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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묵상글 ( 주님 성탄 대축일. -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주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6:0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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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25 04:38
-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너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구원이 무엇일까? 반대로 비 구원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제 생각에 비 구원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는 것 자체가 비 구원이고,
가장 쓰라린 비 구원이며 비 구원의 종합입니다.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외롭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마음이 어두우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배고프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불안하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무섭고 두려우며
엄마가 있는 아이는 활기차고 의기양양한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시들시들합니다.
여기서 외롭고 어둡고 배고픈 것은 비 구원의 현상들이고,
엄마가 안 계신 것은 비 구원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 구원을 얘기할 때 현상을 얘기하지만
원인인 엄마가 안 계신 그 비 구원을 더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가 굶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
엄마가 없는 것에 더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인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우리가 불안하다면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하다고 믿어야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한데
식량이 떨어져 가기에 불안하다고 생각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독히도 고독한 비 구원 상태에 내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안 계셔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고독하다고 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행복하게도 우리 신앙인에겐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분을 구원자로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이고 그것이 비 구원입니다.
이것을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죄에서 구원된 사람입니까?
이 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까?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저이고 여러분입니다.
이 구원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자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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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가난한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신 주님”
오늘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하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심으로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대로 하느님은 구원 계획은 실현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흙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방금 우리는 레오 대 교황의 성탄 강론도 노래로 들었습니다. 440년 로마에서의 성탄밤미사때 강론이니 무려 1585년전 강론입니다. 첫 대목을 들어봅시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없애 주시고 영원한 기쁨을 약속하신 생명의 탄생일에 슬퍼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당신이 성도라면 기뻐하십시오. 승리의 월계관에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죄인이라면 기뻐하십시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교도라면, 그래도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으로 불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더불어 주어진 참 좋은 주님 성탄 선물이 평화입니다. 방금 노래로 들은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꿈이, 하느님의 평화의 꿈이, 유토피아 하늘 나라의 꿈이 예수님 탄생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공존공생의 평화를 누립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며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내밀리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이, 생존경쟁의 야만적 세상이 아니라 공존공생, 평화의 꿈이 실현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으로 바야흐로 실현되기 시작한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이사야의 예수님 탄생의 선언도 가슴 설레는 기쁨이 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바로 이런 놀라운 구원자, 평화의 군왕이 참으로 비천한 작은 이로 겸손하게 오셨으니 하느님 역설의 신비가 정말 깊고 놀랍습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구중궁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머물 자리도 없어 여관집 우리 안 가난한 구유안에서 태어 난 예수님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매 성탄때 마다 낮고 어두운 소외된 외롭고 추운 곳에서, 또 가난한 이들의 순수한 마음의 구유 안에 태어나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많은 돈 써가며 예수님 탄생지 찾아 순례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 가난한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는 아기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 탄생을 체험했습니까? 바로 고독과 침묵의 들판에서 깨어 양떼를 돌보던 가난한 목자들이 예수님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이나 고위지도층 종교인들이 아닌 춥고 어두운 밤, 들판에서 깨어 제자리에서 책임에 충실하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탄생을 목자들이 맨처음 체험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난한 삶의 자리에 찾아 오시는 주님의 천사요,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목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 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다윗 고을과 동시에 빛으로, 희망으로, 생명으로, 기쁨으로, 평화로 가난한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늘의 무수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주님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충만히 누리도록 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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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왜 성탄인가? 다른 탄생과는 어째서 다른가?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난 존재’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존재’입니다. 곧 ‘온갖 피조물’과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두 존재 차원을 함께 갖고 계신 유일한 분이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시면서 건네 오시어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성탄’이라 부르며, 동시에 ‘강생’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탄생’일뿐만 아니라 ‘강생’이라는 ‘내려오심’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참한 ‘내려오심’입니다. 그것은 전능하고 무한함에서 무능하고 허약함으로 내려옴이요, 높고 존귀함에서 낮고 비천함으로 내려옴이요, 온전함에서 결핍과 의존함으로 내려옴이요, 자유와 다스림에서 예속과 지배로의 내려옴입니다. 바로 이 내려오심 안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에 사는 가난한 부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탄생된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드러내줍니다.
‘나자렛’은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나온 ‘네째르’에서 온 말로, ‘볼품없고 형편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보통의 가지는 줄기로부터 나오는데 비정상적으로 뿌리에서 삐져나온 볼품없는 가지라서 발로 밟아 꺾어버리거나 칼로 쳐서 제거해버리는 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의 경외함이다.”(이사 11,1-2)
그리고 흔히 메시아 장으로 일컬어지는 53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라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3,2)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곧 ‘강생’은 참으로 무참합니다. 여느 인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밀려나 마구간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로 세상에 옵니다.
그리고 이 ‘탄생’, 이 ‘오심’은 꼭 필요한 한 분이 없이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함께 있으니,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없이는 탄생할 수도,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무력한 아기로 오는 까닭입니다.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요 또 세상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곧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을 필요로 하는 존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존재!”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기’의 약한 존재로 탄생하셔야 했어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여야 사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무력하고 약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약하기에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고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 사는 존재”,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살아야 할 참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오니, 주님!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이처럼, ‘성탄’은 “우리가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야만 살 수 있는 존재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취약함을 거부하고 자력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높아지려고 했던 ‘옛 아담’이 범한 죄를, 이제 ‘새 아담’이 취약함을 받아들여 낮아지고 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밤 내내 야간철야 근무를 하고 있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 사실을 두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도 2,11)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이 복된 날, 축하에 축하를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구유의 아기 예수여!
높은 곳에서
지고한 사랑으로 찾아오시어
밀리고 밀려 떠밀려난 마구간 구유에
진리의 자리를 깔고 누운 빛, 아기 예수여!
비추신 당신의 신비, 강생의 도를 가르치소서.
무능해지고
무력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밀려날 줄을 알게 하소서.
제 몸을 누인 그 어디든 밥이 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먹힐 줄을 알게 하소서.
내어줄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짐이 내어주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주고,
생명이 되어주기를 배우게 하소서.
어둠을 뚫고 광야를 건너
죄를 부수고 장벽을 넘어
멀고 먼 길을 달려온 빛, 아기 예수여!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부서져 사라지는 그 아름다움을 지니게 하소서.
진리의 빛, 아기 예수여!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상대의 구원을 돌볼 줄을 알게 하시고
사랑으로 벌어지는 보살피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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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먼저 자막으로 나오고, 조연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조 출연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와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명, 미술, 의상, 카메라, 대본, 투자 기업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까지 소쩍새가 여름 내내 울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축에도 많은 분이 함께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성당 마당의 보도블록에 함께 했던 분들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분의 땀과 눈물이 모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에도 본당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드러나 보이지만, 사목회와 많은 봉사자가 함께했기에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 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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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세상 안에 있는 빛, 우리 안에 있는 빛!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24일 수요일- 쉰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성탄 대축일 전날 밤, 우리는 새로운 시작과 그리스도의 새 빛을 기뻐하며 맞이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신비로운 여정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유 앞에 무릎 꿇고 세상에 크나큰 희망을 비추시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길을 만든다(We Make the Road by Walking)
브라이언 맥라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살아 있음이 새롭게 밝아오는 새벽으로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기억하십니까? ‘태초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빛이 있어라…."
