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로 개교 기념식을 거행하고, 개교 기념행사도 가졌던 것이다. 이 경동중 • 고
등학교 주최 개교 19주년기념 제1회 체육대회에 서 는 「미스 경동」을 선발하여 가장
행렬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편,이와 같이 경동중 • 고등학교 주최 개교 19주년
기념 제1회 체육대회가 개최된 이후에도 65년까지 개교 기념식의 거행이라든가 체
육대회가 계속 개최되었는지 여부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그러다가 67년 10월
2일에 이르러서는 체육대회의 개최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개교 27주년 기념식이 거
행되었던 것만은 확실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사실은 67년도의 동창회 기록이 「67년
10월 2일 개교 기념일에 교장선생님에게 감사상과 부상을 증정하였으며,전교생과
전교직원에게 기념품을 증정」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입증을 해 준다
결론적으로 말해,경동고등학교 동창회는 54년 4월 16일 창립총회를 가진 이래 65
년 9월 15일,고윤일 제6 대 회장이 사임할 때까지는 1인당 G N P 120불대 미만 수준
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사이의 동창회 활동으로 확
실한 것은 54년 4월 16일에 창립총회를 가졌다는 것과 각 대학지부 동창회의 결성과
기별 동창회의 결성 및 창립총회가 열렸던 54년 가을에 경동중 • 고등학교 주최 추계
체육대회에 대학지부팀이 참여(자료편의 「경동동문친선체육대회일람」)했다는 것 이
외에는 심지어 정기총회까지도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개최되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동창회 운영비의 양출방법,나아가서는 경동교 재학생들이 졸업
할 때마다 납금하는 동창회 입회비도 66후도 이전분은 납금제도 자체가 언제부터
채택되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다만,이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제
1〜6대 회장단(자료편의 「회장단 ᅳ람 」)이 재임하고 있을 때까지의 동창회 총무,이
를테면 고윤왈(제1회생), 금옥경(제6회생),이항우(제12회생) 총무 등이 무보수 봉사
롤 하면서 어려운 살림의 동창회를 지속케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동창생 아내가 모교 후배들에게 인술봉사
5 • 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이를테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의 고윤 일 (제1
회생)회장 및 장경환(제5회생), 조남선(제7회생), 송두빈(제8회생) 부회장 등이 제
5대 임원으로 선임될 무렵인 63년 3월, 조남선부회장의 부인 서복순여사는 이비인후
과 전문의 자격을 얻고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요셉이비인후과의원을 개업하게 되
었다.
이렇게 아내가 의원을 개업하게 되자,조남선부회장은 모교 후배들 중 가정형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