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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학교 안양3기
 
 
 
카페 게시글
말씀으로 든든하게 스크랩 [종교개혁주일설교]
장덕수 추천 0 조회 242 16.10.28 07: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마다 10월 마지막주일이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이 날은, 그 옛날 루터가 ‘비덴베르그 대학교’의 정문 게시판에, 95개 조항을 내걸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드리는 날입니다.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교회의 모습이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합니다.
한 때,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했었고, 지금도 이 문제는 교회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중세교회에 불붙었던 개혁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재현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단호하게 고쳐 나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개혁되어져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요?
성경말씀에 벗어난 모든 것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은, 어떤 것도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가 부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서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부패의 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원인을 정리해 보면, ‘잘못된 신관’ ‘비틀어진 신관’이 주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했습니까?
그 주범은 비틀어진 신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는데, 비틀어진 신관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신을 비롯한 이방의 잡신들은,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상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제물을 잡아 바쳤습니다.
그래야 신이 기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도, 거창한 제사와 많은 제물을 기뻐한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물을 잡아 바쳤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행위는 나무랄 데 없이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아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가증스럽다”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그러셨습니다.
(사1장)
공동번역에는 ‘구역질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몰렉을 섬기는 자들은, 어떤 짓을 했습니까?
자신의 자녀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잘못된 신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잡아서, 그것도 자기의 자식을 잡아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악행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관에서 오는 부패요, 악입니다.

신약시대, 예수님이 활동하실 당시, 유대교가 왜 부패하고, 악한 종교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비틀어진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저들이 잘못된 하나님, 신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틀어진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형식만 남았고, 마음의 중심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당연히 이런 종교는, 상처 입은 영혼을 싸매어 줄 수가 없었고, 유대교는 점점 부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대교는 물질과 결탁하고 있었습니다.
(예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 쫓으심)

그러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중세교회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중세교회 역시, 비틀어진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교회는, 정치와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정치는 곧 종교요, 종교는 곧 정치권력이었습니다.
교회의 수도원과 수녀원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었습니다.
군주들과 고위 귀족들은, 첩에게서 나은 자녀들을, 수도원장, 수녀원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종교는, 엄청난 부동산과 부를 축적해 가며, 향락에 빠져있었으니, 참신한 수도사들이 명상할 수 있는 수도원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질 모했습니다.
지주들의 착취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 중세교회 시대입니다.

이들이 우상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과 윤리가 상실하고, 종교가 부패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는데, 하나님을 도용했습니다.
서민들은 원리와 재산을 착취하여, 도용했습니다.
서민들의 권리와 재산을 착취하여, 재물을 모으던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자신이 유익한 방향으로 만들어 갔고,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변형시켜간 것입니다.

중세시대, 교회의 소행은 또 어떠했습니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은, 막대한 자금이 드는 관계로, 벌써 100년 이상 공사를 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기 위한 비용 조달을 위해, 1506년부터,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 [알버트]라는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교황에게 거액을 뇌물로 바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두 교구의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돈에 의해서 성직이 매매되고, 진리가 매수당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알버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대 주교구인, ‘마인츠 교구’를 수중에 넣기 위해, 교황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돈의 액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교황은, 면죄부를 팔도록 권장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알버트]는, 당시의 웅변가 [테첼]을 이용해, 면죄부를 팔게 되는데, 이익의 절반을 교황에게 바치고, 절반은 [알버트]가 먹었습니다.
교황은 면죄부를 판 돈의 절반을 가지고, 성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짓을 하는 이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라, 중세교회의 전반적인 흐름이었습니다.
권력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변형하여, 자신들의 탐욕과 권력을 성취하는데, 동조해주는 하나님으로 만든 것입니다.

[테첼]이라는 사람이, 면죄부를 팔면서, 뭐라고 설교한줄 아십니까?
‘면죄부는, 죄인들을, 세례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며,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순결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효력이 있다. 헌금함 바닥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갇혀있던 영혼은, 화살처럼 솟아오른다.’
이러한 감언이설로, 신자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교회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요, 도용하는 자들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입니까?
이들은 성경에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 시켰습니다.
수 세기 동안, 유럽의 영적 어머니 역할을 해 오던 교회가,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3절에,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말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사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면죄부를 파는 [테첼] 일행이, 서서히 비텐베르그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그 대학 교회’ 정문에, 95개조항의 신조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진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기득권자들은, [루터]를 향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통일을 파괴한 반란자요,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은 돼지요, 수도원 주의의 기초를 파괴한 반항심에 가득 찬 수도사다.’

