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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의 생애와 명언
영어-Lee Kuan Yew 또는 Lee Kwan-Yew, 중국어-李光耀(이광요. Lǐ Guāngyào. 리광야오). 문화어(북한어)-리관유,
Ⅰ. 생애(1923년 9월 16일~2015년 3월 23일)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정치인이자 초대 총리와 인민 행동당의 총재(1959~1990)로 재직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임과 동시에 냉철한 현실감각과 능수능란한 정치적 지략,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서 20세기 세계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퇴임 후 싱가포르의 두 번째 총리인 고촉통 내각에서도 수석 총리로서 정치에 관여했다. 싱가포르의 세 번째 총리가 된 그의 아들 리셴룽 총리를 조언하는 특별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일찍이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때로는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도 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하기도 하면서 차례차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 수준의 금융과 물류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또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의 깨끗한 정부로 발돋움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79년 10월 공식 방한했으며 이후 1986년 6월과 1988년 7월 공식 방문했다. 1999년 10월 전경련 국제 자문그룹 회의 참석차 방한했으며 2002년 5월 다임러 크라이슬러 국제 자문단회의 참석차 방한했다. 2006년 5월 고려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차 방한했다.
1999년 회고록 <싱가포르 이야기 The Singapore Story>와 2000년 두 번째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을 출간하였다.
1. 가족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4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리복분(1846년 출생)은 중국 광둥 성에서 영국의 동남아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1862년 이민을 갔다.
리친쿤과 추아짐니의 큰아들인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캄퐁 자바 가의 92번지에 있는 큰 방갈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그의 할아버지 리훈렁이 가르쳐준 영어로 인해 영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콴유라는 중국 이름에 덧붙여 ‘해리’라는 영어 이름을 더해주었다.
리콴유와 그의 아내 콰걱추(Kwa Geok Choo, 柯玉芝)는 1950년 9월 30일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두 아들과 하나의 딸이 있다.
그의 자녀들은 싱가포르 내에서 대부분 정부 고위관료로 재직하고 있다. 전 육군 장성이었던 큰아들 리셴룽은 2004년도부터 싱가포르의 총리이자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싱가포르 정부 투자 회사의 부의장을 맡고 있다(의장은 리콴유). 역시 전 육군 장성인 둘째 아들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의 회사인 싱텔의 최고 경영자이다. 싱가포르 항공이나 DBS 은행과 같은 정부 관련 회사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테마섹 지주 회사가 현재 싱텔의 지분 중 56%를 가지고 있다. 테마섹 지주 회사는 리콴유의 첫째 며느리인 호칭이 최고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다.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는 리콴유의 딸 리웨이링은 여전히 미혼이다. 리콴유의 아내 콰걱추는 예전에 법률 회사 리&리를 리콴유와 공동 운영했었다. 그의 동생 데니스, 프레디, 수전 유 또한 같은 회사의 파트너였다. 또한 여동생 모니카가 있다. 그러나 리콴유 자신은 지속적으로 친척에 대한 특혜에 대해 부인해 왔으며, 그의 가족들의 현재 위치는 그들의 성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은 리콴유를 “해리(Harry)”라고 불렀으며,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취미는 사이클링과 수영이며, 과거엔 골프도 즐겼다.
2. 청년 시절
리콴유는 19세기 싱가포르로 이주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 출신으로, 텔록 쿠라우 초등학교와 래플스 중·고등학교 및 래플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부터 1945년간의 일본의 지배로 인해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42년부터는 일본어와 중국어 수업을 듣고 동맹군의 전보를 번역하는 일과 일본의 보도부(정보 및 선전 부서)에서 영어 편집인으로 일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1949년에 싱가포르로 돌아와 법률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1950년 미들템플(Middle Temple) 법학원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가담했고, 우편집배원·전화교환원 노조 파업과 해군기지 노조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싱가포르 정치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Ⅱ. 정치 생활 초기(1951~1959)
1. 인민행동당 이전
리콴유의 정치인으로서 첫 경험은 친영국적 당인 진보당에서 후보로 나선 그의 상사 존 레이콕을 위해 선거인으로 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이 대중, 특히 중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리콴유는 당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이는 렌델 위원회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을 때,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함으로 인해 더 명확해졌다(1953). 결국 그는 무역 노조와 학생 조합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기회를 갖게 되었다(나중에 인민행동당은 이 역사적인 연결 고리를 파업 협상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2. 인민행동당 창당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이라고 그가 지칭하던, 영어를 배운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을 결성하였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인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들의 대량의 지지가 필요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다. 리콴유를 이 정략적 연합을 편리를 위한 결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두 계층의 공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데 있었다. 창당 기념식 때 빅토리아 기념홀은 1500명의 지지자와 무역 노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리콴유는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 직책을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창당 기념식에는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의 툰쿠 압둘 라만과 말레이시아중국인연합(MCA)의 탄청록이 신당에 신뢰를 주기 위해 초청되었다.
