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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이허량 봉산인(李許樑 鳳山人)의 자는 경언(擎彦)이요. 문정공 이수(文靖公 李隨)의 11세손이며 종사랑 민효(從仕朗 敏孝)의 아들로 1567년에 출생하여 1597년(丁酉) 정유재란에 의병 활동을 하시다 순절(殉節)하셨고 열녀 유씨(烈女 柳氏)는 정유재란 때의 충신 봉산인 이허량의 처로 고흥인 영밀공(高興人 英密公) 휘(諱) 청신(淸臣)의 후손이고. 사인(士人) 희저(希渚)의 딸이다.
이허량은 유년 시절부터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해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철에도 부모 옆에서는 의관을 벗지 않는 천성이 영민하고 예의 바르며 호걸스러운 성격으로 도량이 커서 사람들이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부모상을 당해서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예절에 어긋남이 없이 3년 상을 마쳤고, 일가 간에도 화목하게 지내며 멀고 가까운 친척을 가리지 않고, 살림이 어려워서 일을 제때에 치르기 어려운 친척들을 힘껏 도와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1597년(丁酉年)에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에 왜적이 재차 난을 일으켜 겨레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의병을 일으켜 왕이 임시 머무는 의주(義州)로 달려가려 했으나 군중이 질서가 없고 모은 군량(軍糧)이 부족하여 포기하고 있을 때 노복과 근처의 동지 수백 명을 규합하여 정읍의 사현(沙峴)에서 진을 치고 왜적을 맞아 싸웠다. 적의 공격이 급박할 때마다 그가 앞장서서 의병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우고 수많은 적을 베니 왜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왜적과 전투 뒤에 의병대를 정돈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적의 기습을 당하게 되여 그가 적진으로 달려가 수십 명을 무찌르는 순간에 십 여 군데 창상을 입었고 적의 수효가 많아 막지 못하여 장렬히 전서 하였으니 이날이 1597년(丁酉) 9월 16일 이였다.
그 때 그의 부인 유씨(柳氏)도 적의 포위 안에 있었는데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 하려는 순간에 왜적이 와서 항복 하라고 협박하니『난을 당하여 국가에 목숨을 바친 것은 장부의 지절이요.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부인의 조행이니라, 차라리 네놈의 칼에 맞아죽어 혼이 될지언정 네놈들에게 항복할 수 없다』하고 꾸짖으니 적이 노발대발하며 부인을 세 도막으로 베었다. 적들이 물러간 후 가족들은 그 부부의 시신을 거두어 월영산(月影山)과 불갑동(拂甲洞)에 장례를 치렀는데 무덤 위에 청백색의 빛깔이 무지개처럼 며칠간 가시지 않으니 사람들이 충렬이 지극한 소치라고 했다 한다. 이 부부의 장렬한 주검 사실을 유림들이 조정에 천거하여 이허량 의병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그의 부인 유씨에게 숙부인(淑夫人)을 각각 추증하고 충열려(忠烈閭)의 은전을 1623년(仁祖 元年 癸亥) 8월에 내려 오늘날의 정읍시 상동 사현에 세웠고 그 후 1873(고종 10)년 10월 자손들이 사는 현 정읍시 교암동 458번지로 이건 했다가, 1988년(戊辰) 3월에 선대조의 묘소와 그의 묘소가 있는 정읍시 쌍암동 월영마을로 재 이전 했으며 그 부부묘가 있는 곳을 지금도 충신산 열려등(忠臣山 烈女嶝)이라고 부르고 있다.
