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노테선 안쪽의 토지만으로 미국 전역을 살 수 있다→"모두 없던 일"로…일본 경제에 치명상을 입힌 '플라자 합의'의 속사정 [모리나가 타쿠로의 고찰] / 9/30(월) / THE GOLD ONLINE(골드 온라인)
2024년의 역사적 엔화 약세에 따라 엔화 강세 시대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엔화 강세가 반드시 일본 경제에 좋은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모리나가 타쿠로 씨의 저서 「쓰면 안 되는 일본 경제 추락의 진상」(삼오관 신샤 발행, 포레스트 출판 발매)으로부터,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로 일어난 엔고의 영향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 일본 경제의 전환점은 '1985년 8월~9월'인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허허벌판이 된 일본은 GHQ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주권을 잃었다. 모든 정책은 GHQ(실질적으로 미국)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 결정할 수 없는 '점령하'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기적이라 불리던 고도 경제성장을 통해 일본은 세계에서 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재팬 머니가 전 세계의 자산을 사들여 1980년대 후반에는 도쿄의 야마노테선 안쪽 땅만으로 미국 전역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일본 경제는 세계 제일의 지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 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점령 상태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주권은 자기 나라의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그리고 1975년 11월 프랑스 랑부예에서 개최된 제1차 주요국 정상회의(통칭 랑부예 서밋)에서 일본은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G6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일본은 세계 톱 6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일본은 완전히 주권을 되찾았다, 적어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85년 8월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건 이후 시계가 갑자기 역회전을 시작했다. 전후 40년에 걸쳐 쌓아 올린 일본의 주권이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게 된다.
일본항공 123편의 추락으로부터 불과 41일 후인 1985년 9월 22일, 선진 5개국의 대장 대신, 중앙은행 총재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플라자 합의'로 불리는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결정이 이뤄졌다. 표면상으로는 환율을 안정시킨다는 합의였지만 실태는 각국의 협조 개입으로 급격한 엔화 강세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 플라자 합의가 일본경제에 준 '치명상'
실제로 플라자 합의 직전까지 1달러=240엔대였던 달러 대비 환율은 1987년 말에는 1달러=120엔대의 초엔고를 기록했다. 2년여 만에 두 배의 엔고가 초래된 셈이다.
2배의 엔화 강세가 된다는 것은 일본의 모든 수출상품에 100% 관세를 매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대충 얘기하면 일본에서 수출한 상품의 현지 가격이 갑자기 두 배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경제 평론가 중에는 「엔고는 일본 경제가 강해진 증거이므로 엔고가 바람직하다」라고 하거나 「수입품을 싸게 살 수 있거나 해외 여행에 싸게 갈 수 있으므로, 국민 생활에 있어서는 엔은 높을수록 좋다」 등이라고 해설하거나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러한 측면도 있지만, 경제 전체로서 보면, 엔고는 반드시 경제에 마이너스의 영향을 준다.
나는 싱크탱크 근무 시절 내내 경제모델이라는 경제모형을 만들어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 경험으로 말하면, 어떤 경제 모델을 사용해도, 엔고는 수출의 감소를 통해서, 반드시 경제의 실속을 가져온다.
실제로 1985년 42조엔였던 일본의 수출 총액은 1986년 35조엔, 1987년 33조엔으로 급감했다.
수출 부진은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모든 제조업에 피해
수출 부진은 일본 산업계에서 유일하게 높은 국제 경쟁력을 지켰다는 자동차 산업에도 닥친다.
사륜차 수출대수는 1985년 673만대를 달성했는데, 이를 정점으로 이후 질질 줄어 2022년에는 381만대로 급감했다. 일본 자동차산업이 세계 1위 지위를 확보한 것은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겼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은 모든 제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한 가지만 내 개인적인 취미인 미니카의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으면 한다.
◇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였던 '토미카'가 미국시장에서 사라진 이유
'3인치 미니카'로 불리는 길이 8㎝ 정도의 미니카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영국 레즈니사의 '매치박스'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미국 마텔사의 핫윌이 등장하자 시장이 격변했다.
피아노선 차축을 채택한 핫 휠은 고속 주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 동안 아이들이 손끝으로 굴리며 즐기던 미니카가 레일 위를 맹스피드로 주행하는 완구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핫 휠의 폭발적인 안타에 매치박스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피아노선의 차축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사이키조의 도장이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조차의 바디와, 실차와는 동떨어진 미니카만을 발매하게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성냥갑 팬들은 멀어져 갔다.
거기에 등장한 것이 1970년에 발매된 일본의 「토미카」였다. 실차에 충실한 모델인 데다 토미카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애초부터 실현하고 있었다.