그러나 여러분!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라는 슬로건으로, 종교개혁에 불을 당긴 [루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알고, 복음을 바로알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중세 교회가 왜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까?
그들은 비틀어진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자신의 탐욕과 야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저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이슬람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아봅시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범들에 의해,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이, 엄청난 테러를 받았습니다.
지난번 테러로, 7,000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2천 3백 90명이 죽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1,500명이 죽었습니다.
지난번 미국의 인명피해가, 진주만 공격 때의, 3배에 달한 것을 보면, 이는 전쟁 그 이상의 테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믿는 신은 누구입니까?
이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은, ‘알라’인데 ‘알라’,는 ‘하나님’을 뜻하는 아랍어입니다.

아랍인 = 알라
유대인 = 야훼
미국 그리스도인 = God
한국 그리스도인 = 하나님

유대인들은, ‘야훼’라 부르고, 미국인들은 ‘God’이라 부르고, 한국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이라 부르고, 아랍인들은 ‘알라’ 라고 부르지만, 그 대상은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무하마드]가, 알라로부터 계시 받았다는 ‘코란’을 들고 나오면서, 성경의 하나님이 변질된 것입니다.

[무하마드]는, ‘알라신’의 사도요, 신의 말씀을 전하는 마지막 사도요, 신의 말씀을 전하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코란’을 계시 받았다고 합니다.
[모세]보다도 더 위대하고, 예수님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하마드]는, 메디나로 가서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로 생성된 이념공동체입니다.(622년)
[무하마드]는, 이 공동체를 세우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점술사, 중재자 및 전시 지도자의 권력을, 자신의 한 몸으로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모세 오경 외에, 알라신과 코란을 이용하여,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비틀어진 신관을 주입하면서, 군중을 이끌어간 것입니다.
잘못 비틀어진 신관을 이용하여, 이슬람 공동체가 다른 종교에 현혹되지 않도록, 눈과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신의 사도로서, 중재자로서, 군사령관으로서 제정 일치의 모든 권한을 쥔, 강력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를 몰아내는 힘을 응집하고, 실질적으로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이슬람의 깃발아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슬람의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슬람의 하나님 알라는, 저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신일뿐입니다.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권력을 쥐는데, 하나님을 변형시켰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도용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수천 명의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면서도, ‘알라(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잘못되고 비틀어진 신관이, 인간을 얼마나 사악하게 만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구약성경을 인정하지만,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기독교도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알라’를 만들어놓고, ‘알라만이 제일 강력한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념과 욕망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신의 죄종적계시라는 ‘코란’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들의 하나님은, 분명히 저들에 의해서,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신이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우상에 불과한 신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본문 3절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슬람들은, 군사적,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 하나의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상입니다.

7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슬람들은, 군사적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 하나의 다른 신, 하나님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상입니다.

7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한, 또 하나의 우상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고, 신약시대의 유대교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했습니다.

서방의 열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연히 ‘사랑’입니다.
하나님 = 사랑이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보호해 주라고 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들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의 대표요,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이들을, 사랑으로 보호해 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역사요, 힘의 논리로 이어져온 역사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국을 침범하여, 빼앗고 점령했습니다.
정복한 나라는 좋을지 모르겠으나, 빼앗긴 입장에서 보면, 가슴을 칠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다.
서방의 열강들, 구라파 유럽의 열강들을 보세요.
이들은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수많은 약소국들을 점령하고 다스렸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테러범이나 중세교회와는 근본이 다르다)

지금도 힘의 논리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제재를 가하는 열강의 기독교 국가들이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식민지 아닌 식민지가 된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힘의 논리로 약소국을 점령하는 일에, 손을 들어 찬성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왔습니다.
중세교회는,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하나님을 성취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부동산 목회로,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했고, 비틀어진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신의 이름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이, 중세교회입니다.