성탄 전야에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경축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그리스도의 빛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날은 동틀 무렵에 시작되고, 새로운 해는 빛이 길어지는 계절과 함께 열리며, 새로운 생명은 아기의 눈이 처음으로 빛에 물든 세상을 바라볼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인류의 새로운 시대는 하느님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비추어질 때 열렸습니다.
네 번째 복음서(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단순히 새로운 종교나 새로운 신학, 혹은 새로운 원리와 가르침만이 아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일어났지만, 요한이 강조하는 참된 핵심은 ‘생명’과 ‘활력’, 그리고 ‘살아 있음’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그 빛나는 생명의 충만함이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겨 두려는 불의한 꾀를 지니고 있기에, 진리의 빛을 두려워합니다. 빛은 그들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그들은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빛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하고 찬란한 생명이 그들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빛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동쪽 하늘에 새벽빛이 비치면 긴 밤이 거의 끝났음을 알리듯,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세상에 드리운 두려움과 적대, 폭력과 탐욕의 어두운 밤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날, 새로운 길,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참된 살아 있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빼앗음에서가 아니라 나눔에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갈등에서가 아니라 화해에서, 지배에서가 아니라 봉사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종교의 겉모습—규칙과 의식, 논쟁과 엄격한 규정, 성전과 전통—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과 같으며, 가장 좋은 포도주처럼 우리를 기쁘게 하여 삶을 실망에서 잔치로 바꿉니다. 이 새로운 생명의 빛과 사랑은 우리를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열어 주며,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가 세상을 순수한 경이로움으로 재발견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새로운 빛, 곧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자연과 가까워지면서 자연과 하나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의식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분명히 둘은 함께 성장한 것입니다. 자연은 하느님께서 취하시는 모습이며, 그 안에는 우리가 바위라 부르는 것, 식물, 동물, 그리고 사람인 우리 자신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하느님과 자연을 분리할 때 길을 잃고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David D.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79–8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ciej Wodzyński,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여름의 데이지 꽃과 겨울의 얼어붙음은 모두 하느님의 숨결로 존재하며, 각각은 신적 펼쳐짐의 빛나는 표현입니다. 곧, 우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육화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전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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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지만, 이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더 깊이 체험하고, 또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성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프란치스코는 성탄을 “축일 중의 축일”이라 부르며, 이날 하느님께서 주먹만 한 아기가 되시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리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그 어떤 축일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보냈습니다.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을 볼 때면, 그는 그리운 마음에 그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고, 아기 예수의 처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뭉클해져 실제 아기들에게 하듯이 더듬더듬 예쁜 말을 건네곤 했습니다. 아기 예수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의 입안에서 꿀처럼 달고 향기로운 이름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탄에 관한 한 일화는 주님의 성탄이 “모든 이를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어느 해 성탄일이 금요일과 겹쳐 단식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날을 단식일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이 날은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여야 하는 날입니다. 비록 먹일 수는 없으니, 그 겉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탄날에 프란치스코는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의 배를 든든히 채워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또 소나 당나귀 같은 가축들에게도 평소보다 더 넉넉하게 여물을 주라고 권고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탄을 맞이하며 품은 진실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황제께 한 번만이라도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청하겠소. ‘오늘 같은 날에는 모든 사람이 밀과 곡식을 길거리에 뿌리게 하셔서 새들도 성대한 이 날을 실컷 누리게 해 주십시오. 특히 나의 자매들인 종달새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는 바로 이 날, 가난한 동정녀께서 겪으셨을 궁핍함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 날 점심 식사 중, 한 형제가 복되신 동정녀의 가난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빈곤에 대해 이야기하자, 프란치스코는 곧 식탁에서 일어나 맨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나머지 빵을 먹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의 성탄 신비를 온 존재로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가난은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길이 맺는 영적 열매는 참으로 많지만, 그 참된 가치를 아는 이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토록 생생하게 성탄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금도 한눈팔지 않고, 온 열정을 다해, 애타는 갈망으로,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주님의 성탄을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나 연례행사로 지나치지 않고, 가난하신 아기 예수의 사랑을 삶으로 더 깊이 체험하고 이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또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해 태어나셨음을 기억하며,
성탄의 기쁨과 가난, 나눔과 자비의 정신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가도록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함께 청합시다.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고바의 성지와 수도원의 수방
‘통고의 마리아’ 수녀의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신분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장상의 뜻을 따라 특히 본인의 부탁으로 그녀 앞에서는 되도록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도록 극구 조심하였다.
드물기는 하나 허가를 받고 그녀를 방문하여 과거 사정을 묻거나 현재의 파티마 공경의 상황을 전해 주기는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알려 주기 전에 이미 파티마의 사정을 남김 없이 알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습니까?" 하고 어느 날 루치아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어난 그 후의 상황을 이야기한 안테로 드 훼게일이 놀라서 물었다. 이번에는 루치아 편에서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입안에서 우물쭈물,
“아닙니다. 오직 상상해 본 것입니다.” 하고 피하려 했다.
생각컨대 이 상상은 하늘에 있는 친구 히야친따와 프란치스코로부터 직접 받은 소식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 혹은 발현의 진상과 직접 관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루치아는 그 방문객에게 이어 말했다.
“매월, 발현의 13일은 파티마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합니다. 저는 밤 새우는 성무, 즉 야간 조배 시간을 성당에서 보낼 허가가 없기에 제 영혼은 파티마로 달려갑니다. 그리하여 현시된 성체 대전에 무릎 꿇은 수천의 신자들 속에 섞여 져도 부복합니다. 그곳에서 저는 모든 이를 위해 졸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고 난 다음, 회칙대로 육신도 쉬어야 하기에 침상에 들어갑니다. 새벽녘 미사 시간이 되면 눈을 감은 채 역시 파티마의 미사에 참여합니다. 수천 명의 신자들과 함께 노천에서 영성체를 합니다. 수녀들과 공동 로사리오 기도를 드릴 때 저는 다른 또 한 무리의 기도드리는 형제 자매들, 즉 고바 다 이리아를 덮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지요.
순례단 속에 있을 때도 저는 오직 혼자서 제일 처음 발현을 회상하면서 어린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와 함께 기도하는, 온전히 어린이 그대로의 자신을 봅니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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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종종 어둠 속에 있습니다. 두려움, 죄, 관계의 깨어짐, 희망 상실… 이 어둠이 우리 마음을 뒤덮을 때, 우리는 길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어둠은 그를 이기지 못하였다.”(요한 1,5)
주님은 단순히 멀리서 비춰주는 관람자의 빛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빛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던 우리에게 그 사랑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
어둠은 종종 빛을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내 안의 어둠을 감추려 하고 주님을 환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을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머물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요한복음은 희망의 약속을 줍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주님을 모실 때, 우리의 존재는 더 이상 실패나 두려움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참 빛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비추십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닫힌 눈을 열어 희망을 보게 하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빛을 다시 이웃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게 합시다. 어둠 속에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 기쁨과 용기, 위로의 빛을 건네고 그렇게 함께 살아갑시다.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 뭐였을까? 예전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장난감 트럭이었습니다.
