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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은 곧 우리의 전적인 도덕적 파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계속하여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이 아니던가. 우리는 소망 없이 곤경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연결시키시고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회복하시며 또 우리 인격의 상처받은 영역들에 치유를 가져다주시는 길을 찾아내셨다. 바울의 기쁨에 찬 외침을 들어보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 20)"
사 1:18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본문/ 사1:18-20
예언자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던 사람들은 세 부류였습니다.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왕입니다. 그 중에 예언자는 다른 나라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라고도 하는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특히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왜 그런 위기가 생기게 됐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외쳤습니다.
예언자라 하면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점쟁이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점을 치듯이 미래를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는 미래를 알려달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무엇이 문제인지를 밝히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외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지를 경고하기 위해 미래를 예언합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미리 豫자에 말씀 言의 예언자라 하지 않고, 맡을 預자에 말씀 言의 예언자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고 외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죄로 인해 멸망당하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누구를 초청했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주홍 같은 죄, 진홍 같은 죄라 표현했습니다.
일전에 어느 교회에 설교 부탁을 받고 설교 전에 저녁 식사 대접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는 도중에 김치 국물이 와이셔츠에 튄 일이 있습니다. 와이셔츠가 여기 저기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해야 할 상황인데 이만 저만 낭패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닦고 감추려 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교회 목사님의 와이셔츠를 급히 빌려 입고 설교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닦아내려 해도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 앞에 적나라하게 죄상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길은 하나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외쳤습니다. 그러지 말고 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오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앞 단락 10-17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잘못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제사를 드리지만 그런 제사를 하나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쁘지도 않은 그 많은 제사를 받는 것 자체가 짐이고, 제사 받는 것이 너무도 피곤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를 드리러 수도 없이 성전에 오지만 그 모든 수고가 다만 성전 마당만 밟는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죄는 잘못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이제 기도마저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끊으시려 하셨습니까?
13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이유를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5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이유를 그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이 예배자의 삶이 아니고, 행위가 기도자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 4:5절을 보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따로 제물 따로 받으시는 분이 아니심을 보여줍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시면 그 제사도 기뻐 받으십니다. 반대로 제사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그 제사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릴 만한 사람이 드리는 제사만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제물이 훌륭해도, 아무리 제사 형식이 화려하고 거창해도 드리는 사람이 문제가 있으면 그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배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 형식, 예배 순서, 예배 방법을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 드리는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 것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다 헛것이고, 다만 교회 마당만 밟을 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담한 상황 가운데 빠졌습니다. 아무리 정성껏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상황이 됐으니 말입니다. 이사야는 그래서 10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 초청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참담한 상황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그래도 초청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카흐'입니다. 이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검사가 피고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고하고 나면, 변호사가 피고 입장에서 변호를 합니다. 야카흐는 바로 피고의 입장에서 변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이사야가 검사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낱낱이 밝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바로 처벌하시고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징계하시고 처벌하실 때 변론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 그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다릅니다. 꼭 변론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바로 처벌하시거나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변론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만일 인간 재판장 앞에 말할 기회를 얻는다면 핑계를 대고 자기를 합리화해서 무죄를 주장하거나 죄를 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장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고, 왜 그 죄를 저질렀는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할 기회를 얻는다 해도 할 말은 단 하나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앞에 야카흐 즉 변론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저질렀을 때 반드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은 가룟 유다가 죄를 범했을 때도 회개할 기회를 세 번씩이나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잘못은 예수를 판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세 번의 기회를 놓친 것이 잘못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를 팔았어도 회개만 했으면 다 용서받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죄를 짓고도 용서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불행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나다나엘 호손의 대표작이라면 주홍글씨를 꼽습니다. 이 소설에는 세 사람의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아름답고 덕망 있는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 그녀의 남편으로서 일생을 아내의 불륜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사는 칠링 그로우스, 그리고 헤스터와 불륜 관계를 맺었던 청년 목사 딤스데일입니다.
헤스터는 청년 목사 딤스데일의 아이를 분만함으로써 불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녀는 끝까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그 벌로 간음이라는 영어의 첫 자인 'A'를 붉은 색실로 수놓아 가슴에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제목인 "주홍 글씨"입니다.
청년 목사 딤스데일은 죄를 고백하지 못한 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딤스데일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는 죽었습니다. 그의 가슴팍에는 칼로 판 'A'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만 아는 주홍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남편 칠링 그로우스는 딤스데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이 불타고 있었으나 딤스데일이 최후로 죄를 고백하고 죽자 이를 지켜본 뒤 미쳐버린다는 것으로 이 소설이 끝이 납니다.
헤스터는 비록 죄를 졌지만 바로 죄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죄를 고백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에 가서 죄를 고백할 기회를 얻었고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칠링 그로우스는 증오심을 해결하지 못한 채 결국은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가장 큰사랑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 회개할 수 있는 기회,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청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초청에 응하는 경우
본문 18절에 보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홍, 진홍은 지워지기 어려운 색깔입니다. 흰색 티에 버찌나 포도 같은 과일 물이 들면 세탁기에 돌리고, 손을 비벼 빨고, 갖가지 세제를 다 동원해서 빨아도 흔적 없이 깨끗하게 색깔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홍이 눈처럼 하얗게 되고, 진홍이 양털처럼 희게될 것이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주홍과 진홍과 같지만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사 44:22에서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안개가 사라질 때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처럼 죄가 깨끗하게 사라지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죄인이 자기 죄 값을 다 치르고 나왔더라도 그 전과가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징역형을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전과입니다. 그래서 한번 죄를 지은 사람들은 전과 기록 때문에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회개하면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전과기록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본문 19절에 보면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죄를 씻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면, 다시 말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 3:17-18절을 보면 범죄해서 에덴을 쫓겨 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에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죄를 범한 땀흘려 인생들이 농사를 짓지만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서 방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힘겹게 농사를 짓지만 그 결실이 시원치 않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땅이 아름다운 소산을 내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초청에 응하지 않는 경우
본문 20절에 보면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론하도록 기회를 주시며 초청하셨는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초청에 응하지 않은 행위 자체를 거절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반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지른 죄도 죄지만 이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고, 하나님을 배반한 더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칼로 심판을 받아 끝장이 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초청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기로에 놓이게 합니다. 그 초청을 응하여 복된 삶을 살 것인지? 그 초청을 거절하여 심판을 받을 것인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다른 핑계가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이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초청을 어떤 자세로 응하는가를 보십니다. 초청에 응해도 기쁨으로 응해야 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기쁨 마음으로 이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의무감으로 이 초청에 응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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