 용 머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체에는 한 줄의 선을 가로로 긋고, 7자의 부처님 말씀인 범어(梵語)를 새겨 넣었다. 밑으로 사각형
모양의 유곽(乳廓)에는 빗살무늬를 새겼고, 그 안에 유두(乳頭)를 9개씩 두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보살상을 4면에 새겼다.
이 종은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1734년(영조 10)에 산청 쌍계사(雙溪寺)에서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법당 툇마루 왼쪽 벽에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세로 105㎝, 가로 100㎝로 비교적 작은 크기다.
'위태천'을 비롯한 여러 신중들이 간결한 구조 속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같은 호법신(護法神)들은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다. 이것은 곧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한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안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 본존불의 두광과 신광에서 발하는 빛이 유난히 밝다.
부처의 대광명을 표현하고자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대웅전을 참배한 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금대암의 회주, 종림 스님을 뵐 수 있을까해서다. 하안거(여름 집중수행기간)라 뵐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나 하며 일어난 마음에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인터넷 월간해인'에 소개된 종림 스님의 이야기다.
희끗한 반백의 머리에 희미한 미소를 언제나 머금고 있는 모습은 스님을 아는 이들에게는 한결같은 이미지이다.
무슨 얘기를 시작하려면 종림스님의 눈자위는 이를 먼저 알고 짓무르도록 웃는다. 딱히 우습고 재미난 것이 아닌
데도 늘 웃는다. 마치 웃음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듯이 그렇게 편안한 침묵이다.
스님은 평소에도 말이 없다.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저 싱긋이 웃음으로 대답할 뿐 웬만하면 입을 열지 않는다.
할배 스님인 종림스님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스님을 자주 할배라고 부른다. 서원할 일, 힘겨운
일 모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넉두리를 하고 싶어 찾아뵈면 그것만으로도 알아질 것 같은 넉넉함을 안겨 주는
것이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할배의 느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종림스님은 늦게 출가한 편이다. 그러나 스님이 불법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을 낸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고 한다.”속가 부모님이 사랑방을 했어. 지나가는 객과 마을 노인들이 머물다가 가고 또 다시 오고 했어 아마도
그런 환경이 내게는 불교적으로 다가왔고 출가에 대한 마음을 가지게 한 듯싶어.스님의 얘기는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애써 나오는 한마디처럼 나즈막하게 간간이 이어진다. 아주 오랜 일이어서라기보다는 스님의 생각
과 마음을 말로 만들어 내기가 영 어색한 까닭인 듯하다.
계단과 좁은 바위 틈새로 난 길을 따라 오른 종림 스님의 방은 법당과 떨어진 높은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종림스님은 동국대학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하였으며, 지관 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고려대장경 연구소장을 역임하며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 5천여 만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10년의 노력 끝에 CD 15장에 담아내 대장경의 디지털화를 완성하신 분이다.
불교개혁에도 앞장섬은 물론,한국불교계에서 가장 많은 독서량을 갖고 있다는 스님이다.
이렇게 풍부하고 깊이있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아는 체"를 하지않고 늘 웃음으로 대하는 스님에
게 현대 한국불교의 양대선맥을 이끌어가시는 송담스님도 발벗고 나섰다.
알다시피 '남진제 북송담'으로 회자되는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은 좀처럼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는데, 어느날 종림스님을 신도들 앞에 불러 그의 대장경전산화에 힘을 보태게하여
십시일반으로 모인 힘이 큰 추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가를 하기 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뒤, 두 해 남짓 도서관에 파묻혀 책만 읽은 적이 있다.
종교, 철학 서적에서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과학과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끌렸고, 불교적
태도의 ‘유용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나 프롬의 저서들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연기적인 사고의 틀을 실제에 적용시켰다고 보았다.
절집에 들어와 보니 경전에 대한 해석 방법이 습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대장경의 전산화를 시도하게 했다. 컴퓨터를 처음 만지면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불교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에서 세습된 구태의연하고 왜곡된 관습을 새롭게 만들어 낼 자료를 제시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경이 전산화되면 새로운 기준이나 상상력이 적용되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불교가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경의 전산화 작업도 어쩌면 출가 전이나 뒤에 늘 가지고 있었던 ‘유용성’ 에 대한 수단
이라 할 수 있다.
행자시절부터 큰 꿈이나 욕심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욕심을 하나 낸다면 '사이버 승가'를 창조해
내는 일이다. 가지고 가고 싶은 자료를 마음대로 가지고 가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토론해 불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면 족하리라." - 종림 스님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방은 비어 있었다.
찾는 이들을 따뜻이 맞았을 다상만이 가지런히 방 한 켠에 놓여져 있다.
3면이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스님의 거처'지원당(智圓堂)'은 그야말로 '하늘정자'다.
지리산 주능선을 관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금대암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때문이다.
이곳에서 스님의 트레이드마크인 인자한 웃음과 묵언,그리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무욕
(無慾)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다음은 한겨레신문 '조현'종교전문기자의 종림 스님에 대한 글을 발췌한 것이다.