3. 야당 활동
리콴유는 1955년 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야당의 당수로서 데이비드 솔 마셜의 노동 전선 연립 정부에 대항한 그는 런던에서 열린 싱가포르의 미래 정세에 대한 두 차례 회의에도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첫 번째 회의는 마셜이 주최하였고 두 번째는 마셜의 후임자인 림유혹이 개최했는데, 이 시기에 리콴유는 이 두 라이벌들과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친공산주의적 측근들은 간혹 폭력적이기도 한 대중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였기에 적절한 거리를 둔 반면 여당의 연립 정부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종종 그들이 무능력하다고 공세를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의 당 내부 위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림유혹은 친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구속하도록 명령하였고,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내 위협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리콴유는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이자 그가 플렌이라고 불렀던 퐁총픽(또는 팡추앙피)과 처음으로 비밀리에 만나게 된다.
Ⅲ. 국무총리, 독립 이전(1959~1965)
1. 자치 행정부(1959~1963)
1959년 7월 1일 열린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51개 의석 중 43개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으며, 리콴유는 1959년 7월 3일에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었던 림유혹을 대신해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국무총리가 되기 전에 리콴유는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림친시옹과 데반 나이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리콴유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리콴유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주택 건설을 위한 주거 및 개발 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HDB)를 세웠다.
1961년 7월 21일에는 13명의 인민행동당 의원이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서 투표를 거부한 내각 불신임 투표가 있었다. 이들은 6명의 교역 조합 출신 좌파 지도자들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당인 바리산 소시알리스를 창당한다. 바리산 소시알리스는 창당 때부터 인민행동당에 버금가는 지지를 얻었다. 인민행동당의 51개 지부 중 35개의 지부와 23명의 간사 중 19명이 바리산 소시알리스로 자리를 옮겼고, 이 사건은 1961년의 분당 사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의회에서 인민행동당은 26석만 획득해 25석을 가진 야당과 한 석 차이로 간신히 다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1년에 인민행동당은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의 패배와 당원들의 탈당, 좌파의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리콴유의 정부는 1962년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과 관련한 국민투표 전까지 거의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62년의 투표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임을 시험하는 자리였다.
2.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 및 분리(1963~1965)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 1961년에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간의 연방을 제안했을 때,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병하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끝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70%가 투표에 찬성한 1962년 9월 1일에 열린 국민 투표 결과를 이용해 국민들이 자신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연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말레이연합 국가조직(UMNO)는 싱가포르에 있는 다수의 화교가 말레이시아에 통합되어 인민행동당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리콴유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반대했고, 이를 주장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연대회의의 “말레이시아 사람의 말레이시아!”라는 유명한 구호를 사용했다.(말레이계는 말레이시아의 토착 민족이고,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이 통합된 나라를 뜻한다.)
1964년의 싱가포르 인종분쟁은 무하마드의 생일(1964년 7월 21일)에 칼랑 가스회사 부근에서 일어났다. 이 분쟁에서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서로를 공격해, 23명이 죽었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중국인이 무슬림 행렬에 병을 던졌다는 설도 있고, 말레이인이 이 분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1964년 9월에는 더 많은 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차량과 상점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툰쿠 압둘 라만과 리콴유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서야 했다.
툰쿠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내며 “중앙 정부에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주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리콴유는 연방에 계속 머물기 위한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리콴유는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뒤 관계를 다룬 분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뒤에도 상호 국방과 교역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합병의 실패는 합병만이 싱가포르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던 리콴유에게 매우 중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기자회견에서 리콴유는 분리를 발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이 기자회견은 리콴유의 지지자들이 리콴유가 싱가포르의 분리를 선동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증거로 사용하곤 했다.)
