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바리>
어제 저녁 경산회 망년회 때, 내가 ‘해드 테이블’이라고 부르고 장환이가 ‘머슴 자리’라고 부르는 곳에서
는 난 데 없이 ‘나와바리’의 의미가 화제로 떠올랐다. 재한이가 “이 곳 방이동은 계무 나와바리다.”라고
말했던 것 같으며, 그 말을 듣고 윤칠(곽윤칠)이가 ‘나와바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것 같다. 나는 대
뜸 “관할구역!” 하고 말하며 아는 체했고, 계무, 재한이, 학준이 등등이 달려들어 한 마디씩 보태면서 ‘나
와바리’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관할구역’이라는 짧고 분명한 규정을 넘어서지
는 못했다. 나는 속으로 흐믓해 하다가 장환이가 동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나와바리’가 관
할구역 맞지? 일본말이겠지?”하고 물어 보았다. 장환이는 그제서야 슬슬 나서더니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와바리’는 물론 일본말로서, 한자로 쓰면 ‘승장’인데, ‘승’자는 실 사 변에 복잡한 게 붙
는 그 글자(繩)고, ‘장’자는 활 당길 장으로 활 궁 변에 어른 장이 붙는 글자(張)라는 것이다.
“이 친구가 아직도 이러고 다니고 있네.”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만약 내가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
다면 입이 근질거려서라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텐데, 이 친구는 입에 저울추라도 달아 놓았다는 말인가?
장환이는 원래 좀 그랬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아는 체 하고 나서지 않았다. 사실
은 장환이의 유모어 감각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장환이의 그 썰렁한, 웃기지도 않는 웃기는 이야기
를 듣고 “야,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장환이의 유모어 감각이 그대로인 것
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부산에서는 그게 통했을 테니까. 부산의 부하 직원들은, 장환이가 무슨 말을
해도 웃어 주지 않았겠나? 유모어 감각이 그대로인 것은 이런 식으로 이해가 되지만, 무거운 입이 그대
로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지만, 계무는 모르는 것이 나오면 나에게 물어 보곤 하였다고 말하였다. 나는 모
르는 것이 나오면 장환이에게 물어 보곤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좌중이 술렁거리자 장환이가
쑥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장환이에게 물어 보았다고 말했을 뿐, 장환이에게서 대답을 들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하여 좌중을 웃겼다. (장환아, 서울에서는 이 정도 유모어가 아니면 안 통한단
다.) 물론 그것은 농담이었다. 옆에 계셨던 장환이 제수씨에게도 자세하게 말해 주었지만, 장환이는 하
나를 알아도 확실하게 아는 스타일이었으며, 특히 원리를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나는 아
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으며, 특히 원리 같은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덮어놓고 외워두는 학
생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른바 안배포치(按配布置), 즉 둘러대는 데에 명수였다.
<고문관>
장환이가 여전히 그러고 다니는 것처럼 나도 여전히 그러고 다니는지 모른다. 내가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후배 학자가 한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이 얼마 전에 한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러저러한 주제로 논문을 한 편 쓰려고 방학 내내 고투하였는데, 결국 실패로 끝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둘러대어 번듯하게 보이는 한 편의 글을 꾸며내었을 것이다. 이 후배는 모르
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후배는 못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 그 점은, 언젠가 이 사람이 털어놓은 군대 시절 이
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개인에게 지급되는 물품들, 예컨대 작업모나 수통 등등이
슬며시 없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났잖아? 없어졌다 싶으면, “첫째로, 소문을 내지 말 것”, “둘째로, 가급
적 빨리 채워 넣을 것” -- 이런 행동 지침을 따르면 되는 거지. 작업모 같은 것은,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는 똥 누는 놈 것을 벗겨 달아나는 식으로라도 채워 넣어야지.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차례 겪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때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을 분실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총이냐고? 천만
에. 숟가락이었다. 다른 사람이 먹기를 마친 뒤에 그 숟가락을 빌려서 먹기에는 식사시간이 너무 짧았
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당한 것과 똑 같은 것을 아무에게나 베풀어주면 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숟가락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군대에서는, 특히 훈련소에서는 다 그런 식으로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이 후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후배도 바로 그 숟가락을 분실하였
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는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식사시간에는 어떻
게 하였는가? 밥을 타다 식탁에 놓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게나. 참으로 코믹한
장면 아닌가? 이런 병사들을 고문관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는 이러한 이 후배의 이야기를 민형이에게 해 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민형이는 장환이가 바
로 그런 고문관이었다고 말해 주더라. 장환이가 후반기 훈련을 받은 원주 통신 훈련소에서 일어난 일인
데, 분실 품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통이나 작업모 등속이었겠지. 없어지면, 이
곳에서도 역시 두 가지 보편적인 행동 지침을 따라 처신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다들 그 지침을 따라
행동하면서 원만하고 행복한 훈련소 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유독 장환이만 그 행동 지침을 이해하지 못하
고 쩔쩔매면서 모나고 불행하게 지냈다고 하더라. 다행히 장환이에게는 빽 있고 실력 있는 사회 친구가
같은 내무반에 있어서 그 친구의 도움으로 궁지에서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 친구는 김명서로, 당시 병
기계인가, 이사종계인가 하는 핵심 보직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껏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둘러대는 데에 있어서의 명수로 살고 있을 뿐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 처세의 달인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가끔, 신비스러운 고문관들, 즉 아는 것은
분명히 알되, 모르는 것이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거나,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찔끔하여 비실비실 쥐구멍을 찾는다. 그건 그거고, 장환이가 유모어 감각만 조금 업그레이드시켜 줬으
면 좋겠는데. 물론 그 일이 쉽지는 않겠지. 부산의 부하 직원들 탓만 할 수도 없다. 유모어 감각이란 것
은 살아 온 연륜에 비례하는 법인데, 장환이와 우리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으니까.
