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12]
1945년 말 동북지역 북부권으로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지대장 김택명(이상조)과 정치위원 주덕해가 작성한 계획서에는 미국과 소련이 38선으로 남북한을 양분한 데 대해 크게 우려한 것이 적혀 있다.
이들은 38선을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는 진영 간 경계선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남한을 점령한 미국이 결코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경계선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의 이 같은 인식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며 국공내전에 참여한 조선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반 조선인의 경우 특별한 정보를 얻기 어려워 지도층 인사들이 정리하여 제시하는 정보와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며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인들은 국민당정부와 남한 및 남한 정치세력, 그리고 미국을 일체화시켜 모두 적으로 인식했다.
제국주의자인 미국이 남한을 점령해 남한 정치세력과 결탁해 남한주민들을 착취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국민당정부와 연계하고 있다는 식이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을 도와 동북지역에서 국민당정부를 몰아낸 후 북한과 힘을 합해 한반도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이들이 중국공산당을 도와 국공내전에 참전한 것은 국민당정부를 몰아내기 위해서 뿐 아니라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한반도통일을 이루겠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국민당정부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서부권 대도시 조선인들은 1948년 중국공산당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국공내전이 국민당정부 세력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낙관했다. 이에 따라 이곳 조선인들은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자생적 역량을 기르는 가운데 국민당정부 세력과의 관계 형성에 주력했다.
이곳 조선인들은 수적으로는 물론 연대의식도 낮아 당시의 정세에 대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이 입장을 견지했던 것 같다.
해방 후 한반도로 귀환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에 남은 조선인들은 남북한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정들에 귀 기울이며 남북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남북한 및 한반도 분단현실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의 판단과 의지를 넘어서는 문제였다.
동북지역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철저히 이 지역 내 정치상황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정부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남북한에 대한 인식도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동북지역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어느 세력의 영향 하에 있느냐에 따라 이념적 정향은 물론 정세에 대한 인식도 달랐다. 중국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었던 동북지역 동부권 및 북부권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북한과의 인연이 많았는데 특히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출신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해방 직후 동북지역에 진출하면서 북한 진주를 도모하는 등 북한과의 연대를 꾀한 만큼 동북지역에 머무는 동안에도 줄곧 북한과 관계를 유지하고 북한중심의 통일을 모색했다.
김덕명과 주덕해는 남한에서 미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독립시키는 것을 조선혁명의 제1단계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동북지역을 통일혁명 역량을 키울 전진 기지로 삼아야한다는 ‘만주기지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동북지역에서 국공내전이 본격화될 경우 조선인 청년들을 혁명군에 가담시켜 훈련시킨다는 복안도 가지고 있었다. 이 복안은 어느 정도 실천됐다.
국공내전 기간 조선인 청년들이 참군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체득하였고 이 기간 연길 등지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등을 세워 간부들을 양성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북한에 들어가 북한군의 중추로서 역할하기도 했다.
국민당정부의 영향 하에 있던 동북지역 서부권에서는 당시 국민당정부를 등에 업은 한국독립당이 조선인들의 중심에 있었다. 한독당은 국공내전 초기 이 지역에서 국민당이 세력을 확장하자 동북지역에 친남한 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광복군 확장운동을 폈으며 1947년 4월에는 친북한의 조선의용군에 대항하기 위해 ‘민주자위군’을 창설했다. 한국독립당은 이 부대를 조선의용군처럼 수만 명으로 키워 남북통일의 역량으로 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고작 1개 대대병력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