그 트럭은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바퀴가 커져서 웬만한 장애물은 그냥 넘어버렸습니다.
어린 시절 제게 그 트럭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완벽한 트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트럭보다
어린 시절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완벽한 선물은 바로 가족이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올해 그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엇인가요?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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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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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육화하신 말씀도 새싹이 돋아나듯 소란스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요한 복음 1장은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고 자주 묵상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말씀(Logos)이 또한 빛이며 그 빛이 세상에 와서 참된 빛을 비추고 있다는 말씀과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크나큰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래 Logos(로고스)라는 말은 '말' 또는 '언어'를 뜻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성', '논리', '원리' 등 우주와 존재의 근본 원리를 뜻하는 개념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존재의 근본 원리가 이 세상에 빛으로 와서 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게 되었다는 것이 요한 복음이 강조하고자 하는 성탄, 혹은 하느님 육화 혹은 강생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전 공동번역에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라고 번역해도 되고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번역해도 되는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어둠이 빛에 어떤 대결 구도에서 볼 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그 빛이 지니고 있는 힘에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둠이 어둠 그 자체에 익숙해져 빛이 지닌 참된 행복과 엄청난 은총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빛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우리는 대개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성모님과 성 요셉은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를 향해 평화의 임금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한 발짝 한 발짝 가셨는데,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는 그분들에게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관도 이 꽉 차서 결국 동물들의 마굿간이 그들에에 문을 열어 주었지요.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끝까지 발길을 옮겼던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아무도 당신 아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영원한 복으로 들어서는 문을 활짝 열어주셨답니다!
다만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나'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폐쇄된 문을 열어 젖히고 과감하고 용기 있게 나서야 합니다. 그곳으로 들어서는 문 안쪽에는 너무도 강력한 빛(사랑)이 있는데 그 빛은 작렬하는 태양처럼 우리를 눈멀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랑과 빛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빛이랍니다.
주님 성탄의 의미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빛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그곳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이요 복입니까!
이 은총을 묵상하면서 오래 전의 고전적인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주다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럽게 죽음의 길을 가시다 넘어지신 예수님께 물을 드리려다 병사들에 의해 저지를 당하지요. 사실 예수님은 주다 벤허가 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벤허가 노예의 상태가 되어 끌려가던 순간 물 한 모금이 간절히 필요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그에게 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힘이 로마 병사의 물리적인 힘을 작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조용히 말입니다. 아직도 그 병사가 그에게 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저지하려다 자기를 빤히 바라보시는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렇듯이 성탄에는 이미 영원성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루틴을 벗어나게 하고, 분주했던 모든 준비가 끝나 어느 순간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됩니다. 바로 그때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일상과는 다른 무엇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지난 성탄 이후 매일 저녁처럼, 또다시 텔레비전을 켭니다.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탄이 지루하다, 슬프다, 혹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다른 날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공간과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짝이는 불빛들, 끊임없는 텔레비전,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들은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 오히려 움직일 여백을 없애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인공의 빛 속, 하나의 동굴에 갇혀 버립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친다.” 그러나 그 빛은 인공의 빛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꺼야 합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도록, 침묵과 여백을 허락해야 합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새로운 업적, 가장 새롭고, 가장 어린, 가장 최근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는 광고의 흥분된 목소리로 선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사건입니다. 그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지만, 갓난아기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누워 계십니다. 오직 침묵 안에서만 이 침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날 때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듯, 육화하신 말씀도 소란스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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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마음은 살짝 쉬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1) 직원을 불러 항의해서 나온 음식을 되돌려 보내고,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받는다.
2) 그냥 먹는다.
3) 항의 후, 기분 나쁘다면서 나가 버린다.
뭐, 답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2번을 선택합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실제로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도 괜찮기 때문입니다(이 점은 부모님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편식하지 않고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으니까요). 솔직히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런 부분에 제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까다롭고 완벽한 척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화합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기에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닌, 그냥 불편함만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그리고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불편한 자리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고,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취해서 우리 역사 한복판으로 오신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불편한 길이었고, 또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탄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랑을 치료한다. 받는 사람, 주는 사람 할 것 없이(K.A.매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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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성탄 - 말씀이 살이 되어
(성탄절 /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 탄생의 완성)
말씀이 살이 되어
#성탄 #강생 #육화 #생명 #빛 #받아들임
요한복음 1,1-18은 성탄의 신비를 가장 깊은 언어로 전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이 말씀은 관념이 아니었다. 철학이 아니었다. 이 말씀은 살이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체를 입으셨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몸을 받으셨다.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다. 말씀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셨다.
수정란으로 시작하여,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되어 손가락이 생기고, 심장이 뛰고, 눈을 뜨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신 분.
하느님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치셨다. 건너뛰지 않으셨다. 생명의 여정 전체를 통과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한다. 생명의 모든 단계가 거룩하다고. 임신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태중에 계신 예수님도 이미 예수님이셨다. 보이지 않을 때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을 때도 그분은 이미 구세주셨다.
만약 우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생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태중의 예수님도 부정하는 셈이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그 생명은 처음부터 빛이었다고.
모든 생명이 그렇다. 잉태된 순간부터, 그 생명은 빛을 품고 있다. 아직 세상이 알아보지 못해도, 아직 환영받지 못해도, 그 안에는 이미 빛이 있다.
세상은 때로 생명을 선택의 대상으로 만든다. 원하면 받아들이고, 원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는 것으로.
하지만 복음은 다르게 말한다.
"그분께서 당신의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인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도 거부당하셨다. 세상에 당신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문을 닫았고, 마구간만이 그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거부가 그분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했다. 환영받지 못함이 그분의 존엄을 흔들지 못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이셨고, 여전히 빛이셨고, 여전히 생명이셨다.
만삭에 이른 태아를 생각한다.
눈을 뜨고, 소리를 듣고,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생명. 며칠만 기다리면 세상으로 나올 존재.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묻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산도를 통과하는 그 짧은 순간이 생명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안과 밖, 그 경계가 존엄의 기준인가.
복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전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오셨다. 임신, 탄생, 성장, 그 모든 단계를 거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란 어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아기로 오셨다.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그리고 그 연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율법은 선을 긋는다. 이것은 허락되고, 저것은 금지된다. 이 시기까지는 가능하고, 저 시기부터는 불가하다.
하지만 은총은 다르다. 은총은 경계를 넘어 흘러넘친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어진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랬다.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오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선물로 주어졌다.