<고문관 사모님 팬티 사건>
장환이와 녹색 속옷을 즐겨 입으시는 제수씨는 1차가 파한 후 들어가시고, 우리는 호프집으로 옮겨가서
2차를 하고, 또 다시 노래방으로 가서 3차를 하였다. 성률이, 윤칠이, 민호 등등 노래 잘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더라. 2차 호프집에서는 역시 순태가 그 독한 중국 술을 이 놈, 저 놈하고 주고받으며 돌아다녔
고, 명서가 명서표 폭탄주를 제조하여 한 순배 돌렸으며, 재한이가 룸싸롱 아가씨마냥 신발을 벗어들고
좌석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오는 등 순태와 양 김씨가 설쳐댔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안줏발을 세워 대적
하면서 먹을 만큼 먹고 웃을 만큼 웃었다. 제일 오래 있었고,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뭐니 뭐니해도 ‘남
경’에서의 1차였다. 우리는 격조있고 풍족하게 먹고 마시면서 -- 1년에 한번쯤이라면, 낭비를 좀 해도
되는 것 아닌가? -- 마술까지 관람하였다. 마술사는 덕영회장의 부하 직원이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도
텔레비젼에 자주 출연한다고 하지만, 바로 코 앞에서 시연하는 것을 보니 진짜로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더
라.
“녹색 속옷을 즐겨 입으시는 제수씨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조영태, 이 친구 아직도 술이 안 깬 모
양이야, 또 실수하네......” 이런 생각이 들겠지? "남편이 고문관이지, 부인이 고문관이냐? 남의 부인 속
옷 색깔을 니가 어떻게 아냐?" 그러나 장환이 제수씨가 녹색 속옷을 입으신다는 것은 나만 아는 것이 아
니고 그 자리에 있었던 설흔 명이 다 안다. 아니, 다 봤다. ‘고문관 사모님 팬티 사건’에 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그 마술사에게 연락을 취해 볼 것.
첫댓글 앗~ 1등이다. 영태 글 솜씨에 그냥 스쳐갈 수가 없구나. ㅎㅎㅎㅎㅎㅎㅎㅎ 즐거운 연말이구나.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누룽지 냄새나는 구수한 글을 써주는 영태형께 감사드림.
제수씨에게 내가 실례를 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이야기를 워낙 받아주셨거든. 장환이 말에 의하면, 우리 동창들 소식은 장환이보다 제수씨가 더 잘 알아서, 장환이가 제수씨에게 물어 볼 정도라고 하더라. 물론 까페에 자주 들르시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가 확인에 들어 갔다. "김봉훈에 관해서 아는 것 4가지 이상을 말해 보시요." 제수씨는 어렵지 않게 4가지를 대었다. 우리는 감탄을 하면서, 장환이를 준회원으로 강등시키고 제수씨를 정회원으로 등업시키자는 둥, 장환이는 불쌍하니까 그냥 놔두고 제수씨를 특별회원으로 등업시키자는 둥 그럴 듯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지원엄마는 웃으면서 모든것을 다이해하실거야....못본사람의 이해를 돕기위해 한마디...지원엄마가 도우미로 나선 마술의 일부다...
이 짧은 영태의 글에서도 수많은 세계를 발견하고 경험하네.. 그러면 우리들의 조영태는 글의 마술사?..
그 제수씨 닉이 머래? 특별회원 오케바리~~
이날 만은 마음놓고 놀자고 사진을 안찍었구만 결국 영태의 예리한 필봉에 꼼짝없네...
그러고 보니, 장환이 제수씨도, 우리 까페에 들르시는 김에, 가끔씩 글까지 남겨 주시면 좋겠구만. 부산 생활이 어떤지, 두 집 생활이 어떤지 등등을 말이야. 장환이 아이디로 들어오시는 게 아니고, 독자적인 아이디가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재한이가 신발을 벗었다? 룸싸롱 아가씨마냥 ??? (좌우간) 무지 먹은겨?ㅎㅎ 나도 군 훈련시절 야외교장에서 권총 분해하다 스프링 하나가 튀어서(그냥 조립 해봐야 격발이 안 되므로) 이실직고 하고... 터진 후, 전 중대원이 네발로 기면서 찾아낸 적이 있는데 무려 20여미터의 반대쪽에서~ 그 바람에 귀대가 1시간 지연되었지.
우하하하...영태 슨상 글 읽으며 웃음보가 터졌다..그날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