이슬람권의 무슬림(이슬람 신자)들 역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이념의 목족으로 변형된 하나님 알라를 만들어, 숭배하며 통치하고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망령된 행동들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3. 그러면, 일부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제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신(하나님)을 변질시키는 행위입니다.
중세교회처럼, 무슬림처럼, 하나님을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만유의 하나님은, 이단에 의해 이용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중세교회는 일명 부동산 목회였습니다.
엄청난 부동산과 재산과부를 축적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만들었고,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권력과 부를 쌓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서민들은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빈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어느 개척교회 목사님이, 힘을 다하여 목회를 해 보았지만, 부흥이 되질 않았습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습니다.
해서, 목회를 잘하고 계시는 선배 목사님을 만나,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질문에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O목사, 부동산 목회를 해야 되는 거야.”
순간,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어서, 잠시 후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한 것을 깨닫기를, ‘목회를 잘하는 것은, 부동산을 늘리고,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목회를 잘하는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동산 목회는, 중세교회를 부패하게 만든 주범입니다.
부동산을 팔아서,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키우는 일에 투자해도 부족할 판국에, 영혼을 울려가면서 부동산을 쌓는다면, 그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입니까?
교회가 성전을 건축한다면, 참으로 큰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가 교육관을 건축한다고 하면, 모든 성도님들이 정성껏 헌금을 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이며, 또한 성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축헌금을 모으기 위해서, 차량헌금을 모으기 위해서, 부흥회를 하고, 일부 강사들은, 협박하다시피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세교회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려는 욕망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런 일은, 이렇게 부패한 모습보다는, 훨씬 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복음에 붙들려 있고, 순수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물질에 매이게 되면,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또한, 물질에 매이게 되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헌금을 끌어 모으는 일에 도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물질을 축적하는 일에만 몰두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시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죄라는 것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은 오늘날 자신의 욕구와 탐심을 채우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틀어진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아멘-

[종교개혁]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갈 2:15-21)