“제게 이 순간은 매우 고통스런 순간입니다. 제 인생 동안, 제가 성인이 된 뒤에 저는 두 지역의 통합과 합병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중략) 지금, 저 리콴유, 싱가포르의 총리는 싱가포르 인민과 싱가포르 정부를 대표해 1965년 8월 9일 오늘부터 싱가포르는 자유와 정의 위에 세워졌으며 인민의 복지와 행복,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영원토록 주권을 가진 민주 독립 국가가 된 것을 선언합니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의회는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를 한 주로 인정하던 관계를 끊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싱가포르는 천연 자원과 수자원이 부족해 자원의 공급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매우 빈약한 국방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싱가포르 정부와 리콴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Ⅳ. 독립 이후의 총리 시절(1965~1990)
리콴유는 독립 이후에도 30여 년간 싱가포르 총리로 있다가, 1990년 11월 퇴임했다. 퇴임 직후 선임 장관(senior minister)으로 추대되었고, 2011년 5월까지 고문장관(mentor minister)을 역임했다.
그는 총리 시절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권위주의’로 유명했으며, 개발독재를 펼쳐 ‘독재자’와 ‘싱가포르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공로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연평균 경제성장률 10%를 달성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루어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대한민국, 싱가포르, 중국, 홍콩)’ 중 하나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패행위조사국(CPIB)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해 공직자 부정을 엄단하는 한편, 공직자 급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상해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로 만들었다.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독립 이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며칠 뒤 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국 총리인 해롤드 윌슨이 영국 고등판무관 존 롭에게서 싱가포르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려를 표시하자, 리콴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싱가포르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동료들과 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또렷한 정신을 갖고 있는 이성적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정치의 장기판에서 한 수를 두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결과를 고려할 것입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21일 유엔에 가입했고, 다른 4개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1967년 8월 8일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을 세웠다. 리콴유는 수카르노 집권 시절 보르네오를 두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전쟁을 벌인 지 몇 년 뒤인 1973년 5월 25일,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공식적으로 방문했다. 이 방문을 통해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간의 관계가 급격히 발전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어가 다수가 쓰는 언어이긴 했지만, 다양한 이민자들이 함께 공유할만한 주된 문화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정부와 여당의 협력을 통해 리콴유는 1970년과 1980년 동안 다문화와 다인종에 바탕을 둔 독특한 싱가포르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리콴유와 정부는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종 간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폭력을 일으킬 만한 위협에 대한 법을 통과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리콴유는 기독교인들의 말레이인들에 대한 전도를 “무감각적인 복음 전도”라며 경고했다. 1974년 정부는 싱가포르 바이블 소사이어티가 말레이인들에게 종교적 매체를 출판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1. 정책
리콴유는 독립 뒤에 국방, 경제, 사회문제의 세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1) 국방
공산주의자, 인도네시아(대결 구도를 통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로 다시 통합하려는 UMNO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은 싱가포르의 취약한 국방에 큰 골칫거리였다. 싱가포르가 유엔에 가입한 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된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그는 스위스의 모델을 따라 중립과 비동맹 정책을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고켕쉬가 싱가포르 국군(Singapore Armed Force, SAF)을 세우도록 부탁했고, 다른 나라에 조언을 비롯해 훈련, 장비 지원을 부탁했다.
2) 정부 정책
싱가포르도 다른 나라처럼 정치적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리콴유는 부패행위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을 세우는 법을 통과시켰다. 부패행위조사국은 부패 용의자 및 그의 가족들의 체포와 수색, 증인 소환, 계좌 및 소득세 환급 추적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그는 깨끗하고 정직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관의 소득이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4년 리콴유는 장관, 판사, 고위 공직자의 연봉을 사기업의 전문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맞추는 안건을 제출하며 이런 높은 소득이 공공 부문으로 인재를 끌어오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0년 말, 싱가포르의 인구가 늘어나자 경제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 ‘둘만 낳자’는 강력한 가족계획 캠페인을 시작했다. 두 아이를 낳은 부부는 불임 수술을 권유받았다. 셋째 또는 넷째 아이에게는 교육 혜택을 낮추었으며, 이렇게 자식들이 많은 가정은 받을 수 있는 세금 환급도 줄어들었다.