교리(郊理) 윤행직(尹行直)이 행적을 짓고 문경공 송래희(文敬公 宋來熙)가 비문을 짓고 문경공 이채(文敬公 李采)가 묘지(墓誌)를 짓고 문간공 기정진(文簡公 奇正鎭)이 정려(旌閭) 이건기(移建記)를 지은 내용 등 이허량과 그 의 부인 유씨의 사적(史蹟)은 기정진 노사집 23권(奇正鎭 著, 蘆沙集 二十三卷 )에 “숙부인 유씨 정려 이건기(淑夫人柳氏旌閭移建記)” 내용, 김평묵 저 중암집 46권(金平黙 著, 重菴集 四十六卷)에 “묘갈명 예빈사(직장 묘갈명) 유공(柳公景仁)과 함께 향인(이허량)으로 의병을 일으켜 참여한 내용(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정읍군지 김동수 교감 역주, “호남문화연구총서 13 호남절의록(井邑郡誌 湖南節義錄)”, 한국민족정신진흥회(韓國民族精神振興會), 한국 의병인물사(韓國 義兵人物史), “제2장 조선중기의 의병활동”, 전라북도지 호남삼강록 충의효열록(全羅北道誌 湖南三綱錄 忠義孝烈錄) 등에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부인 유씨도 왜병의 칼에 순절하여 이허량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부인 유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봉하여 정려(旌閭)를 내린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자료출처1
· 기정진, 蘆沙先生文集卷之二十三, 記, 淑夫人柳氏旌閭移建記: 楚山縣東沙峴之下。里曰上里。舊有綽楔焉。其榜曰贈通政大夫李許樑妻贈淑夫人高興柳氏之閭。正鎭未老時。追逐友生。屢次經由其下。隨衆起敬焉。顧以謏聞。柳氏成節首末及夫家鄕貫未之詳也。今年癸酉。綽楔移于縣南九巖。後孫家戶所在也。役旣竣。李君奎烈,台植,秉瓘。抱牛峯李司禦,恩津宋祭酒筆墓誌若表。來徵記事之文。正鎭老。廢文墨。顧以聞昔所未聞爲快。不敢默。謹按通政公字擎彥。系鳳山。文靖公隨。其十世玄祖。生員貞仁,從仕郞敏孝。其祖若考也。柳夫人英密公淸臣後。希渚女也。通政公性至孝有志節。萬曆丁酉。倭奴再突。覆於稷山。奔而南。沿路恣殺害。公憤忿。不爲避賊計。團結閭里少年。期於遮截剿戮。始也殺數十賊。而末以賊勢浸大。不能支。遂遇害。夫人時在圍中。賊欲進劫之。夫人大罵曰。有死義之男子。豈無死節之女子乎。斥以犬羊不絶口。遂倂命。家僮收二屍體。葬于縣東佛覺山。墓上有靑白氣經日不散。土人嗟異焉。事聞。贈公通政。夫人從夫職。且有旌閭之命。噫。非死爲難。處死爲難。男子猶然。况於婦人乎。此朝家所以旌贈而褒美之也。不有顯刻楣端。何以昭示來許。如昨日事乎。今日諸君之事當矣。
· 번역본: 노사선생문집 권23, 기(記), 숙부인 유씨 정려 이건기: 초산현(楚山縣)의 동사현(東沙峴) 아래 상리(上里)라는 마을에 옛날에 정려가 있었다. 그 방(榜=木牌)에 ‘증통정대부 이허량 처 증숙부인 고흥유씨지려(贈通政大夫 李許樑 妻 贈淑夫人 高興柳氏之閭)라고 쓰여 있었다. 정진(正鎭)이 어려서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차례 그 아래를 지나면서 여럿이 공경심을 자아내었으니, 뒤돌아 보면 약간의 명성이 있었는데 유씨가 지조를 지킨 이야기와 부군(夫君)의 향관(鄕貫)은 자세히 알 지 못하였다. 금년 계유(1873년)에 현(縣)의 남쪽 구암(九巖) 정려를 옮기니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일이 끝나고 이규열(李奎烈), 이태식(李台植), 이병관(李秉瓘)이 우봉(牛峰) 이사어(李司禦)가 쓴 묘지(墓誌)와 은진(恩津) 송좨주(宋祭酒)가 쓴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일의 전말을 기록한 글을 요구하였다. 