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 창문 닫기
2019년 5월, 새벽 한시를 조금 넘긴 시간. 시를 쓰던 나는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아파트 놀이터에 보랏빛 물고기가 맴을 돌고 있었습니다. 놀이터로 내려가자 일순 발이 젖고 허리가 잠기고.
물고기는 부드럽게 헤엄쳤습니다.
수면 위로 라일락 그림자가 일렁이고 멀미가 날 것 같았습니다. 물고기가 튀어오를 때마다 물방울이 두 볼에 닿았어요.어쩐지 미지근하고 따듯했습니다. 나는 물속에서 둥둥 떠내려가고. 이곳은 아주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버린 부모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익숙한 슬픔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낮은 지붕이 보일 듯 말 듯, 어느새 동네는 물에 잠겼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세계에 진입한 모양입니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얼마나 떠다녔는지 내가 물이 돼버린 것 같았어요. 갈비뼈 안으로 물고기가 파고드는 것 같았어요. 가슴 한편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습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자 배고픈 고양이, 배고픈 어린이, 배고픈 옆집 쌍둥이 할머니, 배고픈 토마토, 배고픈 하얀 달, 배고픈 피아노. 하나하나 물 위로 떠올랐어요. 물고기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밤이 짧습니다. 어떻게 하면 듣고 싶은 말을 계속 들을 수 있을까. 그때부터 시를 썼어요. 듣고 싶은 말이 들릴 때까지. 시는 짧고 밤이 끝나가고.
깨끗한 물도 오래 만지면 상한 냄새가 나더라고요. 거기서 시를 썼습니다. 냄새나는 몸으로요. 익숙한 자세로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슴 아프다고 말합니다. 이런 건 시가 아닐 거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시 속에만 있어요. 이런 말도 다 시에서 들었어요.
둔치 위로 아이들이 띠를 이루어 서 있었습니다. 나를 닮은 어린이, 내가 잃어버린 개를 안고 있는 어린이, 훔친 초콜릿을 입에 물고 훔친 실내화에 내 이름을 적는 어린이, 매를 맞는 어린이, 앙상한 어린이…… 어린이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돌로 나를 맞힐 때마다 애들이 깔깔거립니다. 이 장면이 이 시에서 제일 싫어요. 왜 저는 제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할까요. 내가 미워하는 시는 다 내가 쓴 거예요. 나는 똑똑한 사람이 못 됩니다.
여러날 지나고 햇빛에 물이 다 마른 뒤에도 물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햇빛 속에서도 물속을 걷는 것처럼 첨벙첨벙,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햇빛 속에서 내 다리가 녹고 가슴이 녹고 정수리 위로 빛이 내리쬡니다. 오늘 퇴근길엔 보랏빛 구두 신은 아가씨를 보았어요.보랏빛 기차가 보랏빛 냉장고를 싣고 달렸어요. 보랏빛 건물 속에서 보랏빛 일꾼들이 걸어나옵니다. 첨벙첨벙 빛을 받고 서 있었어요. 옅은 라일락 향기 끝에 물고기 냄새가 묻어납니다.
사랑하는 친구는 손목의 상처가 덧날 때마다 아가미가 열리는 것 같았대요. 열고 닫고. 두 세계가 포개질 때 나는 다만 슬프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보다 슬픈 사람을 많이 봤어요. 사람들이 쉽게 죽고 이상한 남자들이 자꾸. 정말 자꾸…… 끝없이 슬퍼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시 선생님이 이건 시가 아니라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써 오라고 계속 쓰라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들릴 때까지 더 듣고 오라고.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계속 오라고.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다시 시를 쓰러 왔어요. 방문을 닫고 시를 쓰다 말고 창문 앞에 섰습니다. 불투명한 창이에요. 물가에서 돌멩이 던지는 소리, 멀리 들려옵니다. 창을 열지 않고. 다만 그 앞에 서 있어봅니다. 물고기에게 아가미를 만들어준 건 물고기 자신이었을까요.
봄밤이 끝나가고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아직도 우리들 창밖에는 보랏빛 물고기가 맴을 돌고 있는데요.
첫댓글 좋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