승복을 입었지만, 도무지 스님 같지 않고, 어수룩해 보이며, 말 또한 어눌한데도 어딘가에서 더운 여름 찬 우물 같은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를 만난다면, 그가 바로 종림 스님이다.
기자가 그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4~5년쯤 전이었다. 서울 조계사에서 ‘간화선 토론회’가 열렸는데, 토론회가 끝난
직후 토론자로 그와 도법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이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처 못다한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서
였다. 그곳엔 스님들뿐 아니라 수십명의 방청객과 기자들까지 대거 함께했다. 스님들만이 아니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 함께한 야단법석이 펼쳐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림 스님은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맛있게 담배
를 피우고, 맥주까지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켜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스님들 중엔 곡차를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중들의 안목이란 겉모습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재단
하는 겉볼안인 때가 많은지라 알 만한 사람들끼리의 자리가 아닌 대중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굳이 책잡힐 짓을 하지 않는
게 상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당연지사가 된 세상에서 대중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담배를 물고 털끝만한 꺼림이 없이 할 얘기를 해가는 모습이 오히려 한줄기 청풍으로 느껴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쪽·5천여만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2000년까지 시디 15장에 담아낸 고려대장경 연구소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수명이 다해가던 목판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부터 한국 불교계를 정화하려던 개혁 세력
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나름의 불교관과 철학관을 가진 그지만 겉모습에선 새털만큼의 무게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정도로 겉모습엔 신경을 쓰지 않는 그다. 해병대보다 군기가 세다는 해인사도 무욕의 그를 묶지는 못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를 아끼는 도반들이 “남 있는 곳에서 담배 좀 안 피울 수 없느냐”고 하면, “큰스님이나 주지는 느그들
이나 하고, 나는 그런 거 할 생각 없으니, 담배 피우는 건 내버려 달라”며 태평스레 담배를 물었던 그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사는 방엔 언제나 밤새 읽어 머리를 깨끗이 비우게 한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컴퓨터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던 80년대 초부터 산사에서 밤새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너무도 방대한 작업이어서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성공시킨 것은 그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접했던 만화의 상상력과 그의 장난감인
컴퓨터가 빚어낸 조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술, 담배, 커피, 만화, 컴퓨터 게임…. 스님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것만을 접하는 그와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연구원 가운데 무려 7명이 그를 따라 출가해 머리를 깎았다.
종교인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자기 포장’에 익숙한 세상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심판과 가르침만 많은 세상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넉넉한 미소로 귀를 밤새 열어두는 그를 지인들은 ‘우리 할배’라고 한다.
종림 스님은 지식인으로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수행자와는 더욱 더거리가 멀어 보인다. 편안한 할아버지나 아저씨처
럼 느껴질 뿐이다. 무엇엔가 열정과 신념을 가질 것 같지도 않은 그가 어떻게 고려대장경연구소장으로서 불교사의 대역
사를 이뤄낸 것일까.
먹고 살거나 출세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애초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다니던 시절 도서관은 그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학교 수업도
늘 빼먹기 일쑤였던 그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헤겔과 칸트, 장자, 노자를 읽었다. 고향인 경남 함양 안의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상계〉를 정기 구독해 읽었을 만큼 일찍이 철학과 종교 사상에 눈을 떴던 그였다. 어린 시절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들렀던 자기 집 사랑방에서 본 세상 사람들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는 그렇게 책에 푹 파묻혀 살았
다.
성현들은 철학과 종교를 통해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살아가는 자들의 상황 논리와 그 원칙 사이엔 갭이 있었
다. 그는 우주와 인간, 물질과 정신의 지도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그 갭을 쉽게 뛰어넘도록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다.
그가 군대를 다녀와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속가에선 놀라지도 않았다. 일찍부터 그는 부모에게 세상에서 밥 벌어먹고
살 만한 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해인사 호랑이’였던 지관 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친 그가 간 곳은 선방이었
다. 하기 싫은 일을 누가 시켜서 한다고 할 리 없는 그가 무려 6~7년간 선방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는 것은 스스로
근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사람도 살 수 없고, 길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無)의 체험이었다.
그를 붙잡던 이념도 감정의 찌꺼기들도 사라졌다. 그는 그때 “이제 ‘종림이’를 아무데나 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뒤 그는 1년간 전남 해남 대흥사 선방에서 선원장을 지낸 것 외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삶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구름과 물처럼 떠돈다는 뜻으로 ‘운수단’(雲水壇)이란 이름을 붙인 봉고차에 코펠과 버너를 싣고 다니면서 산하를 주유하
는가 하면, 경남 함양 서상면에 손수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도무지 수좌(선승)로서 틀도 싫어해 ‘비수
좌’로 불렸던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삶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눈동자뿐 아니라 틀을 벗어난 자에게서만 보이는 심미안에 반하기 시작했다.
그가 함양 산골 개울 옆에 나무를 직접 베어 오고 돌과 흙을 짊어다가 삼각형으로 지은 집은 건축 전문가들도 도저히
아마추어가 지은 집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며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도 쓸모 있었다.