정진이 늙어 문묵(文墨=문장)이 쓸모가 없게 되었으나, 옛날에 듣지 못했던 것이 명쾌해져 가만히 있지 못하였다. 통정공(通政公=李許樑)의 자는 경언(擎彦)이고 봉산 이씨(鳳山 李氏)이다. 문정공(文靖公=李隨, 1374~1430, 자:澤之, 호:深隱․寬谷, 鳳山 李氏 始祖)는 그의 10세 현조(玄祖)이고 생원(生員) 정인(貞仁)과 종사랑(從仕郞) 민효(敏孝)는 그의 조(祖)와 고(考)이다. 유부인(柳夫人)은 유청신(柳淸臣, ?~1329, 본관:高興, 시호:英密)의 후손으로 희저(希渚)의 따님이다. 통정공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만력(萬曆) 정유(丁酉=1597년) 왜노(倭奴)가 재침하여 직산(稷山)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밀려오면서 도로에서 사람을 방자하게 살해하였다. 공(公)이 화가 나서 적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적을 차단하고 섬멸하기 위해 기다렸다. 처음에 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마지막에는 적이 대거 밀려와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피살되었다. 그 때 부인은 포위되어 적이 겁탈하려 하자 부인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의롭게 죽은 남자가 있거늘, 어찌 절개를 지키다 죽은 여자가 없겠는가? 斥以犬羊不絶? 마침내 함께 목숨을 잃었다. 가동(家僮)이 두 분의 시신을 거두어 현(縣)의 동쪽 불각산(佛覺山)에 장례를 치렀다. 묘 위에 청백(靑白)의 기운이 태양을 가로질러 흩어지지 않으므로 지역 사람들이 기이함을 탄식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공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증직하고 부인은 부군의 직책을 좇았으며(숙부인 증직), 또한 정려를 하사하는 명(命)을 내렸다. 아! 안죽기도 어렵고 죽는 것도 어렵도다. 남자도 오히려 그런데, 하물며 부녀자임에랴. 이것이 조정에서 정문을 내리고 상을 내려 아름답게 여기는 이유이다. 처마 밑에 새긴 것이 분명하지 못하니, 어찌 지난 날의 일과 같은 것을 장래에 소상히 알겠는가? 오늘에 여러분들의 일도 당연하다. (번역본 내용 중 밑줄부분은 해석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임) - 기정진(1798~1879) 자: 大中, 호: 蘆沙, 초명: 金賜, 전라도 순창 출신, 시호: 文簡 -
* 자료출처 2
· 김평묵, 重菴先生文集卷之四十六, 墓碣銘, 禮賓寺直長柳公墓碣銘 幷序: 父子君臣之道。天之經地之義。而所謂民彜者也。自古篤於忠孝者。其心固儻然。無所爲矣。然自主張世敎者言之。所以采掇而旌褒者。不可有漏珠之歎也。今柳公景仁。與其弟成仁,克仁。一心忠孝。足以範俗。而至今數百年。寥寥乎無聞。可勝惜哉。尙幸楚山邑誌。湖南節義錄。有可考故。心齋宋文敬公。據以表章於前。就加撮要。而昭揭墓道。可以無媿詞矣。公字士榮。自號松隱。高興之柳。始於高麗戶長諱英。盛於高興府院君淸臣。其世麗史詳焉。自其下仍士大夫不絶。監察淵。參奉懷荃。參奉檣。學生天祥。於公爲高曾祖禰。妣朴氏。籍尙州。學生三孫女。公生於嘉靖戊午。天姿魁桀。慷慨有志節。以薦授禮賓寺直長。不就。兄弟漁樵養親。竭誠供歡。親癠。晝宵禱天。求以身代。夢神人指山蔘一根。旣覺至其處。取以已疾。萬曆壬辰倭寇至。兄弟負親逃難。遇諸塗。賊犯其親。號泣翼蔽。