유명한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 보면 여주인공인 마리아가 트랩 대령과 우여곡절의 끝에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드디어 확인하게 되는 날 밤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인물로 보나 사회적 지위나 재산 정도로 보나 자기로서는 도무지 상대도 될 수 없어만 보였던 그 멋진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지금 바로 앞에서 고백하고 있으니, 마리아는 그 현실이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어쩌면 나한테 이런 복 바가지가 터졌을까?'하고, 터질 듯이 떨리는 가슴으로 마리아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일이 그냥 생길 리는 없어요. 그러니 틀림없이 내가 어렸을 때 무언가 착한 일을 했었나 봐요.(Perhaps I had wicked childhood, perhaps I had miserable youth. But someday in my youth or childhood I must've done something good. Nothing comes from nothing, nothing ever could. So someday in my youth or childhood I must've done something good.)"라는 노래입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이런 일이 절대로 우연히 일어날 리는 없고, 분명히 옛날 어느 땐가 자기가 무척이나 착한 일을 했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지금 자기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마리아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처럼'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윤리입니다.
모든 현상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심은 끝내'선이라는 원인이 복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일종의 윤리적 인과율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과율은 세상의 도덕계의 중심부에 흐르는 주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 종교계에서도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최고의 교리로 숭상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선한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는 보상의 원리가 이 땅에 사람 사는 골목골목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가장 보편적인 윤리인 동시에 공통적인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세속적 종교의 도도한 강물 한 가운데 유독 우뚝 솟아 그 조류에 거슬리고 있는 바위와 같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이른 바'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의롭다 함" 혹은 "의롭게 됨"이라고 번역되어 세 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만한 그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그저 의롭다고 인정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칭의'의 정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아주 독특한 복음입니다.
모든 다른 종교에서는, 아니 모든 무종교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복을 받고 선한 일을 한 까닭에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 그 어떤 선한 일을 한 보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데, 유독 기독교만이'사람은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견 이 세상의 상식이야말로 지극히 알기 쉽고 합리적인 윤리 도덕의 절대적 법칙으로 보이고, 반면에 기독교의'이신칭의'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교리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 내면의 진리를 바로 깨닫기만 하면 이'이신칭의'의 교리야말로 세상의 상선벌악의 상식적인 윤리와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을 진짜 합리성과 충만한 감동력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제489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그 종교개혁자들이'이신칭의'의 교리를 통하여 되찾아내었던 깊은 진리와 충만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이신칭의(履信稱義)'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을 충만하게 해주는 교리입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라는 주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물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과 모든 성도들을 뜻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우선 바울 자신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가 주는 깊은 은혜를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체험한 사람이 바로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전의 바울 같은 골수 유대주의자들의 입버릇 같은 표현인데,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자조하는 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기독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율법의 행위" 즉 율법 준수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며 남에게 강요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가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의 열렬한 옹호자이며 준행자였던 바울 자신이 잘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원래 이방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유대인이라고 자랑하고 떠들지만 그 의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완벽한 행위에서 날 수는 없다는 것은 우선 나도 잘 아는 사실이고 우리 모두 다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도 "주의 목전에서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고 증거하고 있는 대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충족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능력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일이며,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이 세상에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상식적으로 보이던'이행득구'의 교리는 사실 이처럼 필연적이고도 절망적인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런 절망을 뚫고 일어설 수 있는 실로 은혜로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충족시킬 수 없었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대신 충족시켜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야말로 율법이 명하는 바를 당신의 생을 통하여 완전히 지키셨던 유일한 분이셨고 또한 그 율법의 정죄가 요구하는 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저주선고를 십자가를 통하여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것은 오직 율법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죄의 고백과 구원 얻기 위한 모든 근거와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찾는 믿음, 이것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믿음을 통한 칭의'의 진리를 16절의 말씀은 "아는고로... 믿나니... 얻으려 함이라... 없느니라"라는 반복 강조를 통하여, 마틴 루터의 유명한 표현 그대로, "우리의 머릿속에 두드려 박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준수를 통하여 자기 의를 이루어 보려고 하다가 쓰디쓴 절망감을 맛보았던 바울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함으로써 그 모든 고민과 무기력을 일순에 해결 받는 복음의 단 맛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행으로 공로를 쌓고 선행으로 의를 세우고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무서운 현혹이며 엄청만 기만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의 입술과 사람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왔을 뿐 이 세상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실제로 완성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순전한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파괴시키며 살아왔는지는 사람이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돌이켜보면 그 누구라도 당장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정말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그 누가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교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이행득구'를 믿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니 절로 교만이 되어버리고 그렇다고 겸손을 유지하자니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기 선으로 의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상식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논리요 어이없는 교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고민했던 천주교 사제였습니다.
그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도하고 고행하고 선행의 공로를 쌓으려고 애를 썼던, 당대의 제일 모범적인 사제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만 남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악한 본성 때문에 더욱 깊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깨닫게 되자, 자신을 그처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절망감이 한 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바로'구원의 확신,'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과 감격이 터질 듯이 넘치게 되는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복음이 복음된' 것입니다.
도무지 스스로는 어찌 일어날 수 없어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예수님께서'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소식을 주셨으니 이야말로 정말'기쁜 소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있어야만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죄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절망적이었다가 극적인 소망을 붙들게 되었으니 실로 감격이 넘치는 중생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상식이요 일견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절망선고나 다름없는'이행득구'라는 말에 절대로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는 이길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과 악한 본성으로 인하여 끝없는 절망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오직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던지고 맡겨놓고서 그 주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믿음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음으로써, 복음의 정수, 그 단 맛과 그 기쁨을 꼭 맛보고 느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이신칭의'만이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온전히 돌리게 해주는 진리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분명히 중생 받은 성도도 이 땅에 살 동안 완벽하게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부분적으로 범죄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비판자들은 바로 그것을 두고 이신칭의의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딜레마라고 공박했습니다.
"보아라. 예수 믿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람이 저렇게 죄를 짓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 예수의 공로란 것이 그처럼 효력이 약한 것 아니냐?"라고 함부로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무분별한 비판에 대하여 크게 분개한 어조로 단호히 반박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즉'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의롭게 된 후에도 나는 나의 연약을 인하여 죄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범법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일 뿐인데 감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장난하지 말아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제 딴에는 칭의교리의 허점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들먹였지만, 바울은'그 어떤 경우에도 죄와 상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만 생각해도 그따위 질문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칭의의 은총을 체험한 성도만이 끝까지 자기 죄에 대하여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며 티끌만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지 않으려고 이처럼 애를 쓸 줄 알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의롭다 함을 입은 성도는 자신이 누리는 은혜로운 삶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본문 19절 이하 21절에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비록 부분적인 연약에 빠질 때도 없지는 않지만 일단 칭의를 입은 성도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변화를 입게 됩니다.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의 처지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리고 그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바울 자신의 노력은 그에게 오직 "율법으로 말미암은" 죽음의 선고만 가져다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범죄자로만 남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이르게 되었으니 바울은 다시는 그쪽으로 돌아설 마음이 꿈에도 없었습니다.
즉 "율법을 향하여" 죽어버린 자가 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쪽으로만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생의 본능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이룰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애를 써도 도무지 풀 길 없던 죄의 문제를, 의롭게 되는 과제를 그처럼 간단히 해결해 주는 십자가를 알게 되자, 그는 바로 그 십자가에 자기의 과거를 함께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자, 바울은 이제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존재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자기의 생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비록 여전히 때로 죄를 짓기는 하지만 이제는'죄짓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그 모든 옛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 자신을 볼 때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된 때문이라고, 모든 공을 오직 그리스도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자들은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죄지었을 때에 책임을 스스로 느끼는 면에서는 바울과 같을지 몰라도 자기가 거룩하고 의로운 새 생활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점에 있어서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말이야 예수님께 감사한다고 하겠지만, 자기가 이만큼 의롭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기의 노력 때문이라는 교리를 확실히 믿고 있으니 그처럼 믿는 만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깎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는 깎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짓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헛되이 죽으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근본이 은혜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전혀 필요 없었던 헛수고로 몰아버리는 것이니 이야말로 실로 중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성경의 확실한 진리를 두고 오늘날에도 꼭 같은 비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이신칭의의 교리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나쁜 사람도 그냥 다 의롭다고 인정해주면 사람이 무엇 하러 애써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그 교리는 사람의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제법 날카로운 비판 같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한 수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는 진실한 믿음으로 정말 의롭게 된 자들의 심령 속에는 이미'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면서' 본인의 의식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주도하게 되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은 진짜 칭의를 입지 못한 자들이 그저 얄팍한 이론적으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참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결코 실존할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논리 속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고 할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이 점에 가서는 양자의 차이는 극과 극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면 될수록 그 의를 스스로 이룬 당사자에게 꼭 같이 비례해서 그만큼의 영광이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공감하고 있는'이행득구'의 교리는 실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엄청난 죄악에 이르고 마는 것을 똑 바로 깨닫고, 아무 공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만 보시고도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내가 무슨 선을 행해야 하는가?'만 가르칩니다.
하지만 기독교만이'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먼저 믿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사람이'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라는 말씀만 성경에 뚜렷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무력에 절망하던 죄인에게 기쁜 소식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정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마틴 루터는 바로 이같은 감동과 진리를 체험한 까닭에 이'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리켜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독교리의 으뜸 되는 조항이며 바로 여기에 신앙심에 관한 모든 지혜가 총망라되어 있다... 만일 칭의의 교리를 놓치면 기독교의 모든 참된 교리는 상실될 것이다."라고까지 선언했던 것이며,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과'삼위일체론'과 맞먹을 만큼 중대한 진리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 돌릴 수 있게 만드는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실로 이행득구 따위의 교리로서는 상대도 될 수 없는, 정말 고귀하기 짝이 없는 진리입니다.

