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부터 동양에는 남아 선호 사상과 가문의 이름을 이어갈 자식을 출산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처럼 되어 있었다. 흔히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큰 저주처럼 여겨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이어 가려는 노력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에 "형사취수제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서 첫아들을 형제의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자식 없이 남편이 죽는 경우 여인에게 있어서 그런 상황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 제도는 영적인 측면에서 구속적 의미를 내포한다.
룻기에서는 이것을 "기업 무를 자"라고 칭하면서 어려운 친척과 형제의 아내를 능력이 있는 친족들이 아내로 맞이하여 저들의 빚을 대신 갚아 주거나 그들의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해 주는 것이었다.
(신 25: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신 25: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신 25: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신 25: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형제의 아내 처지를 이기적인 마음에서 거부하거나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신발 벗기운 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는 공중에 나아가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오른발의 신발을 벗기고 그 여인이 면전에서 침을 뱉어서 그 징표를 삼았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에 기업 무를 자로 자청하여 룻을 맞아들여서 다윗 왕가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류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생명 없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기업 무를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희망 없는 세상을 외면하여 나만 잘 살겠다고 무심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바로 "신발 벗기운 자"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과 책무를 등한히 한다면 언젠가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 자기 하나만 잘 살자고 죽어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외면한 채 천국을 얻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공동체에 살아도 마땅한 책무를 등한히 한 자라는 수치스러운 징표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들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업 무를 자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우리도 세상의 보아스와 같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가족의 일원으로 자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 아버지!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떠 올립니다. 기꺼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게 하시고 기꺼이 연약한 자들의 부족함을 감당하는 보아스 같은 신앙인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