나는, 발매 당초부터의 토미카를 거의 모두 가지고 있는데, 초기 모델은 발매로부터 50년 이상 지났는데도, 바디나 부품의 손상이 없는 것은 물론, 도장의 빛조차 쇠퇴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메이드 인 재팬의 진면목이었다.
원래 일본 시장을 의식해 제조된 토미카였지만, 금세 그 인기는 세계에 퍼졌고,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대환영을 받았다.
나는 1980년 대학 졸업 직전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미국을 일주하는 가난 여행을 떠났는데, 조금 큰 거리의 슈퍼마켓에서는 꼭 토미카가 팔리고 있었다. 포켓카로 이름 붙여진 토미카는 하나에 99센트 정도였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시장은 격변했다. 원래 아이의 장난감이기 때문에, 판매 가격을 2배로 하면, 아무도 사 주지 않게 되어 버린다. 포켓카는 값싼 홍콩제나 중국제 미니카로 대체돼 80년대 안에 시장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모리나가 다쿠로 플라자 합의는 일본경제 집단 린치
그러던 일이 일본 제조업의 모든 분야에서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는 심각한 엔고 불황에 빠졌다. 바로 플라자 합의는 일본 경제에 대한 집단 린치 사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수출을 제한하려는 미국의 압력은 그때까지도 있었다.
가령 1981년 미·일 자동차 협상에서는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가 대미 자동차 수출 대수를 전년 실적 이하로 제한하는 '자율규제'를 도입했다. 비슷한 일은 철강이나 섬유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단지, 교섭의 자리에서, 일본측은 철저하게 싸워, 아슬아슬한 빠뜨릴 곳을 찾고 있었다.
반면 플라자 합의의 경우는 급격한 엔화 강세가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삼킨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정책결정이 이뤄진 것은 틀림없다.
모리나가타쿠로 / 경제 분석가 / 독협대학 경제학부 교수
https://news.yahoo.co.jp/articles/e86429f4979c9fed1ca312907e240fb15fac9338?page=1
山手線の内側の土地だけでアメリカ全土が買える→“すべてなかったこと”に…日本経済に致命傷を与えた「プラザ合意」の裏事情【森永卓郎の考察】
9/30(月) 10:02配信
THE GOLD ONLINE(ゴールドオンライン)
(※写真はイメージです/PIXTA)
2024年の歴史的円安を受けて、円高時代への回帰を求める声を聞く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円高が必ずしも日本経済に良い影響ばかり与えるわけではないといいます。森永卓郎氏の著書『書いてはいけない 日本経済墜落の真相』(三五館シンシャ発行、フォレスト出版発売)より、1985年9月のプラザ合意で起きた円高の影響を詳しくみていきましょう。
日本経済のターニングポイントは「1985年8月~9月」か
太平洋戦争の敗戦で焼け野原と化した日本は、GHQの支配下に置かれ、主権を失った。すべての政策はGHQ(実質的にアメリカ)の判断を仰がないと決められない「占領下」に置かれたのだ。
しかし、日本人のたゆまぬ努力の積み重ねによって、奇跡と呼ばれた高度経済成長を通じて、日本は世界でのプレゼンスを高めていた。ジャパンマネーが世界中の資産を買いあさり、1980年代後半には、東京の山手線の内側の土地だけでアメリカ全土が買えると言われた。日本経済は世界一の地位にまでのぼり詰めたのだ。
外交面でも1951年9月8日に連合国諸国と日本との間で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が締結され、日本は占領状態から脱却し、形式的に主権が認められるようになった。主権というのは、自分の国の政策を自分で決められる権利のことだ。
そして、1975年11月にフランスのランブイエで開催された第1回主要国首脳会議(通称ランブイエ・サミット)で、日本はアメリカ、イギリス、西ドイツ、フランス、イタリアとともにG6の一員として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
日本は、世界のトップ6の仲間入りをしたのだ。私も含めて、誰もが日本は完全に主権を取り戻した、少なくとももうすぐそうなると考えていた。
ところが、1985年8月の日本航空123便の墜落事件の後、時計が突然逆回転を始めた。戦後40年かけて築き上げた日本の主権が音を立てて崩れ落ちていくことになる。
