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4 – 7. 8 제이큐브 미술관 (T.070-4140-1786, 영월)
제이큐브 미술관 기획초대전
김보연
글 : 백지홍 (미술평론)
"平常-평범한 일상"
김보연 작가는 풍경화 작가로 전통적인 풍경화의 틀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견고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면, 담백한 터치와 색감으로 그려낸 자연주의 회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보면 그의 회화가 단순한 평면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선(線)적인 부분, 특히 밝은색으로 표현된 선들이 표층 아래로 파고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각도가 새겨 넣은 물리적 깊이는 그리 깊지 않지만, 그 작은 차이가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입체감은 결코 작지 않다. 이 미묘한 차이가 소실점 등을 배제한 평면적인 구도를 선호하는 김보연 작가의 화면에 납작하지 않은 깊이를 만들어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각칼이 지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들이다. 조각도가 파낸 선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깊이 자체의 표현이다. 슬레이트 지붕의 굴곡 표현은 조각도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깊이 표현에서 나아간 두 번째 역할은 사물에 닿고, 반사되는 빛의 표현이다. 작가는 조각도가 드러낸 하얀 모델링 페이스트 위에 밝은색 물감과 석채를 섞어 그려진 대상에 맺힌 반사광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나무판 위에 모델링 페이스트를 바르고 선적인 요소를 조각도로 파낸 후에 아크릴 채색을 시작한다. 때로는 채색 이후 필요에 따라 음각을 추가로 진행하며, 조각도로 파낸 자리는 다시 물감과 석채로 채워 넣는다. 입히고 파내고 다시 색을 입혀 마무리하는, 흡사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같은 제작과정은 일반적인 회화보다 훨씬 많은 량의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화면에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조각기법과 나무판, 모델링페이스트, 석채, 물감 등 각기 다른 성질의 재료의 활용이다. 〈감나무〉와 같은 작업은 조각도가 드러낸 나무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마감하여 나뭇가지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 〈슬레이트 지붕 앞 갈대〉나 〈벽돌집〉과 같은 작품의 경우에는 조각도를 이용해 만들어낸 깊이 위에 석채를 이용해 실제와 같은 질감을 덧씌웠다. 조각도와 석채의 활용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빛과 깊이의 표현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보연 작가는 사진으로 찍은 듯한 극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붓의 터치 등 회화적 특성을 살린 작업을 선호하며, 그려진 대상의 물성을 가능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다소 상충하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김보연 작가의 풍경에는 흔적만이 남았을 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부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진다. 사람이 떠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잡초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들, 빈집, 또는 폐허라 불리는 공간들도 작가가 포착한 주요 풍경 중 하나다. 사람의 발길이 떠난 지 오래인 이 장소가 오히려 그곳에서 살아갔을 사람들을 가리킨다. 거리를 둔 시선은 이러한 비어있음의 감각을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히 포착한다.
학창 시절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햇빛을 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영혼이 치유됨을 느꼈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러한 빛을 담음으로써 치유의 힘을 전하고자 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작가는 이러한 치유의 힘을 가진 빛을 ‘신의 축복과 같은 빛(divine light)’으로서 표현하였다. “작품의 제작과 감상이 단순히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을 넘어 영(靈)을 터치하는 감동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는 그의 말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작가의 터치가 생생히 느껴지는 회화성과 실재감의 보기 드문 조화가 이뤄지는, 빛의 질감이 새겨진 듯한 화면이 김보연 작가의 칼끝에서, 그리고 붓끝에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