1983년 리콴유는 싱가포르 남자들이 고학력 여성을 배우자로 맞도록 권고했고, 이는 ‘대 결혼 논란’을 촉발했다. 리콴유는 많은 고학력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걱정했다. 대졸 이상의 여성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그의 관점을 불쾌히 여겼다. 하지만 결혼을 알선하는 사회개발부(Social Development Unit, SDU)가 설립되어 고학력의 남녀가 어울리는 것을 도왔다. 리콴유는 과도하게 성공적이었던 ‘둘만 낳자’ 가족계획 정책을 뒤집기 위해 고학력의 여성이 아이를 셋 내지 넷을 가질 경우 세금 환급, 교육, 주택에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0년 말, 출산율이 극심하게 떨어지자 리콴유의 후임 고촉통 총리는 이 인센티브를 모든 기혼 여성에게 확대하고, ‘베이비 보너스’와 같은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3) 태형
리콴유는 태형의 효과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그는 1930년대 래플스 학교에서 그의 끊임없는 지각에 학생주임 D. W. 맥레오드 씨에게서 매를 맞았던 것을 묘사했다.
“나는 의자에 엎드려 바지를 입은 채로 세게 세 대를 맞았다. 그가 살살 때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리콴유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사법적 태형을 물려받았지만, 적용되는 범위를 훨씬 더 넓혔다. 영국에서는 개인적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에 한해 처벌을 위해 일 년에 몇 번의 태형을 선고했다.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 정부는 더 많은 종류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 1993년에는 42개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의무화했고, 42개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했다(법원에서 태형이 자주 선고되는 범죄는 약물 중독이나 불법 이민 등이 있다). 1987년에는 602번의 태형이 선고되었지만, 1993년에는 3,244번으로 증가했고, 2007년에는 6,404번이나 선고되었다.
1994년에 미국 청소년인 마이클 페이가 기물 파괴법 위반 혐의로 태형을 선고받자, 이 사법적 태형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학교 신체형(남학생에게만 해당됨)은 역시 영국에서 물려받은 것이지만, 1957년에 제정된 법에 의해 반항하는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여전히 많이 쓰인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군에도 태형을 도입했고, 싱가포르는 군 규율을 위해 신체형을 사용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2.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리콴유는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와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리콴유는 마하티르가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가 될 것을 알게 된 뒤, 1978년에 마하티르를 싱가포르로 초청했다. 마하티르의 싱가포르 방문을 통해 리콴유와 마하티르 간의 개인적 및 외교적 관계가 개선되었다. 마하티르는 리콴유와 민주행동당의 화교 지도자와의 친교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대가로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1988년 6월엔 마하티르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 강에 링구이 댐을 짓는 협정을 맺었다.
Ⅴ. 죽음
최근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로 지정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사후에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2015년 3월 18일 모든 언론이 그가 극심한 폐렴 증세로 타계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였으며, 2015년 3월 23일 새벽 3시경 만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Ⅵ. 명언
1. 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비전은 자칫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 있다.
2. 민주주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3. 지배층의 영혼을 정화하라.
4.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첫 임기에는 정권이 망하고, 둘째 임기에는 나라가 망한다.
5. 우리는 한두 세대 만에 산업화에 도달한 농경 사회다.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 등 고속 성장을 해 온 나라들을 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의 부상이다, 과거의 관습과 종교는 이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왜 여기에 있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갈구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6. 공산주의자와는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야 한다.
7. 나는 독서가 제공하는 상상력으로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었다. 지금의 싱가포르는 나의 독서 상상이 하나의 실체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8. 항상 청렴해라. 부패로부터 벗어나라.
9. 싱가포르는 모든 장관과 고위 공직자들 스스로 반부패에 앞장서야만 한다. (중략)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된다.
10. 자유는 질서 속에서만 존재한다.
11. ‘나의 실리적 외교는 매나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다.’
12. 민주주의가 반드시 발전을 낳는다고 믿지 않는다. (중략) 어떤 나라가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민주주의보다도 훈련(discipli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