日航123便の墜落からわずか41日後の1985年9月22日、先進5カ国の大蔵大臣、中央銀行総裁がニューヨークのプラザホテルに集結した。
この場で「プラザ合意」と呼ばれる日本経済にとって致命的な決定がなされた。表面上は、為替を安定させるという合意だったが、実態は、各国の協調介入によって、急激な円高をもたらすものだった。
プラザ合意が日本経済に与えた“致命傷”
実際、プラザ合意直前まで、1ドル=240円台だった対ドル為替レートは、1987年末には1ドル=120円台の超円高となった。2年あまりで2倍の円高がもたらされたことになる。
2倍の円高になるということは、日本のすべての輸出商品に100%の関税をかけるのと同様の効果を持つ。大雑把な話をすれば、日本から輸出した商品の現地価格がいきなり2倍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だ。
経済評論家のなかには「円高は日本経済が強くなった証拠なので円高のほうが望ましい」と言ったり、「輸入品を安く買えたり、海外旅行に安く行けたりするのだから、国民生活にとっては円は高いほどよい」などと解説したりする人もいる。
もちろん、そういう側面もあるのだが、経済全体としてみると、円高は必ず経済にマイナスの影響を与える。
私は、シンクタンク勤務の時代、ずっと「経済モデル」という経済の模型を作って、さまざまなシミュレーションをすることを生業にしてきた。その経験で言うと、どんな経済モデルを使っても、円高は輸出の減少を通じて、必ず経済の失速をもたらす。
実際、1985年に42兆円だった日本の輸出総額は、86年には35兆円、87年には33兆円と急減していった。
輸出不振は自動車産業をはじめあらゆる製造業にダメージ
輸出不振は、日本の産業界で唯一高い国際競争力を守ったと言われる自動車産業にも襲いかかる。
四輪車の輸出台数は1985年に673万台を達成していたのに、そこをピークとして、その後ずるずると減っていき、2022年には381万台と激減している。日本の自動車産業が世界一の地位を確保したのは生産拠点を海外に移したからなのだ。
同じことは、あらゆる製造業で起きているのだが、ひとつだけ私の個人的な趣味であるミニカーの事例を話させてほしい。
世界中で大人気だった「トミカ」がアメリカ市場から消えた理由
「3インチミニカー」と呼ばれる全長8センチ程度のミニカーは1950年代から1960年代にかけてイギリス・レズニー社の「マッチボックス」が世界市場を席巻していた。しかし、1960年代後半にアメリカ・マテル社の「ホットウィール」が登場すると、市場が激変した。
ピアノ線の車軸を採用したホットウィールは高速走行が可能だったため、それまで子どもたちが指先で転がして楽しんでいたミニカーが、レールの上を猛スピードで走行する玩具に変貌してしまったのだ。
ホットウィールの爆発的なヒットに、マッチボックスも対応せざるをえなくなった。ピアノ線の車軸を採用するだけでなく、サイケ調の塗装や、現実には存在しない改造車のボディと、実車とはかけ離れたミニカーばかりをリリースする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これによりマッチボックスのファンは離れていった。
そこに登場したのが1970年に発売された日本の「トミカ」だった。実車に忠実なモデルである上に、トミカは世界最高の品質を当初から実現していた。
私は、発売当初からのトミカをほぼすべて持っているのだが、初期モデルは発売から50年以上経つというのに、ボディや部品の傷みがないどころか、塗装の輝きさえ衰えていない。まさにメイド・イン・ジャパンの真骨頂だった。
もともと日本市場を意識して製造されたトミカだったが、すぐにその人気は世界に広がり、とくにアメリカ市場では大歓迎された。
私は1980年の大学卒業直前に、グレイハウンドのバスでアメリカを一周する貧乏旅行に出かけたのだが、少し大きな街のスーパーマーケットでは必ずトミカが売られていた。ポケットカーと名付けられたトミカは、一つ99セント程度だった。
ところが、1985年のプラザ合意で市場は激変した。もともと子どものおもちゃだから、売価を2倍にしたら、誰も買ってくれなくなってしまう。ポケットカーは安い香港製や中国製のミニカーにとって代わられ、80年代のうちに市場から姿を消してしまったのだ。
森永卓郎「プラザ合意は日本経済への集団リンチ」
そうしたことが、日本の製造業のあらゆる分野で発生し、日本経済は深刻な「円高不況」に陥った。まさにプラザ合意は、日本経済への「集団リンチ事件」だったのだ。
もちろん、日本の輸出を制限しようとするアメリカからの圧力はそれまでもあった。
たとえば1981年の日米自動車交渉では、日本政府と自動車業界が、対米自動車輸出台数を前年実績以下に制限する「自主規制」を導入した。同様のことは鉄鋼や繊維でも行なわれていた。ただ、交渉の席で、日本側は徹底的に戦い、ギリギリの落としどころを探っていた。
一方、プラザ合意の場合は、急激な円高が日本経済に致命的な打撃を与えることが誰の目にも明らか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日本政府は“無条件降伏”を呑んだのだ。常識的に考えて、ありえない政策決定が行なわれたことは間違いない。
森永 卓郎
経済アナリスト
獨協大学経済学部 教授
森永 卓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