多方求哀。賊感而舍之。癸巳。遭內艱。情文咸備。旣葬。廬墓終制。丁酉倭鋒再逞。公兄弟相謂曰。始吾未能擧義擊賊者。以吾親在也。親今不在。死於長上職也。乃具糧械。赴笠巖城。與奉事尹軫。同爲城守計。族父春苾。族兄弟希津,潤根,添根。鄕人李許樑。僧將徽墨等。皆義而從之。乃率鄕丁百餘人。家僮五十餘人。出據要害。賊猝至。公挺身而戰。斬數十級。身亦被五六創。俄而一賊。從積死中放丸而卒。時十月三日也。得年四十二。弟殊屍戰。少頃賊挫而走。一方賴以安堵。於是。鄕人懷之。指其所居之里曰三孝村。指其廬墓之崗曰三孝山。指其兄弟曰三義士。忠孝之實如此。可無傳乎。配晉州河氏。將仕郞大海。其考也。墓在楚山龍巓洞負艮之穴。而河氏之葬。亦同崗。一男畢。僉樞。二女朴師孟,宋善後。孫僉樞男震華,震秀。側出震行。宋壻男東奎鼎奎震奎。今爲十餘世。不可悉書。其以三家之述。乃來請銘者。十代孫鼎相也。念昔朱宋二夫子。當中國陸沉之時。至誠惓惓。在於扶植人紀。表著天理。故如唐衛士李士龍之流。雖微必書。其心可悲矣。况公之兄弟。又是衣冠士夫。其始終一心。旣無媿於古人。至如今日所値。則西洋之橫流稽天。其慘不但如彼時之陸沉也。區區如鼓幣之救蝕。又烏可已歟。惟其人地望。實萬萬不似。爲可媿恨也。銘曰。
天降生民。與飛走異。父子之仁。君臣之義。有或敗闕。所異何事。伊狼與蟻。顧或有愧。世衰敎弛。欲火恣熾。遺親後君。盖無不至。肫肫松隱。兄弟同德。責孝課忠。謂是性職。祥幕致雀。革愿感賊。旣憂乃吉。移以死國。原隰之裒。同氣斯惻。矢不俱生。卒靖疆域。瞻彼日月。明有遺照。南人誦之。其名亦耀。有誌有錄。有闡有詔。維龍有阡。睾如其墳。虔薦石章。勉爾後昆。西鯨揚波。殄玆彝倫。曷惠其極。我心之熏。尙兾夙夜。光大家傳。- 김평묵(1819~189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 청풍(淸風), 경기 포천 출신, 자: 치장(穉章), 호: 중암(重菴). -
* 자료출처 3:
· 김동수 교감 역주, “호남문화연구총서 13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경인문화사: 이허량(李許樑)자(字)는 경언(擎彦). 본관은 봉산(鳳山). 대제학(大提學) 공수(公遂)의 후손이고 종사랑(從仕郞) 민효(敏孝)의 아들이다. 천성이 검소함을 지녔고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했다. 정유란(1597) 때 장정(壯丁)을 정읍의 사현(沙峴)에서 적을 막았으나 세력이 다하고 힘이 떨어져 따르는 자들이 모두 죽었다. 공(公)은 짧은 무기를 가지고 적을 쳐 수십 명을 참살하였으나 몸 10여 곳에 상처를 입고 결국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세주: 공(公)이 살해당한 날 아내인 유씨(柳氏) 또한 사절(死節)하였다.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정읍(井邑)]
* 자료출처 4:
· 한국민족정신진흥회(韓國民族精神振興會), “제2장 조선중기의 의병활동”, 한국 의병인물사(韓國 義兵人物史): 이허량(李許樑) 본관은 봉산(鳳山) 정유재란 때 의기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만들고 정읍의 사현(沙峴)에서 왜적과 수십명을 죽이고 격전 끝에 전사했다, 통정대부에 증직되었으며 부인과 함께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 자료출처 5:
· 정읍시 역사:
조선시대 1589년(선조 22) 현이 되었으며, 초대 현감으로 이순신(李舜臣)이 파견 되었다. 정유재란 때 유춘필(柳春馝)·이허량(李許樑)·유경인(柳景仁)·유희진(柳希津) 등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하기도 하였다.