모든 생명이 그렇다. 계획했든, 계획하지 않았든, 환영 받든, 거부당하든, 생명은 언제나 은총으로 온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성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태어남은 완성이 아니라 여정의 출발이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난 후에도 성장하셨다. 젖을 먹고,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익히셨다. 30년을 준비하신 끝에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생명은 그렇게 긴 여정이다. 태어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헌신이다.
아기를 낳는 것만이 아니라 키우고, 사랑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을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태어난 생명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동행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홀로 두려움 속에 남겨지지 않도록,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경제적 압박에 짓눌리지 않도록,
장애를 가진 아이도 환영받고 사랑받는 사회가 되도록.
생명 존중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구체적인 연대와 지지다.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이 찾아왔다.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가져왔다. 시메온과 한나가 기도로 받아들였다.
생명은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을 때 온전히 빛을 발한다.
"한 처음부터 계신 분, 우리가 들은 분, 우리 눈으로 본 분,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분"
요한은 말한다. 말씀이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느님이 육체가 되셨다. 영이 살이 되셨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경시할 수 없다. 몸을 도구로 취급할 수 없다.
모든 살은 거룩하다. 모든 육체는 하느님의 거처가 될 수 있다.
태중의 작은 몸도, 만삭의 큰 몸도, 갓 태어난 연약한 몸도,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다.
성탄은 기쁨의 날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찰의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누구를 환영하고, 누구를 거부하는가.
마구간밖에 자리가 없었던 그날처럼, 오늘도 수많은 생명이 문밖에 서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이유로,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성별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장이 오늘도 반복되지 않기를, 우리가 문을 여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분에게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성탄의 선물은 이것이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주어진 은총.
모든 생명도 그렇다. 자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편해도, 생명을 환영하는 것.
그것이 성탄을 사는 방식이다.
대림의 기다림은 끝났다. 빛이 왔다. 말씀이 살이 되었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 빛을 반사하는 것,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생명이 생명으로 존중받는 세상, 연약함이 거부가 아니라 환대의 이유가 되는 세상, 모든 아이가 환영받는 세상.
그것이 성탄의 약속이고, 우리가 향해 가야 할 평화의 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릎 꿇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생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연약함을 보호하겠다고. 함께 걸어가겠다고.
성탄의 기쁨이 우리의 헌신으로 이어지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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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 대림-성탄 연재를 마칩니다.
생명을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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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이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 가운데 사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그렇게 말씀은 모든 것에 생명을 주었는데
그 말씀은 이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알려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되신 말씀으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과 가까이, 더 나아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빛을 주시는 그분은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오늘도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고
빛을 누리며 기쁨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것은
세상 창조 때만의 일이 아니며
우리 각자가 만들어져서 태어날 때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우리가 결코 살아갈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것의 결정적인 모습으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렇게 성탄은 생명을 주기 위한
기쁨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다가오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잠을 자고 있는 듯한 겨울
생명의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추운 날씨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이 보이지 않고
생명이 꺼져가는 것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꿈꿀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다가오심은
또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성탄이 주는 기쁨과 희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맞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빛이 필요한 순간마다
빛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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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1-5.9-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성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천년 전에만 오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꾸준히 계속해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작고 약한 이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이들, 슬픔과 절망 속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오십니다. 외로워하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시기 위해, 굶주린 이들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시기 위해,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확실한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해, 걱정과 두려움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이자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른 채 세상이 주는 즐거움만 쫓으면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작고 약한 이들을 찾아가기보다 밝은 조명들과 화려하게 장식된 볼거리들을 찾아다니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려고만 들면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겉모습을 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뜻하신 바를 이루실 힘과 권능을 지니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약함과 부족함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당신 안에 품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귀한 ‘성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내 이웃과 형제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며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회에서 소외된 ‘작고 약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 ‘최선’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웃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죄인’과 다르다며 구분하고 분리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짓는 이들을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고 심판하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며 돕기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따지며 단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준수보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시는 그분이 ‘메시아’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만삭의 임신부를 위해 자기들 잘 곳을 기꺼이 내어드린 목동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애써 마련한 귀한 예물들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드러낸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참된 임금으로 인정하고 맞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게 성탄이 그저 지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파티하는 날이 아니라, 참으로 기쁘고 의미있는 날이 되려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고 내 안에 맞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 가운데에 사십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꽁꽁 숨어 계십니다. 그렇기에 “숨은 주님 찾기”를 잘 하는 사람이, 내 이웃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이웃과 주님 모두를 내 마음 안에, 내 삶 속에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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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기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우리가 누렸던 옛날과 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이었습니다. 예전엔 지나치게 화려한 조명이 하느님의 겸손함이라는 신비를 가린 듯싶어서 조금은 쓸쓸한 느낌도 들었지만, 코로나 시기 대림 시기는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와 사적 모임 등이 제한되기도 했었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것을 잃고 난 다음 비로소 우리는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잖아요. 어떤 경우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김종삼 시인이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에서 표현한 ‘내용 없는 크리스마스’가 아닌 ‘거룩하고 의미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말씀은 하느님이시라는 것, 모든 것이 말씀에서 생겨났다는 것, 말씀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1,1-18참조)입니다. 