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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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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14년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80년 로마에 원형극장인 폴라비우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다.
79년 8월 4일 오후 1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 굉음이 울려 펴졌다. 사람들은 평소와 같은 지진으로 생각하고 굳이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끼 돼지를 잡아 양념한 후 오븐에 넣으려던 여인도, 밀가루 반죽을 밀어 빵을 빚던 제빵사도, 해변에 누워 더위를 식히던 귀족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굉음의 진원지는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천 년이 넘게 침묵하던 화산이 분화한 것이다. 화산은 멀리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연기를 내뿜었다. 붉은 용암 덩어리가 흘러내리며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위치에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화산재가 더 치명적이었다. 18시간에 걸쳐 100억 톤에 가까운 화산재가 쏟아져 내렸다.
당시 폼페이는 사르누스 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겨울은 짧고, 봄과 여름이 긴 쾌적한 기후였고, 기름진 토양과 수량이 풍부한 강물 덕분에 농사도 수월했다. 또 외지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열려 있어 교역이 활발했다. 덕분에 이곳을 탐내는 민족이 많았다. 폼페이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출발하여 잠시 삼니움 족의 영지였다가 기원전 89년 로마의 침략에 굴복한 후 로마로 귀속되었다. 특히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제정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상류층이 화려한 별장을 짓고 피서지로 삼았다.
폼페이의 영화를 막은 베수비오 화산은 평소에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높이도 1,300미터로 험준한 산은 아니었다. 도시가 형성된 이후로 한 번도 분화한 일이 없어 사람들은 화산의 공포를 알 수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대분화 이전에는 라틴 어에 ‘화산’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산이 한 번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16년 전인 63년에 지진이 일어나 산기슭의 지형이 바뀐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지진으로 인해 잠자고 있던 화산이 용틀임을 시작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잿빛 화산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2,000명의 주민들이 그대로 화산재에 묻혀 ‘화석’으로 남았다. 당시 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산재의 두께는 5~7미터였다고 전한다. “한 도시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는 방법은 화산재로 뒤덮는 것”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비극의 현장 폼페이는 오랫동안 잊힌 땅으로만 존재했다. 대분화의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3세의 후원 아래 대대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는 물론이고 뒤를 이어 이 일대를 점령한 프랑스도 초기에는 값나가는 유물을 빼돌리느라 발굴은 뒷전으로 미루었다.
1850년대 말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다음에야 제대로 된 고고학자들의 투입되어 폼페이 최후의 날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질식의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끝내 화석처럼 굳어 버린 희생자의 형체가 드러났고, 화려했던 로마의 건축 양식도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발굴된 폼페이는 전체의 절반 내지 5분의 3 정도로 추정된다.
처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인간 화석’이었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2,000년이 지난 후에도 공포가 생생하게 묻어 있었다. X선 투시 결과 화석 안의 장기는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화산재에 파묻힌 도시의 수로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복원되었다. 도심에서 40킬로미터나 떨어진 수원에서 끌어온 물길은 지하에 묻힌 납 파이프를 통해 수조에 저장되었다가 시내로 공급되었다. 거리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도랑까지 있었다. 학자들은 제정 로마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폼페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거 형태도 무척 다양했다. 로마 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화로운 대저택에는 거대한 정원이 딸려 있었다. 서민들이 살았던 2, 3층 아파트는 물론이고 시내 빵집과 채소 가게, 대장간이 딸린 집도 발굴됐다. 집 안에는 자연 채광시설을 갖춘 목욕탕과 안락한 구조의 홀, 정원, 벤치가 있었다. 호화로운 로마의 방식으로 추정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폼페이 인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집 안 벽면과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소재는 그리스 신화가 주로 애용되었으며, 정물화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폼페이는 프레스코 벽화의 보고로 일컬어진다. 최근 이 지역에 비가 많이 내려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검투사의 집’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곳에는 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밖에도 검투사들이 경기를 하던 원형경기장은 물론이고 연극이나 음악 공연이 열리는 극장도 두 곳 발굴되었다. 사치스러운 공중목욕탕은 세 곳이 밤낮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제정 로마의 하루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물이 한순간에 파묻혀 버렸다는 데 있다. 가령 몇 년 전 발굴된 은 식기 바구니에는 은으로 만든 컵과 쟁반 20여 점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도구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베수비오 화산은 이후에도 몇 번 더 분화했다. 17세기에도 1만 8,000명의 주민이 희생된 일이 있다. 1944년의 분화 때에는 나폴리 시민들이 미리 피한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다.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 분화했다.
청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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