* 자료출처 6:
· 임진왜란과 정읍: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이 부산으로 침략해 오니 임진왜란이다. 왜군은 동래성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그 한 부대가 추풍령을 넘어 금산, 진안을 점령하고 전주로 침입하려 했다.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어 정치, 행정의 중심지 일뿐 아니라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경기전이 있고 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전주사고가 있어 조정에서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먼저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을 피난시키는 일이었다. 안전한 곳을 물색한 끝에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인 출신 안의, 손홍록 두 선비는 6월 3일 가동(집안일을 보는 사람) 수 십 명을 데리고 전주 경기전으로 가서 사고의 왕조실록과 전적(문헌, 도서)을 내장산으로 운반하니 50여 짐(말 한 마리가 운반하는 분량)이 되었다.
내장산 은봉암(금선암터로 추정됨)에 도착한 것은 6월 22일 이었으며 태조 영정을 용굴암으로 옮긴 것은 7월 1일 이었다. 손홍록, 안의는 이 곳에서 1년 동안 번갈아 숙직했으며 영은사(지금의 내장사) 주지 희묵 대사는 승군 1백여 명을 이끌고 내장산을 지켰다. 왜군이 금산, 진안으로 침입해 오자 도내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봉기했다. 이 때 오봉 김재민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웅치 싸움에 출전하고 또 장성 남문으로 가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유희진과 충청도로 출전하여 왜군을 무찔렀다.
조선의 요청으로 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왜군과의 화의교섭에 나서 다음 해 4월 왜군 일부가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내장산의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을 충청도 아산으로 옮기라는 왕명이 내렸다. 그리하여 7월 9일 정읍현감 유탁을 배행차사원으로 하고 태조 영정과 왕조실록을 정읍현 객사로 옮겼다. 11일 태인을 거쳐 19일 아산에 도착하여 아산현 객사에 봉안했다. 일본과의 화의교섭이 3년 만에 결렬되고 1597년(선조 30) 1월 왜군이 다시 남해안으로 침입해 오니 정유재란이다.
남해안으로 상륙한 왜군은 남원을 거쳐 이 해 8월 25일 전주를 점령했다. 왜군은 다시 입암산성을 향해 금구를 거쳐 9월 15일 정읍에 침입했다. 이 때 이허량, 이환 등은 정읍지방의 의병을 이끌고 사현(沙峴, 말고개)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많은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또 유희진은 11월 아우인 희사, 희문과 더불어 향리인 남라령(속칭 나나리등)에서 왜군을 맞아 싸워 전사했다. 왜군은 내장사에 모여 전략회의를 했다. 이것을 일본 역사에서「정읍회의(井邑會議)」라 한다. 이 때 내장사 주지 희묵대사는 왜군을 맞아 주연을 베풀고 승군을 주위에 매복시켰다가 이를 기습하여 격전 끝에 전사했다.
* 자료출처 7
· 두산백과:
이허량(李許樑. 1567~1597) 조선 중기의 의병. 정유재란 때 정읍 지역으로 침입해오는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사후 통정대부에 봉해지고 정려를 받았다. 본관은 봉산(鳳山), 자는 경언(擎彦)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정읍으로 침입해오는 왜병에 맞서 사현(沙峴; 몰고개 또는 작은 몰고개로 불리는 정읍의 고개)에서 싸우다 9월 16일 전사하였다. 부인 유씨도 왜병의 칼에 순절하였다. 1623년(인조 1)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이허량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인 유씨는 숙부인(淑夫人)으로 봉하였다. 정려(旌閭)는 정읍시 내장동 월영마을에 있다.
* 문화재 주소지: 전라북도 정읍시 쌍암동 560-1번지 월영마을 봉산이씨 제각 ▒ 이영일/ Hch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첫댓글 폼나게 갖춰집니다.
새롭게 단장하는 작업으로 애 많이 쓰십니다.
또 기록 작업으로 더욱 구색을 갖춰갑니다.
감사드립니다.