저는 영세 후 2년 만에 수도회에 입회한 관계로 본당 생활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맨 처음 수도원을 떠나 제주교구 표선 본당신부로 파견되었을 때(1997년), 제가 붙들고 떠난 말씀이 바로 오늘 저희가 들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는 말씀이었으며, 이후 베트남으로 선교를 떠날 때도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떠나갔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두 번째 요양병원의 원목 신부로 파견될 때도 이 말씀을 붙잡고 달려갔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생활화된 신앙을 의미하며, 육화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빈말이 아니라 삶으로 육화되고 실현되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본당 사목 생활, 베트남에서 선교활동 그리고 노인병원에서 원목 활동은 어쩌면 제 믿음을 실천하는 장소이자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장소에서, 제가 만나 세상은 한마디로 ‘가난’이라는 관점에서 유사합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가난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세상은 물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믿게 할 어떤 도리, 방도가 달리 없으셨기에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사랑이란 간곡하고 절실한 욕구들이 많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만으로 사랑의 그 욕구들을, 그 바람들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부모와 그 자녀들과의 관계처럼,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기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대방이 자신이나 자신의 사랑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며, 사랑해 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쳐 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과 같아져야 하고 그 사람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함께 나눌 결심과 실행 의지를 갖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고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제가 아니 우리 모두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의 노랫말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자식이나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도록 실행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으면, 이때 사랑한다는 말은 공허한 외침이나 빈말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게 더 낫겠지요. 사실 저 역시 사제로 살아오면서 사랑이란 말을 자주 빈번하게 사용하며 살고 있지만, 세상에 너무 흔한 말이 바로 사랑한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천이 없는 말은 죽은 말이며, 육화되지 않는 말은 요란한 빈 소리이며 곧 생명이 없는 말입니다. 빛이 없고 영혼이 없는 말입니다. 사랑한다, 고 말하면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기에 저 역시도 사랑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진심으로 사랑에 몰입하십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사람을 사랑하시려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가난은 하느님의 편에서 보면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가난과 인간의 가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가난은 자유롭게 선택하신 가난이지만, 인간의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조건, 즉 인간의 실존이자 현실 조건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난에서 스스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물질적 가난만을 생각합니다. 먹을 것이 없거나 집이 없는 사람도 분명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가난의 전부가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그보다 심한 가난, 그보다 두려운 결핍, 그보다 더 뼈아픈 가난이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쓴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는 부유했으며, 의식주는 풍요롭고 풍부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프리카까지 가서 동물 사냥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는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사냥하던 총으로 자기 입에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처음으로 자기에게 닥친, 자신을 엄습해 온 가난, 즉 도저히 감당할 것 같지 않은 늙음이라는 가난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늙음이란 가난, 병듦이란 가난, 사랑하지 못한 가난, 용서하지 못한 가난, 낮아지지 못한 가난,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의 가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마음의 가난 등. 이렇듯 세상에는 여러 다른 가난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미워할 때 사랑이 부족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평화가 부족합니다. 거짓을 살 때 참이 부족합니다. 아플 때 건강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인간 가난의 절정입니다. 생명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가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가난을 함께 하기 위해서 바로 이 가난이라는 거친 샛길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셨고 다시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의 가난 곁에 와 계십니다. 아무런 방어도, 아무런 꾸밈도,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와 계십니다. 인간의 가난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서 가난한 존재가 되셨고, 그 가난의 한가운데 사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짓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려고”(루4,19참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육화의 삶은 바로 이 빛에서, 이 진리에서 그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작고 연약한 생명, 갓난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무시받는 이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 안에 은총과 진리를 봅니다. 그분의 은총과 진리의 삶은 사람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가진 자들, 교만한 자들, 높은 자들의 어둠은 그분이 은총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시인 윌콕스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그 기준이 놀랍습니다. 아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편 가르는 것을 거부하는 듯합니다. 누가 누구더러 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서로 필요할 때 기대고 받쳐 줄 수밖에요.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오늘날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부자와 빈자는 아니에요. 한 사람의 재산을 평가하려면 그의 양심과 건강 상태를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겸손한 사람과 거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짧은 인생에서 잘난 척하며 사는 이는 사람으로 칠 수 없잖아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도 아니지요. 유수와 같은 세월 누구나 웃을 때도, 눈물 흘릴 때도 있으니까요. 아니죠. 내가 말하는 이 세상 사람의 두 부류는 짐 들어주는 자와 짐 지어주는 자랍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남에게 당신 몫의 짐까지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인가요? 』 김종삼 시인이 노래한 ‘성탄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가난을 몸소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의 무거운 짊을 도와주시려 태어나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진리의 말씀을, 사랑의 은총을 실천할 것을 결심하며 주님의 성탄을 축하합시다. 은총과 진리로 다시 태어남을 기뻐하면서 오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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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49
12월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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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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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한국외방선교회 윤대호 다니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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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한 형제가 산타복을 입고 나와 아이들을 위해 캐롤송도 불러주고, 작은 성탄 선물도 나눠주고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 가운데에는 한 살도 채 안 된 갓난아기도 있었는데, 따뜻하신 어머니 원장님께서 집중 마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포대기 위에 누워있었는데, 우리 형제의 재롱 잔치를 보고서는, 누워서 깔깔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크신 자기 낮춤,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는데, 백마를 탄 왕의 모습이라든지, 전지전능한 해결사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머리도 돌릴 힘도 없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힘이나 권력, 총이나 칼이 아니라 작음과 겸손,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될 것임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명명백백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탄 미사를 드리러 온 아이들을 보면서 제 어린 시절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서울 근교 산 중턱 판자촌에 살았었는데, 함박눈을 맞으며, 어머니 손을 잡고 십리 길을 조심조심 걸어 성탄 밤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성당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 군용 천막이었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너무나도 추워 코끝까지 다 시렸지만, 선교사 신부님의 미소와 넓은 품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끝나고 나면 선진국에서 보내준 구호품 나눔이 이어졌습니다.
꼬마입장에서는 꽤 벅찬 성탄 미사를 다녀오는 조건으로, 직장 일이 끝난 아버지는 양손 가득 성탄 선물로, 당시로서는 어린이들에게 최상의 선물이었던, 큼지막한 ‘오리온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오셨습니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밤새 이 과자 저 과자 맛보면서 그렇게 성탄절을 만끽했습니다.
은총과 축복의 성탄 전야에 성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성탄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
완성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미완성인 우리들, 완벽을 추구하지만 늘 결핍된 존재인 우리들, 충족함과 충만함을 갈구하지만 늘 뭔가 허전하고 허탈한 우리들의 그 부족함과 한계를 가득 채워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값지고 정성스런 선물이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세상 가장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육화강생에 담긴 그 큰 은혜와 감동, 우리를 향한 큰 사랑과 깊은 의미를 침묵 속에 천천히 되새기는 이번 성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은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 내면에 자비와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주님 사랑의 기운이 있다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정화될 때 성탄의 참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매일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환하고 해맑게 웃으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겸손하신 하느님을 따라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거기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신 아기 예수님을 따라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겸손의 향기가 풍겨날 때, 우리의 얼굴은 성탄의 은총으로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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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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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식이 그리스도가 되게>
찬미 예수님!