제가 지난 봄인가 언젠가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에서 무슨'명설교'라는 시간에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채널을 돌린 순간 그 분께서는 마리아 테레사 수녀를 한참 칭찬하던 중이었습니다.
무슨'테레사 효과(effect)'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마리아 테레사 수녀처럼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보게 되면 자기도 그렇게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되는 효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는 그 마리아 테레사만큼 착하게 살지 못해서 부끄럽다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 듣지도 못하고 그냥 텔레비전을 꺼버렸습니다.
기독교 목사가 수녀처럼 선하게 살지 못해서 부끄럽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 보이신 본대로 살지 못해서 부끄러울 뿐이요, 우리가 선행을 한다면'십자가 효과'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지, 어떻게 테레사가 기독신자의 선행의 기준이요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또 뭐 사실 선행 그 자체만 가지고 따진다손 치더라도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고 평생을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사셨던'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적어도 테레사 수녀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강단에서 수녀를 그처럼 칭찬할 정도이면 아마도 그 목사님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것이야 본인 신앙양심으로 마음대로 판단할 자유가 있으니까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도 장로교회를 세웠으니 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으셨을 것이고, 그때 분명히 장로교의 헌법과 신조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따르겠다고 서약도 하셨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처럼 장로교가 잘못된 것이 많고 천주교에서 본받아야 될 정도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시든지 아니면 최소한'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 그 본인께서 부끄럽게 여기고 계실 그 간판만큼은 무슨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달고 목회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주교의 이단성은'이행득구' 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를 제4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예수님 대신에 중보자로 모시는 것, 신구약 66권에다가 위경을 첨가한 것, 교황무오설, 적어도 수천 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을 통하여 고문하고 죽인 일 등등, 그 명백한 이단성은 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기독교계에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외치는 목사들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오히려 천주교와 기독교가 같은 것처럼 가르치고 둘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이'종교개혁기념주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지켜지고 있을지 실로 통탄스럽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종교란 사람의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사람 스스로의 양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원래부터 엄청난 균열이 존재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사람은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는 자연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랴?"(욥25:4)라는 고뇌의 외침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진짜 절망은 선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알고도 행치 못하는 무능력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롬10:2, 3) 실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를 세우려 하다가 실패하여 절망할 필요도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의가 무엇인지 깨닫기만 하고 그것만 복종하면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는'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주님께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의, 바로 이 의를 통하여 참된 의로움을 얻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영광을 주님께 돌릴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종교개혁]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 (고전 16:15-16)