특히 고정된 틀을 유지해온 불교계에서 그의 독특한 삶과 자유로운 안목은 훗날 조계종 개혁의 산실이 된 대승불교승가회
등의 모임에서 산소탱크로 기능했다. 또 해인사 소식지였던 〈해인〉은 그가 편집장을 하면서 산사와 대중들의 소통의 장
으로 변했고, 80년대 그가 해인사 도서관장을 맡자 일만오천권의 도서관 장서가 컴퓨터로 분류되고 대장경 목록이 만들어
졌으며 드디어 대장경 전산화에까지 이르렀다.
나한전(羅漢殿)
나한도량 금대암의 나한전(羅漢殿)은 대웅전 뒤쪽 위에 자리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군데군데 대들보와 서까래 일부가 불에 그을린 듯하다.
전각을 중수하면서 소실된 목재의 일부를 사용한 것인지, 목재의 수명을 길게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단청을 올리지 않은 전각의 모습은 단아하다.
나한전을 오르는 계단 옆 바위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음각해 놓은 글씨에 붉은 색을 입혔고, 그 옆에
법당시주란 글과 함께 시주자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요즈음이야 사찰경내의 바위에 시주자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한전 주련(羅漢殿 柱聯)
나한전의 주련은 대구 서단(書團)의 기수, 일사(一思) 석 용진(石 龍鎭)의 글씨다.
白雲淸風自去來 (백운청풍자거래)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
日落西山月出東 (일락서산월출동) 서산에 해지자 동녘에 달뜨도다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천개의 강물에는 천개의 달이뜨고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만리에 구름없어 만리가 푸르른 하늘이네
나한전 내부
나한전을 들어서며 특이한 인상을 받은 것은 탱화였다.
여느 사찰의 후불탱과는 달리 검은 바탕에 청동빛이 감도는 나한들을 익살스럽게 그려놓았다.
직접 손을 갖다대며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상패나 감사패를 만들 때 청동을 부식하여 제작하는
기법을 사용했으리란 추측이다.
나한전의 좌우 벽면에는 칠성각,산신각이란 편액 아래 칠성과 산신탱화가 걸려있다.
불단 위에는 나한상 5위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1위는 조선시대에 조성하였고, 함께 만들었던
4위는 1990년대 초에 도난당해 새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나한전 앞의 월석(月石)
금대암 삼층석탑
나한전 뒤에는 다소 널찍하고 평평한 자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이 곳이 주요 경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곳 한쪽에 바로 바위에 붙어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있다. 나한전 뒤쪽 공간의 커다란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바로 옆에도 커다란 바위가 붙어있다시피
있다.
바위가 탑의 기단부를 대신하여 그 위로 3층의 탑신이 쌓여 있는 모습이다.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가지런히 새겼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얕게 두었는데, 그에 따라 낙수면의 기울기도 완만하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
다가 양끝에서 살짝 들려 가벼운 상승감이 느껴진다.
꼭대기에는 단조로운 머리장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후대에 보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 복발(覆鉢) · 앙화(仰花) · 보개(寶蓋)가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2.5m다.
비록 바위가 기단부를 대신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특히 지붕돌의 가벼
운 곡선처리는 탑 전체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현재 각 부분의 모습들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금대암 전경
석탑에서 금대산정상으로 가는 길의 바위에서 바라본 금대암이다.
금대암은 덕유산에서 뻗어 내려온 금대산 정상 가까이의 산사면에 자리한 탓에 절터가 넓은 편은
아니나, 지리산 제일방장의 명성답게 천왕봉을 중심으로 좌우의 영봉들을 굽어보며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암자를 떠날 때 까지도 하늘은 내려놓은 얇은 장막을 걷지않고 지리산의 속살을 내게 보여주지 않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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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꼭가보고싶습니다~관세음보살()()()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늘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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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행복한 마음으로.관세음보살()()()
늘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아담하니 경치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금대암을 잘설명하셨네요. 정말 경치가 좋은 암자지요 금대암에서 내려다보며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습니다. 대나무를 베고 없기에 더더욱 전망이 좋아요. 수시로 생각나게 하는 암자중에 암자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관세음보살()()()~~~♡
어제 금대암을 다녀 왔습니다. 지리의 장엄한 연봉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화려하지 않고 소박해서 더 좋았던 금대암,
금대암 주지스님의 해맑은 미소가 어떤 법문보다도 더 좋았습니다.
전망도 아름다운 지리산의 여운이 오래 갈 것 같습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관세음보살()()()
이 향기로운 음악 제목이 무엇인지요?
해모성님 덕분에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군요^^
이 음악의 제목은 '매화'이구요 연주자는 '왕준기'입니다.
왕준기의 명상음악 2집에 실린 것입니다. 좋은 날 되시길요()()()
답변 고맙습니다.
세상너머님이 쓴 벽송사, 오도재 그리고 고담사 글도 잘 읽었습니다.
글, 사진, 노래가 정말 좋더군요.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