거룩하고 복된 성탄 밤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빕니다. 그러나 오늘 모두가 다 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밤, 저는 한 가지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먹고 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먹는 것엔 다 그 본래의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 깊은 산속 바위 밑에 홀로 사는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주식은 사람이 먹는 밥이 아니었습니다. 소에게 주는 사료였습니다. 그는 매끼 사료를 씹어 먹으며 무려 50년을 넘게 살아왔습니다. 제작진이 경악하며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습니다. "밥 해 먹기 귀찮아서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가정 폭력의 공포가 그를 산속으로 도망치게 했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인간으로서의 존엄인 따뜻한 밥마저 포기하고 짐승의 사료로 연명했던 것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소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산에서 내려오게 한 것은 경찰이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갓 찐 따뜻한 고구마와 쌀밥을 들고 찾아간 이웃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이웃의 간곡한 권유에 10년 만에 사료 대신 따뜻한 밥을 입에 넣었습니다. 순간, 그의 얼어붙은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사료의 텁텁함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와 달콤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맛있네... 사료보다 낫네." 그 밥 한 숟가락이 그를 짐승의 삶에서 사람의 삶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바로 먹는 것을 바꿈으로써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오십니까? 밥으로 오십니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구유가 무엇입니까? 여물통, 즉 소나 말이 밥을 먹는 밥그릇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짐승의 밥그릇에 당신 몸을 담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세상의 욕망, 돈, 쾌락이라는 '사료'를 먹으며 영혼이 짐승처럼 변해가지 않았느냐. 이제 그 썩어질 사료를 치워라. 그리고 이 구유에 담긴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밥을 먹어라. 나를 먹고 제발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우리는 엄마를 먼저 만날까요, 엄마가 주는 양식을 먼저 만날까요? 갓난아기가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믿어서 젖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배고프니까 본능적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그렇게 엄마 젖을 먹다 보면 엄마의 냄새를 알게 되고, 눈을 맞추게 되고, 결국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성체를 먹다 보면, 내 안에 들어오신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목자들은 바로 하늘의 것을 먹고 하늘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곧 ‘착한 뜻’을 지닌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합니다. 사랑이라는 좋은 양식을 먹고 자라야 내면에도 착한 뜻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좋은 것을 줄 착한 뜻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밥이나 고구마를 먹는데, 다른 사람은 여전히 사료를 먹고 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먹는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먹느냐는 내가 무엇을 나누고 싶으냐와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성탄절 밤, 독일 아르덴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독일군을 피해 숨어든 미군 부상병 셋을 주인 아주머니가 숨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길 잃은 독일군 넷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총구가 서로를 겨누고, 방 안에는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증오'와 '살기'라는 사료를 먹으며 서로를 죽이는 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성탄절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총을 밖에 두고 들어오세요. 따뜻한 수프가 준비됐습니다." 아주머니의 그 말에, 기적처럼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끓여준 수프와 빵을 나누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수프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평화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에 ‘평화’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밥을 나누자 그들은 적군이 아니라 배고프고 추운 '형제'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로 선택한 것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독일 군의관은 미군 부상병을 치료해 주었고, 미군은 아껴둔 초콜릿을 꺼내 독일군과 나누었습니다. 그날 밤, 그 오두막은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거룩한 베들레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빵이 아니라 '평화'였고, 그 자리에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사료를 먹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준은 간단합니다. '오늘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은?' 물어보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에게 매일 1시간의 성체조배를 의무화했습니다. 일거리가 쏟아지는 빈민가에서, 봉사자들은 "수녀님, 환자들이 죽어갑니다. 기도할 시간을 줄이고 일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마더 데레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일이 많을수록 기도는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빈 깡통으로는 아무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의 양식은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는, 성체 조배를 하지 않고는 내 영혼이 숨을 쉴 수 없다." 이런 절박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짐승의 밥그릇에 오신 주님을 찬미하며,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밥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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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먼저 자막으로 나오고, 조연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조 출연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와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명, 미술, 의상, 카메라, 대본, 투자 기업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까지 소쩍새가 여름 내내 울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축에도 많은 분이 함께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성당 마당의 보도블록에 함께 했던 분들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분의 땀과 눈물이 모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에도 본당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드러나 보이지만, 사목회와 많은 봉사자가 함께했기에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 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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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이 밤, 한 빛이 밝혀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여러 세기 동안 기다려 온 분께서 마침내 오셨습니다.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을 보여 주는 표징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입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이사 9,5)
오늘 읽는 루카 복음서의 이 대목은 큼과 작음, 강함과 약함을 대조하여 보여 줍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에서 온 땅에 호적 등록을 실시한 황제의 강함과,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와 그를 둘러싼 목자들의 작음과 약함. 그런데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작음 안에, 가난함 안에, 약함 안에. 이 작음과 약함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맞이하려면 우리의 작음, 가난함, 약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밤, 구유 앞에 머물며 조명과 장식을 넘어 아기를 바라봅시다. 아기이신 하느님!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땅 위에 태어나시어 머무르실 집이 없습니다. 다정한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어루만짐을 받으십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못 하는 아기로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작아지시는데 우리는 커지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시는데 우리는 기를 쓰고 높아지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 성탄에 작음의 은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주님, 작음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작음이 참된 위대함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십시오.”(2021년 성탄 밤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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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복음: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어젯밤 미사의 전례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 신비를 맞이하는 흥분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오늘 낮 미사는 그 신비를 한층 더 깊이 묵상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의 심연을 바라보게 된다.
1.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14)는 선언은 그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표면적인 사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원문 eskēnōsen은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던 ‘계약의 장막’(탈출 25,8; 민수 35,34)을 떠올리게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는 분, 우리 가운데 거처를 이루신 분이 되셨다. 그분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기쁨과 고통, 시간과 공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시다.
2. 창조주이신 말씀이 피조물 안에 머무르신다.
요한복음은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은 하느님이셨다”(1,1)라고 선포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1,3) 그러므로 강생의 신비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스스로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오시고, 무한하신 분이 유한함을 입으신 사건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4) 이것이 오늘 본기도가 말하는 놀라운 진리이다. 곧,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기에 인간은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영광의 역설: 낮아지심 속의 높아지심
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 그러나 이 ‘영광’은 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심의 영광, 곧 십자가의 영광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 역설을 중심으로 흐른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질 때,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단순한 겸손의 모범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권위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연약함을 통해 당신의 전능을 보여주신다.
4. 그분을 맞아들이는 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다.
요한은 덧붙인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12) 이 자녀 됨은 혈통이나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1,13).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외적인 사건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루카 복음이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처럼, “성령께서 너에게 내리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감쌀 것이다.”(루카 1,35) 그 성령의 능력이 오늘 우리 안에도 역사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5.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단순함 속에
히브리서(1,1-3)는 이 말씀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만물을 상속받으신 분이며, 만물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분은 이 영광을 버리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낮아지심을 통해 당신의 가장 참된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탄은 바로 이 역설의 축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기가 되시고, 무한하신 분이 우리 품에 안기신다.
6. 성탄의 신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성탄의 신비는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 장막을 치고 머무르신다. 가난하고, 연약하며, 사랑을 기다리는 이웃 안에서, 또 우리의 단순한 기도와 선의의 행위 속에서, 그분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머무르신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며, 또한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축제이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 속에,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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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기 예수님께서 밥그릇에 누우시네요>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아기 예수님께서 밥그릇에 누우시네요>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밥을 먹어야 살 텐데
밥이 있어야 먹지요
밥을 찾는 이 많아도
밥이 되려는 이 없어
텅 빈 밥그릇에
오늘밤
아기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누우시네요
서른 세 해
믿음으로 뜸들어
믿음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서른 세 해
희망으로 뜸들어
희망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서른 세 해
사랑으로 뜸들어
사랑밥으로 먹히실
아기 예수님께서
애써 밥을 찾기보다
기꺼이 밥이 되려는
당신 닮은 사람들
자그마한 품에
누우시네요
믿는 벗님들께
희망하는 벗님들께
사랑하는 벗님들께
너무 기쁜 오늘이기를
너무 벅찬 오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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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려오심’의 최종 목적지는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9-14)
1)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인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거부와 배척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도 여러분은 왜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가?”라고 꾸짖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만 보지만, 믿는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탄생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일도 그렇고, 헤로데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도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의 성탄은 ‘십자가의 길’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탄절을 경축하고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도 묵상하면서, 차분하고 경건하게 성탄절을 지내야 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일의 최종 목적지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니,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처럼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이 말씀은, 열두 사도에게 보상을 약속하신 말씀인데, 열두 사도만 그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받게 됩니다.(묵시 21,7)
3) 예수님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내려오심’만 생각하고 ‘다시 올라가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 우리의 ‘올라감’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일은 될 수 있어도, 신앙하는 일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인은 ‘땅에 있는 것’은 버리고 ‘위에 있는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한처음’에 시작해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지극히 짧은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구유’도 아주 잠깐 머물렀던 임시 거처였을 뿐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탄생 뒤에, 외양간을 떠날 때 ‘구유’를 그곳에 그대로 두고 떠났습니다. 만일에 “메시아께서 누워 계셨던 구유이니까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다.”라고 생각해서, 구유를 잘 챙겨서 가지고 갔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이라면 ‘허무한 것’은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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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을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길 빕니다. 아울러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드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성탄의 삶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성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하였을까요?