에르마 봄벡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다가 한 어린아이가 온 교회당을 웃으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전혀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아이의 어머니가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쉿! 웃지 말라니깐!"하며 주위 사람에게 드릴 정도로 큰 소리로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아! 여기는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란 말야. 그렇게 크게 웃으면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라며 엄마는 아이를 붙잡아 옆에 앉게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눈물이 그 상기된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게 더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던지 그 아이의 엄마는 다시 찬송을 웃으면서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장례식에 다녀온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마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감정인 웃음을 잃어버리고 경시하기까지 하는 오늘날 현대교회의 아픈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이 글을 쓴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환경이나 조경이나 인테리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분위기는 어떠하십니까? 어떤 색깔입니까? 우리 교회와 예배 분위기는 장례식장? 아니면 잔칫집과 같습니까? 분위기에 따라서 편안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수도, 꼭 오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오고 싶고, 예배드리고 싶고, 섬기고 싶고,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교회로 만들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든 교인들이 행복해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협력합시다.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하나님만의 집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특정한 누구누구의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모범적인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처럼 함께 하나님을 더욱 잘 섬김으로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믿음의 집

본문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스데바나의 회심은 바울이 아덴에 복음을 전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바나 혼자만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혜와 축복입니다. 스데바나의 신앙과 인격과 지도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들에게 영향력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오이키안'은 '가족들' 뿐만 아니라 '노예들'까지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스데바나가 아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아가야로 돌아와 그의 가족들과 노예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모두를 믿음의 사람과 가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는 요란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조용하면서도 알차고 착실하게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복음의 향기와 열매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믿음의 멘토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독교를 공격하며 반박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한 기독교인이 반쯤 먹다만 오렌지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그 연설자에게 "이 오렌지가 단 오렌지입니까? 신 오렌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보시오. 맛도 보지 않고 어떻게 그걸 압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기독교인은 "여보시오. 당신은 기독교를 맛도 보지 않고 어떻게 틀렸다느니 나쁘다느니 말할 수가 있단 말이요?"라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남이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전혀 없는 왕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출세하여 거액의 연봉을 손에 쥐었다 할지라도,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어 인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오늘 매력적인 이성으로부터 황홀한 사랑의 프로포즈를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생이라면 결코 그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니라면 그 기쁨의 수명은 매우 짧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환자가 병원 침대에 누워 겨우 산소 마스크로 생명을 연명하듯 생명의 능력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은혜의 힘을 공급받지 않고 사명의 멍에를 몸으로 때우며 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 소위 '영적 노가다 신자'들입니다. 기쁨이 없이 짐을 지게 하는 것은 '노가다 신자'를 양산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영적 노가다 신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피곤한 짐을 지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희생하기보다는 희생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생과 수고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힘입고, 기쁨으로 짐을 지고 충성하며 마귀를 압박해 갈 때 마귀는 기가 죽어 항복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가득할 때 믿음의 기적은 가능하게 됩니다. 숯덩이에게는 불덩이가 될 소망이 있고 흙덩이에게는 돌덩이가 될 소망이 있는 것처럼, 성령 안에서 소망을 품을 때 인생역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스데바나처럼 삶 속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여 가족과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고 싶어하도록 뜨거운 감동을 주는 삶을 삽시다.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믿음이 충만한 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스데바나의 집처럼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섬김의 집

본문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를 섬기는 집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어떤 종류의 봉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이 견해에 따르면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도왔고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데바나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많은 헌금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는데 헬라어 '에?산 헤아우투스'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라는 의미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섬겼음을 보여줍니다. 의무나 직분에 의한 섬김이 아닌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쁨의 섬김이었습니다. 자발적인 섬김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섬기는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섬기는 사람과 후손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창대케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잘 섬겼을 때 영육간에 거부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최고의 선물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섬김은 하늘 나라의 면류관이고 나와 후손의 축복의 도구이며 수지 맞은 투자인 것입니다.