결국,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차려져도 매일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서 성탄 축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솜이라는 학생은 선천적으로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솜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어떤 역할을 줄까?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동작도 대사도 아주 적은 배역을 찾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관 주인의 역할이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이 여관 문을 두드리면 “방이 없어요!” 하고 한마디 말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솜이도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상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애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라고 하면 “방이 없어요!”라고 같은 말을 3번 반복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은 다급히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나왔습니다. 다솜이는 연습한 대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 않고 여관 주인에게 매달렸습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을 줄 수 없나요?”
“방이 없어요!”
다솜이는 또박또박 맡은 배역을 잘해 나갔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대 성공입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사정합니다.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방을 좀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다솜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다솜이의 그 순수한 마음은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원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구세주이심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집을 내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를 문전박대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실 방은 없었습니다.
그 방은 오늘도 여전히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마구간을 선택하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안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오늘도 방을 내어드리지 못한 어두움, 우리의 이 어둠을 벗겨 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볼 수 있는 눈,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곧 그분이 태어나실 안락한 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길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줍시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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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거룩하게 선포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는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장 56절에서 중단된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려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7절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사용된 ‘첫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동정 사실을 입증하면서(1,34 참조), 태어난 아들이 천사의 예고를 완성하였다는 사실(1,31 참조)을 보증합니다. 더불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율법의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것으로, 첫째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지위를 가짐을 의미합니다.(탈출 13,2; 민수 3,12-13; 18,15-16; 신명 21,15-17 참조)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화려한 궁전도 부자의 저택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첫아들’이 태어난 곳은 마굿간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비천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비천한 신분을 대표하는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되었습니다. 하느님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도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되어 스스로 낮출 때, 구유에 누워 계시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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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오늘 아기 예수 탄생하셨으니 …… 성탄~ 성탄~ 성탄~ 기뻐할지어다.”(가톨릭 성가 103번, ‘오늘 아기 예수’) 오늘 밤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지만, 어둠 속을 걷는 백성과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아기의 탄생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대비시킵니다 ‘존엄하다’는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제국의 황제로서 ‘주님’과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세주’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황제의 명령으로 아기의 부모와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지금 태어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힘없이 누워 있는 아기가 그 황제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힘과 대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구세주이신 분은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보내진 갓 태어난 이 아기입니다. 이 아기가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당신을 온전히 다 내어 주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비추어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어둠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이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티토 2,11)입니다.
오늘 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예수님 안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 마음을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큰 사랑의 선물 앞에서 감사드리고, 우리도 이제 선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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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의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입니다. 장엄한 별, 천사들의 천상 찬미가, 가난하고 겸손한 목자 그리고 구유 안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선포하는 지난밤이나 오늘 새벽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말씀의 육화’, 곧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은 시적 구절들과 담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적 구절이 한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노래한다면 담화 부분은 사람이 되시어 오신 말씀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을 묵상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화 같은 예수님의 탄생을 좀 더 깊게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그저 환상으로만 남지 않기를 선포하면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고 초대합니다.
성숙한 눈으로 강생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연약한 사람의 살을 취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은총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에 고집까지 더해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고집스럽고 더 확고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 속에 살아갑니다. 게다가 성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보다는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만 바빠 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바라보고 깨달을 “은총에 은총”이 더욱 간절한 때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노래한 요한 복음사가의 시를 다시 한번 읊어 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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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마음은 살짝 쉬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1) 직원을 불러 항의해서 나온 음식을 되돌려 보내고,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받는다.
2) 그냥 먹는다.
3) 항의 후, 기분 나쁘다면서 나가 버린다.
뭐, 답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2번을 선택합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실제로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도 괜찮기 때문입니다(이 점은 부모님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편식하지 않고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으니까요). 솔직히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런 부분에 제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까다롭고 완벽한 척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화합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기에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닌, 그냥 불편함만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그리고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불편한 자리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고,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취해서 우리 역사 한복판으로 오신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불편한 길이었고, 또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탄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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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희망이신 빛이 왔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왔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심으로 빛이 왔습니다. 가장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비추어 밝게 만드는 빛이 왔습니다.
오늘 오신 그리스도의 빛은 어두운 우리 생각을 비추기 위해 오셨습니다. 날카로운 이성의 빛이 되어 올바른 식별력의 영이 되어 왔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억울한 사람이 없는 공정한 세상을 위한 지혜의 빛이 왔습니다. 불공정함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 왔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있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왔습니다. 억압된 분노로 우울하고 냉혹하고 쓰라린 영혼의 방에 빛을 비추러 왔습니다. 너무 아파 빗장을 걸어둔 마음의 문을 열어 아픈 우리를 모르고 건드린 그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빛이 내려왔습니다.
버겁고 힘든 관계들 속에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자연 생태적 관계가 올바르게 되도록 비추십니다. 그 빛은 모든 전쟁, 약육강식 가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당리당략의 가치나 부익부빈익빈,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 및 인종적 차별, 그리고 자연환경 파괴라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또한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는 우리에게 빛이 왔습니다. 쉴 줄 모르고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몸을 혹사시키거나, 외적인 육체적인 미(美)에 욕심을 부리다가 빼앗긴 내면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하는 빛이 왔습니다.