사람의 속을 뚫어 보는 불가사의한 눈은 예수님께 못 말리는 낙관론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어찌 부랑자, 거짓말쟁이, 겁쟁이, 사기꾼과 어울리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낡은 것이 새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자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약한 자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영적 변화를 목표로 불신자들과 친분을 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인해, 영적 수준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말과 부적절한 행동 너머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일어날 변화를 꿈꾸셨습니다. 그분은 두려움과 죄의 벽을 뚫고 들어가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잠재력의 극한까지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그분께 맡기기만 하면 우리가 받은 모든 불공평한 일을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업상 거래에서 상대에게 속아 많은 돈을 날렸습니까? 누군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직장에서 승진의 기회를 잃었습니까? 정말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습니까? 이런 경험들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매우 슬프고 힘들 것입니다. 복수할 방법을 찾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다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10:30). 우리가 일일이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며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변호사가 되시니 우리가 나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우리 대신 싸워 주십니다. 우리가 문제를 맡기면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다. 우리는 다만 사랑하고 섬기면 됩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는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있을 때 잘하겠습니다'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교회, 가족, 이웃,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하면 모두가 잘 하고 행복해 집니다. 문제는 남이 아닌 나입니다. '잘 해'가 아닌 '잘 하겠습니다'로 변해야 합니다. 스데바나 가정이 섬기는 집이 되었을 때 더 복을 받았습니다. 싸움이 가득한 섬김이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 모두 스데바나의 가정처럼 섬김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복종의 집

본문 16절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순종을 본받아 자신들을 낮춰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서신의 끝 부분에서 복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이나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종하는 것도 기도하고 배워야 합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복종은 고귀한 은혜와 축복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복종치 못하는 결점은 바울 서신보다 약 35년 늦게 보내어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에도 나타납니다. 반항하는 사람과 가정은 반드시 불행해 집니다. 고라와 그의 후손과 추종자들이 저주를 받아 땅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복종하는 성도와 후손들은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고 높여 주십니다. 스스로를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지만 스스로를 높이면 하나님이 낮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은혜를 받으면 복종하는 집이 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크고 다양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연기자가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실수 때문에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감독은 'NG' 사인을 줍니다. 'NG'는 'No Good'의 약칭입니다. 우리는 연기자의 적나라한 실수를 실제 방송보다 더 실감나게 보면서 폭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합니다. 왜 시청자들은 'NG'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연기자보다는 때로는 실수도 하는 연기자가 훨씬 인간적으로 보여지고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연기자가 자주 'NG'를 낸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일이겠지만, 'NG' 때문에 긴장 속에서 연기하던 연기자나 스텝들이나 감독까지도 웃으면서 촬영장의 피로를 풀고, 쉬는 시간을 갖게 돼서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자기 고향을 떠날 때부터 사라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를 양자로 삼을 생각으로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롯과 갈라서게 되자 아브라함은 자기 하인들 가운데서 가장 신실한 사람인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자기 후계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사라가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합니다.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사라를 통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은 포기했었기에 몸종에게서 난 아들인 이스마엘이라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브라함처럼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 때, 즉 자기에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할 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내게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총의 전용차선 곧 시온의 대로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자기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서 지금도 지구촌에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아들 이삭으로 인하여 평강의 왕이신 예수가 오셨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복종하면 반드시 최상의 축복을 주십니다. 스데바나의 집처럼 복종하여 칭찬과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여러분의 집은 믿음과 섬김과 복종 가운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기도하고 노력해서 이 시대에 스데바나의 집처럼 존귀한 성도와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종교개혁의 3대 핵심 주제 (딤후 3:16,17, 롬 1:17,3:27,28)

오늘 아침에도 우리 주님께서 예배하기 위하여 주님 앞에 모인 저와 여러분 모두를 크신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틴 루터가 생명을 걸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89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예수님과 같은 신실한 믿음과 생활로 뭇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볼 때에 마음이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에 성전이 타락하고 부패되어서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로 마치 강도의 굴혈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진노하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비둘기 상자를 내 던지시고, 돈 바꾸는 궤짝을 던져 버리시며 양과 소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오늘 한국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보신다면 혹시 책망을 듣지는 않을는지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 책망 들을만한 몇 가지의 양상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지나치게 물량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의 대형교회나 중형 교회를 가보면 마치 오늘날 교회가 무슨 기업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에 갔더니 중국에 있는 공산당원들이 우리 목사님들을 부를 때에 “회장님 오셨습니까?”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기록된 대로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귀빈 대접을 하고 대단한 환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대형교회에 오면 목사님 한 번 만나기가 구청장 만나기보다 어렵고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겨우 만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닌다는 이야기가 생겼나 봅니다.