세상은 아직 그 빛을 몰라보고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만, 성탄은 우리가 그 빛을 알아보고 맞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새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기쁨의 잔칫날입니다. 주님의 빛을 마음에 받아들여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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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축하합니다.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왜 성탄인가? 다른 탄생과는 어째서 다른가?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난 존재’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존재’입니다. 곧 ‘온갖 피조물’과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두 존재 차원을 함께 갖고 계신 유일한 분이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시면서 건네 오시어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성탄’이라 부르며, 동시에 ‘강생’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탄생’일뿐만 아니라 ‘강생’이라는 ‘내려오심’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참한 ‘내려오심’입니다. 그것은 전능하고 무한함에서 무능하고 허약함으로 내려옴이요, 높고 존귀함에서 낮고 비천함으로 내려옴이요, 온전함에서 결핍과 의존함으로 내려옴이요, 자유와 다스림에서 예속과 지배로의 내려옴입니다. 바로 이 내려오심 안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에 사는 가난한 부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탄생된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드러내줍니다. ‘나자렛’은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나온 ‘네째르’에서 온 말로, ‘볼품없고 형편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보통의 가지는 줄기로부터 나오는데 비정상적으로 뿌리에서 삐져나온 볼품없는 가지라서 발로 밟아 꺾어버리거나 칼로 쳐서 제거해버리는 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의 경외함이다.”(이사 11,1-2)
그리고 흔히 메시아 장으로 일컬어지는 53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라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3,2)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곧 ‘강생’은 참으로 무참합니다. 여느 인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밀려나 마구간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로 세상에 옵니다. 그리고 이 ‘탄생’, 이 ‘오심’은 꼭 필요한 한 분이 없이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함께 있으니,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없이는 탄생할 수도,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무력한 아기로 오는 까닭입니다.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요 또 세상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곧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을 필요로 하는 존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존재!”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기’의 약한 존재로 탄생하셔야 했어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여야 사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무력하고 약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약하기에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고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 사는 존재”,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살아야 할 참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오니, 주님!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이처럼, ‘성탄’은 “우리가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야만 살 수 있는 존재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취약함을 거부하고 자력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높아지려고 했던 ‘옛 아담’이 범한 죄를, 이제 ‘새 아담’이 취약함을 받아들여 낮아지고 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밤 내내 야간철야 근무를 하고 있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 사실을 두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도 2,11)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이 복된 날, 축하에 축하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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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구유의 아기 예수여!
높은 곳에서
지고한 사랑으로 찾아오시어
밀리고 밀려 떠밀려난 마구간 구유에
진리의 자리를 깔고 누운 빛, 아기 예수여!
비추신 당신의 신비, 강생의 도를 가르치소서.
무능해지고
무력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밀려날 줄을 알게 하소서.
제 몸을 누인 그 어디든 밥이 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먹힐 줄을 알게 하소서.
내어줄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짐이 내어주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주고,
생명이 되어주기를 배우게 하소서.
어둠을 뚫고 광야를 건너
죄를 부수고 장벽을 넘어
멀고 먼 길을 달려온 빛, 아기 예수여!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부서져 사라지는 그 아름다움을 지니게 하소서.
진리의 빛, 아기 예수여!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상대의 구원을 돌볼 줄을 알게 하시고
사랑으로 벌어지는 보살피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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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가난한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신 주님”
오늘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하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심으로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대로 하느님은 구원 계획은 실현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흙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방금 우리는 레오 대 교황의 성탄 강론도 노래로 들었습니다. 440년 로마에서의 성탄밤미사때 강론이니 무려 1585년전 강론입니다. 첫 대목을 들어봅시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우리 모두 기뻐합시다.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없애 주시고 영원한 기쁨을 약속하신 생명의 탄생일에 슬퍼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당신이 성도라면 기뻐하십시오. 승리의 월계관에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죄인이라면 기뻐하십시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교도라면, 그래도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으로 불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더불어 주어진 참 좋은 주님 성탄 선물이 평화입니다. 방금 노래로 들은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꿈이, 하느님의 평화의 꿈이, 유토피아 하늘 나라의 꿈이 예수님 탄생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공존공생의 평화를 누립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며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내밀리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이, 생존경쟁의 야만적 세상이 아니라 공존공생, 평화의 꿈이 실현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으로 바야흐로 실현되기 시작한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이사야의 예수님 탄생의 선언도 가슴 설레는 기쁨이 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바로 이런 놀라운 구원자, 평화의 군왕이 참으로 비천한 작은 이로 겸손하게 오셨으니 하느님 역설의 신비가 정말 깊고 놀랍습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구중궁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머물 자리도 없어 여관집 우리 안 가난한 구유안에서 태어 난 예수님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매 성탄때 마다 낮고 어두운 소외된 외롭고 추운 곳에서, 또 가난한 이들의 순수한 마음의 구유 안에 태어나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많은 돈 써가며 예수님 탄생지 찾아 순례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 가난한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는 아기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 탄생을 체험했습니까? 바로 고독과 침묵의 들판에서 깨어 양떼를 돌보던 가난한 목자들이 예수님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내로라 하는 신학자들이나 고위지도층 종교인들이 아닌 춥고 어두운 밤, 들판에서 깨어 제자리에서 책임에 충실하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탄생을 목자들이 맨처음 체험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난한 삶의 자리에 찾아 오시는 주님의 천사요,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목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 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다윗 고을과 동시에 빛으로, 희망으로, 생명으로, 기쁨으로, 평화로 가난한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늘의 무수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주님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충만히 누리도록 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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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너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구원이 무엇일까? 반대로 비 구원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제 생각에 비 구원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는 것 자체가 비 구원이고, 가장 쓰라린 비 구원이며 비 구원의 종합입니다.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외롭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마음이 어두우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배고프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불안하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무섭고 두려우며
엄마가 있는 아이는 활기차고 의기양양한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시들시들합니다.
여기서 외롭고 어둡고 배고픈 것은 비 구원의 현상들이고, 엄마가 안 계신 것은 비 구원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 구원을 얘기할 때 현상을 얘기하지만 원인인 엄마가 안 계신 그 비 구원을 더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가 굶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 엄마가 없는 것에 더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인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우리가 불안하다면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하다고 믿어야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한데 식량이 떨어져 가기에 불안하다고 생각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독히도 고독한 비 구원 상태에 내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안 계셔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고독하다고 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행복하게도 우리 신앙인에겐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분을 구원자로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이고 그것이 비 구원입니다.
이것을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죄에서 구원된 사람입니까? 이 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까?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저이고 여러분입니다. 이 구원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자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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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우리도 성탄이 되자!>
'주님성탄대축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파스카 성삼일, 곧 '주님부활대축일' 다음으로 큰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 성탄의 이 큰 기쁨이 형제자매님들과 그 가정에 충만히 내리고, 너와 온누리에 전해지길 빕니다!
주님성탄대축일 밤미사와 낮미사 때 들려오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9,1.5ㄱ)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1.14)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히브 1,2.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9.14.18)
모두의 구원을 위한 성탄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우리의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한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큰 기쁨이며,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은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하는 날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성탄이 됩시다! 삶의 자리에서 너를 살리고 구원하는 또 하나의 성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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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일상이 곧
거룩함의 자리임을
일깨워 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생활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일상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삶으로 말씀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사람 안에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낮아지기를
선택하신
사랑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신 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신
사랑이 시작된
은총의 날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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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구유가
하느님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오늘은
우리가 만들어낸
일정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
스스로
무르익은
때입니다.
모두를 살리려는
생명의 성탄입니다.
성탄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성탄은
우리를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신
사건입니다.
이로써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아니라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 스스로
구원자가 되시어
세상을 살리십니다.
이렇듯
구원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사건입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따뜻한 마음의
시작입니다.
성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시작된
희망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신 사랑의
성탄입니다.
가득 찬 곳에는
머무를
자리가 없고,
비워진 마음에는
하느님의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내어드리는
행복한
성탄 되십시오.
오늘 하느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기쁘게
태어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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