둘째로 우리 나도 너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세속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좋은 모습을 보고, 성도를 따라 교회로 와야 하는데, 요즈음은 반대로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세상의 사람들이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셋째로 우리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개 교회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교단과 교단끼리 그리고 교회와 교회끼리 연합이 되어야 하는데 거의 잘 되지 않습니다. 작은 교단이든지 아니면 큰 교단이든지 간에 나타나는 양상이 비슷합니다. 하나같이 자기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고, 우리 교단이 부흥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 때문인지 예수 믿는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되 나만 잘 믿고 복 받기를 바라는 극도의 이기주의적 신앙생활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기복주의 신앙으로 흘러가는 경향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 믿는 목적이 복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사업이 잘 되거나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복(福)이라는 단어가 1260번 이상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34장중에서 96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복(福)의 장(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 28장에서만 11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복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바로 하다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온갖 축복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 한국교회는 형식주의와 타성(惰性)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 아픈 것은 생활 속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또한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형식과 타성(惰性)과 습관에 젖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예배에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타성에 젖어 형식적으로 예배 시간에 자리에만 앉아 있다가 돌아가니까 마음의 기쁨도, 삶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이 저의 개인의 판단이라기보다 한국교회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괴로워하는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계속되어서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개혁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개혁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처음에 칼빈이나, 루터나, 쯔빙글리 등이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느꼈던 그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결같이 외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3대 핵심이 되었습니다.

1.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를 보려고 한다면 거울을 보아야 합니다. 보고 무엇이 묻었다면 수건으로 닦든지 아니면 물로 씻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묻었는지, 아니면 잘 못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면 성경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우리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려고 해도 무엇인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개혁을 하려고 해도 막연하게 개혁을 부르짖는다면 탁상공론에 불과 할 것입니다. 개혁에도 뚜렷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나, 사상이나, 신비한 체험이 결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과 사상 그리고 신비한 신앙 체험들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딤후3:16)고 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이 성경이 우리 인생들의 생활의 척도요, 지침서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고 뼈대이며 기초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성경 말씀을 무시한다면 우리 신앙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삶과 신앙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로마 교황의 말과 교황청의 말 한마디가 더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외쳤던 말씀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 말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위에 두고 그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와 내 심령 속에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부터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하여 책망 받을 것은 책망 받고, 바르게 할 것은 바르게 하고, 의로운 말씀으로, 교육을 받아야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딤후3:16)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딤후3:17) 늘 말만하지 말고, 부디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되고, 또한 성숙하여서! 하나님의 일꾼이요 주님의 제자요, 이 시대의 참된 영적 지도자로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시작하고, 성경공부가 있으면 겸손히 배우시고, 성경 암송을 한다든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신앙을 말씀 위에 굳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지혜도 좋지만 그 보다는 말씀에서 지혜를 찾고, 그 말씀에 내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개혁의 첫째 모토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2. 개혁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롬1: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두 번째로 외침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루터는 행위로 의로워 지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도 하고 온갖 금욕적인 절제 생활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선행을 베풀고 경건 절제 생활을 했지만 도무지 그의 마음에는 참 평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방황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만들어 누구든지 이 면죄부를 사야지 자신의 죄가 사해지고, 또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의 죄를 위하여! 지옥에서 울부짖는 부모를 천국으로 옮겨 놓기 위하여 이 면죄부를 샀습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기에 교황의 말이 성경인 줄 알고 무조건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 고민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루터가 발견한 말씀이 바로 오늘 롬 1:17절 말씀입니다. 한번 따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은 돈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율법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행위로 인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랑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면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 했지 사람들은 자랑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롬3:27,28)

성도 여러분! 구원은 결코 교회 열심히 나오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등, 이런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대선의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이 진리 위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같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개혁의 세 번째 외침은 오직 은총으로! 오직 은혜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우리 삶과 신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가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구원의 감격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내가 구원받게 된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여 감격의 눈물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공로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은총 때문임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해서 절대로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롬3:27)

저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엡2:8,9절을 함께 외워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은 것도 나의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은총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을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볼 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었지만 그런데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총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것은 {“오직 은총, 오직 은혜로”}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내가 “연약 할 때에”(롬5:6)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에”(롬5:8)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롬5:10)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로울 때도 아니고, 우리가 착하고 선을 행할 때에도 아니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고,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을 때인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종교개혁 489돌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은총으로”이라는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믿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새롭게 회복하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것만 회복된다면 우리의 입에서 감사와 감격이 저절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의무감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책임감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것도 좋지만, 기분과 감정에 따라 충성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늘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즐거운 신앙생활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게 된 것을 기억하게 될 때 침체되었던 우리 신앙들이 다시 회복되며 활짝 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으면서 이제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위도 해야 하고 공로도 쌓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 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그런 일이 필요하지만,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인줄 믿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형벌을 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늘 감격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가 임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이루어집니다. 영혼과 육체에 회복이 됩니다. 회복이 되면 여러분들의 삶이 새롭게 될 줄 믿습니다.

부디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신 놀라운 역사가 회개함으로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회개함으로 1907년 대 부흥의 주역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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